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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일/김윤희 선교사는 1956년 11월에 태국에 도착하여 거의 20년을 사역하다가 태국을 떠났다. 태국을 떠난 후에도 미국에서 태국인 교회를 개척하였고, 태국에도 거의 매년 찾아와 어려운 산족 아이들과 몸파는 아이들을 위한 재봉 교육과 의상실 등의 재활 교육을 계속하여 왔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태국에 찾아와 태국 선교를 위해 애쓰시다가 소천하셨다. 그분을 만나 교제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 그분은 진정으로 태국을 사랑한 선교사였다.
2. 태국을 사랑한 김순일 & 김윤희 선교사 *
1929년 황해도 태생인 김순일 선교사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경도 입명관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동시에 일본 신호 개혁파 신학교를 수료했다. 그는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전인 1948년에 귀국하여 서울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부터 1955년까지 대구에 있는 헌병학교에서 육군 군목으로 재직하였다.
대구에서 군목으로 재직하는 동안 25세가 되던 해인 1954년에는 대구에서 전쟁 고아들을 돌보던 가정의 목회자의 딸인 21세인 김윤희 자매를 만나 결혼을 하였다. 당시 군목이었던 김순일은 25세였고, 신부인 김윤희는 21세였다(1933년생). 그들은 결혼 후에도 계속 대구에서 거주하였으며 군목으로 사역하였다.
자서전에 의하면(p.11) 김순일 목사가 태국 선교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1954년 7월이었다. 그는 대구 경북대 교정에서 열린 국제 기독교 청년 봉사단 모임에 강사로 갔는데 그곳에서 태국에서 온 마나라는 신학생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 마나라는 청년은 영어도 서툴고 말이 없었지만 젊은 목사인 김순일을 따르며 간곡하고도 진지하게 태국 선교에 대한 요청을 하였다고 한다. “김 군목, 당신이 우리 나라에 와서 우리를 도와 주세요. 그래 당신같은 젊은 사람이 우리 태국에 선교사로 와서 일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왜 그러냐하면 서양 선교사들의 복음 전파는 ”백인들의 종교“라고 우리 태국 사람들이 배척한답니다. 한국 사람이 우리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주면 얼마나 효과적일까! 당신이 우리나라에 와 주세요.” 이 말을 듣고 나서 김순일은 비록 이름없는 한 청년의 요청이었지만 바울이 드로아에서 마케도니아 사람의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부름 소리를 듣던 그 환상처럼 그런 음성으로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후 그는 태국 선교사가 되는 것에 대하여, 열대의 나라 태국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장로교 총회는 파키스탄에서 열린 세계 교회협의회(WCC) 회의에서 한국교회에 선교사 파송 가능성을 타진해왔고 태국 교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요청한 사실을 알고 장로교 총회 해외 선교위원회에서 선교사를 찾게 되었다. 2년마다 열리는 당시 예장 총회는 1954년 장로회 총회 40회기에 최찬영, 김성권 목사를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하였으나 김성권 목사의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선교지로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에 총회 선교부는 태국 선교사 한 가정을 더 찾고자 하여 총회 신문에 태국 선교사를 모집하는 공고를 냈다고 한다.
김순일 목사는 군목으로 사역을 하던 1955년 9월경에는 대구에서 큰딸 유미를 출산하였으며 가족들은 장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56년 3월경에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해외선교부에서 태국에 선교사를 보내기 위해 사람을 물색중이라는 교단 신문광고를 보고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태국 선교에 대한 기도의 응답으로 믿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나를 부른다고 믿었고, 내가 여기에 응하지 않으면 않된다는 마음의 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라고 고백하며 대구에서 단숨에 서울로 달려갔다. 그는 총회 선교부에 선교사 지원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고 머지 않아 태국 선교사로 허입되었다. 그는 1955년 12월말부로 4년 동안 일해왔던 대구에서의 군목 생활을 접어야 했다.
