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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할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가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각묵스님을 뵙고 -
도 일 / 사교과
당당한 기개를 자랑하는 지리산 끝자락을 타고 내려앉은 소박한 어느 마을. 부처님의 가르침을 현실 속에서 실천하는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스님들이 모여 사는 절이 있다. 그 절은 인드라망 생명공동체와 귀농학교, 화엄학림 등의 다양한 색채를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는 현실적인 문제의식을 가진 스님들의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곳이 바로 “실상사”다. 여느 비구스님 절 에서 볼 수 있는 풍경들과는 달리 실상사 도량의 정취는 키 낮은 야트막한 수수함으로 다정다감함을 불러일으킨다. 이웃집 같은 편안함이 있다. 그곳의 화엄학림에서 강사소임을 맡고 계시는 각묵스님은 현재 초기불전연구원의 지도법사로 있으면서 ‘빨리어 삼장완역’이라는 대원력을 세우고 경.율.론 삼장의 초기경전을 번역하고 계신다. 스님을 만나는 1박 2일의 여정은 ‘가야 할 길을 아는 것과 그 길을 가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라는 강한 여운을 남겨 주었다.
실상사 일주문을 지나 고개 하나를 가볍게 넘으면 ‘실상사 화엄학림’이 있다. 다실에서 스님이 직접 달여 주시는 차를 마시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우리들의 다소 두서없는 질문들에도 친절하게 하나하나 설명해 주셨던 그분의 따뜻한 배려가 두고두고 떠오른다.
- 스님께서는 어떤 계기로 초기불교와 인연을 맺게 되셨습니까?
대학 다닐 때 대불련 활동을 하다가 한글로 된 불교입문서를 읽다보니 초기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됐지요. 아함경을 처음 접하고 부처님의 생생한 모습을 만났지요. 초기불교를 중심으로 한 책들을 접하면서 초기불교가 불교의 시발점이라는 의식을 갖게 됐어요. 일본 학자들은 일본에는 두 번 불교가 전래됐다고 표현해요. 첫 번째는 중국, 한국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고, 두 번째는 서양을 통해서 근세에 들어온 초기불교죠. 산스크리트어와 빨리어로 들어온 것을 대사건으로 보는 것이 제게는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법정스님의 숫타니파타가 1975년 번역되어 나왔을 때 대학생 불자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했었어요. 그때 나는 남들보다 일찍 관심을 가졌지요. 1983년쯤 한국에 들어온 월풀라 라훌라스님이 쓴 『붓다의 가르침』이라는 책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어요.
1987년 칠불암에서 하안거를 날 때 외국 나가는 것이 화두처럼 들렸죠. 이상하게 끊이지 않고 계속 들리더라구요. 그 당시 현정스님이 한국에서 초기불교 경전을 번역할 수 있는 사람을 찾다가 나를 추천하게 된 계기로 초기불교와 인연이 되었지요. 처음에는 스리랑카를 가기로 했는데 그곳에 내전이 일어나게 된 이유로 일정이 지체되면서 결국은 인도로 가게 되었습니다.
- 아비담마는 어렵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쉽게 접근할 방법이 있나요?
어렵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현재 교학체계가 붕- 뜬 소리를 가르치기 때문이에요. ‘空’이다, ‘실체가 없다’, ‘一切唯心造’라는 소리를 들으면 그럴 듯하지만 따지고 들어가면 공허한 소리라는 거죠. 그래서 하나하나 법을 따져 들어가서 체계적으로 공부해야 하는 아비담마가 어렵게 느껴지는 거예요. 이것이 아니면 안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공부 하면 절대로 어렵지 않아요. 우리나라의 중·고등학교 수학수준을 볼 때 그것보다 아비담마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거든요. 아비담마를 바라보는 관점과 관심을 바꿔보면 절대 어려운 게 아닙니다. 솔직한 심정으로 한국의 교학체계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 초기불교가 좋은 것은 알지만 지금 현실사회·문화와 괴리감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데요, 초기불교를 사람들에게 어떻게 적극적으로 동기부여 할 수 있을까요?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지만 초기 경전이야말로 현실에 부딪히는 문제를 가장 가깝게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쌍윳다니까야’의 내용 중에 2권에서 6권까지를 보세요. 이런 경전들은 출가해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문제 들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부처님께서 스님들에게 한 설법, 스님들과의 토론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수행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는 내용이 많아요. 학인스님들 같은 경우는 출가해서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생소하다고 받아들이지 말고 경전을 보고 배우는 입장에서 출가자들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야 하는구나, 만약 이런 문제의식을 못 가졌다면 출가자들은 이런 문제의식을 가져야 하는구나 라고 받아들이면 될 것 같아요.
