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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265~316)의 역사
1) 무제 사마염(265~290): 진나라는 낙양을 수도로 정한 서진과 건강(건업)을 수도로 정한 동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서진의 역사를 보면 건국자는 사마염이지만, 건국 시조격인 사람은 위나라 권신 사마의입니다. 사마의는 249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조씨를 약화시키고 실권을 쥐게 됩니다. 251년에 사마의가 죽은 후에도 그의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대를 이어 권세를 부립니다. 263년에 사마소가 촉을 멸망시키고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염이 위황제 조환에게 선양받는 형식으로 황제에 오르고 국호를 진으로 정합니다. 위나라 건국자 조비나 사마염은 모두 난봉꾼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조비는 부친 조조, 동생 조식과 함께 문화인으로서 깨끗한 기질을 갖추고 있었고 영웅적인 부친 조조에게 교육을 받았으며 조조가 등용한 많은 인재가 그를 보좌해 그의 시대에는 촉의 승상 제갈량도 감히 침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염은 철두철미한 술꾼에다 호색한이었습니다. 사실 조부 사마의와 백부 사마사, 부친 사마소의 공포정치로 많은 인재들을 죽이거나 청담으로 내몰아 제대로 된 인재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새로 선 국가라면 개국공신들이 능력이 있었으며, 자신들의 재능으로 존엄성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진 왕조의 개국 공신들은 거의 대부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인물들이었습니다. 그나마 인재라는 사람들은 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지는 청담 사상에 젖어 마약의 일종인 오석산을 복용하며 한가롭게 지냈습니다. 그래도 사마염은 즉위 초기에는 지방에서 올라온 여러 마리의 꿩들의 머리털로 이어 만든 모자인 치두구를 대주전 앞에서 불태우며 제법 근검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280년 오를 토벌해 천하통일을 달성하자 그의 본색이 드러나 그 후에는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습니다. 사마염은 황궁에다 1만 명이 넘는 희첩들을 두고 지냈는데, 그 자신도 매일 누구한테 가서 잘까를 고민했습니다. 그는 양이 끄는 수레를 타고 양이 멈추는 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영리한 희첩은 양이 좋아하는 소금울에 담근 대나무 잎사귀를 자기 거처 앞에 두고 양을 유혹하기도 했습니다. 군주인 사마염외에도 지배 계층도 썩어빠졌습니다. 승상 하증은 아들 하소에게 '막 창업된 국가라면 조정에 기운이 넘쳐야 정상인데, 매일 어전 회의나 연회에 참석해도 국가와 관련된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저 쓸데없는 이야기만 오고 가지 이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너희 세대는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손자 세대에 가면 재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증은 상당히 식견이 있는 인물이었으나, 자신은 하루 세 끼 밥에 1만전을 썼고, 아들 하소도 상다리가 휘어지게 푸짐하게 나와도 먹을 것이 없다며 투덜거리는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1만전은 1,000이 한 달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액수이었습니다. 사마염의 사위는 사람의 젖으로 키운 돼지고기를 사마염에게 자랑스레 선보였으며, 또 사마염의 외숙부 왕개와 부호 석숭의 대결은 사치의 극치에 이르렀습니다. 그들은 서로 한 방울에 마을 하나를 살 수 있는 금액과 맞먹는 맥아당과 백랍으로 그릇을 씻었으며, 비단으로 25km에 이르는 장막을 설치하고 황제의 외숙부 왕개도 하나 밖에 없던 산호수를 석숭은 6,7개나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석숭은 형주자사 시절에 상인들이 지나가면 군대를 동원해 상인들은 습격해 물건과 돈을 탈취해 부를 쌓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묵인되고 정당했던 시대가 부패한 진왕조 시대였습니다. 그 밖에 더욱 더 불행한 사실은 사마염의 적자인 황태자 사마충이 백치였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마염은 290년에 병사하고 사마충이 그의 뒤를 이었습니다.
