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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종격투기 원문보기 글쓴이: Royal Nav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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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3대 대첩 중 하나인한산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출처: 전쟁기념관>
임진왜란! ‘조-일 전쟁’, ‘임진전쟁’, 또는 ‘7년 전쟁’이라고 간혹 부르기도 하지만, 한국인들은 대부분 전근대적인 어법을 써서 이 전쟁을 ‘왜놈들이 일으킨 난리’라고 부른다. 그 치열함과 참혹함에서 한국전쟁에 필적하고, 일본에게 말도 못할 피해를 입었다는 점에서 일제강점과 짝을 이루는 역사적 대사건이기에, 감정을 빼고 객관적인 ‘전쟁’의 하나로 이를 취급해 부르기가 왠지 싫기 때문이다.
한편 일본 쪽에서는 임진년의 침공을 ‘분로쿠의 역(文祿の役)’으로, 정유재란까지 합쳐서는 ‘분로쿠-케이조의 역(文祿慶長の役)’이라고 부른다. 임진년과 정유년에 해당하는 일본의 연호를 써서, 이를 자신들이 성취한 ‘큰 사업(役)’의 하나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 전쟁의 잘잘못과 진영을 떠나 개인이 겪어야 했던 엄청난 희생을 논외로, 국가적으로 임진왜란은 조선, 그리고 명나라에게는 국세가 기우는 위기를, 일본에게는 새롭게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선조의 필적.
1567년, 이 해에 조선에서는 새롭게 선조가 즉위했다. 그의 즉위는 오랜 훈척정치의 폐단을 마감하고, 사대부의, 사대부에 의한 정치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시대를 열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파행적인 독단에 질려 재야에 묻혀 있던 이황이 조정에 복귀하고, 기대승, 이이 같은 뛰어난 학자들이 앞 다투어 나타남으로써 바야흐로 조선은 문치주의(文治主義)의 봄을 맞는 듯했다.
바로 그 해,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며 ‘천하포무(天下布武)’를 내세웠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오랜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일본을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뜻이었다. 그는 이듬해에 교토에 입성해 ‘노부나가 정권’을 수립하고, 가이(현재 야마나시 현)의 풍운아 다케다 신겐, 에치고(현재 니가타 현)의 용 우에스기 겐신, 혼간지(本願寺) 불교 세력 등과 치열한 항쟁을 거듭한 끝에 1580년 즈음에는 일본 통일을 거의 성취한다. 그러나 1582년에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자결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이로써 아케치를 토벌한 오다의 또 다른 가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포무의 꿈을 계승하는 새로운 실권자로 떠오르게 된다.
전국시대의 전쟁도. 1561년에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격돌하고 있다.
본명이 기노시타 토키치로라고 하며, 오와리의 보잘 것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급사(고모노)로 출발했다. 하지만차차 공을 세워 29세에는 성주의 지위에 올랐으며, 이때부터는 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아케치를 토벌하고, 오다의 가신들 중 자신에게 적대하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물리치고, 오다의 동맹자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굴복시킨 다음 1585년에는 간바쿠(關白), 1586년에는 태정대신(太政大臣)의 직함을 얻으며 일본 일인자의 자리를 굳혀갔다. 이때부터는 일왕에게 하사받은 도요토미라는 성을 써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었으며, 1587년에는 마침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사를 굴복시킨 다음 '병농분리령'을 내려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1590년에는 간토의 호조 우지마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반대자들을 무릎 꿇리고 일본을 통일, 120년 동안의 ‘전국시대’를 마감하고 ‘모모야마 시대’를 열게 된다.
조선에서는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이 정여립 사건을 기화로 동인을 무섭게 박해하는 기축옥사가 일어나고(1589), 명나라에서는 명신 장거정이 죽은 뒤 만력제가 업무에서 손을 떼고 나라가 멋대로 돌아가도록 방치하는 ‘태정(怠政)’이 시작되며(1586),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건주여진을 통일하던(1588) 무렵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인에게는 천추의 영웅. 한국인에게는 만세의 흉적이다.
이리하여 겨우 피와 불과 연기가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의 혼란이 멎고 안정되나 했는데, 히데요시는 곧바로 “조선을 거쳐 명나라를 정복하고 동양에 군림한다”는, 포부라기보다는 망상에 가까운 계획을 세우고 밀어붙였다. 왜 그랬을까?
일본에서 조선과 중국을 정복한다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사실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였다. 그러나 그것은숙종 때의 ‘북벌’이나 이승만 시절의 ‘북진통일’처럼 실현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 않은 말잔치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일본 통일 대업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면서 대외침략 계획도 실제적으로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직 오다를 섬기던 1577년에 처음 조선과 명나라로 출병하겠다고 밝혔고, 집권 후에는 1586년, 일본에 와 있던 예수회 신부에게 명나라를 손에 넣을 것이라고 밝힌다. 이 무렵 대마도주와 그의 측근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구상이 언급된다. 그리고 1591년에 어렵게 얻은 아들인 쓰루마쓰가 병사하자, 간바쿠 직위를 양자인 히데츠구에게 넘겨주고는 전국의 다이묘(大名)들에게 조선 출병을 지시함으로써 이 구상을 현실화한다.
히데요시의 공명심 내지 야욕이 임진왜란 발발의 원인이라는 설은 전부터 가장 많이 제기되었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며 히데요시를 옆에서 지켜보았던 선교사 그레고리 드 세스페데스, 루이스 프로이스 등은 “그는 자식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조카 히데츠구에게 천하를 물려주고, 강대한 군대를 이끌고 중국으로 건너가 그 땅을 정복하는 과업에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런 위대한 업적을 세운 최초의 일본 지도자로 자신의 이름을 불멸케 하려는 뜻이었다”고 보았다. 히데요시 본인이 “일찍이 일본을 제패한 사람은 여럿이지만 대륙까지 손에 넣은 사람은 없다”며 자신은 아무도 이루지 못한 명성을 얻고야 말겠다고 부하들에게 여러 차례 언급했고, 조선 출병에 앞서 다이묘들에게 “나는 이 더 없는 명예를 얻기 위해 이미 손에 넣은 명예와 쾌락을 모두 포기했다. 너희가 이 계획에 동참한다면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나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남는 이름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한양을 점령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그에게 편지를 보내 “그대를 명나라의 간바쿠로 삼는다. 이제 명을 정복하면 지금의 천황을 북경으로 옮길 것이다. 일본 천황 자리는 지금의 황태자나 도시히토 친왕에게 주고, 조선 왕으로는 기후의 재상인 하시바 히데카츠를 앉히리라”고 호언하고 있는 것을 보면 히데요시가 정말로 조선뿐 아니라 명나라까지, 나아가 동아시아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출병에 앞서 조선, 류큐, 필리핀에 두루 사신을 보내 자신에게 복종하고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 임진왜란 당시 침략의 선봉에 선 다이묘들은 정권에 불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같은 서부의 다이묘들이었다.
하지만 단순히 히데요시 개인의 야망이 아닌, 보다 넓고 복잡한 차원에서 전쟁 원인을 찾으려는 시각도 있다. 가령 ‘경제원인론’에 따르면 히데요시 정권은 기나이(畿內) 지역의 상인들의 후원에 기대고 있었으며, 그들은 명나라에서 시행 중이던 무역 금지(海禁) 조치를 깨고 포르투갈 상인들 대신 동아시아 무역에서 우위를 차기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출병을 결행했다고 하며, 그것은 일본이 전쟁 도중 명나라와 교섭하며 무역의 재개를 요청한 사실에서 뒷받침된다고 한다.
또 ‘정치원인론’에서는 오랜 전국시대를 끝내긴 했어도 여전히 독립지향적인 다이묘들을 확실히 통제하고, 그 힘을 어느 정도 약화시켜야 했던 정권의 입장에 주목한다.옛날 원나라의 일본 침공은 최근 지배권에 편입된 남송과 고려의 군사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는 분석이 있는데, 그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 침략의 선봉에 선 다이묘들은 정권에 불복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고니시 유키나가(독실한 천주교도), 시마즈 요시히사(통일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었다. 조선에는 그 후계자인 시마즈 히사야스가 출정했다가 사망했다) 등의 서부 다이묘들이었으며, 히데요시는 전쟁 수행에 소극적이었던 다이묘들의 영지를 빼앗아 가신들에게 주기도 했다.
