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이 날리는 길을 걸으며
여기는 세상이 하얗다. 온통 하얗게 부셔지는 길을 걷는다. 발걸음이 가벼울 수밖에 없다. 날아갈 기분이 이런 것일까. 잠깐 두 세 시간을 내서 걷는 사람은 그렇다. 자신의 삶을 잠시 내려두고 다른 세상으로 건너온 여행객이 가볍게 마주한 그 자리 그 시간에도 세상은 빠르게 돌아간다.
그렇다. 배꽃은 4월 16일에 핀다. 누군가는 목숨을 잃기도 하고 누군가는 먹고사는 일에 지치기도 한다. 조금은 조심스럽다. 배를 만들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에게도 그렇지만 배꽃이 피는 그 순간 아이들은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간 아이러니는 뭐란 말인가.
한 걸음 한 걸음 마다 생명의 오고감에 대한 깊은 성찰이 이 길을 열어주는 것이라 믿고 싶다. 꽃이 다시 피는 것이 각성을 위함일 수도 있겠다. 조용히 걷자. 열매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으로 세월의 아픔을 다독이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걷자.
평택의 배밭은 이곳 비전동 일대에서 시작한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다. 배밭이 이렇게 상업적으로 조성된 것이 일제치하였다. 1905년5월 경부선 철도가 들어선 이후 일인들은 동척을 등에 업고 비전동 일대를 배밭으로 조성했다. 일인에 의한 최초의 배밭은 옛날 등기소 자리라고 한다. 산직촌, 이곡마을, 배다리 저수지, 재빽이 등으로 퍼져나갔다. 일인들이 이곳에 배밭을 조성한 것은 이곳이 배나무가 자라기 알맞은 토양이기 때문이다. 배골(梨谷), 배다리 같은 지명이 그것을 받침 해준다. 토종배가 자라는 곳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배다리도 배나무다리일 거로 추정할 수 있다. 혹자는 일인들이 배밭을 만들고서 마을 이름이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근거가 부족하다.
이곳에 지금 심겨진 배나무는 수령이 40~45년 정도이다. 간혹 100년 가까운 배나무도 있을 것이다. 일인들이 심었던 배나무가 일본배인 조생종으로 조지로(長十郞), 만생종으론 이마무라(今村秋), 상그지(晩三吉), 와시아까(早生赤) 등이 식재되었다가 70년 이후 지금의 품종인 신고(니다카)로 품종갱신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지역 배 품종의 80%는 신고 품종이다. 우리가 주로 먹는 배 품종이고 선호하는 품종이다. 새로운 품종이 개발 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신고를 넘어서는 품종은 자릴 잡지 못했다. 농사도 식민잔재가 만만치 않다.
지금 시기는 농민들의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 다는 시기이다. 이는 신고품종이 꽃가루를 자체적으로 만들어 내지 못하기 때문에 인공적으로 꽃가루를 묻혀주는 일을 해야 한다. 이를 인공수분 이라고 하는데 이름도 야릇한 ‘러브텃치’라고 하는 기계로 하기도 하지만 일손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과수원 마다 비상인 철이다. 신고 배맛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꽃가루 없고, 꿀이 없고, 그래서 벌이 없고, 향이 없다. 이는 최고의 배맛을 위해 포기한 것들이다.
과수원길은 시청마당에서 원균사당 주차장 까지의 길이다. 배밭구간이 4km에 이른다. 배다리공원을 지나면 바로 배밭으로 들어선다. 바람에 날리는 배꽃의 향이 없기로 서니 뭐가 아쉬울까. 그것이 아니라도 포기해야만 살아남는 것은 또 부지기수 아니던가. 햇볕 따사로운 곳에서 흥얼거리며 평택의 색다른 모습을 보며 삶과 세상을 돌아보는 것만도 삶의 기쁨이 될 것이다. 마침 평택과수조합에서 배와 배즙을 시식할 수 있게 했다고 하니 포기해버린 배꽃 향 보단 배향 그리고 배즙의 건강까지를 느껴볼 기회가 되리라.
배는 소화를 돕고 기침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다. 연구에 의하면 배에 항암성분도 많이 있다고 한다. 요즘은 정치인들의 시원한 발언을 ‘킨사이다’ 발언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옛날엔 시원하고 싹삭한 사람을 배같이 시원하다고 했다. “배먹고 이 닦는다”.는 배에 소화를 돕는 석세포가 이를 닦는데도 효과가 있다는데서 나온 속담이고 “까마귀날자 배떨어진다.”는 의심받을 일 하지 말라는 말이다.
이조년은 유명한 “이화에 월백하고~다정도 병인양하여”하고 애석해 했으며 이옥은 여자에 비교 했는데 “복숭아꽃은 오히려 천해보이고 배꽃은 서리처럼 너무 차갑구나”하고 노래했다.
첫댓글 평택을 알려고 섶길을 걷고 있는 나그네에게 청량수와 같은 글에 감사 드립니다..
18일 화요일 08코스 황구지길을 찾아 가려고 합니다만 대중교통이 난해해서요.
역방향으로 걸으셔도 괜찬으시면 진위역에서 출발하시는 건 어떠실지요?
@광우 생각해보니 순뱡향으로 걸으셔도 마찬가지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