장로교단이 통합과 합동으로 분열되기 이전인 1956년 9월에 2년마다 열리는 예수교 장로회 41회 총회가 새문안 교회에서 열렸다. 총회 선교부는 그 총회 기간중에 하루 저녁에 시간을 내어 김순일 & 김윤희 선교사의 파송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총회 해외 선교부에서는 이미 최찬영(김광명) 목사 부부를 태국으로 파송하기로 하였고 1955년 4월 24일에 이미 파송 예배를 드린 상태였고 최찬영 선교사 부부는 1956년 5월 24일 한국을 떠나 태국으로 간 후였다. 김성권 목사의 여권이 발급되지 않아 총회는 태국으로 갈 선교사 한가정을 물색하게 되었는데 김순일(김윤희) 목사 부부가 지원하여 태국 선교사로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한국은 전쟁으로 인한 폐허로 말미암아 해외 공관원들도 가족을 데리고 해외로 가지 않을 정도여서 선교사가 가족을 데리고 해외에 간다고 하는 것은 일을 맡은 공무원들에게는 여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운 전례를 만들기를 싫어하는 공무원들은 가족 여권을 만들어 주려고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방면으로 수소문하여 길을 찾으려 하였지만 길을 찾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한경직 목사님과 여러 장로님들의 도움으로 경무대의 힘을 이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경무대의 도움으로 가족들의 여권은 2개월만인 1956년 6월경에 만들게 되었다.( 참고로 최찬영 선교사는 여권과 비자를 하는데 1년 1개월이 소요되었다)
선교지로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던중 가족의 여권이 만들어지자 여권과 비자 서류를 만들어 태국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야 했다. 당시 태국 대사관은 서울이 아닌 동경에 있었다. 어렵사리 서류를 만들어 동경에 있는 태국 대사관에 태국가는 영주권 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김순일 목사는 수번에 걸처서 비자를 줄것을 독촉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하였다. 편지를 받은 태국 대사관에서는 6개월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으나 비자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나왔는데 그는 3개월 15일만에 비자가 찍힌 여권을 되돌려 받을 수 있었다.
김순일 선교사는 형식적으로는 대한예수교 장로교 총회가 파송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필요한 재정을 공급함에 있어서는 총회가 아닌 대구에 있는 신임복 장로가 어려운 중에서도 선교사역에 필요한 생활비 재정의 대부분을 공급하였으나 사역비는 전국 여전도회에서, 자녀교육비는 동남아 교회협의회에서 감당하기로 하였으나 대부분은 잘 공급되지 못하였다. 생활비를 담당하기로 한 신임복 장로님만 어려운 가운데서도 굳건히 후원 사역을 지속하였다. 김순일 선교사 가정의 모자라는 사역비를 비롯한 대부분의 재정은 당시 태국 선교를 책임지고 있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가 부담하였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한국과 태국에 선교를 하는 동일 단체로 당시 최찬영, 김순일 선교사의 선교사 출발을 위한 한국교회에 요청, 파송에 깊은 관여와 태국현지에서의 사역을 위한 사역비, 언어후 사역지 답사, 자동차 구입, 안식년 경비와 그후의 사역일정 모두를 뒤에서 격려하고 협력하였다. 후원비가 끊어 졌을 때 태국 기독교총회(모두 미국 북 장로교의 후원으로 진행되는 재정이었지만)와 미국선교부의 후원이 있었다.
김순일 선교사 가족으로는 김윤희 선교사와 돌도 안된 딸 유미가 함께 했는데 그들은 11월 하순 방콕으로 가는 직항이 없어 동경으로 가는 비행기에 올라 동경에서 하루를 묶었고, 그 다음날 저녁 늦게 홍콩으로 갔다. 그곳에서 1박을 하고 목적지인 방콕으로 왔다. 방콕에서는 총회 임원들과 몇몇 미국 선교사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태국 생활을 시작하였다. 태국 기독교 총회와 협력하는 사역이었기에 먼저 숙소에 짐을 풀고 난후 태국의 물정을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하였다.
김순일 선교사 가정은 방콕에 짐을 푼후 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김순일 선교사는 일어와 영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기에 언어 습득에는 다소 은사가 있었던 것 같다. 김순일 선교사는 태국어를 배우기 위해 1956년 12월부터는 방콕에 있는 언어 학교인 Union Language School에 등록하여 1년 6개월 과정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당시 김순일 선교사는 27세의 젊은 나이와 선교에 대한 열정, 그리고 언어 습득에 대한 은사가 있어 그의 태국어 실력은 날로 날로 향상되었으며 태국 문화와 가치 체계와 관습, 태국 사람에 대해 이해의 폭을 넓혀 가고 있었다.
