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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이 조선의 도읍지로 결정된 데는 조운(漕運)의 잇점이 크게 작용했다.한강이 있어 전국의 물산을 자유롭게 운송할 수 있었다.
조운에는 짐을 운반할 수 있는 조선(漕船),곡식을 갈무리 할 수 있는 조창((漕倉) 배를 운항시키는 조군(漕軍) 등이 기본적인으로
필요하다.조선 조창 조군 등 세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는 서강나루다.용산 마포에는 관리들의 녹봉용 곡식을 저장하는 광흥창
(廣興倉),군용곡식을 갈무리하는 군자창(軍資倉) 왕실용 곡식을 저장하는 풍저창(豊儲倉) 등이 용산 마포에 몰려있다.
토정 이지함 남계 박세채 이덕무 흥선대원군 이하응.....참으로 많은 인물이 나온 마포다. 광흥창역 1번 출구로 나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1층에 오른다.바로 편의점을 만난다.편의점 앞 만남의 공간에서 물류의집산지 서강나루 탐방은 시작한다.
내(川)나 동리의 이름도 갈무리시설 창(倉)과 관련이 많다.창천(倉川)은 광흥창(廣興倉) 근처를 지나는 내(川)라는 뜻이다.
창천동 창전동 등도 광흥창에서 연유된 것이라고 한다.창천(倉川)은 연세대 뒷산 안산에서 발원해서 광흥창을 지나 동남쪽으로
뻗어나간다.그 산줄기는 계속 흘러내려 기가 막힌 곳에서 불쑥 솟아 오른다.그 소가 엎들여있는 모양의 와우산(臥牛山)이다.
와우산 동남쪽 기슭에 생기(生氣)의 꽃봉우리 혈(穴)자리가 생긴다.그 명당에는 광흥창(廣興倉)이 앉았다.이 지역의 역사문화는
광흥창에서 시작해서 광흥창으로 끝맺는 것 같다.
무학대사가 이곳을 찾아 소가 엎드린 모양을 한 와우산을 가르키며 "이는 하늘이 만든 신비한 부국(富局)이기에
산 아래 큰 창고를 지어야 한다"고 했다고 전한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9년 3월 14일 자 기사를 살핀다.
"와우산은 속담에 전해 오기를, ‘성조(聖祖)께서 도읍을 정하실 때 무학(無學)이 내룡(來龍)을 찾아 이곳에 와서
「이는 하늘이 만든 부국(富局)이다」라고 했으므로, 드디어 창고의 터로 정했는데, 그뒤 천사 가 왕래할 때 멀리서
바라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저 산이 형양창(衡陽倉)의 뒷산과 비슷하니 그 산 아래 큰 창고가 있지
않으면 반드시 일국의 거부(巨富)가 있을 것이다.」하자, 그 아래 태창(太倉)이 있다고 대답하였더니,
탄식하기를, 「조선(朝鮮)에도 진짜 풍수(風水)를 아는 사람이 있구나.」했다.’고 합니다. 당초에 창고를 설치할 적에
그 소중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고로(故老)들이 서로 전하여 오고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수목(樹木)이 울창했는데
지금은 하나의 민둥산이 되어버려 내룡(來龍)의 산맥이 잔파(殘破)되었습니다. 창고 아랫쪽에 거주하는 백성들도
모두 경작을 금하고 나무 심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부터 경조(京兆)에 공문(公文)을 보내어 누차 금단시키게 했는데도
함부로 경작하는 것이 아직도 이러합니다. 이 뒤로 금법(禁法)을 범하는 사람은 의당 형배(刑配)시키는 법전을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광흥창 앞을 흐르는 창천(倉川) 왼쪽에는 벼슬아치 들이, 오른쪽에는 일반 평민이하가 살았다.
이들 양반들을 일컬어 서강양반이라 하였다. 서강양반은 도성 안에서야 기를 펼 수 없는 하급관리에
불과하였다.도성 밖 강가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갓쓰고, 도포입은 것만해도 대단한 행세를 하였다.
