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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태령4년명와당(太寧四年銘瓦當)]
1)연대:326년(미천왕27년)
2)크기:지름 12.5cm , 두께 2.5cm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4)개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서 발견된 흑회색 권운문(卷雲文) 와당의 가장자리에 돌아가면서 명문이 양각되어 있다. 지금까지 2점이 발견되었다.
<판독문>
太寧四年太歲□□閏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
<해석문>
태령(太寧) 4년1) 태세(太歲)□□ 윤월(閏月) 6일 기사(己巳)에 만들었다. 길(吉)하여 자손이 번성한다.
(서영대)
1)태령이란 연호는 역사상 3차례 확인된다. 동진 명제(323~325)·후조 석호(349년)·북제 무제(516년)가 그것이지만, 모두 4년까지 사용된 것은 없다. 그렇지만 이를 동진(東晋) 명제(明帝)의 태령 3년의 오기로 보아, 고구려 미천왕 26년(325)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실제 미천왕 26년에는 윤 8월이 있으며, 그 6일은 기사일(己巳日)이다.
[기축명와당(己丑銘瓦當)]
1)연대: 329년(미천왕30년) 추정
2)크기:직경 15cm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마선중학(麻線中學) 서쪽 50m 지점
4)개관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 마선중학(麻線中學) 서쪽 50m 지점에서 출토되었다.
‘태’자명 와당과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기축'은 미천왕 30년(329)으로 추정된다.
<판독문>
己丑」
<해석문>
기축(己丑)
[길녀자명와당(吉女子銘瓦當)]
1)연대:338년(고국원왕 8년) 추정
2)크기: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마선중학(麻線中學) 서쪽 50m 지점
<판독문>
吉女子」
[십곡민조명와당(十谷民造銘瓦當)]
1)연대:338년(고국원왕 8년) 추정
2)크기:반지름 7.5cm, 두께 2.3cm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이수원자(梨樹園子) 남쪽 유지
4)개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 이수원자(梨樹園子) 남쪽 유지에서 발견된 흑회색 권운문 와당에 양각된 명문으로 가운데 돌기에는 ‘길(吉)’자가 있고, 가장자리에 나머지 명문이 있다. 연대는 「태자명와당」과 함께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338년 경 전후로 추측된다
<판독문>
吉」
十谷民造」
<해석문>
길(吉)
십곡민(十谷民)2)이 만들었다.
2)고구려에서는 민중을 성과 곡(谷)을 단위로 편재했던 바, 이 경우의 10곡도 민중의 편재 단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십곡이 지명인지, 10개의 곡을 의미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라지고 있다. 그런가 하면 와당의 발견지가 고분이란 점에 착안하여 고구려 이를 수묘제(守墓制)의 입역(立役) 방식과 관련시키는 견해도 있다. 즉 고구려에서는 곡민을 왕릉의 수묘호로 사역했는데, 그들의 구체적인 임무 중의 하나가 무덤에 사용할 기와를 만드는 것이었다는 주장이다.(門前誠一)
[태자명와당(泰字銘瓦當)]
1)연대:338년(고국원왕 8년) 추정
2)크기:지름 14.5cm, 두께 2~2.2cm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4)개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에서 발견된 흑회색 권운문(卷雲文) 와당에 양각된 명문으로, 가운데 돌기 부분에는 ‘태(泰)'자가, 가장자리에는 8글자가 돌아가면서 양각되어 있다. 이수원자(梨樹園子) 남쪽 유지와 우산묘구 M992호묘에서 각각 1점씩 발견되었다.
<판독문>
泰」
歲□戌年造瓦所記」
<해석문>
1) 태(泰)
2) □3)술년(戌年)에 만들었다. 계소(啓所)4)에서 기록한다.
(서영대)
3)□을 ‘戊’로 판독하여, 고국원왕 8년(338)로 보는 견해가 있다.
[월조기명와당(月造記銘瓦當)]
1)연대:338년(고국원왕 8년) 추정
2)크기:경(徑) 13.5cm, 후(厚) 2.5cm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4)개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성 대중목욕탕을 만들 때 출토되었다. 「태자명와당」과 공통점이 많으므로, 제작 시기도 4세기 전반인 것 같다.
<판독문>
…月造記」
<해석문>
…월(月)에 만들고 기록한다.