결국 히데요시 개인의 의욕에 정치적, 경제적 상황이 합쳐져 임진왜란이 결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히데요시가 가지고 있던 특별한 입장도 고려될 수 있다. 앞선 미나모토, 아시카가 가문과 이후의 도쿠가와 가문은 모두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將軍)’, 즉 일왕을 대신해 국토를 수호하는 총사령관의 명목으로 막부를 열고 다이묘들을 군령으로 다스렸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미천한 신분이었기에 쇼군이 될 수 없었으며, 궁정의 직책인 간바쿠, 태정대신 등의 직함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실권 차원에서는 대장이나 대신이나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오랜 법도와 관행상 쇼군이 아닌 이상 다이묘들에게 직접적인 명령을 내리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여러 다이묘들이 히데요시의 위세에 밀려 조선으로 건너가 싸우기는 했지만 일일이 작전 지시는 받지 않았으며, 심지어 평양성 전투 후의 총퇴각도 본국의 훈령을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 판단으로 실행했음을 보면 히데요시의 권력 기반은 완벽하지 않았다. 그 자신은 몰라도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언제 모반이 일어날지 모르는 형편에서, 히데요시는 조선-명 정벌 같은 거창한 사업을 벌여 가장 불온한 자들을 제거하는 한편 해외 영지를 나눠줌으로써 가신 집단을 늘리고, 도요토미 가문에 역대 막부를 능가하는 권위를 덧붙이려고 했을 수 있다. 그럼 점에서 만약 오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살아남아 막부를 세웠더라면 과연 조선 출병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일본이 힘을 기르고 전쟁을 준비하는 사이에 조선과 명나라는 정치 혼란과 체제 모순 심화가 진행되면서 제대로 대처할 여유를 찾지 못했다. 특히 조선은 오랜 훈척정치(공신과 친척이 국정 전반을 도맡아 하는 것)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성리학적 이념은 아랑곳없이 여성(문정왕후), 승려(보우), 외척(윤원형) 등이 날뛰는 세상이 된 것을 깊이 반성하면서, 이름난 선비들이 정승에서 언관까지 조정을 장악함으로써 원칙과 상식에 맞는 정치를 펴고자 하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내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지식인 특유의 소심함 때문에 그리 중대하지 않은 문제도 심각한 갈등으로 불거질 수 있었고, 여기에 많지 않은 주요 관직을 둘러싼 경쟁이 맞물리면서, ‘당쟁’이 발생하고 나날이 격렬해졌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퍼진 ‘당쟁망국론’에서처럼 이 당쟁 때문에 조선이 왜란에 아무런 대비도 못한 것은 아니지만, 국론을 통일하고 효과적으로 정책을 도출하는 데는 확실히 장애가 되었다. 그것은 이이를 비롯한 국방-민생 개혁론자들이 진정성을 의심받은 상대 당파의 공격으로 제때 개혁을 추진하지 못한 사실과,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는 일조차 의견의 불일치 때문에 효과적인 대응책 마련이 어려워진 사실 등에서 찾을 수 있다(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이 서로 정반대의 말을 남겼음은 유명한데,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 의도를 알았으나 혼란을 우려해 침략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혼란이 있어도 무방비 상태로 병란을 맞는 것만큼 할까?).
한편 이처럼 필요한 개혁이 지연되고 정치리더십이 실종된 가운데 국방체제의 부실함이 심해졌다. 그것은 사실 선조대에 시작되었다기보다 조선 건국 후 2백 년이 지나면서 체제가 변형되고 해이해진 누적된 결과이기도 했다. 조선 초의 병제는 천민을 제외한 모든 양민이 병역을 지는 병농일치적 개병제였으나 차차 양반들이 병역에서 빠져나갔으며, 농민의 경우도 점차 군포를 내고 역을 면제받는 방군수포제를 따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장부상으로는 병사가 있지만 죽거나 도망한 상황에서 새로 군적을 정리하지 않음으로써 실제 근무병은 없는 폐단이 점점 늘어났다. 그래서 왜란 직전 조선군은 17만 명 정도로, 20만이 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건국 초기에 비하면 축소되어 있었으며 그나마 허수(虛數)가 많았다. 한편 왜란 동안에 일본은 20만 명 정도를 조선에 파병했는데 따라서 수적으로는 그렇게 압도적이 아니었으나, 전문성이 떨어졌던 조선의 병력은 패배하면 흩어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실제로는 늘 병력 부족 상태에서 전쟁을 해야 했다.
이렇게 되니 전통적인 진관 체제가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진관 체제는 거점 방어에 주력하여 적이 침략하면 해당 진에서 최선을 다해 막고, 역부족으로 그 진이 뚫리면 다음 진이 막는 사이에 중앙군이 도착해 적을 섬멸한다는 개념이었다. 그런데 각 진마다 병력이 부족하다 보니 버티지 못하고 연속으로 격파되었으며, 1555년의 을묘왜변에서는 전라도가 깊숙이까지 유린되고 전라 병사 원적이 전사하는 사태가 빚어졌다.
진관 체제. | 제승방략 체제. |
이를 계기로 진관 체제를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거점 방어 대신 지역 방어 개념을 써서, 적이 침입하면 그 지역의 병력을 한데 집결시킨 다음 중앙에서 파견된 장수의 지휘로 적과 일대 결전을 벌여 격퇴한다는 것이었다. 소수의 병력으로 각개격파되기보다 초기의 희생을 감수하며 집중된 전력으로 승부한다는 것인데, 일리는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임진왜란 초기의 전황을 더욱 불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국방의 부실은 민생의 불안, 민심의 이반과 이어져 있었다. 양반은 병역을 기피하며, 평민도 여유가 있으면 군포를 내어 면제받고 가난하면 도망해 버리는 가운데 죽은 이나 도망한 이의 군포를 친인척에게 강제 징수시킴으로써 원성이 컸다. 여기에 국초에 만든 방물 목록이 오랫동안 개정되지 않음으로써 바뀐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더 이상 생산되지 않는 ‘토산품’을 구해 바치느라 방납업자에게 등골이 빠지기도 했다. 오죽했으면 왜란 당시 일본군에게 호응하여 아군 관리들을 붙잡아 바친 고을도 적지 않을 정도였다. 병력의 대부분이 일반 백성인 나라에서, 민심의 이반은 곧 사기 저하, 전투력의 저하로 이어졌다.
15세기 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와 남긴 [해동제국기]. 임진왜란 발발 당시까지 일본에 대한 주된 지침서로 쓰였다.
정보의 미비함도 조선이 전쟁을 준비함에 큰 지장을 주었다. 조선은 국초부터 명나라에는 사대, 일본에게는 교린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외교를 했으나 대일외교에는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아예성종 때부터는 통신사를 받되 보내지는 않으며, 일본에 뭔가 전할 일이 있으면 대마도를 거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15세기에 신숙주가 일본을 다녀와 남긴 [해동제국기]가 16세기 말이 될 때까지도 일본에 대한 주된 지침서였으며, 심지어 왜란이 끝난 다음에 쓴 유성룡의 [징비록]에도 오다 노부나가와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혼동하고, 히데요시는 평(平)씨에다 중국 출신이라고 적을 정도였다(히데요시가 잠깐 다이라(平)씨를 쓰기는 했지만, 중국인이라는 것은 허무맹랑한 말이었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군사력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 1589년에 선조가 일본의 침입 가능성을 두고 신하들과 의논할 때, 신하들은 “왜구의 배는 한 척에 백 명 이상을 실을 수 없고, 배가 있어야 모두 백 척을 넘지 못하니 최대 1만 명 이상은 침입해올 수 없다”고 장담했다 (일본의 배가 조선 배보다 작은 편이기는 했으나, 히데요시는 전쟁에 2천 척의 배를 동원하도록 지시했다). 또한 일본의 조총에 대해서도 이일이나 유성룡처럼 그 위력을 경계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쏜다고 모두 맞겠는가. 우리 활이 우월하다”며 과소평가했던 신립같은 사람들이 우세했다. 조총을 우리도 제작해 사용하자는 움직임도 일부 있었으나 본격화되기 전에 왜란이 일어났다.
