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하고도 3일이라. 이쯤이면 중부지방의 가을도 어느덧 끝자락이 보일락 말락한 시절인 거라. 매양 가을이면 그러하였듯 처연하면서도 어리석었던 삶 반추해 볼 사품도 없이 눈 깜빡할 사이에 이 계절 사라질까봐 부랴부랴 간단한 짐을 꾸리고 M군과 함께 영월로 차를 몰았다.
하필이면 웬 영월? 이유인즉슨, 거기엔 재작년 이맘 때 낙향해서 글을 쓰며 소일하고 있는(글 쓰는 게 그에게 유일한 생계수단이니 소일이란 말은 쪼까 사치스런 표현일지도 모르겠구만) O박사가 있으니 뭐 더불어 가을을 음미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일 터...
마성IC에서 영동고속도로에 차를 올리고 열심히 달리다 보니 휴게소 들르는 걸 깜빡했네. 아뿔싸! M군이 궁시렁거리는 소릴 듣고 휴게소를 찾으려 하나 개똥도 약으로 쓰려면 없다던 옛 어른들 말씀 하나도 틀린 게 없더만. 에효! 그놈의 담배 쪼옴 참으면 어디가 덧날까 생각하면서(이걸 말로 했다간 M군한테 서 무슨 불호령을 들을지 모르니 당연히 맘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겨우 조그마한 휴게소를 찾아 들어갔다. 커피 한 잔 얻어 마시고 다시 출발하여 영월 읍내로 들어가 O박사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찾은 시각이 12시 10분이니 대략 두 시간을 꼬박 운전해 왔네그랴.
점심을 먹으러 세 명이 함께 차를 타고 장릉보리밥집으로 갔는데, 그러고 보니 난 이 식당을 벌써 세 번째로 찾게 되었네. 단종릉 옆에 자리잡은 이 식당은 이곳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오래 전부터 많이 알려진 곳으로 보리밥에 몇 가지 채소 반찬을 얹어 비벼먹는 걸 기본으로 한다. 거기다 O박사의 강력한 추천으로 두부를 따로 주문하고 막걸리를 곁들이면서 고맙고도(그 많은 비용을 O박사가 계산함) 환상적인 점심식사를 하였더라.
식사 후 장릉 경내엔 들어가지 않고 담벼락을 따라 150m 정도 걸어가니 고즈넉한 산길에 체험학습 산책로가 만들어져 있어서리 물소리 바람소리 들으면서 10여 분 정도 데크를 걸었다. 지역의 읍민들이야 잘 알고 접근이 용이한 곳일 테지만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알 턱이 없는 호젓한 산책로였는데, 지역에 사는 O박사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나 할까...
영월 지역 전체를 조망하기 좋다는 봉래산 별마로천문대로 차를 몰았다. 정상까지 자동차가 갈 수 있다고 하지만 멀리서 보기엔 꽤나 높아 보여서리 차를 운전해서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뭐 별 염려 없이 슈웅하고 금방 천문대 입구까지 올라갔다. 근디 바람은 쐬엥 불어대는데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몸을 기댈 수 있는 펜스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어? 이게 아닌디 하는데 O박사가 이 자리가 패러글라이딩 출발지이기 때문에 펜스를 설치할 수 없다고 설명한다. 봉래산은 천문대로 유명하지만 패러글라이딩 명소로도 많이 알려져서리 전국에서 동호인들이 몰려온대나 뭐래나...
어느새 시각은 오후 3시를 넘기고 있네. 해서리 우린 또 미련 없이 차를 몰아 내려와 부근에 있는 선돌을 보러 갔다. 서강(西江) 강변에 높이 70여m의 높이로 우뚝 솟은 선돌은 신기한 형상에 더하여 명승(名勝)으로 손색이 없었는데, 실제 이곳이 2011년 명승으로 지정되었다고 하더만.
서강을 보았으니 이젠 동강(東江)을 봐야겠지? 해서리 후다닥 차를 몰아 영월수도사업소 쪽으로 방향을 틀어 동강 기슭 금강공원으로 내려갔다. 옛날 이 부근에 관아(官衙)가 있었기 때문인지 강 기슭에 송덕비들을 비롯한 시비(詩碑)들, 정자인 금강정(錦江亭)이 늘어 서있었다. 저녁 어스름이 깊어가는 시각에 특히 눈에 띄는 건 순절비(殉節碑)와 낙화암(落花巖)으로 어린 나이에 죽음으로 내몰린 단종의 슬픈 역사를 말해 주고 있었다.
금강공원이 주로 조선의 제 6대 왕 단종의 아픈 역사와 더불어, 실수로 자신의 조부를 능멸한 난고(蘭皐) 김병연의 한스런 삶의 족적을 드러내고 있는데 반해, 공원 윗쪽에 자리잡은 라디오스타박물관은 동명 제목의 영화맹키로 밝고 명랑한 분위기를 한껏 풍겨주고 있는데...안타깝게도 내부 공사중이라 박물관 관람은 불가하다 해서 파라솔 아래에서 커피를 주문해 마시는 걸로 오늘의 공식 일정은 끝났다. 그리고 저녁밥에 소주를 곁들인 만찬의 시간이니, 드디어 초뻬이 M군이 기다리고 고대해 왔던 시간이려니...초뻬이? 주야장천 술에 잠겨 사는 술꾼을 일러 부산에선 그렇게 부른다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