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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50년 전인 1956년 법성진성(옹성)의 모습
※법경헌 주 : 그네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다른 해석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네는 우리나라 4대명절의 하나였던 단오제와 불과분의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고장 향토사에도 법성포 단오(端午)사(史)에 그네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법성향지 초판(1988년)에 수록되어 있는 그네관련 사료를 주해와 사진자료를 보완하여 올려 드립니다.
법성포 단오제 와 그네
단오제(법성향지 초판 제6편 민속과 풍속 제1장 민속 제1절 (P253~257):전주에서 열리는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놀이」라는 행사를 하는데 일종의 국악 경연대회이다. 현재에 있어 그 규모나 차원이 범국가적 행사로 발전하여, 옛날에도 그랬지만 여기에서 장원으로 뽑혀야 비로소 명창으로 인정받게 될만한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전주대사습놀이가 본래는 판소리의 명창을 뽑는 대회였으나 현재는 판소리 뿐 아니라 농악, 시조, 기악 등 종목이 다양해 졌다. 그런데 이 고장 법성에서 지금의 「전주대사습(全州大私習)놀이」보다 그 규모나 권위가 훨씬 더 컸던 축제가 매년 단오절에 이곳 숲쟁이에서 열렸고 이 대회에서 장원을 해야 한사람의 명창이나 기예자(技藝者)로서 전국에서 인정을 받던 그런 큰 대회가 열렸었다면 아마도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 대회가 어느 때부터 이 고장에서 맥락을 이어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추측컨대 이조 중종 때에 법성 진성이 축성되어 거진(巨鎭)으로써의 면모를 갖추게 된 후부터 일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볼 수가 있다. 물론 옛날, 일종의 흥행형태인 소위 남사당패들의 마당놀이(산대감 놀이;가면극) 따위의 연희(演戱)는 그 이전부터 돌아 다녔다. 그러나 이런 흥행행위와 이 「대민족놀이」 축제와는 엄연히 구별해야 한다. 이 큰 민속행사는 관(官)에서 주관했던 것인데 그것을 입증할만한 기록이 있어 나중에 싣겠는데 이 내용을 보면 대개 경제적 중심지나 정치적인 요충지로 진영이 설치되었던 중심지에서 행해졌다는 것과 주로 관(官)에서 주관되었으며 각 도의 관찰사(감사)가 시상했던 주관자라는 것을 엿 볼 수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이 고장이 경제적, 정치적, 나아가서는 예능 적으로 그 사회적 지위가 상당한 지정학적 가치로 향상되었을 시기에 이르러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여하간에 1907년 무렵부터는 해마다 행해졌던 것만은 확실하다. 고(故) 신명희 옹(翁)이 어린 시절에 실지로 목격한 경험담을 생전에 들려주신 바가 있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이 축제는 단순한 놀이 모임이나 축제행사가 아니고 입상자에게 어떤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는 일종의 예인(藝人)들의 고시 장이오, 등용문이었던 것이다.
이 축제에서 연희(演戱)되었던 종목이나 진행되었던 순서를 고(故)신명희 옹(翁)의 증언에 의하면 먼저 가창으로 ①시조 ②단가(短歌) ③판소리 ④육자배기 ⑤잡가 등의 순서를 마치고 다음은 기악으로 육편악(六編樂) 즉, 가야금, 거문고, 퉁소(筒蕭), 단소, 태평소(날라리), 대금을 연주하고, 다음으로 줄타기, 바나(접시돌리기), 망재주(자반 뒤집기)를 연출한 다음 선소리로 염불, 보렴, 새타령, 화초사거리, 승무, 검무, 발림(굿거리), 성주풀이를 끝낸 다음에 씨름, 그네뛰기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그 후에는 탈놀이(가면 극;산대도감놀이)가 연희되었는데 옛날에는 부녀자의 외출이 억제되었던 만큼 이 단오절만은 외출이 허락되어 많은 부녀자들이 모여들어서 구경도하고 그네도 뛰고 얼마동안의 쌓이고 쌓였던 정신적, 육체적 압박감과 피로를 푸는 좋은 기회가 되었고 순박한 처녀 총각의 눈 맞춤(데이트)의 계기가 되기도 했을 낭만의 한마당이기도 했다. 3~4일 또는 4~5일간의 축제가 끝나갈 무렵 최고 입상자가 발표되면 반드시 풍년가의 합창과 농악놀이로 마지막 흥을 돋우고는 입상자들은 말이나 가마에 태우고 삼현 육각의 풍류를 잡히고 농악대를 앞세워 숲쟁이를 출발하여 동문거리를 거쳐 조대마당으로 해서 해창거리, 참 모퉁이, 월랑대, 다랑 가지, 군기통, 큰 저자거리, 홍살거리, 진골의 경로를 밟아 다시 숲쟁이로 돌아와 한 마당 농악을 치고 수삼일 동안의 밤낮 없는 대축제의 대단원이 막을 내렸던 것이다. 만일, 단옷날이 궂어 비가 오는 날이면 대덕산 은선 암에서 거행되었다.