반면 일본은 침공을 결정한 이후 수십 명의 밀정을 조선에 들여보내 조선 지도를 제작하고 각종 사정과 지형, 인구와 물자 분포 등을 파악했다고 한다. 하지만 최고위 수준에서의 정보가 부실한 점은 일본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히데요시는 조선과 명의 국가 규모나 정치 방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으며, 따라서 조선을 위협하면 국왕은 곧 항복할 것이고, 왕이 항복하면 조선인은 일본의 충실한 신민이 될 것이니 조선인까지 합세해서 명나라를 공격하면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이미 1577년에 “규슈 번(藩)을 공략해 번주의 항복을 받고 그 병력으로 조선을 친다”고 말했거니와, 대륙 침략도 그런 식으로"조선을 공략해 왕의 항복을 받고 그 병력을 더하여 명을 친다"라고구상했던 것 같다. 자국의 지방을 공략하는 전쟁과 국가간 전쟁의 차이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대에 대한 이런 무지는 서로 불신과 분노를 낳으며 전쟁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히데요시는 1587년에 대마도의 소 요시시게에게 “조선 국왕에게 일본에 건너와 나를 알현토록 전하라”고 통지했다. 조선이 대마도에 쌀과 콩 등을 하사해주던 것을 ‘조공’이라고 오해하고, 조선 왕이 대마도주의 말을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곧이곧대로 전할 수가 없던 소 요시시게는 가신인 타치바나 야스히로를 ‘일왕의 사신’으로 속여 한양에 보내 통신사 파견을 요청했는데, 일왕과 최고실력자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던 조선 조정은 오다 노부나가의 죽음을 두고 “왜인들은 최근 자신들의 왕을 시해했다”며 이런 야만스러운 나라에 사절을 보내줄 수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타치바나 일족을 멸문해 버렸으며, 1589년에 다시 한 번 조선 왕을 설득하라, 그가 복종하지 않으면 출병하겠다고 대마도에 통보했다. 이로써 황윤길과 김성일이 115년 만에 통신사로 일본에 가지만, 그들은 교린을 목적으로 했음에도 히데요시는 자신의 요구에 굴복한 조선이 항복을 표시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후 “명나라를 칠 것이니 너희는 선봉에 서라”고 요구했으나(대마도에서는 이를 “명나라에 조공할 테니 길을 빌려달라”로 위조해서 전달했다), 조선이 이를 묵살하고 명나라에 일본의 움직임을 전달하자 결국 전쟁이 터지게 된다.
결국 국가간의 소통의 부재가 비극적인 전쟁의 한 원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런 몰이해와 오해는 명나라와의 사이에서도 있어서, 명은 한동안 계속 조선이 일본과 손잡고 요동을 침공하지 않을까 하고 의심했다. 그리고 명-일 간 강화 교섭도 동상이몽 속에 진행되었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어린애 시절부터 칼 다루기를 배우는 일본의 상무 정신에 비해 조선은 갈수록 문치주의가 발전하면서 무를 천시하는 분위기가 짙었고, 그것이 왜란 초기에 무력하게 무너졌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선조는 1594년에 “경상도는 풍습이 잘못된 지가 오래이다. 비록 친형제라도 [천자문]을 배우고 고상한 이야기를 하면 높은 자리에 앉히고 대우를 하지만, 활과 화살을 가지고 무술을 익히면 뜰에 내려가게 하고 천대한다. 그래서 변란을 당하기 전에 상주에는 궁수가 세 명뿐이었다 한다. 풍속이 이와 같고서야 어떻게 적병을 막겠는가.”라고 한탄했는데, 경상도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그런 풍속이 만연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백병전이 벌어졌을 경우에는 일본군 병사가 조선군 병사보다 일반적으로 사기나 노련함 등에서 앞섰다고 할 수 있다. 무기체계도 조선은 접전을 벌이기보다 원거리에서 적을 사살하는 방식을 선호했으며, 따라서 활이 주된 개인 병기였다. 전통적으로 사용된 각궁은 최대사거리 300m, 유효사거리 100~150m였는데 값이 비싸고 비가 오면 부레풀이 녹아 풀어지는 게 문제였다. 이를 대신한 목궁은 사거리가 100m를 넘지 않았던 것 같다. 적의 화살과 단병 접전시의 방어를 위해 병사들까지 갑주를 착용했으며, 따라서 몸이 무겁기 때문에 칼은 되도록 가벼운 것을 썼다. 조선군의 환도는 길이가 50~60cm였으며, 일본군의 주무기인 일본도보다 10~20cm 정도 짧았다.
일본의 조총. 진열품은 에도 시대의 것이다. <출처: (CC)Rama at Wikipedia.org>
일본군은 전통적으로 백병전을 선호했으며 따라서 가볍게 무장하고 일본도와 장창으로 적에게 돌격하여 참살하는 식으로 싸웠는데, 조선군은 활의 우위로 그 돌격의 기세를 약화시킴으로써 왜구와의 오랜 싸움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왜란 때 이 균형을 깨트린 무기가 나타난다. 바로 조총이었다. 포르투갈 사람이 다네가시마(種子島)에서 전해주었다 하여 ‘다네가시마 뎃포(鐵砲)’로 불리던 이 조총은 오다 노부나가가 대량으로 사용하여 전쟁에서 우위에 선 이래로 일본에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최대사거리 200m, 유효사거리 100m로 각궁에 비하면 그렇게까지 위력적이지는 않았으나(게다가 숙련된 사수라도 1회 발사에 30초 이상이 소요되어, 활에 비해 연사가 어려웠으며 여러 발을 쏘고 나면 총신이 과열되기도 했다) 각궁을 장비한 조선 병사가 많지 않은데다 조총을 쏠 때 나는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위협 효과를 주어 왜란 초기에는 일본군이 조선군을 연패시키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각궁을 많이 장비하고 침착하게 맞서 싸웠다면 팽팽하게 싸울 수 있었으나, 장비 부족과 공포감 때문에 적의 접근을 막지 못했고, 접전이 벌어지면 일본도와 장창 앞에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행주산성에서 위력을 떨친 화거. <출처: (CC)draq at Wikipedia.org>
그러나 개인이 아닌 집단용 병기는 대체로 조선군이 앞섰다. 총통은 조선이 자랑하는 대표적인 화기였는데, 구경이 가장 큰 천자총통은 사거리가 2km, 가장 많이 사용된 현자총통은 3.8km에 달했다. 다만 작은 철환을 여러 개 넣어 발사하기도 했지만 보통은 ‘대장군전’, ‘장군전’ 등의 대형 화살을 넣어 쏘았고, 따라서 인명살상보다 적의 진영이나 적함을 파괴하는 목적으로 쓰였다. 문종때 만들어진 화거(화차)는 한 번에 수십 발의 철환이나 화살을 사격할 수 있는 이동식 다연발포로, 왜란 때에는 신기전보다는 소구경 총통인 승자총통을 수십 정 장착해서 많이 사용했으며 행주산성전투 때는 그 위력이 승리에 한몫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기동력을 중시했기 때문에 끌고 다니기 어려운 화포는 거의 쓰지 않았으며, 대구경 조총을 거치시켜 박격포처럼 썼다. 하나의 대형 철환을 넣고 신속하게 발사하는 서양식 불랑기포는 명종 때 이미 수입되었다고 하지만, 왜란 중에는 명군이 주력 무기로 사용했다.
조선이 일본보다 월등히 앞선 군사기술은 선박 부문에도 있었다. 조선 전함은 하나의 두터운 판재로 외벽을 만들고 나무못으로 이어 붙이는 배였는데, 이것은 얇은 판재를 겹쳐 쓰며 쇠못을 사용하는 일본 배에 비해 무겁고 느린 편이었다. 그러나 나무못은 녹이 슬지 않고 같은 재질끼리 달라붙는 성질이 있었던 데 비해, 쇠못으로 여러 판재를 이은 일본 배는 충격을 받으면 이음새가 부서지면서 배가 파괴되기 쉬웠다. 그리고 기본 속도는 조선 배가 느렸지만, 회전은 보다 자유로워서 교전 중에 공격 방향을 빠르게 전환할 수 있었다. 또한 을묘왜변 이후 조선 초기의 맹선(猛船)을 개량하여 방패판과 상갑판을 올린 3층 구조의 판옥선(板屋船)을 만들었다. 이 배는 높이 때문에 적이 배로 뛰어오르기 어렵게 하고, 상층구조물로 적의 사격을 막는 한편 육중한 선체로 적선을 들이받아 깨트리며 총통을 배에 실어 적선을 부수거나 불태울 수 있어서 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활약에 큰 기여를 했다. 이 판옥선에서 한 층을 축소하고 상갑판을 둥글게 덮어서 아군이 완전히 가려지도록 만든 것이 거북선이었다. 거북선은 적의 사격을 겁내지 않았으므로 적진 깊숙이 돌격해 진영을 깨트리는 돌격선으로 활약했지만, 판옥선보다 낮았기 때문에 판옥선처럼 위에서 아래로 사격할 수가 없어 주력 전선으로 쓰이지는 못했다.
조선 수군의 주력함, 판옥선.