1956년 12월부터 시작된 1년 6개월의 언어 과정이 끝나기도 전인 1958년 3월에 태국 기독교 총회(CCT)는 김순일 김윤희 선교사 가정을 태국의 제2노회인 치앙라이 미션 센타로 이주하여 정착하도록 결정하였다. 당시 치앙라이에는 15,000명 정도의 인구가 살고 있었고 미얀마와 라오스와 인접한 치앙라이 미션 센타는 최초의 태국 북부 선교사인 멕길버리 선교사를 비롯한 일행이 1890년 4월 13일에 개척한 곳이었다.(Khrischak Muang Nua, Herbert R. Swanson, p.169)
김순일 선교사 가정은 1958년 이른 봄쯤 3월쯤에 사역지인 치앙라이를 향해 출발하였다. 방콕에서 치앙마이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람빵에서 내려 다시 치앙라이로 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하였다. 당시 버스는 트럭을 개조하여 만든 것으로 간이 객차였다고 한다. 김윤희 선교사는 치앙라이 선교관에서 생활하면서 1959년에 둘째인 아들을 출산하였으며 1961년에는 셋째인 딸을 순산하게 된다.
김순일/김윤희 선교사 가정이 치앙라이에서 머문 숙소는 미국에서 온 장로교 의료 선교사였던 윌리암 브릭스(William A. Briggs M.D. 1890-1918) 박사가 몸소 건축한 곳으로 2층으로 되어 있는 대형 맨션이었다. 안타깝게도 브릭스 부인은 태국에 온 이듬해인 1891년에 람빵에서 사역을 하던중에 병을 얻어 먼저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을 입었다. 브릭스 박사는 의료 선교사로 람빵에서 1890-1894년까지, 프레에서 1894년부터 -1890년까지, 치앙라이에서 1890년부터 1918년까지 사역하다가 태국에서의 28년간의 사역을 마감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Historical Sketch of Protestant Mission in Siam 1828-1928)
치앙라이 선교관(센타)은 김순일 선교사 가정이 쓰기에는 너무나도 벅차고 커다란 집이었다. 선교관 뜰은 초등학교 운동장 만큼이나 컸고 2층으로 된 맨션 1층은 큰 무도회에 쓸만큼 넓은 응접실이며 매반 방이며 여러 가지 부속실로 구성되어 있었고 2층은 두툼한 벽으로 햇볓이 들지 않도록 설계하여 지었는데 2층 가운데에는 가장 넓은 메스터 침실이 있었고 양옆으로는 작은 방들이 모두가 침실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방이 자그만치 17개나 되었다. 주변에는 인가는 하나도 없고 바로 옆에는 선교관 만큼이나 낡은 선교 병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순일 선교사 가정이 머물던 치앙라이 선교관은 건축된 지가 60년(김순일은 그의 자서전에서 100년이 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부릭스 박사가 치앙라이에 와서 선교관을 지었다면 그가 치앙라이에 와서 사역을 시작한 것은 1900년부터 1918년까지 이니 그가 오자마자 지었다고 해도 60년 정도가 되었다.)이 다된 건물이었다. 그곳은 사용하기도 힘들었고 너무 커서 유지하기도 힘들었지만 태국 기독교 총회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김순일 선교사 가족에게 선교관을 사용하도록 것이었다. 하지만 이 선교관은 귀신이나 도깨비가 나온다는 소문도 무성하였으며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죽었다는 소문도 있었고 2차 대전때는 많은 일본군들이 죽은 시체가 선교관 앞뜰에 쌓여 있었다고도 하였다. 하여간 이 선교관은 세 사람의 한국인 선교사가 관리하기에는 너무도 벅차고 컸으며 살기에도 불편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소 한번 하기에도 너무 힘이 들었다. 운동장처럼 넓은 잔디의 풀을 뽑거나 청소하는 일만해도 두 세 사람을 고용하여야 했고 선교관 전체를 움직이려면 최소 5,6명의 인부를 고용하여야만 했다. 그들은 선교관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재정은 없었지만 선교사로서의 품위 유지를 위하여 선교관에서 머물 수 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이에 필요한 재정은 음으로 양으로 미국 선교부에서 다 지원하고 있었다.