이 “법성 단오제” 대축제는 그 당시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규모와 권위가 큰 대회였으며 물론 호남지방에서는 제일 큰 축제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날이 되면 심남(충청, 전라, 경상도)지방에서는 물론 전국에서 내 노라 하는 소리꾼, 재주꾼, 많은 남사당패들이 수없이 모여들었고 따라서 구경꾼들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운집해 왔었다 한다.
이 대회 행사가 어떤 이유에서 이건 그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는 것은 매우 애석하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는 어쩔 수 없는 세태의 변화 탓도 있겠지만 한.일 합방이후(주: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강점한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우리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첫째 원인이요, 이 고장의 정치적 예술적, 경제적 쇠퇴현상이 둘째 원인일 것이다. 또 한 가지를 들자면 한말 개화기 이후 현대 사조의 시류를 타고 들이닥친 신파연극, 영화 따위의 공연예술의 추세에 완전히 밀려 버린 탓도 컸을 것이다. 현재로는 강원도「강릉 단오제」가 유일하게 그 원형을 보존하여 해마다 거행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 축제의 의의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을 줄 안다.
이런 민속놀이의 연원을 따져보면 상고시대의 재천의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무속편 참조) 우리의 조상들은 이런 계기를 통하여 마을의 (후대에 와서는 광역적 의미) 안태(安泰)(주:안령과 번영)를 빌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여 인보(隣保)애향(愛鄕)의 우의를 다졌으며 나아가서는 일년 동안의 축적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해소시키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법성 단오절 놀이」의 성격을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고증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에 「강령(康翎)탈춤」이라는 민속놀이가 있는데 무형문화재 3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해설을 인용하면 「강령(康翎)탈춤」도 황해도의 다른 탈춤과 마찬가지로 5월 단오에 놀아 왔으며 5월 6, 7, 8일의 3일간은 해주 감영에 나가서 도내 각처에서 모인 여러 탈춤들과 경연하였는데, 장원을 하면 감사에게서 후한 상을 내렸다. 「양주 별산대(別山臺)놀이」는 조선시대 양주목사가 군 행정을 집행하던 양주 구읍(舊邑)에서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 8월 추석 등 대소명절에 연희(演戱)되고 기우제의 행사로 놀기도 하였다. 「송파 산대(山臺)놀이」: 송파는 한강변 5강(江)(송파, 한강, 서빙고, 용산, 마포)의 하나로써 수운(水運)으로는 강원도까지 내왕하였고, 육운(陸運)으로는 마상(馬商)행인들이 많아 전국을 돌았고, 송파 장(場)은 조선 후기 전국에서 가장 큰 향시(鄕市), 다섯 장(場)중의 하나였고 송파는 경기 일원에서는 부촌(富村)이라 송파 산대놀이의 경제적 요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황해도 「봉산(鳳山)탈춤」은 해서(海西)일대에 분포된 탈춤중의 하나로 19세기 말엽 이래로 해서(황해도)일대의 탈춤의 최고봉을 이루는 그 대표적인 놀이였다. 