2) 혜제 사마충(290~306): 사마충은 동진의 안제 사마덕종과 쌍벽을 이루는 중국 역사상의 백치 황제로 아주 어리석었습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어 죽는다는 소리를 들어도 '쌀이 없으면 고기라도 먹어야지, 왜 안 먹다는 말이오.'라고 궁금해 했으며, 비 오는 날에 연못에 청개구리들이 우리 소리를 듣고는 '쟤들이 왜 울지? 공적으로 울끼, 사적으로 울까?'라고 말했다고 하니 이런 사람이 황제가 되었으니 제국의 앞날은 도박을 하지 않아도 그 말로가 보였습니다. 사실 사마염도 황태자를 폐하고 동생 제왕 사마유로 자신의 뒤를 잇게 하려고 고려했으나, 사마유가 일찍 죽어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이에 그의 아들 사마경이 의사가 의심스럽다며 의사가 주살되기도 했습니다. 노신 위관이 연회에서 용상을 가르키며 '이 자리가 너무 아깝습니다.'라고 속삭였으나, 사마염은 '경이 너무 취했구료'라며 넘겼습니다. 그러나 사마염은 그의 속마음을 읽고 있어서 사마충에게 시험지를 내주어 답안을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 문제는 사마충이 풀기에는 불가능한 문제로 진의 개국공신 가충의 딸이며, 사마충의 부인 가씨(가남풍)는 학자를 하나 매수해 그에게 별도로 작성하게 한 다음 그것을 그대로 베껴 적게 했습니다. 답안을 본 사마염은 만족했으며, 위관도 놀라워 했습니다. 이렇게 그의 사마충은 즉위했으며 가씨는 아주 유능하고 총명한 여자로 조서를 내리고 싶으면 우선 자신이 먼저 적은 다음 그것을 조서 용지에 그대로 베끼게 하면 그만이었습니다. 황제가 백치라도 그의 친필이 최고의 효력을 지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실권을 쥐려는 그녀는 사마충의 어머니 양태후의 아버지인 사마충의 외할아버지인 양준과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궁극적으로 진왕조를 멸망시키게 된 원인인 8왕의 난이 시작하게 됩니다. 가씨는 양준이 군권을 장악하고 있어 사마충의 동생 초왕 사마위와 합작하여 양준을 죽이고 그의 삼족을 멸했으며 양태후는 감금되어 굶어 죽게 됩니다. 양준의 자리는 사마충의 작은할아버지 여남왕 사마량이 접수하게 됩니다. 이에 그의 손자며느리 가씨는 다시 사마위와 손을 잡아 사마량과 위관을 살해하는 데 성공합니다. 양준과 사마량을 제거하는데 사용된 수단은 모반죄를 씌우는 방법이었는데, 사마량 같은 경우는 황실에서 가장 명망 있는 원로로 가씨가 함부로 제거하면 위험하다는 것을 총명한 가씨는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양준의 경우와 조금 다르게 사마위에게 적당한 자리를 주어 달랬습니다. 사먀량이 제거된 후에는 가씨는 모든 책임을 사마위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사마위는 형장을 끌려나가 황제만이 상요하는 청색 종이에 사마충이 직접 쓴 조서를 꺼내 담당관에게 보여주며 호소했으나, 정치적 사건은 법과 무관했습니다. 그제서야 이용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 사마위는 후회했지만 결국 참수되고 말았습니다. 8왕의 난은 사마씨 왕들이 서로 원수끼리 복수하는 식으로 서로 죽이고 다른 사람이 그를 죽이는 어리석은 짓거리였습니다. 애초에 사마염은 위나라가 멸망한 이유로 조비가 조씨 황족을 약화시킨 것으로 보게 되어 사마씨 황족 왕에게 군대를 보유하게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변방에는 대규모 부대를 주둔시키지 않아 8왕의 난 이후에 오랑캐들의 침입인 영가의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가씨가 대권을 장악하자, 사마위가 처형된 이 후부터 사마씨 왕들은 가씨 세력을 제거할 명분을 찾게 됩니다. 