치앙라이 선교관에 도착하여 김순일 선교사가 하여야 하는 일은 제2노회 지역의 교회들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태국어를 1년 반여에 걸처 배웠다고 하지만 아직도 그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치앙라이 지역의 제2노회 산하에는 38개의 지역교회가 있었는데 그중에 9개는 나환자 중심의 교회였다. 김순일 선교사는 치앙라이 선교관에 부임하는 날부터 38개의 지역교회를 방문하여 설교도 하며 지역 교화의 사정을 살피는 사역을 지속적으로 감당하였다. 5개월이 지날 정도에는 38개의 모든 지역교회를 방문하여 같이 예배도 드리고 교회에서 일어나는 장례식이며 결혼식, 세례식, 장로 안수식, 헌당식 및 추수감사절 예배와 크리스마스 예배를 드려야 했다.
1959년에는 필리핀에서 세계기독교 교회 협의회(WCC) 총회가 마닐라에서 열리게 되었다. 태국 기독교 총회에서는 태국 대표로 두명의 대표를 파송하기로 하였는데 한명은 당시 총무였던 목사였고 나머지 한명으로 김순일 선교사를 지목하였다. 따라서 김순일 선교사는 필리핀에서 열리는 WCC 총회에 태국 대표로 참석하게 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의 상황으로는 선교사에게 선교 사역을 위하여 차를 구입해줄 능력도, 재정도 또 그럴 생각도 없었다. 김순일 선교사가 미국 선교부의 요청으로 미국 선교부가 재정을 다 지불하고 한국 교회는 차를 사는 것에 동의하는 것만을 하도록 요청하였을때도 외지 선교부에서는 재정 지원을 하지 않음에도 선교사가 차를 사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선교부에서 김순일 선교사의 선교 사역을 위하여 지프(차)를 구입해주어 비가 오지 않은 날에는 차를 이용하여 밀림 지역의 교회를 방문하기도 하였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물소가 끄는 우마차를 이용하여 밀림속의 교회들을 돌아봐야 했다. 밀림 지역을 오가면서 때로 김순일 선교사는 밀려오는 외로움과 정체감에 대한 혼란이 오기도 하였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기도 하였지만 세월이 지날수록 몇 해를 밀림의 교회들을 돌보다 보니 자신의 삶의 일부요 동반자요, 인생 최대의 행복한 길이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김윤희 선교사의 증언(2002.11월)에 의하면 김순일 선교사가 지역 교회들을 돌보는 일에 전심 전력하였다면 집에서 오는 손님들을 대접하며 자녀들을 돌보는 것은 김윤희 선교사가 감당해야될 몫이었다. 찾아오는 많은 서양 선교사는 물론이고 유미를 비롯한 세명의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일도 큰 일이었지만 매일 매일 일어나는 너무 많은 일들로 인해 유미를 비롯하여 자녀들을 잘 돌보지 못하고 자녀들에게도 한국어를 가르칠 수 없었다고 했다. 사실 당시 태국 치앙라이에는 한국 사람이라고는 김순일 선교사 한 가정만이 있어서 어린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어린딸 유미를 비롯하여 세명의 자녀들은 태국의 메반들과는 태국어로, 서양 선교사들의 자녀들과는 영어로 이야기를 하게되어 모국어를 형성하는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자녀들은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자녀들은 영어나 태국어가 모국어가 되었던 것이다. 김윤희 선교사님이 마지막으로 태국 치앙마이에 오셨을때인 2002년 11월에 같이 교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하셨던 말씀은 선교할 때 가장 안타깝고 아쉬웠던 것은 너무나도 큰 선교관을 돌보고 선교부에 찾아오는 손님들이 너무 많아 자신의 자녀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지 못한 것이 가장 후회스런 일이었다고 하셨다. 당시 주변에는 한국인도 없었고 한국어를 배울 수 있는 어떤 환경도 되지 않아 결국 아이들이 한국말도 못하는 아이들로 성장하여 한국과는 멀어진 아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많이 아프다고 하셨다.
외국인으로 제2노회의 노회장이 되다.