'창천 동쪽 사람들은 서강양반 종노릇'이라는 말도 생겨나왔다.이 때문에 한강 하류지역 어느 곳 보다도
빨리 창전동 일대가 취락지구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광흥창역 주위에는 '독막리' 도로명 표시판이 곳곳에 있다.근처에 독, 즉 옹기류를 구워내는 움막들이 많았다고 한다.
독짓는 곳 ‘옹막(甕幕)’, ‘옹리(甕里)’이다.이를 우리말 독막 독마을로 불렀다.우리 발음의 독이동으로 변전되면서 ‘동막’으로 된다.
그것이 다시 한자 ‘동막(東幕)’이 되었다고도 한다. 동막에서는 제법 많은 옹기를 구워 팔았다고 한다.옹기는 젓갈이나 김장을 위한
용도로 썼다.마포에는 새우젓 장수가 유명했다.자연 소금창고도 이곳에 들어왔다.서해 염전에서 거둬온 소금을 보관하기 위한 소금창고는 마포구 염리동 일대에 많았다.소금마을 염리(鹽里)도 마포나루 근처에 등장한다.
염리(鹽里)에 소금창고에서 새우젓 장수에게 소금을 공급했다고 한다.마포 새우젓장수와 뚝섬 채소장수를 식별하는 방법이
우스개 소리로 전한다.마포 새우젓장수는 이마가 까맣다.새우젓장수는 이른 아침 물건을 팔러 도성에 들어갈 때 해를 안고
들어간다.물건을 다 팔고오후 늦게 해를 안고 귀가하기 때문에 이미가 까맣다는 것이다.
뚝섬 채소장수는 아침에 해를 등지고 도성에 들어간다.또 오후 늦게 귀가할 때도 해를 등져야 하기 때문에 목덜미가 검다는 것이다.
마포 옹기는 술을 빚는 그릇으로도 많이 사용 됐다.동막 부근에서는 좋은 소주가 생산된다고 『동국세시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공덕과 동막 사이에서 생산되는 소주의 일종인, 삼맥주(三麥酒)는 양조법이 까다롭고 일반 소주와는 다른 맛을 냈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천 독씩 술을 빚어냈다고 한다. 이 삼맥주는 노란빛을 띠는데, 마시면 마치 이슬을 먹은 것처럼 산뜻하지만 그냥 두면 기름이 낀
것처럼 탁하다고 하였으며 오장에 특히 좋은 술이라 하였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와우산(臥牛山)이다.
예로부터 와우산에서 부는 목동의 피리소리 '우산목적(牛山牧笛)은 유명했다.농바위 부근의 저녁짓는 연기모습
'농암모연(農岩暮煙)'도 우산목적(牛山牧笛)과 함께 서호팔경(西湖八景)으로 꼽혔다.와우산은 서강 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소가 누워있는 모습와 같아서 와우산이라고 했다. 풍수지리 설화는 와우산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예전에 큰 소가 있었다. 그 소는 길마는 무악산에다 벗어 놓고(길마재) 굴레는 북아현동에 벗은 다음(굴레방다리 勒橋)
서강에 내려 물을 마시고 이곳에 누웠다..이 와우산의 소가 여물을 먹는 그릇인 쇠죽통은 하수동에 있던 '농바위'이다.
작자 미상의 옛 시는 이렇게 전한다.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 와우산에 취해 누웠는데
하늘의 궁녀는 한강가로 찾아서 왔네...
와우산 기슭 명당길지(明堂吉地)에 관리들의 녹봉용 곡식을 갈무리하는 광흥창(廣興倉)이 들어섰다.
광흥창은 창전동 402번지 일대에 있었다.경기와 삼남지방에서 바친 공미(貢米)를 쌓아 두었다가 여러 관리들의 녹봉을
관장한 관아이다.고려의 제도를 본받아 조선 건축초에 설치한 것이었다 <육전조례(六典條例)>호조전에 보면 매월 20일 후에
문관은 이조에서 무관은 병조에서 각각 봉급조서를 작성하여 호조로 통고해 오는데 호조에서는 봉급조서 명단을 살핀 후
감봉 및 물품관리관의 귀책 사유의 해제여부를 고찰하여 광흥창에 통지한 다음 날짜를 배정하여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이러한 광흥창의 관원으로는 정4품의 수(守), 종6품의 주부(主簿), 종8품의 봉사(奉事), 정9품의 부봉사(副奉事) 각 1명씩을 두었다가 후에 종5품의 영(令), 종7품의 직장(直長) 1명씩을 각각 증원하고 부봉사를 감원하였다.
