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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학관점
본문을 읽으면서 요한의 세례는 심판과 죄의 회개와 연관되어 있는데 왜 예수가 세례를 왜 받았는가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누가는 지금까지 예수의 신적인 탄생에 대해 서술해왔고, 곧 시험을 이기시는 장면을 통해 예수의 거룩함을 더 강조할 것이다. 왜 하늘에서 내려온 소리는 회개의 세례가 기뻐할 일이라고 선포한 것일까?
누가복음에서 세례에 관한 본문은 족보와 시험 이야기 이전에 나온다. 누가의 족보는 요셉으로 시작에서 셋,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아담에까지 이른다. 셋은 가인에 의해 살해당한 아벨을 대신해서 얻은 아들이다. 예수는 용맹, 개인적 결점, 이해관계에 따른 분쟁, 영웅주의 등의 온갖 인간의 특징을 보여주는 조상들의 자손으로 태어났다.
예수는 구조적인 죄의 세계로(into a world of systemic sin) 오신 것 뿐 아니라 그 세계로부터(from) 오시기도 했다. 그의 세례는 예수의 성육신이 얼마나 철저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인간의 세계와 단순히 동질감을 느끼거나 연대감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계의 비극적인 구조를 완전하게 수용한다. 이 세계에서는 순수하고, 완전하고, 명확하고, 죄가 없는 선택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선택은 앞선 모든 조건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의 배경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Suchocki’는 Fall to Vioelence라는 책에서 자신이 재판에서 배심원으로 참여했던 일을 회상하며, 범죄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범죄자에게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상호연결된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자신도 그 사람의 범죄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이런 관점에서 원죄를 새롭게 규정할 수도 있겠다. 원죄는 모두를 위한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선행되는 구조라 할 수 있다.
마가복음 7:24-30을 보면 시로페니키아 여인을 대하는 예수의 모습에서 그가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사회적 역사적 관습의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가복음은 이 이야기를 수록하지 않았다. 누가는 아마도 예수가 세례를 받는 것이 예수의 개인적인 의지적 결함(죄)과 관련되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누가가 묘사하는 예수의 시험 장면도 사실적이라기보다는 실험적이고 예시적이다. 악마는 한 가지의 변수만을 갖고 예수를 시험하고 예수는 그에 대해 죄와 무관한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고, 그것에 의해 이미 결정된 수많은 상황들이 있다.
예수의 의지도 이런 비극적인 죄의 틀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누가는 세례와 족보 이야기를 시험 이야기와 나란히 배치함으로 독자가 (1) 예수의 의지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한다는 것과 (2) 예수도 이 세계의 비극적인 구조를 벋어날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예수의 의지에 대해 마가적인 해석을 하던, 누가적인 해석을 하던 상관없이 예수는 왜곡된 구조 안에서 사셨다. 우리는 예수가 도덕적 진공상태에서 선택들을 했다고 말할 수 없다. 가장 고상한 기독론적인 선택들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불의의 구조 속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누가는 이런 복잡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가난한 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여인들에 관한 내용을 많이 갖고 있다. (복음서 전체의 여인에 관한 42 단락 중에서 23 단락은 누가복음에만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시로페니키안 여인과 같은 공격적인 여인의 이야기는 제외시켰다.
세례요한은 예수가 그보다 위대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예수는 요한의 세례를 받음으로 요한의 알곡과 쭉정이의 이분법(17절)을 거부하셨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는 “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눅7:34)라는 비난을 받았다.
진정한 거룩은 우리를 상호 연결된 망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고, 우리가 그 망에 너무 깊이 걸려있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주석적 관점
▶ 유대사람들은 메시야가 와서 그들을 파괴에서 구해내고, 유대나라를 새로운 정치적 종교적 미래로 인도하리라고 기대했다. 이미 설교하고, 세례를 주며 제자들을 모았던 세례 요한은 메시야 후보로 간주되었다(요1:35-38). 그런데 그때 예수도 나타나셔서 역시
설교하고 가르치며 세례를 주었다. 복음서이야기 속에 세례 요한의 자진 포기 선언 뒤에는 음모와 논쟁의 소용돌이가 있다. 이 급진적 운동의 지도력은 분명히 판명되어야 한다. 진짜 메시야가 제발 나타나라!