가씨는 두 딸만 있을 뿐 아들은 낳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미소년들과 간통하며 죽여서 버리기도 하고, 선물을 주면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가끔씩 그들이 궁문을 나가다 적발되면 그들이 사실을 호소하면 경비들은 그들을 그냥 보내주곤 했습니다. 사마충은 희첩 사씨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사마휼을 낳게 됩니다. 300년, 가씨는 황태자 사마휼을 미워해 독약을 태운 약을 보내 마시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절하자 결국 사마휼은 약찧는 절구에 찍혀 죽었습니다. 이 때, 명분을 찾던 사마씨 왕들 중의 하나인 사마충의 작은할아버지 조왕 사마륜은 참모들의 계획 아래, 황태자가 억울하게 죽었으며 그를 위해 복수하자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이끌고 정변을 일으켜 가씨 척족들을 도살하고 가씨는 예전에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 조환의 영지이며, 황족만을 감금하는 낙양 북서쪽 금용성에 감금하고 금가루를 집어넣은 금설주를 먹여 죽였습니다. 사마륜은 양씨를 새로 혜제의 황후로 봉했습니다. 사마륜은 정권을 장악하고 승상이 된 후에 다음 해인 301년에는 아예 사마충을 감금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습니다. 이에 사마염의 조카인 제왕 사마경은 다시 황제를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군대를 일으켜 낙양을 함락시키고 사마륜을 사로잡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사마륜은 황제 노릇을 네 달하다가 역시 금용성으로 보내져 금설주를 먹여 죽었습니다. 사마경은 황제를 다시 추대하여 복위시켰습니다. 사마경은 승상이 되어 처음에는 그럴 듯한 식견을 보여주었으나, 사마충의 황권을 약화시키고 모든 일을 자신의 집에서 처리하고 관리들을 궁궐이 아닌 사마경으로 집으로 찾아서 지시를 하는 등 멋대로 처리했습니다. 이에 302년, 사촌동생인 장사왕 사마예가 역시 황제보위라는 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사마경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사마예는 군대 수가 적어 그의 동생 업성 사령관 성도왕 사마영과 먼 친척 아저씨인 장안 사령관 하간왕 사마옹이 연합하여 낙양을 점령해 사마경을 토벌했습니다. 사마옹은 큰 변수로 작용해 다시 사마충을 폐위시키고 사마영을 황제로 올리고 자신은 승상이 되어 보좌하게 되었습니다. 304년, 낙양성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사마예는 사마옹에게 체포되어 사마옹의 대장 장방의 군영을 보내져 잔인하게 석탄불에 구워 죽였습니다. 사마옹은 승상에서 황태제가 되어 자신이 제2인자라는 것을 과시했습니다. 306년 사마영의 먼 친척 동해왕 사마월과 사마염의 차남 예왕 사마치가 군사를 일으켜 10월에 장안과 낙양을 함락시키고 달아나던 사마영과 두 아들을 업성의 감옥에서 목 졸라 죽였습니다. 장방도 잔인하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마월은 낙양으로 사마충을 맞이하여 파괴된 낙양으로 환도했습니다. 이 때 소 달구지에 탄 사마충을 제외한 나머지 관원들은 모두 걸어서 들어왔습니다. 304년에 흉노족 유연과 저족 이응은 각각 평양과 성도에서 한조와 성한 제국을 각각 건립해 점점 천하는 분열되어 갔습니다. 306년 12월에는 사마월이 사도 자리를 준다는 말에 속아 낙양으로 오다가 신안에서 세 아들과 사마월이 보낸 사람에게 수레에 앉은 채로 목 졸라 죽었습니다. 이렇게 8왕의 난은 끝났습니다. 동해왕 사마월은 8왕 중 유일한 생존자로 306년에 백치 황제 사마충을 떡에 독을 넣어 독살시키고, 사마치를 황제 자리에 올렸습니다.