대창(大倉)이라고도 부르는 광흥창 주변에는 녹봉관리를 위한 광흥창관리들과 호조의 파견관리는 물론 그 가족들까지도 함께
어우러져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못 복잡한 곳이었다.
서강에 닻을 내린 팔도의 조운선이 창천의 물길을 이용해 사대문과 가장 가까운 내륙에 접근한다
짐을 부린 곳이 바로 지금의 광흥창이다. 지금은 복개돼 독막로 아래로 사라진 창천을 눈으로 보지 못하니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서강나루를 통해 쌍용예가아파트 앞까지 배가 들어왔고, 광흥창은 홍수를 피해
와우산 아래 올려 지었다.
조선 건국 초 공무원들에게 월급으로 줄 양곡을 보관하는 광흥창을 지을 때이다.
어느날 밤 이 광흥창을 짓는데 참여하고 있는 동네 노인의 꿈에 공민왕이 나타났다. 이렇게 호소한다.
"이곳은 전에 내가 자주 찾던 곳이다. 이곳에 당(堂)을 짓고 매년 제사를 지내준다면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풀려질 것이다.
만일 이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 해마다 사고가 날 것이다."
그 노인이 꿈에서 깨여나 그 자리에 가 보니 공민왕 부부를 그린 영정이 바위 밑 함에서 나왔다. 그 자리에 사당을 지었다.
광흥창과 공민왕 사당이 함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공민왕 사당 안내판에는 공민왕이 재위 때 한강을 찾아 유흥을 즐겼다고
적어놓았다. 서울에 고려 유적이 별로 없고, 고려의 유서 깊은 관아 이름을 그대로 딴 광흥창이 있으니 고려 왕을 이곳에
모시는 게 자연스럽다. 또 공민왕은 고려를 무너뜨린 태조와 태종이 특별하게 여긴 인물이었다.
역대 왕의 신전인 종묘에 공민왕 사당을 따로 둬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모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당을 완성한 뒤에는 매년 10월 1일 밤 12시에 제사를 성대하게 지내왔다. 혹시라도 제사를 소홀하거나 불경스러울 때면
광흥창에 화재가 나거나 곡식을 실은 배가 풍랑에 파손되는 등의 재난이 뒤따랐다.
고려 31대 왕(재위, 1351~1374)으로 충숙왕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이다.
왕비는 원나라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魯國大長公主)이다.
공민왕은 12세가 되던 1341년에 원나라에 들어가 10년 동안 머물러 있다가 1351년에 충정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한 해인 1351년 11월 이제현, 조일신을 중심으로 한 전면적인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정치적 기반을 다진 뒤
이듬해 1월에 몽골식의 변발(辮髮)과 호복(胡服)을 폐지하여 고려의 자주적 전통을 추구하려는 새로운 정치를 시작하였다.
공민왕과 신진사대부가 추진한 개혁정치는 권문세족을 정치적으로 배제한 가운데 이루어져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원나라의 지배를 받던 고려 충선왕 때 남경에서 격하된 한양부는 고려 말 공민왕 때부터 다시 각광을 받게 되었다.
공민왕 5년(1356)에 원나라를 배척하고 주권을 회복하는 정책을 단행하여 문종 때의 관제를 복원하였다.
이 때 한양부도 남경으로 환원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공민왕이 한양천도를 결심하게된 것은 중 보우(普愚)가 “한양에 도읍하면 36개국이 조공을 바치게 됩니다.”라고 제안한 때문이다.
공민왕은 왜구와 홍건적이 침입하는 등 나라 안팎에 어려움을 겪자 수도를 옮김으로써 국내외적인 환난을 피하고,
국가 기업의 연장과 국운의 쇄신을 기하려 하였다. 이에 공민왕은 남경궁궐을 수리하게 한 후 공민왕 6년(1357)에 봉은사로 가서
태조 왕건의 어진(御眞)을 배알하고, 한양 천도가 좋은지 나쁜지를 물었다.