▶ 분명한 문제가 있다. 만약에 “ 연기가 나면 반드시 불이 난다” 는 격언이 맞다면, 분명히 자신이 예수보다 열등하다고 말한 요한의 선언은 어떤 사람들이 어떤 곳에서는 요한이 예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 반증한다. 네 복음서 기자 모두가 세례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규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뒤에서 시끄럽던 지도력 갈등과 마지막 결과에 대해서 증언해 주기 위해서이다(마3:11-12;막1:7-8;요1:26-27,33).
▶ 요한복음서는 지도력의 변경에 대해 기술한다. 세례요한은 예수가 전면에 등장했을 때(요1:35-39), 그의 두 제자들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다. 요한은 예수를 보고 “ 하나님의 어린양” 으로 선언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탈하여 예수를 따른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세례요한이 아니라 예수가 새로운 메시야라는 것이다.
▶ 눅3:17은 세례요한의 말을 사용하여 권력의 자리를 세운다. “ 예수는 자기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려고 손에 키를 들었다.” 이 일상적인 농사에 대한 서술은 성서에서 여러 번 사용된다(시1:4;잠20:26;사41:15f;렘15:7). 추수할 곡식을 타작마당에 가지고 가 까분다.
키를 가지고 추수할 곡식을 공중에 날려 바람으로 하여금 일하게 한다. 바람이 곡물로부터 왕겨를 까불려 날린다. 왕겨는 불에 태워지고, 곡물은 창고에 안전하게 저장된다.
▶ 복음서 기자들은 요한과 예수 모두 그들의 청중들에게 심판을 준비하도록 촉구했다고 말하는데, “ 죄사함의 회개의 세례를 선포” (눅3:3)하였다. 그런데 알곡과 쭉정이의 묘사(눅3:17)는 가장 활동적인 대행자는 바람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선과 악을 구별하고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는 대행자는 성령이다. 진리의 빛이나 바람의 움직임은 악인을 노출시킨다. 예수는 삽을 들고 있고, 성령께서 일하신다.
▶ 예수의 세례 이야기의 위치는 누가복음에서 대단히 중요하다(3:21-22). 누가에서 예수의 세례 이야기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이야기(눅1-2장) 다음에 나온다. 다른 복음서의 예수의 세례기사(마3:13-17;막1:9-11;요1:29-34)와 비교하면 누가는 이 중요한 사건에
이차적 위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알수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세례에 관해 분명하고 특정한 사실들을 보여준다. 예수는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예수와 요한의 대화가 녹음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의 의식은 예수의 공생애사역의 시작을 보여준다. 이와 대조적으로 마가복음에서는 마태와 같이 에수와 요한 사이의 대화도 없고, 단지 하나님의 영에 초점을 맞추어 “ 내가 너를 좋아한다” 라고 썼다(막1:10-11). 마태와 마가에서는 세례가 예수의 공생애의 중요한 시작으로서 나타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단순히 세례가 있었다고 말한다. 사건의 구체적 보고는 없고 세례요한의 목소리로 간접적인 보고만이 있다(요1:32-34).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의 세례가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세례 받은 뒤에 위치한다. “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시고...” (눅3:21). 예수를 위한 특별한 의식이 전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예수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줄을 서서 요한이 물에서 다른 사람들을 세례하는 줄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또한 누가의 예수 세례 묘사에서 빠진 것은 심판, 불, 의라는 관념들이다. 세례는 오로지 기도와 하늘의 선언으로만 묘사되어 있는데, 분명히 세례요한의 사역의 마지막이요 예수의 사역의 시작임을 보여주지만, 마태와 마가에서와 같은 요란스러운 팡파르는 없다.