김순일 선교사 가정이 치앙라이 제2노회 산하에 와서 선교관에 머물면서 지역교회를 돌보는 사역을 지속하였고 5,6개월이 지날 즈음에는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은 우마차를 이용하여 1-2일에 걸처서 돌아오는 일정이었지만 때로는 1주일간 부흥집회를 하면서 머물기도 하였다. 그의 사역에 대한 태국 교회의 반응은 “김선교사는 우리 태국 사람과 같은 피부를 가졌고 아마도 그 마음과 생각도 우리 태국 사람과 같다고 믿습니다. 그런데도 귀신 나오는 집에서 병도 걸리지 않고 귀신을 이긴 선교사입니다. 지난 5개월 동안 우리 노회의 모든 교회를 방문해주었습니다. 이런 선교사를 노회장으로 모신다는 것은 우리의 영광이 아닐 수 없습니다.”라고 하며 노회장으로 추천하였다. 즉 태국에 온지 약 1년 9개월만에, 치앙라이에 와서 사역을 시작한지 5, 6개월만에 이러한 인정을 받아 약 60여명의 회원으로부터 만장일치로 노회장으로 피선되어 1958년 8월부터 1차 안식년을 떠나는 1962년 8월까지 5년간을 제2노회 노회장으로 사역하였다. 당시 제2노회 산하에는 38개의 교회중 9개처가 나환자 교회였고 같은 노회에는 독일 마버거 선교회(MARBURGER MISSION에서 나온 7가정의 선교사와 미국 북장로교 소속 선교사 6가정 이상이 이미 사역을 같이 하고 있을 때였다.
제2노회 노회장으로서 김순일 선교사는 5년간(1958.9-1962.8) 2노회 산하의 흩어져 있는 38개의 교회의 부흥회, 성찬식, 세례식, 장례식 모든 각종 행사를 주관해야 했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은 약 3개월에 걸처 노회장이 방문하는 날로 예배를 드렸다고 했다. 당시 제2노회의 목회자는 전도사 포함하여 10여명 정도였고, 파야오와 치앙라이를 중심으로 한 독일 마버거 선교사들은 독자적인 자기들의 사역을 하고 있었고, 미국 장로교 선교부도 그러했기에 노회장으로서 나머지 태국 교회들의 노회와 교회의 모든 사소한 일들을 도맡아 해야 했다. 조준형 선교사의 기록에 의하면 '1960년 10월 8일의 기록에는 노회장으로서 김순일 선교사는 노회원의 목사증(기차할인용도)을 발급한 것으로 나와 있다.'고 하였다.
1차 연구 안식년을 갖다(1962.9-1964.11)
김순일(김윤희) 선교사는 1956년 11월에 태국에 도착하여 방콕에서 1년여 동안 언어를 배우고 태국 북부 치앙라이로 사역지를 이동하여 제2노회 노회장으로서 힘에 겹도록 사역을 감당하였다. 6년간의 태국 사역을 마치고 미국 선교부의 준비와 협력으로 2년간의 연구 안식년을 갖게 되었다. 김순일은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선교학 석사(Th.M) 과정을 공부하기로 하고 8월 학기에 가기로 준비를 하였으나 김순일 선교사가 미국에 가서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미국인 의료 선교사가 결핵에 걸렸다며 방해하여 출국이 거의 한달이나 늦어져 그들이 미국에 도착한 것은 이미 개학하여 한달이 지난 후인 1962년 9월말이었다. 이미 8월 중순에 학기가 시작되어 학습은 상당히 진전이 되어 있어서 지난 공부를 따라가느라 김순일은 밤낮으로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일본에서 유학한 전례가 있어 학과를 잘 따라잡을 수 있었다. 다음해인 1963년 6월 10일에는 학위 과정과 논문을 완성하여 프린스톤에서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학교에서도 지속적으로 그에게 관심을 갖고같이 일할 것을 제안하였으나 과정을 마친 후에는 뉴욕을 떠나 유럽으로 여행하면서 1963년 7월초에는 스위스 제네바의 에쿠메니칼 연구원에서 시야를 넓히는 기간을 가졌다. 그는 그곳에서 신학의 다양한 관점에 대해 접할 수 있었으나 이미 다져진 견고한 신학적 토대로 말미암아 그의 신학은 그리 큰 영향은 받지 않았다. 그는 후에 기록하기를 다양한 신학의 모습을 보았다고 기술하였다.(자서전, p.140)
이후 7년만인 1964년 2월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고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는 신문과 방송, 그리고 각 교회를 통하여 선교보고와 선교 사업에 대한 프로모션을 전개하였다. 한국말을 잘하지 못했던 그의 자녀들도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말을 조금이나마 배울 수 있게 되었고 한국교회와 함께 태국 선교를 이야기하기도 하였으나 한국 교회는 이미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어 자신 역시 어느 편에 속할 것인가를 강요받고 있었다.