언제나 전쟁을 거치며 무기 기술은 진보되기 마련이다. 왜란 중에도 그리하여 총통을 소형화하여 조총과 비슷하게 쓸 수 있도록 한 별승자총통이 제작되고, 명나라에서 당파와 편곤, 제갈노, 화창(火槍) 등을 수입, 보급하여 일본도에 맞설 개인용 무기로 쓰도록 했다. 이장손이 만든 비격진천뢰는 일종의 수류탄인 질려포통을 개량하여 대포로 멀리까지 발사할 수 있게 한 공성무기다. 또 당시 조선군은 ‘비행기’까지 썼다고 한다. 비거(飛車)라 불리는 물건은 한 두 사람을 태우고 30리 가량을 날아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 일종의 글라이더였을 것으로 보이며 보급, 통신 등에 활용되었다. 화학무기도 썼다. 생석회 등의 독극물을 주머니나 나무통에 담아 터뜨렸는데, 행주산성 전투에 요긴하게 쓰였으며 수전에서도 사용되었다.
1592년 3월 27일, 히데요시는 교토에서 일왕에게 출정의 보고를 하고, 3만의 친위군을 거느리고 침략군이 집결해 있는 나고야로 향했다. 그리고 4월 13일 아침, 총 15만 8700명에 달하는 군대를 9개 군으로 나누어 출격시켰다. 선봉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제1군. 이들은 13일 오후 5시쯤에 부산포 앞바다에 나타났다.
부산진을 공략하는 일본군.
[조선왕조실록]과 [징비록]에는 당시 부산 첨사 정발이 사냥을 즐기고 있었고, 적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제야 허둥지둥 성으로 돌아가다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전사했다고 적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풍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정발은 적의 접근을 제 때에 발견하고 전투 준비를 하는 한편 경상좌수사 박홍에게 통보했다. 그리고 일본군은 절영도에 일단 정박하고는 정발에게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이니 길을 빌려 달라”고 통보했으며, 이를 거부하자 14일 아침부터 부산성을 공략했다. 정발 등은 분전했으나, 부산성을 지키는 병력은 1천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적의 전진을 막고자 철질려(쇠못)를 길목에 뿌렸지만 공성전에 능숙한 적은 나무판자를 깔고 쉽게 건너왔다. 결국 정발을 포함한 다수가 전사하고, 부산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여세를 몰아 인근 다대포와 서평포까지 손에 넣고, 다음날인 15일에는 동래로 진격했다. 동래의 경상좌수영에 있던 박홍은 달아나고, 동래 부사 송상현은 결사 항전을 했지만, 정발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이틀 만에 부산 일대를 장악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일본군은 4월 18일부터 유유히 도착하는 후속군을 맞이하여 병력을 강화한 다음 곧바로 세 갈래로 한양을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정발이 실록과는 달리 제 할 일을 다 했는지 몰라도, 이 급변을 한양에 즉각 보고하기 위해 봉화를 올리는 일은 소홀했다(또는 저지당했다). 그래서 조정은 이 일을 사흘이나 지나, 박홍의 보고를 통해 비로소 알게 된다. 당황한 조정은 당시 가장 신뢰받고 있던 무장인 이일과 신립에게 응전하도록 했다. 하지만 대구에서 적을 맞이하기로 한 이일이 한양에서 어느 정도 병력을 모아서 내려가려 했으되 사흘 동안 삼백 명도 모으지 못했으며, 조정의 재촉에 내려가 보니 이미 대다수의 병력이 흩어진 뒤였다. 상주에서 고니시군과 대치했으나, 제대로 승부를 볼 수가 없어 달아나 버리고 말았다. 제승방략 체제의 맹점, 즉 현지에서 병력을 집결시키는 어려움과 병력과 지휘관이 만나기까지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신립 역시 충분한 병력을 모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이 적을 막기에 최적의 요새지라고 꼽고 있던 조령을 포기하고 충주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다. 두려워하는 보병들에게 배수진으로 필사즉생의 결전의지를 북돋우고, 자신했던 기병대의 돌파력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4월 26일, 결전을 앞두고 비가 내렸으며, 그 때문에 조선군의 맥궁이 못쓰게 되고 길은 진창이 됨으로써 기병의 빠른 진격을 방해했다. 수적으로도 우위였던 일본군이 조총을 콩볶듯 쏘아 대며 몰려들자, 그만 병사들은 강물에 뛰어들며 달아나 버렸다. 참패했음을 깨달은 신립은 자결했다.
믿었던 두 장수의 완패 소식에 조선 조정은 그야말로 ‘멘붕’ 상황이었다.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파천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런데 신하들이 벌떼처럼 반대하고 나섰는데, 이제 한양을 지킬 병력은 거의 남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선조에게 한양을 사수하라는 말은 말 그대로 ‘死守’하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정치체제에서 왕이 변을 당하면 그 자리에서 나라가 멸망하는 것이었기에, 선조 개인이 죽고 사는 문제를 떠나파천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신하들이 반대한 까닭은 나중에 자신은 위기 앞에서도 의연했음을 과시하고자, 또는 한양이 점령되면 놔두고 갈 수밖에 없는 가족과 재산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아무튼 개국 이래 처음으로 도성이 적에게 짓밟히게 된 상황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한양 백성들은 궁궐로 몰려가 절대 사수를 부르짖었고, 선조가 결국 도망치듯 도성을 빠져나가자 궁궐과 관아를 불태우며 화풀이를 했다. 고니시의 일본군은 선조가 한양을 떠난 지 사흘 만에 무혈입성했다. 그리고 대오를 정비한 다음 고니시군은 선조를 쫓아 평안도로,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는 함경도로, 구로다 나가마사의 군대는 황해도로 방향을 정한 다음 계속 진격해 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생을 그린 문학 [회본태합기]에 삽입된 선조 피난 행렬 삽화.
선조 일행은 갖은 고생을 하며 개성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성은 한양성과 달리 이중 삼중으로 성벽이 쳐져 요새화되어 있고, 대동강이라는 장벽도 있었으므로 이를 거점으로 삼아 반격을 노릴 만 했다. 하지만 워낙 병력이 부족해서 성벽 가장자리 나무에 옷을 걸어 병사처럼 보이게 했으며, 가뭄 때문에 대동강 강물이 많이 줄어서 군데군데 걸어서 건널 수 있는 곳까지 있음이 불안요소였다. 도원수 김명원은 도순찰사 한응인, 경기감사 권징, 유도대장 이양원등과 함께 1만 3천 명이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진을 쳤으며, 전라 감사 이광, 충청도 순찰사윤선각, 경상도 순찰사 김수 등이 남도의 5만 병력을 모아 북진 중이었다. 또한 금강산의 유정(사명당), 전라도의고경명등도 각자 의병을 모집해 근왕(勤王)을 내세우며 출정 중이었기에 평양의 조정은 한양 수복의 희망을 품을 만도 했다. 5월 6일에는 이순신의 수군이 옥포에서 첫 승전을 거두었다는 낭보도 들렸다.
하지만 희망은 다시 짓밟혔다. 일본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든 임진강 수비군이 5월 17일에 참패했으며, 남도 연합군도 6월 5일과 6일에 용인과 광교산에서 잇달아 패배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고경명군도 북상을 포기하고 호남을 구하기 위해 발걸음을 돌렸다. 선조는 한편으로 이덕형을 명나라에 보내 파병을 요청하고, 자신은 다시금 파천하였다. ‘임진강 방어선’은 다시 ‘대동강 방어선’으로 끌어올려져 임진강에서 패배하고 온 김명원과 한응인, 그리고 도순찰사로서 평안도에서 병력을 모으고 있던 이원익과 좌의정 윤두수등이 평양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6월 14일, 적진을 야습하려던 것이 그만 왕성탄(대동강의 한 여울목)의 얕은 여울을 적에게 알려주는 결과를 줌으로써 고니시군이 일제히 강을 건너오자 모두 평양을 비우고 달아나고 말았다.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더 이상 선조를 추격하지 않고 평양에 머물렀는데, 이것은 임진왜란의 최대 수수께끼 중 하나다.
개전 2개월 만에 평양까지 함락되었으니, 이제는 끝장이 난 듯했다. 국토의 끝에서 끝인 의주까지 피난한 선조는 한양을 떠나기 직전 벼락치기로 세자를 삼았던 광해군에게 분조(分朝)를 맡아 강원도 쪽으로 가도록 하고, 자신은 명나라의 허락을 얻어 요동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유성룡, 윤두수 등의 극렬한 반대 속에 실천은 못했는데, 묘하게 평양을 점령한 고니시군이 더 이상 선조를 추격하지 않고 그해 가을과 겨울을 내내 평양에서 보내고 있었으므로 파국에는 이르지 않았다.