▶ 하지만 누가복음에서의 특별한 초점은 기도이다. 누가는 예수가 세례 받은 뒤 기도했다고 주의깊게 묘사한다(3:21). 누가는 다른 복음서에서는 빠뜨린 세례의식의 중요한 특징을 첨가한 것이다. 누가에게는 세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기도하는 것이고,
이것은 예수의 삶 속에서 성령이 함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도 그러하다. 누가복음 다른 데에서도 기도는 예수의 사역의 초점이다(5:16; 6:12; 9:18,28ff; 11:1; 22:41; 23:46). 마태와 마가 공동체에 그토록 중요했던 시작예식으로서의 예수의 세례의 힘은 누가복음에서는 상실되었다. 마찬가지로 세례요한과 예수의 제자들 사이의 지도력에 관한 강한 톤의 논쟁은 누가복음에서 많이 낮추어져 있다. 누가에게는 기도가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목회적 관점
누가는 세례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관하여 자세하게 이야기를 했다. 이제 누가는 아주 간략하게 요한의 선포 사역의 마지막에서 예수의 공생애의 시작으로 전환한다. 예수의 세례가 연결고리로 필요했다. 사람들은 요한이 그리스도인지 궁금해했지만, 요한은 사람들에게, 자기보다 더 능력있는 분이 오고 계시는데, 성령의 권능을 받은 분이라고 알려준다. 메시아가 오시기를 준비하는 요한의 사역은 그가 헤롯에 의해 투옥됨으로 끝난다. 예수 사역의 시작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은 예수가 세례를 받은 것이다. “ 백성이 모두 세례를 받았다.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다.(눅 3:21a)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의 세례에 관해 우리가 아는 것은 모든 백성과 함께였다는 것뿐이다. 이것은 교회가 종종 잊어버리는 것이다. 예수는 세례가 죄인들의 민족과 나라와 연대하는 행동이라고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예수는 이런 이기적인 세상에서 닳아 헤어져서 망가진 사람들과 그들 자신과 하나님을 포기한 모든 사람들의 편에 서신다.
압제 당하는 사람과 죄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들의 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다시 오심을 통하여 새로운 시작이라는 희망을 형성할 때, 예수는 그들과 함께 하신다. 예수가 세례를 받음으로 그는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상처받고 망가진 사람들과 동일시한다.
우리의 교회들이 진실하게 죄인들과 동일시하는지 어떤지 그리고 그들과 기꺼이 한편이 되고 있는지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요 자매로 환영하고 그들을 위해 일하는지는 물어볼 가치가 있는 질문이다. 교회가 모든 좋은 말을 할 수는 있다. 우리가 죄인들과 난민들을 위한 병원이라고 선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해 존경받고 성공한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보낸다.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서 돌봐줄 다른 곳을 찾다가 그들이 존중받는 교인이라고 확신을 가지게 된 후에 교회로 돌아가는 일이 되풀이해서 일어난다. 예수는 죄인들과 같은 줄에 서셨고, 그들과 함께 세례를 받으셨다. 그것은 알아야 하고 기억해야 하는 일이다.
누가는 예수가 세례 받으면서 말씀하신 것을 전혀 알려주지 않지만, 예수는 세례 받으신 후에 기도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에게 오실 뿐 아니라, 기도를 통해 하나님에게도 오신다. 그는 가르치고 치유하는 그의 공생애를 그 자신의 권능과 능력으로 수행하지 않았다. 그의 힘의 원천은 그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가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도 성령이 항상 그를 격려할 것이었다. 제자들은 이런 기도의 자세를 예수로부터 배울 것이고, 성령께서 그들에게 신실한 사역을 위한 체력과 거듭 거듭 사랑하는 인내를 제공할 것이었다.
다시, 우리의 교회들이 성령에 의지하고, 우리가 기도 가운데 하나님께 연결되고 있는지, 그래서 영적인 체력이 세상으로 들어와서 그리스도를 통해 사람들의 삶이 달라지게 만들었는지 물어야 한다. 이 연결은 모든 제자와 모든 교회와 모든 사역의 생명선으로 남아 있다. 예수의 세례에 이어서, 그가 기도하는 중에 이런 강렬한 영적인 경험을 하는 것은 중요하다.