제2기 사역(1964.11 -)
1964년 초가을 프린스턴 신학교와 스위스 제너바에서 안식년 연구를 마치고 한국에서 8개월 정도를 보낸후 1964년 9월에 한국을 떠나 일본 동경에서 2개월 여를 보낸후 태국 북부 지역인 치앙마이로 돌아온 것은 1964년 초가을로 11월 말경이었다. 태국 기독교 총회에서는 그가 안식년으로 돌아오기 전에 이미 그로 하여금 안식년을 마치고 돌아와서는 태국 총회 청년부 디렉터라는 자리에서 사역하도록 결정하였다.(p.105-106) 태국 북부 지역의 중심인 치앙마이에 있으면서 전국의 학생들과 청년들을 돌아보는 자리였다. 또한 그는 멕길버리 신학교(현 파얍대학교)에서 교수로 사역하면서 치앙마이에 위치한 Mckein 나환자 병원(최근에는 멕켄 재활센타로 명칭을 변경)을 돌보면서 선교사의 필요성을 알고 대구에 있는 동산 의료복지 선교회에 의료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동산 의료복지 선교회는 태국 치앙마이 나환자 병원에 의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평신도 의료 선교사로 송예근 박사를 1966년 3월에 태국 치앙마이에 있는 Mckein 나환자 병원에 파송하여 3년간 사역하도록 하였다.(정승회 선교사는 송예근 선교사의 파송 연도를 1964.11 -1969.5이라고 기술하고 있으나 본인이 멕켄 병원에 확인하여 본바로는 송예근 의료 선교사가 와서 사역한 것은 맞으나 그가 병원에서 재직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지금까지 멕켄 병원에서 사역하고 있는 Mrs. Smith는 자신이 1969년도에 왔는데 자신들이 왔을때는 이미 그들이 떠난 뒤였고(1968년 12월에 떠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들이 살던 집이며 그들에 대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송예근 박사는 이곳에서 사역하면서 선교 사역보다는 의료사역에 더 관심을 가졌고 의사로서 충실하게 사역한 사람이었다.'고 진술하였다. 후에 동산의료복지선교회에 문의한 결과 당시 이사회에 회의록이 남아있었는데 1966년 3월에 송예근 박사를 태국 치앙마이의 나환자 병원에 파송하는 것으로 나와 있다.)
2002년 11월에 김윤희 선교사의 회고에 의하면 당시 치앙마이에는 한국인이라고는 두 가정 밖에 없었다고 했다. 자신들은 신학교에서 강의하고 태국 기독교 총회의 일을 돌아보는 일에 너무 분주하여 자신이 리쿠르트한 송예근 박사 가정을 잘 돌아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 기간 동안 치앙마이에 있으면서 송예근 선교사 가정과 교제하며 지냈는데 어쩐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두 가정 간에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하였다.
1960년대말 한국 최초의 초교파적인 해외 선교단체라 할 수 있는 국제선교협력 기구(The Korea International Mission-이하 K.I.M.)가 조동진 목사에 의해 조직되어 홍콩에 자체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었다. 이 무렵 태국에서 철수하여 돌아온 김순일 선교사는 본국 파송교단이었던 예수교 장로회 총회가 1959년 이래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어 있는 현실에 접해 1969년 총회 여전도회의 후원을 받아 합동 총회로 소속을 변경하였다. 당시 K.I.M. 대표 이사인 조동진 목사는 김순일 선교사를 K.I.M. 선교사로 임명(동남아-태평양 지역 총무)하여 태국으로 재파송하였다.