고니시군의 평양에서의 머무름은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 계속 논란이 되는 이 전쟁의 최대 수수께끼 중 하나다. 많은 경우 이순신의 활약을 이유로 든다. 일본군은 원래 부산에 상륙한 육군이 한반도를 종단해 치고 올라가고, 수군은 전라도를 돌아 서해로 올라간다는 ‘수륙병진책’을 계획했는데, 육전은 자신들도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되었으나 수군이 뜻밖에 이순신에게 가로막혀 서해안으로 진입할 수 없었고, 따라서 필요한 보급을 얻을 수가 없어 발이 묶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장기적으로는 맞는 말이지만,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일본 수군을 궤멸시키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때는 7월 8일로 고니시가 평양에 입성한 한참 뒤의 일이었다. 또 평양에는 군량미 10만 석이 쌓여 있었고, 일본군이 조선 백성들에게 실시한 행정체제에 의해 세금도 걷고 있었기에 당장은 군량 사정이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왜 10일이면 도착할 거리에 있던 의주의 선조를 내버려 두었을까?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가지 해답은 군량 말고도 그럴 형편이 안 되었으며, 정치적, 전략적 고려가 모두 작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고니시의 일본군은 부산에 상륙한 뒤 별다른 병력 보충 없이 전투를 거듭하며 평양까지 올라갔다. 살인적인 행군으로 이미 한양에 입성했을 때 병사들이 온통 발이 부르터서 어기적거렸다는 기록을 보면, 평양쯤에서는 기진맥진이 되어 있었을 것이다. 대동강변에 진을 친 고니시군이 불과 5, 6천밖에 되지 않아서 평양 수비군이 야습을 감행했다는 기록도 있다. 즉 식량 사정은 나쁘지 않았으나, 고니시군은 좀 쉬면서 재정비할 시간이 절실했다.
그리고 아마도 일본의 본래 전쟁 목표는 한양에서 조선 왕을 포위하고 항복을 받아내고는, 조선군까지 합친 병력으로 명나라를 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한반도를 종단하며 평양까지 올라오게 되었고, 여기서 계속 밀어붙이면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하거나 한 상태에서 명군과 맞닥뜨릴 가능성이 있었다. 조선군의 합세가없어도 과연 명나라와 전쟁할 수가 있을 것인가?어차피 명나라 정벌은 무리였음을 인정하고, 조선 및 명나라와 교섭해 영토를 더 얻는 선에서 마무리 짓는 게 낫지 않을까? 고니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평양에서 발을 멈춘 채로 있었을 수 있다.
이순신 표준영정.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일본군의 열화 같은 공세가 일단 주춤하자, 곧 그들은 ‘세 명의 장군’의 손으로 애써 차지한 조선 땅에서 밀려내려가게 된다. 첫 번째는 바로 이순신 장군이었다. 옥포 해전에 이어 5월 29일 사천포, 6월 2일 당포, 6월 5일 당포, 7월 8일 한산도, 7월 10일 안골포, 9월 1일 부산포까지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일본 수군의 서방 진출을 완전히 틀어막아 버렸다. 조선 육군을 연패시킨 병력 부족 문제는 수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이순신은 한산대첩이나 이후의 명량대첩에서 모두 적은 수의 함대로 압도적 다수의 적 함대를 격파했는데, 사거리가 월등히 긴 총통과 육중한 조선 전함의 파괴력, 빠른 방향 전환 능력을 적절히 활용하며 일본 함대의 약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일본 배들은 조선 배들보다 빠르다. 그러나 유인작전에 걸려 조선 함대를 쫓다가 갑자기 돌아서서 총통으로 사격하니, 여기저기 부서지고 불타는 자신들의 배가 장애물이 되어 퇴각이 어려워진다. 반대로 전진하여 접전하려 해도 판옥선이나 거북선에는 씨름 선수에게 일반인이 덤비는 꼴이다. 게다가 일본의 함대란 여러 다이묘들이 마련한 혼성함대였기에 위기 상황에서 질서가 잡히지 않아 우왕좌왕하느라 더욱 피해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되자 일본의 수륙병진책은 완전히 실패했고, 잘못하면 조선과 일본 본토 사이의 교통마저 끊길 위험이 있었다.
두 번째는 이여송장군이었다. 본래 일본인들은 명나라 군대를 가볍게 여겼다고 한다. 바로 얼마 전까지 왜구로서 명나라 해안지대를 공략해 보니 거의 무인지경으로 휘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5일에는 요동 부총병 조승훈의 선발대를 격파하고 평양을 지켜내기도 했다. 그러나 12월에 압록강을 건넌 이여송의 5만 명군은 차원이 달랐다. 이여송은 젊은 나이에 여진족과 몽골족의 반란을 진압한 경력이 있었고, 그가 이끄는 요동 기병은 정예였다. 그리고 “고니시에게 조총이 있으면, 이여송에게는 대포가 있었다.” 그는 김명원의 조선군과 유정의 승군까지 포함한 병력으로 1593년 1월 초하루부터 평양성을 두들겨 부쉈는데, 불랑기, 호준포, 멸로포 등을 동원하여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결국 고니시는 평양에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 해전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장군’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보다 덥고 습한 땅이었고, 그 중에서도 침공 주력군이 살던 구슈는 일본에서도 가장 더운 곳이었다. 조선 북녘의 추위는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2년 겨울, 프로이스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와 제 부하들 전원이 동상에 걸렸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입니다”라고 밝혔다.
한산대첩을 그린 병풍.
혼을 빼는 추위에 지원 병력은 오지 않고, 명군이 대거 진입해 들어온데다 조선군도 이제는 만만찮게 반격하며, 의병들이 각지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일본군은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다. 사실 초기에는, 공포에 질린 데다 그동안 조정에 품은 불만도 한몫하여 일본군에게 협조하는 조선 백성이 적지 않았으며, 일본군은 자국에서처럼 다이칸쇼(代官所)를 두고 일부 조선인들에게 일본의 벼슬을 주어 점령지를 통치했다. 함경도처럼 평소 조정에 대한 불만이 컸던 곳에서는 회령, 경성, 갑산 등에서 반란이 일어나 그곳 관리들을 일본군에게 넘겼으며, 그쪽으로 피난했던 임해군과 순화군두 왕자도 그들의 손으로 넘겨졌다. 하지만 겨울을 지나며 일본군의 기세가 꺾이고, 의주에 선조가 건재한 데다분조 활동 중이던 광해군의 독려도 한몫하여 전국적으로 일본에 저항하는 백성들의 활동이 활발해진다. 결국 일본군은 일제히 후퇴하여 한양, 경기, 경북을 차례로 포기하고 영남 남해안의 교두보로 내려갔다.
진주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출처: 전쟁기념관>
사실상 이 전쟁에서 조선군의 작전권을 접수한 명군은 이여송이 평양 수복 후 기세 좋게 남하하다가 벽제관에서 역습을 당한 뒤로 전쟁 수행 열의가 가셨으며, 심유경등이 고니시와 비밀 회담을 한 결과 일본군이 질서 있게 퇴각하고 명군은 그들을 느릿느릿 ‘쫓는’ 형태로 일본군의 남하가 진행되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명나라 입장에서는 굳이 조선 땅을 조선 임금이 다스릴 필요가 없다. 명나라를 넘보지 않을 것을 약속하면 영토권을 최대한 보장하겠다” 등의 언질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군이 일본군을 맹렬히 추격하려고 하면 명군에 의해 제지되곤 했다. 그래도 조선군은 일본군과 불꽃 튀기는 대결을 몇 번이고 벌였는데, 1593년 2월 12일의 행주산성 전투 와 6월의 2차 진주성 전투가 그 예였다. 진주성은 일찍이 1592년 10월에 전라도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을 맞아 싸워 격퇴한 곳이었는데, 히데요시는 철수할 때 철수하더라도 진주성에만은 반드시 복수하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의병장 김천일등이 분전했으나 결국 10일 만에 함락되고, 6만여 군민들도 광분하는 일본군에게 학살되었다. 이처럼 치열하고 처절한 싸움은 이미 조선인과 일본인은 원수가 되었다는 뜻을 나타냈다. ‘조선을 신속히 복속시키고, 조선군을 흡수한 병력으로 명나라를 친다’는 히데요시의 당초 구상은 이 시점에서 완전히 물거품이 된 것이다. 결국 7월에 선조가 한양에 환도하고, 10월에 잡혀 있던 임해군, 순화군이 풀려나면서 임진왜란의 1막은 마무리된다.
