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 토요일 날 나는 계속 혼자였다. 아무나 만나고 싶었지만 만날 사람이 없었
다.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것이다.
정희 누나가 생각이 났지만 그녀는 임자가 있는 몸이다. 어디 외로운 사람이 없
나? 내 친구들? 학교 가면 만날 그 새끼들 만나서 뭐 하겠나. 혼자 있으니까 좋
다. 쓸쓸해서 좋다. 예전엔 혼자 있어도 그러려니 했는데...
날 이렇게 만든 은정이 누나야, 잘 살아라.
토요일날 하루 종일 집에만 있었다. 삐삐는 한 번도 울리지 않았다. 아버지가
귀가 하시고 잠시 거실에 나와 같이 앉아 있었다. 요즘들어 아버지는 동생이 학
원 차를 타고 오게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가 직접 가서 데리고 온다. 곧 수능 시
험이 있다. 그래 아버지, 공부 잘하는 딸 두셔서 좋겠수. 나는 장가갈 때 집한
채 사주는 걸로 끝내고, 이 건물을 포함 한약방은 동생이 한의대만 합격하면 바
로 물려 주실 것 같다.
"여보세요? 철수 바꿔달라구?"
누가 이 시간에 내게 전화를 한겨?"
"아, 알겠다. 너도 철수보다 나이가 많지?"
"제 전화면 그냥 주세요. 그 자꾸 나이 이야기 하지 말구요."
"잠깐 기둘려 봐. 너 임마 왜 나이 많은 여자들하고만 놀아?"
"저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은정이 누나는 아닌거 같다.
승주가 날 찾아 왔었어요. 학교까지 찾아 올 줄은 몰랐었는데... 그는 나를 난
처하게 만들었지요. 사람들 많은 약대 앞 현관에서 승주 때문에 난 아주 난처했
었습니다. 그런데 날 난처하게 만든 그가 싫기는커녕 오히려 좋아 보였습니다.
그에게 그런 면이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는 내가 장난삼아 말한 265송이의
꽃을 품고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릎까지 꿇은 모습으로
그 꽃을 내게 주었지요.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색한 것을 싫어 했어요. 좋아하는 마음만 있으면 그 것으로 만족하던 사
람이었지요. 그래서 자기가 보여 주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에겐 늘 한 발 물
러서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승주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이 비집고 들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든 뺏길 수 있
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내게 다시 돌아 오려 합니다. 내
가 누구를 마음에 품고 있는지, 내가 또 누군가를 사귀고 있는지 그런 것은 염두
해 두지도 않은 모습으로 말입니다. 나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는 각오를 단단히
하고 왔습니다. 정말 예전 승주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작년 봄, 그가 휴가 나왔을 때 우리 빌라에 사는 청년과 마주했을 때가 생각나
네요.
"당신 뭐야?"
"그냥 친굽니다."
승주는 나를 집에 데려다 주다 우리집 옆 동 청년을 만났지요. 내 손을 잡아 자
기에게서 나를 뺏앗아 가는 그 청년에게 그가 대답한 답은 그냥 친구라는 말 뿐
이었습니다. 자기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에게 그 말은 비수 같았지요. 그
청년이 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몇 발짝 떨어져 주기까지 했었지요. 그리고
자기 때문에 흘린 눈물을 그 청년 때문에 흘린 것이라 오해를 하고선 힘없이 미
소 지으며 돌아 섰었지요. 그런 그가 용기를 내어 내게 다시 왔습니다.
남자는 첫사랑을 꿈 꾸고, 여자는 마지막 사랑을 꿈 꾼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
자는 마지막 사랑을 간직하고 여자는 첫사랑을 못 잊는다고 합니다.
승주는 내 첫사랑입니다. 솔직히 그를 아직 잊지 못했습니다. 자리가 어색했던
탓도 있었지만 나는 그를 따라 가고 싶었습니다. 그냥 편히 승주를 따라 승주의
마음을 받아 드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내가 먼저 마음을 고백했던 사람이니
그의 마음을 받아 들이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습니다. 자존심? 그런 것
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예전으로 아니, 좀 더 발전된 관계로 돌아
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내가 마음만 먹는다면 나를 찾아온 승주의 모습에서
는 분명 그럴 것 같았습니다.
흠, 승주를 따라 나오다 자판기 뒤에 숨어 있던 철수를 보았습니다. 내 난처한
모습을 다 지켜 보았던 것 같았어요.
철수는 승주 보다는 소극적이지 않았지요. 옆 동 청년이 나타났을 때에도, 올
봄 내가 술취한 과동기에게 맞았을 때도 철수는 물러서는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자판기 뒤에 숨어 있던 철수에게서 옛 승주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한 발짝 물러
나는 것도 모자라 숨어 있는 철수, 그런 철수가 내게 다시 다가 온 승주에게 쉽
게 가지 못하게 할 것 같습니다.
아까 약대 앞에서 모습과는 다르게 승주는 단 둘이가 되자 어색해 했습니다. 침
묵의 시간이 흘러 가고 승주는 계속 목적지 없는 곳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승주
가 준 꽃 다발을 안고 조수석에 앉아 바깥 풍경을 쳐다 보았지요. 오후가 물든
늦가을 논 바닥의 허수아비는 홀로 외롭지만 시선을 받네요.