(서영대)
[조행명와당(照行銘瓦當)]
1)연대:338년(고국원왕 8년) 추정
2)크기: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승리(勝利) 2대(隊) 부근
4)개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 승리(勝利) 2대(隊) 부근에서 출토된 흑회색 권운문 와당의 명문이다. 연대는 고국원왕 8년(338)로 추정되고 있다.
<판독문>
照行」
[안악3호분묵서명(安岳三號墳墨書銘)]
1)연대:357년(고국원왕27년)
2)크기:
3)출토지: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구 황해도 안악군 용군면 유설리) 안악3호분
4)개관:안악3호분은 북한의 황해남도 안악군 오국리(일제시기의 황해도 안악군 용순면 유설리)에 있다. 무덤은 357년(고국원왕 27)에 쌓았는데, 고구려의 전형적인 돌방흙무덤[석실봉토분]으로 널길과 앞방, 곁방, 널방을 가진 구조이다. 천장과 각 돌방의 벽면에 인물과 풍속을 주제로 하는 다양한 벽화를 그렸는데, 특히 앞방의 오른쪽 곁방 벽면의 무덤 주인공 부부의 초상화와 주인공의 행차장면을 그린 회랑의 대행렬도가 유명하다. 이밖에도 방앗간, 우물, 부엌, 고깃간, 차고, 외양간, 마굿간 등을 그려 4세기 중반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묵서[먹으로 쓴 글]는 앞방 서벽 좌측 장하독(帳下督) 위에 있는데, 7행 68자이다. 그 내용은 동수(冬壽)라는 인물의 사망일자, 작위, 관직, 고향과 나이 등을 기술한 것이다. 묵서 이외에 벽화의 군데군데에 붉은 글씨로 벽화에 그려진 인물의 이름이나 관직[주인공의 속관으로 추정] 등을 적은 것들이 발견된다. 안악3호분의 주인공과 관련하여 현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크게 엇갈리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묘지문의 내용을 주목하여 그 주인공을 동수로 보고 있다. 반면에 안악3호분의 주인공을 왕으로 파악하는 견해가 있는데, 주로 북한의 학자들이 이를 지지하였다. 그 근거로 벽화의 대행렬도에 왕의 깃발을 상징하는 ‘성상번(聖上幡)’이라는 표현이 보이고, 초상화의 주인공이 고구려왕만 착용할 수 있는 ‘백라관(白羅冠:흰색 비단으로 만든 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이때 동수(冬壽)는 왕과 함께 묻힌 신하로 이해한다. 다만 왕이 구체적으로 누구냐에 대하여 고국원왕설과 미천왕설로 엇갈리고 있다. 안악3호분은 무덤을 쌓은 연대를 알 수 있어 고분벽화 연구의 가장 중요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리고 벽화의 내용은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을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시각자료로서 적극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판독문>
永和十三年十月戊子朔廿六日」
癸丑使持節都督諸軍事」
平東將軍護撫夷校尉樂浪」
相昌黎玄菟帶方太守都」
鄕侯幽州遼東平郭」
都鄕敬上里冬壽字」
□安年六十九薨官」
서측실(西側室) 서벽 : 記室 小史 省事 門下[拜]
전실(前室) 서벽우측 : 帳下督
전실 서벽좌측 : 帳下督
전실 남벽동쪽 : 戰吏
전실 남벽서쪽 : □吏(蔡秉瑞)
동측실(東側室) 서벽북쪽 : 碓
동측실 북벽 : 井 阿光
동측실 동벽 : 阿婢 [京屋] [犢車]
회랑(回廊) : [聖]上幡
<해석문>
영화(永和) 13년5) 초하룻날이 무자(戊子)일인 10월 26일 계축(癸丑)6)에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7)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8)이며 낙랑상(樂浪相)이며 창려(昌黎)·현토(玄菟)·대방(帶方)태수(太守)9)요 도향후(都鄕侯)10)인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평곽현(平郭縣) 도향(都鄕) 경상리(敬上里)11) 출신 동수(冬壽)12)는 자는 □안(□安)인데 나이 69세에 관(官)으로 있다가 사망하였다.