행주대첩을 그린 민족기록화. <출처: 전쟁기념관>
1593년 말에서 1596년 말까지 3년 동안은 두 진영 사이에 특별히 큰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이다. 하지만 경남 해안지대에는 일본군이 남아 있었고, 그들은 울산, 서생포, 동래, 구포, 마산 등등 수십 곳에 ‘왜성’을 쌓고 혹시라도 있을 공격에 대비했다. 조선 쪽에서도 성을 쌓았다. 피폐될 대로 피폐된 조선군은 일본군이 다시 전면 침공해 온다면 청야전술로 논밭을 불사른 다음(덕분에 백성은 더욱 피폐해겠지만), 산성으로 군민이 들어가 농성하는 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평안도에서 병력 모집과 훈련에 돋보이는 성과를 내었던 이원익이 우의정 겸 4도 도체찰사가 되어 금오산성, 용기산성, 부산(富山)산성, 공산산성, 황석산성, 화왕산성 등을 새로 쌓거나 개축했다. 한편 행주산성 전투의 주인공 권율은 도원수가 되어 육전 직접 지휘 책임을 맡았다.
수군은 삼도 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총괄했으나, 전쟁에다 전염병이 겹치며 수군에 충당할 인원이 현저하게 줄어 곤란을 겪었다. 식량 사정도 나빠서 그나마 병영에 있는 병사들도 하루 몇 숟가락의 밥이 고작이었으니 싸울 기력이 없었다. 이순신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둔전을 일구어 직접 식량을 조달하고, 무과를 독자적으로 시행해 무관들을 뽑았다. 또한 병사가 도망치면 그 친족을 강제로 끌어와 전장에 내보내는 방법을 썼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런 연좌법은 국법에도 없고 너무 가혹하다 여겨 금지시켰는데, 이후로는 병력 충원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거북선의 그림. <출처: (CC)PHGCOM at Wikipedia.org>
선조는 일본에 히데요시가, 남해안에 일본군이 아직도 버티고 있는 상황이 못내 불안한 나머지 ‘우리가 선제공격을 하면 어떤가’ 하고 비변사와 장수들에게 계속 탐문했다. 남해안의 근거지를 공략하거나 심지어 일본의 나고야로 쳐들어가는 방안까지 논의되었으나, 조선의 힘으로는 무리일뿐이었다.
만력제. 명나라 황제로 가장 오래 재위했으나 그 후반기는 명왕조의 몰락을 재촉했다.
그러는 사이에 명과 일본 사이에는 강화 교섭이 이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평양에서 패배하고 남쪽으로 퇴각하던 시점에서 명나라 정복 목표는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인식했던 것 같다. 1년 동안의 끊임없는 전투와 추위, 질병 등으로 일본이 투입한 병력은 절반 가량이 소모되어 있었고, 조선과의 협력이 불가능한 이상 대륙 공략은 아무리 과대망상의 히데요시라 해도 가망이 없음을 알 수밖에 없었다. 이제 문제는 얼마나 명과 조선에게서 많은 양보를 얻고 전쟁을 끝내느냐였다.
한편 명나라의 사정도 좋지 않았다. 1594년에는 먀오족(苗族)이 사천(四川)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은 물론 몽골, 티베트 등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아 변방마다 불안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후 1598년에는 요동을 침공한 타타르를 토벌하다가 이여송이 전사하기도 했다. 여기에 만력제의 ‘태정’은 계속되어 국가재정이 파탄에 이르고 관료들의 기강이 무너졌으며, 1596년부터는 전국의 광산에 환관들이 파견되어 가혹한 세금과 무자비한 착취를 가함으로써(광세의 화) 막 태동하던 상업자본이 된서리를 맞고 민생이 한층 불안해졌다. 이쯤 되니 명나라로서는 어떻게든 왜란이라도 빨리 마무리짓고 조선에서 손을 떼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처럼 양 측이 원하던 강화 회담은 웃지 못할 ‘협잡’의 연속이었다. 전쟁 이전과 마찬가지로 일본의 중국 인식과 중국의 일본 인식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면서 서로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심유경이나 고니시 유키나가처럼 중간에서 강화를 성사시키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중간에서 적당히 내용을 조작하여 자신들의 주군을 속이려고 했다. 먼저 1593년 5월, 고니시는 명군 참장인 사용재, 유격장 서일관과 함께 나고야로 가서 히데요시를 만났다. 사용재와 서일관을 ‘명나라 사신’으로 위장시킨 것이었다. 히데요시는 그들에게 이른바 ‘화건칠조(和件七條)’를 내밀었는데, 강화하는 대신 명나라의 황녀를 일왕의 후궁으로 보내고, 명-일본간 무역을 재개하며,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이 차지하고,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인질로 일본에 보낸다는 등이었다. 명나라는 체면상으로라도 들어줄 내용이 아니었고, 조선은 길길이 뛸 노릇이었다. 이를 곧이곧대로 명황제에게 올릴 수 없었던 심유경은 고니시의 가신인 나이토 조안을 ‘일본 사신’으로 위장시키고는 무역 재개와 히데요시의 책봉, 두 가지만 요구조건으로 들고 북경으로 보냈다. 그리고 히데요시의 오만불손한 화건칠조 대신 ‘관백항표(關白降表)’, 즉 그 두 요구가 허용되는 한 일본은 명나라에 항복한다는 내용의 표문을 만력제에게 올렸다. 1594년 12월, 만력제는 나이토 조안을 접견하고는 히데요시를 일본 왕으로 책봉하는 것은 허락하지만 무역은 허락하지 않으며, 점령한 조선 땅에서 물러나고 앞으로 영구히 조선을 침략하지 말아야 한다는 최종 입장을 내놓았다. 이번에는 히데요시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전통의 일왕이 버젓이 있는 터에 자신이 따로 중국이 책봉한 일왕이 되어봤자 분란만 일어날 뿐이고, 겨우 그따위 것을 얻자고 전쟁을 벌였을 턱이 없었으니 말이다. 다시금 머리를 싸맨 심유경과 고니시는 일단 히데요시에게 명나라가 화건칠조를 받아들였다고 거짓 보고했고, 히데요시는 기뻐하며 대부분의 병력을 조선에서 철수시켰다. 한편 그러는 사이에 가토 기요마사도 나름대로 조선과의 강화 협상을 벌였는데, 유정(사명당)이 대표로 나섰지만 이야기가 겉돌 뿐이라 1595년 3월까지 네 차례나 만났으나 성과는 없었다.
마침내 올 것이 왔다. 명나라가 ‘히데요시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그를 일본 왕에 책봉하기 위한 진짜 사신을 보낸 것이다. 난처해진 심유경과 고니시가 그들을 부산포에 묶어 두고 시간을 끌자, 정사 이종성은 그만 겁을 먹고 홀로 달아나 명나라로 돌아가 버렸다. 점점 더 곤란해진 심유경은 자신이 부사를 맡고, 부사 양방형을 정사로 올린 다음 마침내 바다를 건너갔다. 두 달 뒤에는 명나라의 압력에 못이겨 조선도 황신과 박홍장을 일본에 파견했다.
1596년 9월 2일, 히데요시는 의기양양한 자세로 명나라 사신을 접견했다. 조선 통신사의 접견은 거부되었는데, 자신이 요구한 7개조 중 ‘조선의 왕자와 대신을 볼모로 보냄’이 지켜지지 않았으므로 괘씸하여 만나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나머지 조항도 전혀 지켜지지 않았음을, 아니 애당초 명나라에 통보도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노발대발한 그는 가신과 다이묘들에게 다시 출병할 것을 명령했다. 정유재란이었다.
이순신 표준 영정
1596년 12월, 정유재란은 의외로 조선군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 도체찰사 이원익의 지시를 받은 허수석이 부산의 일본군 진영에 침투해 탄약고를 폭파하고 군량과 선박을 불태운 것이다. 그런데 이 일과 관련해 이순신이 약간의 구설수에 올랐다. 그의 군관이 우연히 현장에 가까이 있었다가 허풍으로 자신이 한 일이라고 이순신에게 보고하고, 이를 그대로 믿은 이순신이 장계를 올려 포상을 신청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진상이 밝혀져 이순신이 모르고 한 일임이 납득되었으나, 갈수록 이순신을 찜찜하게 보고 있던 선조에게는 좋지 않은 인상을 남기는 또 하나의 계기가 된다.