"다시 학교로 돌아가자."
"그래. 꽃 받아줘서 고맙다."
"흠, 널 다시 봤어."
"전에 내게 고백했던 거 지금은 받아 드릴 수 있겠어."
"그렇게 쉽게 될 줄 알았니?"
"힘들겠지."
"그래."
"후, 그래도 잊혀지는 것 보단 친구로 남아 있는게 좋을 것 같다. 그리고 다시
그 고백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게."
"훗! 왜 변했어?"
"네가 잊혀지지 않으니까. 그리고 가을하늘이 너무 높더라."
"추상적인 말은 싫어."
"자주 연락할게."
"다시 널 만나는 것은 자신있지만 널 예전처럼 사랑할는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괜찮니?"
"괜찮아."
"오늘은 그냥 집에 데려다 줘."
어디까지 갔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학교 앞으로 오니 겨울 해는 일찍 져 버
리고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승주는 날 그냥 보내지 않더군요. 뭔가 망설이더
니 내 어깨에 손을 올렸습니다. 그리고 입술만 닿았지만 그는 나에게 짧은 입맞
춤을 해 주었습니다. 그의 각오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지요. 그렇게 달콤하
지는 않았지만 가슴을 떨었습니다. 피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짧은 그 순간 난 그 만을 사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창 밖으로 아주 희
미한 노을의 흔적이 하늘에 걸려 있습니다. 골목길...옥수수가 죽어 있습니다.
한 동안 내게 다시 다가온 승주 때문에 가슴이 떨렸지요. 고운 미소가 맺히기
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잠옷으로 갈아 입을 때 이 옷을 준 녀석이 생각이 났습니
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오늘 승주가 내게 보여 주었던 행동과 자판기 뒤에
숨어 있었던 철수를 번갈아 떠 올려 보았습니다. 모르게 내 마음 속으로 헤집고
들어 온 철수는 잊기 싫은 존재가 되어 버린지 오래 전이지요. 승주가 없는 동
안 철수와 지냈던 그 정겨움을 계속 갖고 싶습니다. 연하라 생각치 못했던 철수
에게 품었던 감정들이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알아 가고 있습니다.
철수와 지냈던 시간은 승주와 지냈던 시간보다 오히려 더 정겨운 것이었습
니다.
박철수. 그와 지내면서 승주 생각을 자주 했었지요. 그리고 철수 때문에 승주
를 잊어 갔었습니다. 승주를 만나면 그 반대가 되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가
싫어요. 철수와 지내면서 승주 생각은 하겠는데,승주를 만나면서 철수를 잊어 가
는 건 하기 싫습니다. 내가 연인을 만들어 가면서 동생같은 철수를 생각하며 아
파하는 꼴은 참 웃길 것 같습니다. 연하면 연하 답게 굴 것이지. 우연히 만났던
승주 때문에 일주일 동안 나를 피했던 철수가 오늘 승주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을
보았으니 또 날 피하겠지요?
내가 승주를 만나 연인사이가 된다면 철수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을 것 같습니
다. 훗, 녀석은 나를 독차지 하고 싶은가 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나를 자기
의 연인으로 만들어야지요. 연인 사이였다면 오늘 찾아 온 옛사랑은 눈물을 흘리
며 가지고 왔던 꽃다발을 어딘가에 버렸겠지요. 내 마음이 누군가로 완전히 채워
지지 않았기 때문에 옛사랑을 받아 들였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승주에겐 좀
미안하지만요. 그러지도 못하면서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볼 자신이 없
다? 참 이기적이네요. 연하라서 그런가요? 내가 더 이기적인가 봅니다. 내가 철
수를 연인이라 생각한 적이 있던가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이 철수와 승주를
재고 있는 것 같네요. 철수를 잃기가 싫어서 내게 유리한 생각들만 하나 봅니
다. 승주를 만나도 철수와 지냈던 그 시간들을 공유할 수 있다면 승주를 부담없
이 만나겠습니다. 철수 생각 때문에 밤 늦게 승주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야 은정이."
"응. 왜?"
"오늘 입맞춤 그거 친했던 친구와 다시 만났기 때문에 한거지 다른 뜻은 없는
거야?"
"그 말을 왜?"
"한 번 더 말할 게. 오늘 우리는 친구로 만난것이지, 연인으로 만난 건 아니라
는 거. 내가 예전에 고백했던 것은 잊어."
"어, 응. 그럴게."
"잘 자."
승주와 함께 내게 온 저 화려한 265송이의 장미는 올 해를 넘기기전에 모두 시
들어 버리겠지요. 훗!
지금 입고 있는 이 잠옷은...