김순일 선교사는 1970년 7월 예장(합동)총회 선교부와 K.I.M.의 이중 회원의 자격으로 다시 태국에 도착하였으며 1971년 2월 뱅콕 한인연합교회 (The Korean Union Chapel in Bangkok)를 설립하였다. 그후 1971년 7월에는 신홍식 목사를 초청하여 담임을 맡기고 자신은 미국 훌러신학교(1072년 8월-1974년)에서 유학을 하였다. 이때 태국 교회는 1972년 1월 15일에 총회 총무가 김순일 선교사의 안식년을 위해서 추천서를 쓰면서 “김순일 목사는 한국장로교와 Korean International Mission에서 1956년부터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지난 17년간 선교사로서 태국 교회(CCT)에서 다양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김목사는 교구 담당 목사로, 태국신학교(TTS). 북부지역 치앙라이 노회장으로, 또한 청년 사역자로 일했습니다.”라고 소개하였다. 김순일 선교사의 17년간의 사역은 교구 담당목사, 태국 신학교(TTS), 치앙라이 노회장, 총회의 청년부 디렉터로 일했음을 공문으로 말하고 있다.
당시 김순일 선교사와 기독교 총회와 관계는 매우 긴밀하고 우호적인 것을 알 수 있는 공문서가 있는데 김순일 선교사는 안식년을 가게 됨을 총무에게 서신을 1972년 5월 24일에 보내었는데 그에 대한 답장과 미국에 보내는 재정보증서류를 발급한 날짜가 놀라웁게도 1972년 5월 24일 당일에 작성되었음을 보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 같은 문서수발이 신속한 시대에도 있을 수 없는 신속함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태국의 느린 행정에는 상상할 수 없는 신속함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총회 총무가 작성한 보증서에는 “김순일 목사와 가족(자녀:은성, 조나단, 진애)은 한국교회에서 태국으로 1956년부터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지난 17년 간 그들은 태국 교회(CCT)의 회원으로 태국 교회에서 다양한 사역을 하였습니다. 한국 총회 선교부의 지도와 태국교단 인적자원부의 인증으로 그들은 미국에서 여러 교회가 주선하는 선교사 회의와 미국 내 한국 교회 방문을 위하여 미국으로 안식년을 갈 예정입니다. 그들은 8월 중순경에 방콕을 떠나 1년 후에 되돌아 올 것입니다, 미국 여행을 위하여 저희가 여행 경비와 다른 재정에 대하여 책임을 지겠습니다. 총회총무: 위치안 와타끼짜런목사” 매우 놀라운 일이다. 어느 선교지에서 현지교회가 미국 유학하는 선교사의 생활비를 보조하는 재정 보증서를 보낼 수 있겠는가 이를 보면 당시 태국교회와 김순일 선교사의 협력관계 내지는 깊은 신뢰 관계를 미루어 볼 수 있다. 김순일 선교사의 태국 사역은 현지교회와 현지 지도자들의 사랑을 흠뻑받고 동역하는 관계였음을 미루어 볼 수 있다.
김순일 선교사는 훌러신학교에서 학위과정에 있으면서 1973년 3월 헐리우드 지역에서 태국인 교회인 제1장로교회(First Thai Presbyterian Church in USA)를 개척하였다. 그는 미국 훌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 세계 선교대학원에 등록하였고, 1974년에는 선교학 박사(D.Miss)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학위를 받은 해인 1974년에 태국인 목사인 뿌라쭈압 데차완(Rev. Prachuap Dechawan)에게 LA에서 개척한 태국 제1장로교회를 맡기고 태국으로 돌아갔다. 현재 김순일 선교사가 미국에서 개척하였던 그 태국인 교회(First Thai Presbyterian Church in USA)는 명칭을 미국 타이 라오인 제1 장로교회라고 변경(First Thai-Lao Presbyterian Church in U.S.A.)하였고 캘리포니아 Covina에 예배당을 건축하여 현재까지 맥을 이어가고 있다. 김순일 선교사의 아내였던 김윤희 선교사는 2003년 1월 소천시까지 그 교회의 장로로 시무하며 태국 선교를 지속하였다.
김순일 선교사는 1974년 6월에 풀러에서 학위를 받고 개척한 태국인 교회를 이양하고 태국으로 돌아와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며 태국에서의 사역을 지속하려고 하였으나 멕길버리 신학교를 위시한 태국 신학교의 현실은 개혁주의보다는 에큐메니칼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져 있어서 그가 신학교에서 사역을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신학적 한계를 경험하여야 했다. 김순일 선교사는 고심 끝에 1975년 한국의 동서선교개발연구원 사역을 위해 태국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태국에서의 20년간(1956-1975)의 사역을 마감하였다.