- 간화선의 화두 잡는 것과 위빠사나 수행할 때 사띠(sati)가 어떻게 다른가요?
화두를 챙기는 것이 사띠고, 수행에는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행방법이 달라지죠. 대상을 거듭거듭 챙기고 잊어버리지 않고 집중하는 것이 사띠, 즉 마음챙김입니다. 간화선은 화두를 마음챙김 하는 것이죠. 수행의 입장에서 보면 다를 것이 없어요. 마음챙김의 대상을 신수심법(身受心法) 네 가지라 하면 대상에 마음을 묶어 놓는 역할을 하는 것이 마음챙김이고 밧줄을 묶어 놓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신수심법으로 나눌 수 있지요. 화두가 무엇이냐에 따라 신수심법에 배대해서 볼 수 있겠어요. ‘이뭐꼬’라고 보았을 때 심념처로 보는 것이 맞겠고 ‘無’자 화두는 법념처로 보는 것이 맞겠죠. 간화선을 사마타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묵조선이 사마타로 볼 수 있고 간화선은 묵조선의 병폐를 치고 나온 것이잖아요. 간화선은 의정을 일으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행주좌와 생활선을 강조했죠. 서장에 보면 계속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잖아요. 문제는 지금 한국의 선방에서 개념적인 화두를 잡고, 집중의 대상을 화두로 보고 사마타적인 간화선을 하고 있으니까 문제를 삼는 것이죠. 원칙적으로 간화선은 의정을 통한 통찰지, 지혜, 반야의 입장이므로 초기불교와 같은 입장이라고 볼 수 있어요.
스님과의 인터뷰를 통해서 분별하는 상을 내려놓고 바라보면, 소위 ‘소승’이라고 말하는 초기불교와 그 다른 편에 선 대승불교가 본질적으로는 다른 가르침이 아니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음날, 엷은 아침안개 속을 헤치고 실상사에서 화엄학림으로 가는 길은 미혹 속에서 깨달음으로 향해 가고자 하는 우리 모두의 마음의 여정과 다른 것이 아니었다. 어제보다 더 친숙하고 편안해진 마음으로 각묵스님께 몇 가지 짧은 사적인 질문을 드렸다.
- 스님의 인생철학은 무엇인지요?
구지 말로 표현하자면 ‘내 식으로 불교를 보지 말고 부처님의 법답게 살자.’입니다.
법답게 사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 즉 경전에서 말씀하신 대로 사는 것입니다. 道라는 것은 선문답이 아니거든요. 굉장히 구체적인 답이 경전에 다 나와 있어요. 道라는 것은 八正道를 말합니다. 즉 팔정도가 道예요. 매우 명확하죠. 초기경에 다 나와 있음에도 자기 식으로 풀어 이해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한국불교는 개인불교만 있는 실정이에요. 경전에 나와 있는 대로 사는 것이 바로 법답게 사는 것이라 생각해요.
- 스님은 초기불교를 한마디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부처님의 명령’이라고 하고 싶어요. 니까야에서부터 부처님의 가르침을 '붓다 사사나(Buddha-sasana)'라고 부르는데 붓다 사사나는 부처님(Buddha)의 명령(sasana)이란 뜻이죠. 그 당시 직계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명령으로 받아들였지요. 부처님에 대한 완전한 믿음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겠죠.
- 초기불교에서 말하는‘해체해서 보기’를 일상생활 속 에서 어떻게 적용하고 계신지요?
