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회와 이단의 문제
우리가 여기서 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교회와 사회학적인 관계에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요인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먼저는 이단들이 사회를 업고서 그 힘을 악용하여 교회 전통적 교리 문제를 어지럽히는 측면의 문제이다. 그 중에 하나가 창조를 가정 중심으로 보고자 하는 해석이다. 이것은 현대적 필요 충족과 맛물려서 이루어지는 이단들의 해석 중심 기법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인류의 시작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남녀로 지었다는 부분을 가정의 근본으로 보고자 하는 운동들에 대해서 우리는 경계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직접적인 문제는 가정을 중심에 두고 성경을 거기에 맞추어 해석하는 기법이다. 물론 목적은 가정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 본이지만 그것은 철저히 드러나지 않는 부분에 속한다.
이러한 해석은 통일교의 원리 정신이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 할 필요가 있다. 통일교는 세계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면서 그 중심에 가정을 배경으로 삼는다. 나라도, 어떤 공동체도 아닌 오직 가정이 사회 구성 조건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초점이 이 가정에 맞추어져서 진행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통일교 조직이 우리 개신교 안에 너무 많이 침투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92년에 발표 된 통계는 287개 개신교 교회와 목회자 장로들이 통일교로 넘어갔다고 했다. 통일교는 재력이 많기 때문에 은행을 끼고서 건축에 문제가 많은 교회들을 중심으로 포섭을 한다는 말들이 회자되기도 하고 있다. 그리고 철저히 음성적 관계로 하자는 묵계가 형성 되기 때문에 통일교로 넘어 갔다 하더라도 양성적으로는 철저히 보호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35년 동안 통일교 총회에 총회장을 비롯해서 오랬동안 몸담았다 버림받은 사람이 개신교로 넘어 와 고백하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렇다면 20년이 되는 현재는, 그들의 적극적인 공세가 펼쳐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상상을 초월 할지도 모른다. 선교지에서도 예배를 인도하면서, 기도회를 인도하면서, 성경을 본문으로 채택을 하지도 않고 어떤 특정한 책을 읽고서 교훈식으로 설교를 하면서 가정을 중점적으로 설득을 하는 케이스는 통일교와 관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와 동일하게 교회 안에 들어 온 이들은 교회 안의 가르침의 위치에 올라가서, 혹은 통일교와 손을 잡은 이후 창세기의 창조 부분을 해석할 때 가정에 채널을 맞추고서 가정 중심에 두는 기법으로 재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현대의 이단들 가운데 큰 특징은 창세기 1, 2장의 해석에서 이미 자신들 교의 목적이 가미 되는 왜곡 된 해석을 일삼는다는 것이다.
통일교는 가정 중심을 본으로 삼기 때문에 교회 안에 들어 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이들은 교묘하게 성경의 중심적 포인트 문제들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다. 교회적 환경들이 급속도로 사회로부터 이질적 환경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전통 교회들 안으로 가만히 들어 온 이단들이 그만큼 수가 많아졌고, 이들의 활동이 더욱 강해 졌다는 반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내가 통일교요 하면서 그 짓들을 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히 외형적으로는 개신교 이름으로 활동을 하니 그 누가 미혹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 한국교회의 이단의 문제가 신천지 등의 심각함도 문제지만 앞으로 통일교의 문제가 밖으로 들어나기 시작하면 그 파급력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 사회, 세계의 가정문제는 갈수록 심각한 상황 가운데 놓이고 있다. 우리 모든 가정들마다 크고 작은 문제를 앉고서 살아간다는 점이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가정의 심각성은 교회 안에서도 중요한 위치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이 점을 통일교는 공략의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다고 통일교가 가정을 실제적으로 본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세계 통일을 목적으로 삼다보니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가정의 문제를 지렛대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나 통일교는 자신들이 목적하는 사회를 이루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적 가정을 타파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근본적으로 거짓 된 종교이기 때문이다. 이는 35년을 통일교 안에서 가장 최고의 지도자 그룹에서 살았던 사람이 이용만 당하다 인생을 보낼대로 다 보내고서야 통일교에서 나와 그 원통함을 토설한 고백 속에서 밝혀졌던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자신의 목적하신 바를 이루시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시기로 하신 것이다. 그것이 남녀로 지은 것이다. 여기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삶의 목적과 이유가 분명하게 제시 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엡1:5,9,11)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단들은 가정을 자신들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설정을 하고서 성경 해석을 마음대로 해대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이라는 의미 차제가 모든 사회와 사람들의 공공적인 힘을 끄집어 낼 수 있다는 이유가 매력이 된 것이지 정작 가정이 중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자신들 교의 목적하는 바에 가정이라는 힘을 이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들의 편으로 할 수 있다는 배경을 얻고자 함이다. 그래서 가정을 중심 위치에 올려 놓는 것이다. 이 가정 문제는 온 사회가 대 환영을 할 수밖에 없는 매우 매력적인 공감지대 였던 것이다. 교회나 성도들 조차도 전혀 의심 없이 그대로 수용하고 말 정도로 중요한 위치이지 않는가! 더욱이 말씀으로 풀어가니 그 누가 문제를 제기하고 확인하고자 하겠는가!
하나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남녀를 만드시고, 에덴에서 살도록 하셨다. 왜 남녀라는 가족 구성원으로 지으셨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문제다.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담과 하와는 타락 이전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는 삶을 살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중심이자 근원자 이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생성 되고 교회가 이 지상에 있어야 하는 이유와 연결 되는 인류의 근원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창조 직후의 가정은 타락으로 인하여 파괴되어지고 말았다. 하나님을 중심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겨야 하는 가정은 그 본분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철저히 하나님과 반대되는 가정으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오셔서 회복하셨는데, 그것이 교회를 통해서 드러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이 때 회복의 의미는 ‘다시’ 라는 부사적 강조의 의미로 적용되고 있다. ‘다시’는 ‘되돌아가다’라는 의미가 아니다. 다시라고 할 때 ‘구원하다’ ‘소생하다’ 라는 의미로써 그래서 교회를 설립하셨다는 의미가 성립되는 것이다. 이것은 사명의 중요성과 직결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명자들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 가가 요청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단들은 가정을 중심 위치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가정의 중요성이라는 필요충족의 도구의 위치에 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설득해가는 해석 용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을 세우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자신들 조직의 목적을 이루는 지렛대로 활용하는 성경 해석일 뿐이다. 그런데 실제적으로 이 효과는 대단한 파급력을 가져 오고 있다.
교회 안에는 점차 사명의 중요성이 모호해지고 그 초점이 가정에 맞추어져 가고 있다는 점이다. 모든 중심의 문제가 하나님의 문제에서 가정으로 옮겨가고 있는 과도기적 환경이 강해 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가정은 더욱 파괴로 나아가며 교회의 현실조차 무기력한 상황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단들이 노리고서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교활성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우리 교회의 현실이 이를 말해 주고 있지 않는가!
다음 편에 계속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