며칠 후에 이제현(李齊賢)이 천도의 가부를 점을 친 결과 길조(吉兆)의 점괘를 얻음으로써 한양천도의 의사를 더욱 굳혔다.
공민왕은 그 해 2월에 이제현에게 한양의 집터를 보게 한 후 궁궐과 성곽을 다시 짓게 하는 외에 남경유수(南京留守)를 임명하는 등 한양에 대한 본격적인 경영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론이 많았고, 또한 태묘(太廟)에 점을 친 결과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한양천도를 포기하고 말았다.
공민왕 사당에는 공민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최영 장군 그외 왕자 공주 옹주의 화상이 걸려있다.
공민왕은 왜구를 싫어하였다.
그래서인지 신당 근처에는 일본인들이 얼씬 거리는 것도 용서치 않았다.
개항 무렵과 대한제국 때는 물론 일제 때에도 일본인들이 이 근처에 오면 반드시 해코지를 당하였다.
그 후로는 일본인들이 아예 접근 조차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조선강안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쓴 일본인 토목기사 장목(長木)은 우연히 이곳 신당 앞을 지나게 되었다.
갑자기 창자가 뒤틀리고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며 먹을 것을 다 토해내고 잠시 기절하였다.
그때 수염을 기르고 금색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뺨을 치면서 “썩 물러가라!”며 호통을 쳤다.
순간 정신이 들어 사방을 살펴보니 동행하였던 한국인 보조기사들이 자신을 응급조치를 한 후
데리고 병원으로 가고 있다고 했다.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과로로 인한 급성맹장염으로 나왔다.
“수술 후 요양하여야 한다”는 병원 측의 진단이었다.
당시는 급병 때문에 당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그냥 병원치료를 받았다.
기절한 상태에서 나타난 노인의 얼굴이 잊을 수 없었다.
몇 달 후 다시 신당을 찾았다. 처음 당한 것처럼 똑같은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놀란 장목은 다시 그 병원에 입원하고서야 신당에서 오는 신비한 힘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주위의 일본인들에게 서울 마포 창전동 와우산 자락에 있는 공민왕 신당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고 전한다.
1968년 밤섬이 폭파돼 없어질 때까지 밤섬과 그곳 주민들의 안녕을 위해 기도하던 밤섬부군당이다.
밤섬부군당은 밤섬주민들이 창천동으로 이주하면서 와우산 자락으로 옮겨 옛 부군당의 기능을 해오고 있다.
밤섬(栗島) 부군당
서울시 무형 문화재 제35호
조선시대 서울 천도와 함께 조선공(배 만듦)들이 정착하면서부터(약 130세대가 살았음) 부군당이 있어 주민들의 심봉심이 아주
강하였다. 삶의 터전이었던 한강에는, 어장에서 잡은 각종 생선(새우젓, 조기 등)과, 염전에서 소금을 마포로 토정으로 운반하였으며, 강원도(인제, 양양, 영월 등)와 황해도 개성일대 임진강을 통해 땔감을 운반하는 교통 수단으로 안전운항을 위하여 한강수신을 다스렸다고 하며, 누후된 어선수리와 제작을 업으로 살다가 국가시책에 의해, 부군당과 함께 와우산 중턱, 밤섬이 잘 내려다 보이는 이곳으로 이전하였고 지금도 음력 1월 2일이면 밤섬 도당굿을 매년 지내고 있으며, 2004년 12월 서울시에서 마을굿으로 그 전통성과 예술성이 전승보존 할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어, 서울시 무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을 받고 이제는 실향민이 된 밤섬 주민만의 복을 비는 동네굿이아니라, 서울 시민과 마포의 발전을 위한 한자리 모임의 장으로 종교를 초월하여 마포의 전통문화를 꽃피우는 생활문화의 장소입니다.
서울시 문화재과
마포구청 문화체육과
마포 문화원
밤섬 부군당 보존회
지금의 밤섬은 사람이 살지 않은 자연습지다. 겨울철새들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섬의 생김새가 밤 모양을 닮아 밤섬이 되었다고
한다.조선시대부터 나룻배를 만든 사람들이 있었고, 땅콩농사도 많이 지었고.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호롱불을 켜고 생활했다고 한다.