3) 회제 사마치(307~312): 사마치는 역시 사마염의 아들로 사마충과는 배다른 동생이었습니다. 사마치는 나라를 잘 다스려보겠다는 마음을 가졌으나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정권을 잡은 사마월이 마음대로 독재를 해 좌절되었습니다. 309년에 사마월이 낙양 전방의 군사 도시 형양을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낙양으로 군대를 돌려 궁궐에 난입해 재상들과 고급 관리 10여 명을 잡아다 모반죄로 씌워 모조리 참수했습니다. 사마월이 사마치에게 겁을 주기위한 공작이었습니다. 한편, 한조의 황제 유연은 304년에 죽고, 그의 태자 유화가 잠시 이었다가 동생 유총의 의해 살해되어 유총이 황제에 올랐습니다. 그는 갈족 출신 대장 석륵의 유격대를 보내 수도 낙양으로 통하는 모든 교통로는 막아서 고립시켰습니다. 식량 공급이 끊겨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자, 사마월도 그제서야 위협을 느끼고 대처준비를 마련했습니다. 310년 겨울, 사마월은 아내 배비와 자신의 세자인 아들, 그리고 장수 한 명하게 낙양을 수비하게 하고, 자신은 장강 유역으로 통하는 식량로 하나만이라도 뚫으려고 군대를 남쪽으로 출격시켰습니다. 허창을 지나 311년 봄에 항성이 이르러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그의 군대는 낙양으로 가지 못하고 동해왕 사마월의 관을 그의 봉국 동해국으로 보낼 생각을 해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석륵한테 격파되고 말았습니다. 이에 태위 왕연과 관리, 여러 사마씨 왕들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석륵은 왕연에게 패배한 상황을 물었습니다. 이에 왕연은 청담으로 천하에 떨친 명성과 다르게 비굴하게 관리가 될 생각도 없었고 정사에도 관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석륵에게 한조 정권에서 이탙해 황제가 되라고 꼬셨습니다. 그 밖의 다른 관리들과 왕들도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석륵은 이들에 대해 분노해 이들을 모두 담장을 무너뜨려 깔려 죽게 했습니다. 이 소식에 낙양에 전해져 황제를 버린 장수들은 사마월의 부인 배비와 세자만 호송하여 밤에 동해국으로 달아났습니다. 낙양 백성들도 군대를 따라 도망치느라 압사당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석륵이 매복하고 있었던 허창 북동쪽 유수에서 배비, 세자를 포함해 48명의 사마씨 왕들이 모조리 생포되었습니다. 석륵은 이들을 모두 한조의 수도 평양으로 보냈는데, 유총은 이들을 모두 노예로 삼았습니다. 이 중 배비만 겨우 달아나 강남으로 도주했습니다. 사마치는 버려졌으나, 창원에서 한 장수가 충성을 드러내 그곳에 몸을 맡기려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관리와 권속들이 낙양 황궁을 나와 남문으로 통하는 번화가인 동타가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거리에는 잡초가 무성했으며, 굶주린 백성들은 서로 잡아먹고 있었습니다. 군중들이 황제를 공격하자, 사마치는 내가 황제라며 고함을 질렀지만, 이미 미쳐버린 군중들은 피둥피둥하게 살이 찐 사마치가 맛있어 보였던 것입니다. 결국 황궁으로 돌아와 죽기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에 유총과 그의 조카 유요가 친히 이끄는 한조의 대군이 밀려와 낙양을 함락시키고, 사마치 및 황제 일족들을 생포했습니다. 사마치는 왕연처럼 유총에게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자, 일단 유총은 수도 평양으로 끌고 와 후작에 봉했습니다. 혜제의 황후였던 양씨는 유요가 부인으로 삼았습니다. 유요가 그녀에게 사마씨들을 어떻게 평가하냐고 묻자, 양씨는 비웃으며 한심한 족속들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마치는 후작에 봉해졌어도 평민 복장을 하게 하여 연회 때마다 노예들과 함께 손님들에게 술시중을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313년 싫증이 난 유총은 그를 죽여버렸고 이 사실은 장안에 전해졌습니다.
4) 민제 사마업(313~316): 사마업은 사마염의 아들 오왕 사마안의 아들로 안정태수 가필 등이 이미 점령당한 장안을 탈환시키고, 그를 황제로 등극시켰습니다. 장안은 낙양보다 상태가 심각해 몇 년째 가뭄에 겨우 90여 호의 민가와 네 대의 달구지만 남아있었습니다. 억지로 몇 년을 버텼던 사마업은 316년에 유요가 장안을 공격하자, 사마업은 바로 투항했습니다. 역시 유총은 그를 후작으로 봉하고, 이번에는 사냥하러 갈 때 무기를 들고 호위하게 하고, 변소에 갈 때 부채를 들게 했습니다. 그러나 가을에 결국 죽음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영가의 난으로 서진은 완전히 멸망하고, 거의 모든 황족들도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사마의의 6남인 낭야왕 사마주의 손자 사마예는 8왕의 난 시대에 안개를 이용해 남쪽으로 도주해 목숨을 건지고, 사마업이 평양으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옛 오나라의 수도 건업에서 진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317년에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진황제에 즉위했습니다. 그는 사마업의 이름인 '업'을 피해 건업의 이름을 건강으로 개명하고 수도로 삼았습니다. 이를 동진이라 합니다. |
내용출처 : [직접 서술] <진서(晉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