봉산 구읍(舊邑)은 황주, 서흥, 평산과 함께 팔역지(八域誌)의 소위 남북 직로(直路) 상의 주요한 장터의 하나였고, 이 고장의 이속(吏屬;관리)들이 중심이 되어 약 200년 전부터 이 놀이를 이어왔다. 「은율(殷栗)탈춤」은 황해도 탈춤의 하나인데 이북의 큰 명절인 단오에 2~3일 계속하여 놀았고, 4월 초파일과 7월 백중에도 놀았다. 단오놀이는 낮에도 씨름과 그네뛰기대회가 열렸고, 밤에는 불을 피워놓고 탈놀이를 하였다. 놀이는 보통 저녁 먹고 어두워서 시작하면 자정에 라야 끝났는데 구경꾼들이 함께 뛰어들어 소리하고 춤을 추노라면 짧은 초 여름밤이라 새벽 4시면 날이 새는데 그때까지 놀았다. 이상은 <한국 문화재 보호 협회; 문화재 대관, 무형문화재편>을 인용한 것인데 이런 민속들을 종합해 보면 법성의 「단오제 놀이판」의 성격과 내용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이 때에 주관은 각 진영의 통인청(通引廳)에서 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제반경비는 보부상 단에서 갹출한 것이었다. 또 한가지 참고로 「전주대사습놀이」는 본래 전주 부와 전라감영 두 곳에서 경쟁적으로 시작된 것으로서 전주 부와 전라감영의 두 통인 청에서 주관을 하였으니 여기에서 장원으로 뽑힌 사람이 전주부의 본부(本府)출신 명창과 전라감영의 영문(營門)출신 명창이 따로 따로 배출되었던 것이다.
본부출신의 명창으로는 장자백(張子伯), 염덕준(廉德俊), 송만갑(宋萬甲) 등이 대표자 격이고, 영문출신의 명창으로는 이날치(李捺致), 박만순(朴萬順), 주덕기(朱德基) 등 당시에 그 명성을 널리 떨치고 왕이나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벼슬까지도 제수 받았던 사람들인데 이들은 각각 전주부사와 전라감사의 후한 상을 받았으며, 이때를 계기로 하여 이름을 떨치는 명창으로 더욱 정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법성의 「단오제」대 축제는 이상의 여러 가지 놀이와 「대사습놀이」가 총 망라된 종합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으니 자생적인 민중의 「놀이」의 차원을 넘어 관과 민이 혼연일체가 된, 한마당 큰잔치였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그 최고 주관자는 전라감사가 아니면 초소한도 종3품 법성진 수군첨절제사가 주관 시상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전통의 영향이라고 보여 지는 정초의 지신밟기, 농악놀이, 정월 보름의 줄다리기, 단오절 그네뛰기, 8월 추석의 씨름대회 등의 전통 민속놀이가 해방 직후까지 그 맥을 간신히 이어오다가 현재에는 겨우 그네뛰기 대회만이 근근이 그 맥락을 이어오고 있을 뿐이니, 이 고장의 영고성쇠를 보는 것 같아 쓸쓸한 감회를 금할 수 없다. 더욱이 10여 년 전에 발생한 안전사고로 10년이나 그 맥이 끊겼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1986년 뜻있는 향우들이 부활을 시켰는데 의외로 그 성과가 좋은데 고무되어 금년(1987년)에는 그 행사 규모를 더 키웠다. 이제는 면 단위의 구각(舊殼)을 탈피하여 적어도 전남지방의 행사로는 승화시켜 보기로 하였으니 바라건대, 이 숲쟁이의 단오제 전통만은 꼭 전승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지금부터 48년 전인 1958년 단오제때 12살의 소녀가 그네대회에 출전하여 1등 상을 수상한 상장,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이 상장의 주인공이 벌써 환갑의 나이가 되었다. 끝.
추신 : 재경 법성면 향우회 카페(다음)에 들어가시면 옛날 법성 관련 사진들이 몆 카트 있습니다. 참고하십시요.
첫댓글 감사함니다.정말오래된그네행사장의모습이 너무나 정겹읍니다. 좋은 사진과글을 올려주셔서너무나좋아요.날씨가 장마철이오니 건강에 유의하십시요, 그네사랑인 김병만 올림
좋은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좋은자료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