세례의 물속에서 죄인들과 하나가 되고 기도 속에서 하나님을 붙잡으면서, 예수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될 것이다. Clarence Jordan은 그것을 이런 식으로 드러낸다: 하늘이 갈라지고, 비둘기 모양의 성령이 그에게 내려온다. 그리고 한 음성이 하늘로부터 말하기를,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예수의 세례에서 예수는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메시아로 임명되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이 강력한 확인은 광야에서 시험당하는 시간동안 그리고 신실한 사역의 기쁨과 시련에서 예수를 지탱해 주었다.
또 다시, 교회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자랑스러워하신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지탱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장로교 교수요 신학자인 John Leith는 모든 사람의 삶은 하나님의 의지와 의도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하곤 한다. “ 세례에서 어린이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아이가 나기도 전에 이 아이를 생각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이 아이에게 정체성과 개성과 이름과 아무도 감히 훼손할 수 없는 존엄성을 주셨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 기원이 역사와 생물학의 우연이 아니라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주 하나님의 의지와 의도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확인을 들을 필요가 있고, 서로에게서 오는 확인을 들을 필요가 있다. 이런 것들은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들어야 하는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나의 자녀이다. 너와 함께 나는 아주 기쁘다.” 예수가 이 말씀들을
들었을 때, 이 말씀들은 그의 삶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이 말씀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 배우자에게, 우리 교회 교인들에게 같은 일을 할 것이고, 그리고, 예수가 약속하기를, 우리 원수들에게도 그렇게 할 것이다.
누가는 우리 주님의 세례에 대하여 아주 적은 이야기만 해준다. 그러나 이 몇 마디 안 되는 말들은 신실한 목회에서 우리를 매우 깊은 기쁨의 원천으로 인도한다. 모든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 살아가고 사랑하는 힘을 얻기 위해 기도로 하나님에게 의존하며, 여러분의 부르심과 삶의 목적의 근원으로 여러분의 하나님의 확인을 듣는 것은 인생에서 가장 지속적인 기쁨이다. 이것들은 교회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우리 삶의 축복이다.
설교적 관점
-수세주일 3년 주기의 성서정과는 마태복음 (3:13-17), 마가복음 (1:4-11), 그리고 누가복음 (3:15-17, 21-22)이 순서에 따라 돌아온다. 각 복음서가 “ 동일한” (same)이야기를 다루면서 각각의 특성을 보여주는 것을 주목하게되면 신선함과 깊이를 더할 수 있다. 누가의 기록은 탐구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특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의 특수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누가는 3:15 도입부를 “ 백성들은[그리스도에 대한] 기대감으로 가득차 있었고” 그리고 “ 모두들 마음 속으로 요한에 대하여 생각하기를, 그가 그리스도가 아닐까하고 의심하였다” 라고 시작한다(밑줄은 저자의 강조). 누군가 나타나서 현재의 어려움으로부터
구원해줄 주 있으리라는 희망은 인간 경험과 역사에 늘 반복되는 주제이고 특히 선거가 앞에 있거나 경제가 쇠퇴할 때 혹은 나라가 전쟁 중에 있을 때 특히 그렇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슨 기대로 가득차 있는가? 그들은 지도자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는가? 그들은 신뢰하고 지지할 사람을 어떻게 분간할 수 있는가?
-둘째로 누가는 삽입구에서 즉 세례 직전 19-20절에서 헤롯왕이 요한을 감옥에 넣은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삽입구는 두 가지 역할을 한다. 먼저 예수께서 세례받고 그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요한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요한의 역할은 끝나고
예수의 사역이 바로 시작된다. 그러나 요한의 체포는 이어지는 즐거운 성령강림을 우울하게 만든다. “ 헤롯이 행한 모든 악한 일” (19절)로 인해 하나님의 예언자 요한이 감옥에 갇혔지만 예수는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22절)는 계시를 받는다. 통치자들은 요한이 먼저 (3:18)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선포했던 “ 기쁜 소식” (the good news)을 폭력을 써서라도 반대했고 장차 그렇게 할 것이다.
기쁜소식(복음)을 선포했던 사람들이 치러야 할 희생이 있다. 요한의 체포는 예수의 체포와 십자가를 미리 보여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성서정과는 18-20절을 건너뛰었기 때문에 누가의 이 의도를 보여주지 않는다. 설교를 할 때는 이 빠진 구절을 반영함으로써 세례와 삶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어도 좋다.
