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부자들의 이야기
에제 28,1-10; 마태 19,23-30
연중 제20주간 화요일(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기념일); 2024.8.20.
낮 최고 기온이 영상 30도를 연일 웃도는 폭염이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삼복더위를 마감하는 말복도 지나고 신선한 가을 기운이 찾아온다는 처서가 가까운데도 늦더위는 가실 줄 모릅니다. 그런데 뜨거운 여름 무더위 못지 않게 나라의 정국도 뜨겁습니다. 지난 4월 총선에서 뚜렷하게 나타난 민심에 대놓고 역행하는 정치 현실 탓입니다.
민생 경기가 가라앉는가 하면 수출도 부진하여 가계와 기업에서 걷혀야 할 세금이 모자라는데도 법인세율 감축, 종합부동산세 완화 등으로 국고가 거덜나도록 경제를 무능하게 운용하고 있는 현 대통령과 정부가,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앞두고 이른바 ‘뉴 라이트’ 계열의 인사들을 국민의 교육과 역사 의식을 담당하는 주요 보직에 앉히고 있어서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습니다. 역사학자 전우용의 통찰에 의하면, 이 인사들은 구한말 시기부터 오늘날까지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물질주의적 가치관’으로 처신하여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고 재산을 모아 기득권층을 형성해 온 친일파 부자들입니다. 한류의 상승 기류와는 정반대로 대한민국의 역사는 분명하게 퇴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들에게 아주 실망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몸집이 큰 낙타가 작고 좁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갈 수 없는 이치가 너무나 뻔한 데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본시 이 말씀은,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라난 청년이 윤리적으로도 흠결없이 살다가 영원한 생명을 청하려고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말씀 한 마디에 실망해서 돌아간 이야기 끝에 나왔습니다. 그 한 마디란, “가진 재산을 다 팔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고 나서 나를 따라 오너라.”(마태 19,21)는 말씀이었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가치는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가진 재산만 나누어 주어도 얻을 수 있다면 그건 아주 경제적인 거래요 인생의 횡재를 얻을 뻔 했습니다. 가치관이 제대로 박혀있다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찾아왔던 그 청년은 바리사이적 잣대로 볼 때 윤리적으로 흠결이 없었던 것뿐이지 재물에 대한 욕심도 많았던지라 그 말씀 한 마디에 너무도 실망해서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모조리 지켜본 제자들 역시 아쉽고 이해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조성해 놓은 그릇된 가치관에 물들은 탓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고 죽비를 내려 치시듯이 일갈하셨습니다.
사실 가진 재산을 아낌없이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일이 쉽지는 않습니다. 오늘 독서에 나오는 티로의 군주가 마음이 교만하여 마치 신처럼 굴었던 것처럼, 돈을 신처럼 모시는 우상숭배자들은 돈이 많으면 마치 자신이 신의 자리에 앉은 듯이 착각합니다. 그 돈으로 남은 일생이 안락할 뿐만 아니라 행복할 것 같은 꿈을 꿉니다.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 보아줄 것처럼 과신도 하지요. 그래서 티로의 군주도 있는 꾀를 다해 “재산을 모으고 금과 은을 창고에 쌓았습니다.”(에제 28,4) 오늘 복음을 이끌어 낸 그 부자 청년도 아마 바리사이인 아버지를 두었을 테고 그 아버지는 온갖 지혜와 슬기를 짜내서 돈을 긁어 보았을 것이며, 그 돈으로 자식을 유복하게 키우면서 율법도 엄하게 지키도록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만큼은 가르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러니, 이렇게 하느님을 멀리한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 나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가 바로 나눔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갈 수 없듯이,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다고 단언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실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는 돈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그래서 돈보다 더 귀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이 그렇고, 재능이 또 그렇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주어도 단 한 시간도 살 수 없고, 또 귀한 재능도 본인이 동의하지 않는 한 인재의 재능을 함부로 탐낼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시간의 부자도 있고 재능의 부자도 있는 셈입니다. 또 시간으로 말하자면 젊은이들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이 많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시간의 부자들입니다. 또 산전수전을 다 겪으며 살아본 인생의 경험도 돈 주고 못삽니다. 그러니 노인들은 경험의 부자들입니다. 많이 배운 지식인은 지식의 부자요, 재주가 좋은 기술자는 기술의 부자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수도자는 영성의 부자요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은 섬김이라는 덕행의 부자입니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은총들이 굉장히 많은 셈이지요.
그런데 성경 말씀에 보면 예수님 주변에는 그 부자 청년과 달리, 그 커다란 낙타가 좁디 좁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오듯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간 예외적인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우선 자캐오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세관장으로서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돈이 많았지만 사람들로부터는 기피 대상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김에 통 크게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루카 19,8)
그 다음에는 사도 바오로를 들 수 있습니다. 국제적으로나 전통적으로나 당대 최고의 엘리트였던 그는 예수님을 만나 벼락을 맞고 나서 박해자의 전력을 벗어나 사도요 선교사로 거듭 났습니다. 지식의 부자였던 그는 이 모든 것을 쓰레기로 여기고 다 나누어 준 다음 하느님 나라의 열쇠를 받은 베드로 못지않는 복음의 인도자로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을 수많은 이방인들에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세 번째로는 그가 선교여행을 하다가 필리피에서 만난 리디아도 이 반열에 넉근히 들어갑니다. 그녀도 역시 자색 옷감 장수로서 국제교역을 하는 부자였지만, 바오로의 필리피 선교는 물론 모든 여행과 선교활동과 사목활동의 뒷바라지를 조용히 감당해 줌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상석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들어야 할 가장 큰 부자는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비록 돈은 없었지만 돈보다 훨씬 더 귀한 믿음에 있어서 마리아는 누구 못지않은 부자이셨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고, 아드님의 공생활을 기도로 뒷받침해 주셨으며, 부활 후에는 사도들의 한가운데에서 교회의 어머니로서 중심을 잡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모든 은총은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도구로 쓸 때 다 귀한 보물이 됩니다. 시간이나 경험, 지식이나 기술, 영성이나 덕행, 그리고 그 다음에 돈까지도 하느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제 자리에 놓아야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재산을 비롯하여 우리네 인생에 필요한 이 모든 것들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은총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요, 복음 진리에 대한 믿음입니다.
교우 여러분!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며 물질주의적 가치관으로 우리 사회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뉴 라이트 계열 인사들의 허접한 처신을 우리의 반면교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의 속물적인 처신과의 대조적이게 우리들 각자의 믿음과 실천, 참여와 연대로 이 부당하고 사악한 현실에 맞서는 행동도 필요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