‘해체해서 보기’는 만나는 두두물물(頭頭物物)을 다 법으로 보는 수행입니다. 법이란 개념을 이루는 최소단위죠. 우리는 일반적 개념에 많이 속고 있어요. 저는 해체해서 보기를 제 수행의 기본으로 삼고 있습니다. 항상 일상생활에서 나의 몸과 마음을 법으로 해체해서 보면 무상, 고, 무아가 저절로 드러나죠. 무엇에 집착할 것이 없어요. 인간관계가 복잡해지는 것도 서로 개념적 존재로 보기 때문에 그렇거든요. 그래서 욕망과 이익이 들어가 꼬여버리는 거죠. 서로의 관계도 다 법으로 해체해서 볼 수 있다면 오히려 인간관계가 담박해지고 현상도 분명 해집니다.
- 번역할 때 정법을 바로 전달하고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는지요?
두려움보다는... 지금도 번역할 때 초기경전 주석서를 철저하게 의지하고 있는데요. 처음에는 대승적 안목으로 초기불교를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초기경전 주석서에 의지하지 않으려고 했었죠. 그렇지만 깊이 고민한 후에 다시 아비담마를 접하면서 가슴이 열렸고, 초기경전을 아비담마 번역작업의 토대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 보통 강원을 졸업할 때쯤이면 자신의 진로에 대해 더 많이 고민하게 되는데, 출가 선배 입장에서 한 말씀 해주십시오.
중노릇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제1 관심사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해요. 달리 말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 지 목적의식이 분명해야한다는 거죠. 그런데 대부분이 이를 등한시해요. 그렇게 되면 큰 폭류에 휩쓸려 흘러 내려가게 되죠. 중노릇이 뭐 별거 있어요. 이렇게 자신의 제1 관심사가 정확히 없게 되면 세속적인 흐름, 개념의 흐름에 휩쓸려 내려가게 되죠. ‘내가 진정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한 확고한 결단이 서야 해요. 이 결단이 확고하게 서면 이런 사람은 행운아라 할 수 있죠.
내가 무엇을 하겠다는 게 분명히 서면 그때는 버려야 할 것들이 참 많아요. 아까워서 버릴 수 없는 것들이 엄청 많죠. 하지만 법으로 해체해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의 제1 관심사만을 두고 주저 없이 그 밖의 것은 다 버릴 수 있어야 해요. 내가 정말로 중노릇을 할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사무치게 중심이 서야 됩니다. 사무치게 서게 되면 자신의 인생을 다 걸고 선방을 가든지 교학을 하든 지 다른 모든 것은 다 포기하고 그 하나에 전념해야 해요. 그러면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게 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죠.
스님께서 우리들에게 당부했던 ‘목적의식을 가지라’는 말씀이 가슴속에 오래 머문다. 우리들이 가져야 할 목적의식은 무엇이며, 우리가 출가한 근본 목적은 무엇일까. 처음 출가를 결심했을 때, 나는 주변에 얽혀 있는 인연들을 버리고 끊어내는 일을 주저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었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부처님 같은 대자유인, 해탈인이 되기 위한 큰 포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마음의 좌표 어느 지점에서 현재를 살아내고 있을까.
내가 가야 할 길은 이미 경전 속에 지나치리만큼 자세하고 자상하게 제시되어 있다. 경전 속에 있는 부처님의 말씀에 비추어 현재의 삶을 치열하게 점검하고 성찰하려는 의지가 바로 내가 가야 할 그 길을 올곧게 가는 것이리라. 지금 이 순간 내가 가야 할 길을 그냥 알고만 있는 것을 가지고 이것이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닌 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 위 글은 도일 스님이 쓴 것으로 <운문> 제111호(운문 승가대학, 회보 2010년 1월20일 발행)에 실린 <끝없는 여정>의 내용입니다.
<끝없는 여정>은 <운문>지의 고정 칼럼으로 운문지를 발행하는 운문사 운문 승가대학 편집부의 스님들이 교계 스님들과 나눈 대담을 싣는 곳이라고 합니다. 111호는 작년 11월 중순에 운문 승가대학의 편집부 스님 세 분이 실상사에 와서 저와 대담을 나눈 내용을 정리해서 올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내용을 우리 까페에 소개합니다. 특히 글을 쓴 도일 스님은 대림스님의 둘째 상좌로 이제 운문 승가대학의 4학년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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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목적의식을 가지라~항상 건강이 발목을 잡는 현실이기에 이 글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생명수가 될 것입니다. 늘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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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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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감사합니다_()_()_()_
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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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