(서영대)
5) 영화(永和)는 동진(東晉) 목제(穆帝)의 연호이며, 그 13년은 357년(고국원왕 27년)에 해당된다. 그러나 영화는 345년부터 356년까지 12년간 사용되다가, 357년 정월부터 승평(升平)으로 개원(改元)하였다. 그러므로 영화 13년은 승평 원년이라 해야한다. 동진에서 개원한 지 10개월이 넘도록 그 사실을 몰랐다고 하는 것은 동수(冬壽)의 세력과 동진과의 교섭이 빈번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6) 동수의 사망일자.
7) 사지절(使持節)에서부터 도향후(都鄕侯)까지는 동수가 역임한 관직(官職)과 관작(官爵)을 열거한 것인데, 이 중 사지절(使持節)에서 대방태수(帶方太守)까지는 관직이며, 도향후(都鄕侯)는 관작이다.
‘使持節 都督諸軍事’ : 중국 6조시대(六朝時代)의 관직.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란 한 지역의 군대를 통솔하는 자이며, 사지절(使持節)은 지휘관의 권한을 규정한 것인데, 군사(軍事) 이외의 일로도 질(秩) 2천 석 이하의 관리를 처형할 수 있었다.
동수의 관직과 관작은 당시 중국의 제도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예컨대 군의 태수가 장군호(將軍號)와 통군가절(統軍加節)의 호(號)를 가진 점, 한 사람이 몇 개군의 태수를 겸직한 점 등이 그것이다(嚴耕望). 그렇지만 당시 중국제도 그대로라고 보기 어려운 점도 한둘이 아니다.
육조시대의 도독제군사는 도독영주제군사(都督營州諸軍事)라는 식으로 군사적 권한을 행사하는 지역을 명시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동수의 경우는 통감(統監) 대상지역에 대한 명문이 없다. 이것은 당시의 관례에서 벗어난 것이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이것이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관직이 아니라 동수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칭한 관직이기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孔錫龜)
8) '平東將軍’ : 장군호(將軍號)의 하나로, 위진대(魏晉代)에는 3품이었다.
‘護撫夷校尉’ : 다른 자료에서는 보이지 않는 관직이다. 그런데 『진서』직관지에는 ‘호강·이·만등교위(護羌·夷·蠻等校尉)’라는 것이 보인다. 이들은 주변 이민족의 감호(監護)를 위해 설치한 관직이라고 생각되는데, 호무위교위(護撫夷校尉)도 호동이교위(護東夷校尉)와 같은 계통의 관직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동수의 관직과 관작은 당시 중국의 제도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예컨대 군의 태수가 장군호(將軍號)와 통군가절(統軍加節)의 호(號)를 가진 점, 한 사람이 몇 개군의 태수를 겸직한 점 등이 그것이다(嚴耕望). 그렇지만 당시 중국제도 그대로라고 보기 어려운 점도 한둘이 아니다.
평동장군(平東將軍)이 지방관을 겸하는 예는 동진대에 흔히 보이지만, 통군가절지제(統軍加節之制)에서 평동장군을 비롯한 사평장군(四平將軍)이 사지절도독제군사(使持節 都督諸軍事)를 겸한 것은 예외적이다. 다시 말해서 사평장군(四平將軍)은 사지절도독(使持節都督)보다 아래인 지절도독(持節都督) 또는 가절도독(假節都督)이 일반적이다.
호무위교위(護撫夷校尉)란 관직이 문헌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무이(撫夷)라는 명칭은 황해도 봉산군(鳳山郡) 문정면(文井面)에서 발견된 명문전(銘文塼 : ‘使君帶方太守張撫夷’)에도 보이나, 이 경우의 무이(撫夷)가 인명인지 무이교위(撫夷校尉)라는 직명인지 확실하지 않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이것이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관직이 아니라 동수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칭한 관직이기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孔錫龜)
9)‘樂浪相’ : 상(相)이란 왕국의 행정책임자. 전한(前漢)에서는 몇 개의 군(郡)이 하나의 왕국을 이루고 있었으나, 지속적인 왕국억제책으로 말미암아 경제(景帝) 이후 하나의 왕국이 군(郡) 하나 규모로 축소된다. 그러므로 왕국의 상(相)은 군의 태수(太守)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昌黎·玄菟·帶方太守’ : 창려군(昌黎郡)·현토군(玄菟郡)·대방군(帶方郡)의 태수(太守).