1597년 1월, 일본에서는 8개 군, 총 12만 명이 조선으로 건너가 남해안에 남아 있던 2만 명의 일본군과 합세하여 조선을 치기로 계획이 세워지고, 고니시와 가토가 병력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왔다. 여기서 이른바 ‘요시라 사건’이 일어나면서 조선은 가지고 있던 으뜸패를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스스로 내팽개치는 우를 범하게 된다. 널리 알려진 대로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요시라라는 이름의 이중간첩을 활용해 ‘가토군이 몇 월 몇 일에 바다를 건너올 테니 기다리고 있다가 요격하라’고 유인했으며, 이순신은 그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았으나 조정은 넘어가 버려서 이순신을 처벌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니시와 가토가 서로 원수지간이었음은 틀림없으며, 요시라는 왜란 이전부터 귀중한 정보를 많이 전해주던 대마도인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고니시가 정말로 이순신의 손을 빌려 가토를 제거하려 했을지 모른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이순신의 말처럼 “적들의 수가 적으면 도망칠 것이고, 많으면 역습할 것”으로, 요시라의 말이 진짜이든 가짜이든 조선 수군이 섣불리 공격하기 어려웠다는 데 있었다. 그것은 일단 오랜 전란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군의 인원이나 건강 상태가 매우 열악했으며, 내내 당하기만 했던 일본에서도 대비책을 세워 ‘일본 배가 속도와 숫자에서 가지는 우위를 최대한 활용하여, 조선 배를 겹겹이 둘러싸고 공격한다’는 지침을 세워 두었으므로, 전처럼 만만하게 덤빌 수 없었던 것이다. 자칫 적들이 다수라면개떼들에게 포위된 곰처럼 당할 수 있고, 적들이 소수라 해도 질서정연하게 퇴각하면 느리고 탑승인원도 적은 조선 배로 추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유재란 이전에도 부산포를 공격해 왜놈의 근거지를 쓸어버리라는 조정의 지시에 거듭 불복해온 이순신이었다.
‘필사직생, 필생직사’ 명량해전에서 이순신이 남긴 말이다.
그래서 계속 불만이 쌓여온 선조는 요시라 사건에 마침내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어찌 보면 이순신이 지시 내용을 오해한 점도 있었다. 선조는 출정하여 가토를 잡으면 좋겠지만, 어려울 경우 단지 부산 일대를 순항하며 위력 과시만 해서 적군이섣불리 상륙하지 못하게 방해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출정 명령을 어기고, 가토와 그 후속 군대가 줄줄이 상륙하게 내버려 두었으니, 분격할 만도 했다. 게다가 원균은 이순신이 자신의 공을 가로챘다고 계속 항의하고 있었고, 그것은 허수석 사건과 맞물려 이순신에 대한 인상을 더욱 나쁘게 했다.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지만 자신의 허가도 없이 무과를 실시하거나 둔전을 만들거나 한 점도 거슬렸다. 말하자면 선조의 눈에 이순신은 ‘좀 유능한지는 몰라도 오만하고 상급자를 무시하며 정직하지도 않은 지휘관’이었다. 그래서 마치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하듯, 선조는 이순신을 통제사직에서 끌어내리고 백의종군케 했던 것이다(서인들이 당쟁의 일환으로 원균을 지지하고 이순신을 모함했다는 설은 다소 과장되어 있다. 이순신의 거취를 결정한 어전회의록을 보면 유성룡을 포함한 대부분의 동인들이 이순신을 성토하고 있으며, 서인인 윤두수는 ‘이순신과 원균 모두 통제사로서 함께 싸우도록 하자’고 가장 온건한 발언을 했다). 그러나 맥아더는 리지웨이가 대신할 수 있었지만, 이순신은 원균이 대신할 수 없었다. 아주 무능한 장수는 아니었으나 다혈질에 지모가 부족했던 그는 이순신처럼 군관과 병사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었고, 막상 통제사가 되고 보니 이순신이 왜 출정을 꺼렸는지 그 실상을 알게 되어, 조정의 출격 명령에 마찬가지로 불응했다. 결국 도원수 권율에게 불려가 매까지 맞은 끝에 출정했으나, 칠천량에서 처참히 패배하고 만다. 빠른 속력으로 치고 빠지는 일본 수군에게 끌려다니다가 기진맥진이 된 사이에 기습당한 결과였다.
칠천량 해전(1597. 7. 15)이 일어나자마자 남해안의 일본군은 두 갈래로 전라도를 공략해 들어갔다. 그동안 기다렸던 것은 그들이 출격한 사이에 조선 수군에게 뒤통수를 맞을 것을 염려해서였는데, 이제는 거칠 것이 없었던 것이다. 정유재란에 앞서 히데요시는 장수들에게 지침을 내렸는데, 그 중에는 임진년과는 크게 다른 것들이 있었다. “전라도를 반드시 손에 넣고, 나머지는 가능한 한 그리하라”와 “점령보다는 섬멸을 목표로 하라”였다. 임진년에는 최대한 빨리 한양을 공략하여 선조의 항복을 받으려 했고, 그것은 조선인을 히데요시의 신민이자 대륙 공격군의 일부로 쓰려 했기 때문이기에 잔악행위는 되도록 자제하고 일본식 통치체제를 구축하는 데 힘썼었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성격이 달랐다. 이순신과 의병들 때문에 손을 못 대 본 전라도를 철저히 유린하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자비하게 학살한다! 그런 전략을 세운 까닭은 불확실한데, 단순히 히데요시 개인의 분풀이 차원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공포 효과를 극대화해 조선인의 저항을 마비시키고, 최소한의 전력으로 점령을 달성하는 한편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확보해 장기전에도 견딜 수 있도록 하려던 것이 아닐까 싶다(야담이지만, 히데요시는 “조선인들을 모두 죽여 없애고 그 땅에 일본 서도의 백성들이 옮겨 살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도 한다). 유명한 “코 무덤”도 이 때 생겼다. 일본 병사들은 조선 백성을 잡으면 외국에 노예로 팔아서 돈을 벌려고 했는데, 학살이 우선 목표였으므로 먼저 일정한 수의 조선인을 베고 난 다음에 팔 권한을 주었다. 죽인 증거로 목을 가지고 다니기에는 거추장스러웠기에 코를 베었고, 그 코를 모아서 본국의 히데요시에게 보내면 히데요시는 흐뭇하게 훑어본 뒤 “코 무덤”에 묻게 했다는 것이다.
모리 히데모토가 지휘하는 ‘우군’은 양산을 출발해 밀양, 창녕, 합천을 거쳐 황석산성에서 곽준의 병력과 마주쳤으며,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좌군’은 부산을 떠나 배편으로 사천과 왜교에 상륙하고는 하동, 구례를 지나 남원으로 밀려들었다. 황석산성은 쉽게 함락되었으나, 남원성에서는 전라병사 이복남의 조선군과 부총병 양원이 지휘하는 명군이 합세하여 치열하게 방어전을 벌였다. 명군과 조선군의 대포십여 문이 평양성에서처럼 불을 뿜었으나, 수만 정의 조총들을 제압하지는 못했다. 8월 16일, 남원성은 함락되고, 성 안의 조선인은 남김없이 살육당했다. 이렇게 계속 북상하던 좌, 우 일본군은 힘을 합쳐 전주로 향했으며, 공포 효과가 작용했음인지 병사들이 도망쳐 버린 전주성에 8월 25일 입성한다. 마침내 전라도 점령의 목표가 달성된 것이다. 그리고 좌, 우군 중에서 우군이 그치지 않고 계속 북상해 충청도까지 이르자, 선조는 광해군에게 대비를 모시고 북으로 피난가게 한 다음 자신은 한양에서 적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이번에는 임진년의 ‘비겁자 오명’을 씻겠다는 듯.
왜군의 남원성 침공 작전도. | 코무덤. <출처: (CC)Insers at Wikipedia.org> |
그러나 일본군의 승세도 거기까지였다. 9월 7일에 명군이 직산에서 일본군 선발대와 만나 전투를 벌였고, 그 결과는 어느 쪽이 이겼는지 불분명했으나 거침없던 일본군의 진격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그리고 9월 16일에는 명량해전이 벌어진다. 일본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위를 믿고 이번에야말로 이순신에게 설욕할 수 있을 줄로 믿었으나, 이순신은 초인적인 지도력(가공할 적의 숫자에 질려 다만 일부라도 전선을 이탈했다면 끝장이었을 것이다), 조선 배의 강점, 그리고 지형조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냈다. 이는 한산대첩처럼 전쟁의 흐름을 크게 바꿀 정도는 아니었으나, 일본군의 사기를 크게 꺾고 해상에서 조선군에게 요격당할 염려를 다시 심어주었다. 게다가 이제 동장군이 돌아올 때도 가까워지고 있었고, 명군도 다시 대규모 병력을 본격적으로 파병해왔다. 일본군은 계속해서 전선을 물리며 전쟁에서 발을 뺄 시늉을 했으며, 울산성 전투 같은 치열한 전투가 가끔 벌어졌지만 전세는 대체로 소강 상태가 되었다.