1970년 4월 8일 오전에 일어난 ‘와우시민아파트 붕괴’사고는 무모한 불도저식 개발방법과 낮은 공사비 책정, 시공회사의 기초공사
허술(받침기둥에 철근 소량 사용과 적은 시멘트 배합), 짧은 공사기간 등의 부실공사가 원인이었으며 또한 붕괴위험 신고를 받고도 제대로 대책을 세우지 않은 마포구청과 경찰에게도 그 원인이 있다.
시공사인 대룡건설㈜이 맡은 제3공구 13~16동 아파트에 투입된 총예산은 관급자재로 시멘트 16,614부대, 철근 105만톤(932만원) 등 2,638만원 이었다. 이 예산은 택지조성비·축대비 등을 제외하면 건축비가 평당 1만원도 채 안 되는 부실한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1970년 4월 8일 오전, 서울 마포구 창전동 산2 와우시민아파트 15동 콘크리트 5층 건물이 무너져 내려 앉아 33명이 무참히 압사 하고 19명이 중경상을 입은 대형사고가 일어났다. '와우식 근대화'란 말을 낳은 날림공사 때문에 빚어진 참사였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12월 준공되어 지은지 4개월 만에 붕괴되었는데, 조사 결과 아파트 받침기둥이 건물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여 사고가 발생했다.
산비탈에 축대를 쌓고 아파트를 지은데다 받침기둥에 철근을 제대로 쓰지 않은 부실공사로 해빙기에 건물 무게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와우아파트 기둥은 정상 하중의 3배를 버티다 무너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시민아파트 공사는 처음부터 몇 가지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일단의 아파트가 들어설 부지에 대한 측량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시공이었으니 지질검사는 처음부터 실시하지 않았고, 모두가
높은 산허리였으니 지하는 화강암 암반이고, 따라서 견고할 것이라는 기술자들의 안일한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공사에 참여한 모든 회사가 부실기업이였으며, 담당공무원과 건설업자간의 뇌물수수도 부실공사의 문제점이었다. 이 사고로 인하여 마포구청장은 붕괴되기 2일전 퇴직하였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자 바로 구속되었고, 건설업자 및 관련공무원들도 전원 구속되었다.
위의 글은 행정안전부 국기기록원 홈페이지 <재난방지> 와우아파트 붕괴를 옮겨온 것이다.
서울 마포구 창전동 와우산 서북쪽 자락 와우아파트 참사 현장에는 와우공원이 들어섰다. 와우공원으로 올라가는 중앙계단이다.
중앙계단 바닥에 그날의 참사를 기록한 동판이 설치되어있다. 그 내용을 여기에 다시 옮겨본다.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터
Breakdown of Wawoo Apartment Site
1970.4.8
부실과 날림공사로 지은 아파트가
무너져 34명이 죽고 40명이 다친
대표적인 재난 참사현장
The site of an infamous disaster caused
by the collapse of poorly constructed apartment,
in which 34 people were killed, and 40 people were wounded.
와우아파트 자리에는 공원과 체육시설을 갖춘 와우근린공원이 들어섰다.
공원에서는 시민들의 기념식수비도 찾을 수 있었다. 와우아파트 참사를 기억하는 동판만이 그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날의 희생자를 위한 추모비도 찾을 수 없었다. 무리하게 또 다른 아파트를 짓지 않았다.그 자리를 문화 체육과 휴식 공간으로
시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와우산(臥牛山), 글자 그대로 소가 엎들여 있는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다. 무악에 길마를 벗어놓고 굴레는 북아현동 남쪽 네거리에
벗어 놓았다.소의 여물통은 하수동 132-2번지 앞에 두고 있다. 곧 안산 길마재와 굴레방다리, 하수동 농바우는 소에 필요한 장신구이며 서강초등학교 자리가 뿔, 머리부분은 서강시민아파트, 엉덩이는 와우시민아파트이며 노고산동의 잔돌배기는 쇠똥자리로 부는 곳이다. 그 소의 엉덩이에 그 육중한 시멘트 아파트를 올려 놓은 것이다. 소가 제대로 견딜 수 없어 난리를 치는 통에 참사가 난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