이상과 같은 동수의 관직과 관작은 당시 중국의 제도와 상통하는 점이 많다. 예컨대 군의 태수가 장군호(將軍號)와 통군가절(統軍加節)의 호(號)를 가진 점, 한 사람이 몇 개군의 태수를 겸직한 점 등이 그것이다(嚴耕望). 그렇지만 당시 중국제도 그대로라고 보기 어려운 점도 한둘이 아니다.
낙랑이 왕국이었던 적이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289년(진 무제 태강10년)에 제왕국(諸王國)의 상(相)을 내사(內史)로 개칭했다고 하는 바, 낙랑이 왕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행정책임자는 상이 아니라 內史로 보아야 한다.
창려군은 현 개평(蓋平) 일대로서 당시 전연의 소유였다. 또 원래의 낙랑군,대방군도 당시에는 소멸되고 교군(僑郡)만이 전연의 영역에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므로 동수가 고구려로 투항하기 이전이라면 몰라도, 투항 이후에는 낙랑상(樂浪相)·창려(昌黎)·대방태수(帶方太守)를 칭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앞으로 많은 검토가 필요하겠으나, 이것이 중국 왕조로부터 받은 관직이 아니라 동수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자칭한 관직이기 때문이란 해석이 있다.(孔錫龜)
10) ‘都鄕侯’ : 열후(列侯)의 하나. 전한대(前漢代)에는 열후(列侯)를 모두 현후(縣侯)라 하였으나, 후한대(後漢代)부터는 현후(縣侯)·향후(鄕侯)·정후(亭侯) 등으로 열후에 등급을 두었다. 이 중 도향후는 현후와 향후 사이에 해당한다(嚴耕望).
11) 동수의 출신지. 평곽현(平郭縣)은 오늘날의 요령성 개평(蓋平)이며, 도향(都鄕)은 군이나 현의 치소가 있는 향(鄕)이다. 이로서 동수는 중국 출신의 인물임을 짐작할 수 있으나,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① 당시 요동은 후한말부터 유주(幽州) 소속이 아니라 평주(平州) 소속이라는 점, ② 동수가 활약하던 서진(西晉)과 전연(前燕)시대의 요동(遼東)은 일반 군(郡)이 아니라 왕국(王國)이었다는 점(『진서』지리지 및 『십육국강역지(十六國疆域志)』)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실제와 달리 이렇게 출신지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문제가 될 수 있다.
12) 289~357년. 『진서』109 모용황재기(慕容皝載記) 및 『자치통감(資治通鑑)』95 진기(晉紀)17 성제(成帝) 함강(咸康) 2년조에 보이는 동수(佟壽)와 동일 인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① 동수(冬壽)도 중국 출신이며, ② 동수(冬壽)와 동수(佟壽)의 활동시기가 같고, ③ 동수(佟壽)를 『광운(廣韻)』이나 『성해(姓解)』에서도 동수(冬壽)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동수(佟壽)(판본에 따라서는 佟燾)는 전연(前燕) 모용황(慕用皝)의 사마(司馬)로서, 모용황의 왕위 계승에 불만을 품고 평곽(平郭)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킨 모용인(慕用仁)의 휘하에 들어간다. 그 후 336년 모용황의 기습공격으로 모용인의 세력이 괴멸할 때, 곽충(郭充)과 더불어 고구려로 망명한다. 고구려로 망명한 이후의 행적은 문헌에 보이지 않으나, 안악 3호분의 묵서에 열거된 관작과 관직명으로 미루어 고구려에서도 상당한 지위를 누렸던 듯하다.