울산성의 일본군을 공격하는 조-명 연합군.
마침내 1598년 8월 18일, 히데요시가 죽었다. 그리고 조선 주둔군의 완전 철수가 결정되었다. 그 철수 병력을 섬멸시키고자 노량 앞바다로 출동한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어디선가 날아든 총탄에 가슴을 맞았다. 그렇게 7년의 전쟁, 조선 역사상 최대 최악의 인명 피해를 낳았으며, 일본인과 중국인들의 피 역시 이 땅을 흠뻑 적시도록 한 전쟁은 그 전쟁이 낳은 가장 큰 별, 이순신을 제물로 하며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조선이 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조선의 인구는 삼분의 일이 사라졌고, 전답의 면적도 삼분의 일로(전라, 충청, 경상도 기준) 줄었다. 줄어든 인구는 대부분 조총과 칼과 창에희생된 것이지만, 노예 또는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궁궐에서 여염집까지 쑥대밭이 되고 사방에 거두지 못한 해골들이 널려 있었고, 논밭이 불타거나 돌보지 않아 잡초밭으로 변함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도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저항력이 떨어지니 전염병까지 돌았다. 이 지경이 되니 도덕의식이나 이성도 땅에 떨어져, 사람을 잡아먹어 배고픔을 달래려 하는가 하면(“남편이 아내를,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도적이 날뛰고, 당장 내일은 어찌 되든 말든 남은 식량을 모두 술로 바꿔 퍼마셔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정신적, 정치적으로 조선이 더욱 경직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에 대한 존화의식은 더욱 짙어졌고, 그것은 명-청 교체기에 현실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게 방해함으로써 또 한 차례의 병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리고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 의식은 더 경화되고 구체화되어, 오직 대의명분에 집착하는 주리주의적 성리학만이 조선의 학술, 정치,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대들은 오늘이 지난 뒤에도, 또 다시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겠지." 의주에서 통곡하듯 읊은 선조의 예언, 아니 그 이상으로, 난리가 끝난 다음에도 사람들은 계속 “동인이니, 서인이니” 했으며, 남-북-노-소로 갈수록 분열하면서 서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명분을 따르는 당이랍시고 실질적이지 못한 문제로 국력을 소모했다. 그래도 전란 도중에 대동법의 싹이 트는 등 일부 실용적 개혁의 토대가 마련됨으로써, 17-18세기 ‘실학’의 밑거름이 되기는 했다.
히데요시 가를 지지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일본의 새 주인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나라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소모되었을 뿐 아니라, 명왕조의 내홍(內訌)을 바라보며 차차 고개를 들고 있던 변방의 이민족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朱)씨네 밀가루로 이(李)씨가 만두를 빚었는데 조(趙)씨가 홀라당 먹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주씨란 곧 명나라이며, 이씨란 명나라 멸망을 직접 불러온 농민반란군의 대장 이자성이며, 조씨는 곧 청나라인 것이었다.
비슷한 이야기가 일본에서도 나왔다. 일본판에서는 오다 씨가 쌀을 찧고, 도요토미 씨가 떡을 만들고, 도쿠가와 씨가 홀라당 먹었다. 오다가 닦은 기반을 물려받았으나 본래 정통성이 없던 히데요시가, 어쩌면 그래서 명나라와 아시아를 정복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까지 세운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명만 희생시키고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한 이상 히데요시 사후에까지 권력이 계승되기는 어려웠다. 천하를 홀라당 삼킨 도쿠가와는 막부를 열고,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조선에서 들여온 성리학을 바탕으로 보다 질서정연하고 안정지향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고 운영해 나갔다. 전쟁의 피비린내가 차차 가셔지면서 오늘날 일본 전통문화의 주류가 되는 에도 문화가 꽃피었으며, 그 문화에는 왜란 중에 조선에서 들여온(내지는 빼앗아온) 도자기 기술, 인쇄술 등도 한몫했다. 황금 궁전과 황금 다실을 지으며 요란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던 히데요시의 모모야마 문화와는 달리, 조선의 영향으로 보다 그윽하고 차분하며 내면의 정신을 중시하는 문화가 일본에 뿌리내렸다. 결국 히데요시는 자신이 조선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수많은 ‘코’ 뿐이라고 생각하며 죽어갔으나, 코보다훨씬 가치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가져갔던 것이다.
조선이 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조선의 인구는 삼분의 일이 사라졌고, 전답의 면적도 삼분의 일로(전라, 충청, 경상도 기준) 줄었다. 줄어든 인구는 대부분 조총과 칼과 창에희생된 것이지만, 노예 또는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궁궐에서 여염집까지 쑥대밭이 되고 사방에 거두지 못한 해골들이 널려 있었고, 논밭이 불타거나 돌보지 않아 잡초밭으로 변함으로써 살아남은 사람도 극심한 기근에 시달렸다. 시체가 사방에 널려 있고 영양 상태가 좋지 않아 저항력이 떨어지니 전염병까지 돌았다. 이 지경이 되니 도덕의식이나 이성도 땅에 떨어져, 사람을 잡아먹어 배고픔을 달래려 하는가 하면(“남편이 아내를, 아버지가 자식을 잡아먹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도적이 날뛰고, 당장 내일은 어찌 되든 말든 남은 식량을 모두 술로 바꿔 퍼마셔 버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한 정신적, 정치적으로 조선이 더욱 경직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에 대한 존화의식은 더욱 짙어졌고, 그것은 명-청 교체기에 현실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게 방해함으로써 또 한 차례의 병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그리고 명나라가 망한 뒤에도 그 의식은 더 경화되고 구체화되어, 오직 대의명분에 집착하는 주리주의적 성리학만이 조선의 학술, 정치, 문화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대들은 오늘이 지난 뒤에도, 또 다시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겠지." 의주에서 통곡하듯 읊은 선조의 예언, 아니 그 이상으로, 난리가 끝난 다음에도 사람들은 계속 “동인이니, 서인이니” 했으며, 남-북-노-소로 갈수록 분열하면서 서로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명분을 따르는 당이랍시고 실질적이지 못한 문제로 국력을 소모했다. 그래도 전란 도중에 대동법의 싹이 트는 등 일부 실용적 개혁의 토대가 마련됨으로써, 17-18세기 ‘실학’의 밑거름이 되기는 했다.
히데요시 가를 지지하는 세력을 물리치고 일본의 새 주인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
명나라도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결국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주저앉았다고 할 수 있다. 이로써 막대한 자금과 인력이 소모되었을 뿐 아니라, 명왕조의 내홍(內訌)을 바라보며 차차 고개를 들고 있던 변방의 이민족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주(朱)씨네 밀가루로 이(李)씨가 만두를 빚었는데 조(趙)씨가 홀라당 먹어버렸다”는 말이 있다. 주씨란 곧 명나라이며, 이씨란 명나라 멸망을 직접 불러온 농민반란군의 대장 이자성이며, 조씨는 곧 청나라인 것이었다.
비슷한 이야기가 일본에서도 나왔다. 일본판에서는 오다 씨가 쌀을 찧고, 도요토미 씨가 떡을 만들고, 도쿠가와 씨가 홀라당 먹었다. 오다가 닦은 기반을 물려받았으나 본래 정통성이 없던 히데요시가, 어쩌면 그래서 명나라와 아시아를 정복한다는 거대한 프로젝트까지 세운 것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수많은 인명만 희생시키고 한 뼘의 땅도 얻지 못한 이상 히데요시 사후에까지 권력이 계승되기는 어려웠다. 천하를 홀라당 삼킨 도쿠가와는 막부를 열고, 조선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조선에서 들여온 성리학을 바탕으로 보다 질서정연하고 안정지향적인 국가체제를 수립하고 운영해 나갔다. 전쟁의 피비린내가 차차 가셔지면서 오늘날 일본 전통문화의 주류가 되는 에도 문화가 꽃피었으며, 그 문화에는 왜란 중에 조선에서 들여온(내지는 빼앗아온) 도자기 기술, 인쇄술 등도 한몫했다. 황금 궁전과 황금 다실을 지으며 요란하고 화려한 것을 추구하던 히데요시의 모모야마 문화와는 달리, 조선의 영향으로 보다 그윽하고 차분하며 내면의 정신을 중시하는 문화가 일본에 뿌리내렸다. 결국 히데요시는 자신이 조선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수많은 ‘코’ 뿐이라고 생각하며 죽어갔으나, 코보다훨씬 가치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가져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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