1974년과 1976년 사이에는 그의 가르치는 사역을 세계무대로 확장하여 파키스탄, 인도, 싱가포르, 그리고 한국에서 태국에서와 같이 가르치는 사역을 하였다. 또한 미국의 휘튼 대학, 바이올라 신학교, 달라스 신학교 등에서 방문 교수로 가르치기도 하엿다.
1975년 그의 가족은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1974년과 1978년 사이에 서울에 있는 Institute of the East-West Center for Missions and Development에서 여름학기 과장으로서 선교훈련을 담당하였다. 1975년부터 그는 한국의 KIM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전념하였으며 수많은 신학과 선교와 관련된 소논문을 집필하기도 하였다. 1978년까지 동서세계선교연구원에서 원장으로 섬겼다. 1979년에는 동서세계선교 연구원을 사임하고 풀러신학교의 객원 교수와 아시아목회자 훈련원 디렉터로 초빙을 받아 섬겼으며 아시아계의 목회자들을 양성하는데 기여하였다.
김순일 선교사는 은퇴 후에는 알츠하이머 병에 결려서 LA의 요양 병원에 7년 이상 오랫동안 입원하였고, 2001년 11월 3일 소천하여 미국 LA 소재 로즈메모리얼 가든에 묻혔다. 김윤희 선교사는 건강하였으나 2002년 11월 태국 치앙마이를 다녀가신후 12월 중순 LA 충현 교회에서 선교 헌신 예배에서 설교 도중에 갑작스런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하여 계시다가 2003년 1월에 소천하여 로즈 메모리얼 가든에 묻혔다.
김윤희 선교사는 김순일 선교사가 개척한 LA Cavina에 있는 태국 제일 장로교회에서 장로로 봉직하면서 노년의 어려운 살림을 이어가면서도(김윤희 선교사는 LA에서 장례에 관한 일을 하였다) 마지막까지 태국 선교를 위해 생명의 빛 선교회를 만들어 태국과 라오스 지역 선교를 위해 헌신하였다. 매년 태국을 오가며 태국 선교를 위해 일해 왔고 특히 초창기에는 창녀들의 직업 전환을 위해 태국 기독교 총회와 협력하면서 재봉과 미용을 가르치는데 지속적인 후원을 하였다. 후에는 가난하여 진학하지 못하는 산족 자매들의 직업 교육을 위해 지속적으로 후원하였다. 2002년 11월에 치앙마이를 방문하였을때 태국의 어려운 형편의 산족 자매들의 사정을 알고 그들의 진학을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하였으나 끝내 그녀의 소망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음해인 2003년 4월에 치앙마이를 찾아온 충현 교회 장로님들에 의하면 12월에 LA 충현교회에서 선교 헌신 예배에서 태국 선교를 설파하시다가 뇌출혈을 일으켜 입원하셨고 다음해인 2003년 1월에 소천하셔서 남편이었던 김순일 선교사가 묻혀있는 로즈가든 메모리얼 파크에 나란히 안장되어 있다.
2009년 미국 시애틀에서 안식년을 보내며 은퇴하신 통합측 원로 목사님으로부터 김순일/김윤희 선교사에 대해 더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특별히 김윤희 선교사님의 가정에 대해 잘 알고 계셨고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목회자의 딸이며 대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셨던 유명하신 분이라고 하셨다.) 2015년 6월에는 2개월 동안 LA에 머물 기회가 있었는데 김순일 선교사님이 개척한 교회를 찾아가 예배드렸고 근처에 있는 두분의 묘역, 휘셔의 로즈메모리얼 가든을 찾아가보기도 하였다. 김순일 김윤희 선교사의 묘비는 아무 설명 없이 십자가와 함께 이름 석자와 출생연도와 사망 연도만을 기록하고 있었다.
참고서적 : 김순일, 한국 선교사의 가는길, 성광문화사, 1980.
Herbert R. Swanson, Khrischak Muang Nua. Chun Printing Press. 1984.
McFarland, Historical Sketch of Protestant Mission in Siam 1828-1928. White Lotus, 1999
사진 : 미국 태국 제1장로교회, 김순일 김윤희 선교사 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