[정사명와당(丁巳銘瓦當)]
1)연대:357년(고국원왕 27년) 추정
2)크기:지름 16.5cm, 두께 2~2.5cm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구 집안현) 우산묘구 M3319호분
4)개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현(集安縣)에서 우산묘구 M3319호분에서 발견된 2점의 흑회색 권운문(卷雲文) 와당의 가장자리에 양각된 명문이다. 명문의 의미는 미상이나, 정사년은 고국원왕 27년(357)으로 추측되고 있다
<판독문>
1) 丁巳□□□□歲□□□□□□萬世太歲在丁巳五月廿四…」
2) …萬歲□□□□□□□時二時興志□□□…造」
[서봉총출토은합우(瑞鳳塚出土銀合杅)]
1)연대:391년(광개토왕1년) / 451년(장수왕39년)
2)크기:(뚜껑) 높이 8.3cm, 입지름 18.0cm (합) 높이 7.3cm, 입지름 17.9cm
3)출토지:경상북도 경주시 노서동 서봉총
4)개관:경북 경주시 노서동 소재 서봉총에서 출토된 은제 뚜껑이 있는 둥근 그릇[合杅]의 뚜껑 내부와 그릇 밑바닥에 각각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서봉총은 일본인들이 1926년 발굴하였는데, 발굴보고서가 출간되지 않아 무덤의 규모 등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없다. 금관과 금제 장신구, 유리잔 청동제 솥, 옻칠한 숟가락 등등 당시의 일류물품들이 출토되었다. 피장자는 최고 신분층에 속하였던 이로 여겨진다
<판독문>
(蓋 內)
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
太王敎造合杅用三斤六兩」
(外 底)
延壽元年太歲在辛」
三月□太王敎造合杅」
三斤」
<해석문>
(蓋 內)
연수원년13)태세재묘삼월중(延壽元年太歲在卯三月中)
태왕경조합우용삼근육량(太王敎造合杅用三斤六兩)
(外 底)
연수원년태세재신(延壽元年太歲在辛)
삼월□태왕교조합우(三月□太王敎造合杅)
삼근(三斤)
(노태돈)
13)‘延壽’는 사서(史書)에서 확인되지 않는 연호(年號)로서, 왕의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연수(延壽) 원년(元年) 신묘년(辛卯年)을 391년으로 볼 경우 신라의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 36년, 고구려 광개토왕 원년이 되며, 451년으로 볼 때 눌지왕(訥知王) 35년과 장수왕(長壽王) 39년이 되고, 511년으로 볼 경우 지증왕(智證王) 12년과 문자왕(文咨王) 20년이 된다. 신라에서 처음으로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법흥왕(法興王) 23년(534년)으로 ‘건원(建元)’이 그것이다. 그 이전에 신라에서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534년 이후의 신묘년(辛卯年)은 진흥왕(眞興王) 32년(571년)인데, 그때 신라의 연호는 태창(太昌)이다. 그러므로 연수(延壽)는 신라의 연호라고 보기 어려우며, 고구려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은합의 제작지는 당시 신라에서는 고구려의 연호를 사용하였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신라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을 일단 상정해볼 수도 있으나, 신라 금석문에 보이는 태왕(太王)의 예 등을 고려할 때, 고구려에서 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구체적인 제작년도에 대해선, 511년의 경우는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고려할 때 가능성이 적은 것으로 여겨지고, 391년설과 451년설이 제기되어오고 있다. 이는 경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편년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이작명와당(顊作銘瓦當)]
1)연대:4세기 경
2)크기:반경(半徑) 7cm, 후(厚) 2.7cm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승리촌(勝利村) 소방대 부근
4)개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 승리촌(勝利村) 소방대 부근에서 출토되었다
<판독문>
顊作」
[천추총출토전명(千秋塚出土塼銘)]
1)연대:4,5세기 경
2)크기:남은 길이 27.7cm, 폭 10.7cm, 두께 3.0cm
3)출토지: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 구 집안현)성 마선묘구(麻線墓區) 천추총.
4)개관:천추총(千秋塚)은 집안현성 서남쪽 3.5km, 마선구하(麻線溝河) 동쪽 기슭 200m 쯤 되는 곳에 있다. 계단식 적석총으로 각 변은 80~85m이며, 무너진 상태로 남아있는 높이가 15m이다. 집안지역의 고분 중 최대 규모이다. 무덤을 덮고 있는 돌무지 중에는 회색의 기와편이 널려 있고, 측면에 문자를 양각(陽刻)한 전(塼)이 출토되었다. 명문은 두 종류이다. 무덤의 명칭도 이 명문에서 비롯되었다. 서체는 태왕릉전과 거의 같은 고예(古隸)이다.
<판독문>
(其一)
千秋萬歲永固」
(其二)
保固乾坤相畢」
<해석문>
가 (무덤이) 천추(千秋) 만세(萬歲)토록 영구히 튼튼하소서.
나 (무덤이) 하늘과 땅처럼 튼튼히 보존되소서.
(노태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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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오호...와당 자료는 내가 못 본 것도 일부 있는데...이 역시 감사~^^
오... 미천왕 시기에도 연호가 사용되었다면, 이전에도 이미 사용 중이었다는 뜻일까요..? 소금 장수하던 떠돌이 왕자가 왕이될 정도로 혼란 스러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