-셋째로 누가의 독특한 점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은 것을 사실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단지 예수를 포함한 모든 백성이 세례를 받는 후의 일만을 보여준다. 누가는 마태를 곤경에 빠뜨린 질문 즉 요한이 “ 웅크리고 앉아서 그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는” 사람인데
왜 예수가 요한에게 회개의 세례를 받아야하는지를 피하기 위해 이렇게 했을 수가 있다.
보다 긍정적으로 누가는 마가의 기록 “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그에게 임했다” 라는 것에 “ 예수께서 기도하고 있는 동안에” 를 덧붙인다. 이것은 성령강림을(epiphany) 세례받는 것으로부터 기도하는 것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누가복음 전체를 통하여 누가는 예수께서
기도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기 전에 (6:12),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 묻기 전에 (9:18), 변화산에서 (9:29),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기 전에 (11:1), 잡히시던 밤에 (22:41), 그리고 죽을 때에 (23:46) 기도한다. 누가에게 있어 예수의 특징은 교회의 특징이 된다. 사도행전에서 누가는 교회가 약속된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하였음을 보여준다 (행전 1:8,14). 그리고 약속된 영이 오순절에 그들에게 임한 후에 (바람과 불로!), 그들은 늘 기도를 계속했다 (행전 2:42; 3:1; 4:31; 6:4; 12:5, 12; 13:3; 14:23; 20:36; 21:5). 예수께서 그의 사역 가운데 기도를 통하여 힘을 얻고 인도함을 받은 것처럼 그렇게 그를 따르는 자들은 지금까지 그렇게 했다.
-마지막으로 누가의 독특한 점은 마가가 “ 비둘기 같이” 예수에게 내려온 성령에 “ 형체로” (in bodily form)라는 구절을 더한 것이다 [비둘기같이->비둘기같은 형체로]. 이것을 추가함으로써 누가는 영적 경험을 역설적으로 현실화하려고 한다. 즉 성령은 만질 수 있는 것(형체)이고 또 잡거나 정의하기 어려운 것이다(비둘기 같이).[두가지-만질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것-가 역설적으로 함께 있음을 보여주려했다는 의미] 하늘이 열릴 때 무언가 실체가 내려와서 이 땅으로 들어온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다. 그 영은 세상 속에서 예수를 통하여 편만하게 되고 (loose)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물이 아닌 성령과 불로 세례를 불 것이다.
-성령강림 그 자체는 기독론적이지만(christological) 누가가 [예수께서 기도하는 중에] 임했다라고 서술하는 것은 기도의 성격과 종교적 경험에 관해 질문을 하게 만들고 설교에서 풍성하게 다루어질 수 있다. 기도를 통한 우리 경험은 무엇인가? 성령강림의 순간은
무엇인가? 먼저 세례를 통해 그런 다음 기도를 통해 어떻게 우리는 사역에 부름을 받고 힘을 얻게 되는가?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계시의 메시지에 관해 누가는 마가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나는 너를 좋아한다” (3:22). 이 메시지의 대상은 군중들이 아니라 예수자신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 이해에 관한 것이다. “이 하늘의 선언은
이스라엘의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 대관식에서 사용되었던 시편2:7(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과 하나님이 종을 표현한 이사야 42:1와 연결된다” 고 Fred Craddock는 쓰고 있다: “이 두 본문은[시편과 이사야]다스림과 섬김을 결합시킨다” .
설교에서는 예수께서 어떻게 그의 정체성에 담긴 이 두 가지를[다스림과 섬김]자신의 사역에서 보여주었는지를 예를 들어 보여주면 좋겠다.
-설교자는 또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긍정의 힘에 대해 좀 더 제시해주면 좋겠다: “ 너는 내 아들이야, 내 딸이야” “ 너는 사랑받고 있단다” “ 나는 너 때문에 참 기쁘구나” . 우리가 부모나 중요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종류의 정직한 말을 들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함에 있어 힘을 얻고 그런 자기 정체성을 지키기위해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런게 없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낮은 자존감(self esteem)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기쁜 소식(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사랑받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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