철수는 예상대로 연락을 끊었습니다. 승주를 만난 바로 다음 날부터 철수는 도
서관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이없게도 철수는 자취생활도 포기했나 봅니다. 내
근처엔 오기도 싫다 이건가요? 이틀전에 철수 방 문틈에 끼워 놓았던 어느 음식
점의 광고 전단이 오늘도 그대로 꼿혀 있습니다. 철수는 통학을 하나 봅니다. 내
가 자기를 찬거야 뭐야. 그거 아니잖아. 그리고 같이 있다가 어색한 상황 벌어
진 것도 아니고 자기가 숨어서 봤으면서 왜 날 피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대학원 시험 때문에 금요일날 서울로 가지 않았습니다.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
있었어요. 열한시가 다 되어서 도서관을 나왔는데 눈이 내리고 있더군요. 철수에
게 약속한 게 있지요. 녀석은 내게 전화하지 않았습니다. 방에 혼자 있다 철수에
게 삐삐를 쳐 줄까 하다 그냥 포기했습니다. 니가 그렇게 나오면 나도 널 찾지
않을테다. 옛사랑도 돌아 왔는데 내가 아쉬울 게 뭐 있냐. 그때. 승주에게 전화
가 왔습니다.
"밤 늦게 앤일이야?"
"대학원 시험 때문에 요즘 바쁘지?"
"응."
"주말에 한 번 봤으면 좋겠는데."
"이 번주는 힘들겠다. 다음 주에 대학원 시험 봐야 돼. 또 곧 기말 시험 있잖
아. 약사 고시도 떡 버티고 있고."
"계속 바쁘겠구나."
"응. 오빠는 바쁘지 않아? 참 오빠는 코스모스 졸업이지?"
"오빠 소리 하지 마라 야."
"하하, 아직 조금 어색한가 보다. 예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오빠 소
리가 나왔어."
"너, 사귀는 사람 있니?"
"왜? 예전처럼 피해 주려구?"
"아니야. 그냥 내가 받은 느낌 때문에 물어 본거야."
"사귀는 사람 없어. 그리고 내가 언제 연인 사이로 사귄 사람이 있었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제법 있었지."
"훗, 그랬었나?"
"참, 거기도 눈 오니?"
"응. 서울도 눈이 와?"
"제법."
"오늘 전화는 내일 만날까 하는 것 때문에 한거야?"
"안부 묻는 것도 포함 돼. 열심히 하되 건강도 생각 해."
"알았어. 전화 해 줘서 고마워."
"별말을. 참, 그 후배는 잘 살고 있니?"
"철수? 녀석이 또 삐쳐서 날 안만나 주네."
"안 만나 줘? 너에게서 처음 들어 보는 말 같다."
"응?"
"정희씨는?"
"걔는 뭐."
"그래 오늘 밤 좋은 꿈 꿔라."
"알았어. 오빠도 잘 자."
"또 오빠라고 그랬다."
"곧 예전으로 돌아가겠지 뭐. 안녕"
철수 생각하다 승주 전화를 받으니까 승주가 다소 어색하게 느껴졌나 봅니다.
승주에게 밤 늦게 안부전화를 받으니 기분이 괜찮네요. 철수야 날 피하면 너만
손해다.
승주와 전화 통화를 한 후 얼마 안 있어 전화가 한 통 더 왔지요. 늦은 밤이었
기에 철순가 했었지요. 정희였어요. 얘는 양반 되기는 힘들겠어요. 정희의 목소
리가 많이 가라 앉아 있었습니다.
"나 대학원 시험 본다고 전화 한거야?"
"아니. 그냥 전화할 사람이 없어서."
"뭐야 너?"
"그거 한 번 알아 봐 줄래?"
"뭘?"
"학교 앞에 빈 상가가 있는지."
"왜?"
"나 약국 차리게. 나 저 번주에 사표 냈어."
"응? 사표를 내? 일년도 못채우고?"
"헤헤, 육개월만 넘으면 경력으로 인정 되잖아. 나 철규씨랑 헤어졌다? 한 달
가까이 됐어."
"응?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냥 잊기로 했어. 잊을 자신이 충분히 있으니까."
"왜? 싸웠어?"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너무 손해 본다고 생각했어."
"뭐야? 너 잊을 자신은 있는거야? 많이 좋아했었잖아."
"그 얘기는 접어 두자. 상가 있는지만 알아봐 줘. 내가 모은 돈은 턱없이 부족
하지만 부모님 도움을 좀 받아서 작지만 내가 직접 약국을 경영할거야. 난 지금
까지 너무 끌려 가는 생활만 했던 거 같아."
"정말 그렇게 할려구?"
"응."
"근데 왜 학교 앞에서...?"
"니가 예전에 학교 앞을 생각해 보라고 했잖아."
"그럼 학교 근처에서 살겠네?"
"당연히."
"야, 잘됐다. 나랑 계속 보겠다 그럼."
"그래 기집애야. 학교 근처서 하게되면 심심하진 않을 것 같애. 친구들도 종종
찾아 와 줄테고 바쁘면 너에게 약국을 맡겨도 될테니까. 그리고 셔터 맨도 있잖
아."
"셔터맨? 누구?"
"철수. 녀석에게 전화를 했더니 자기가 셔터맨 해 주겠대. 아주 잘됐다고 그러
던데?"
"그래? 치. 철수가 내 얘기 안 하던?"
"했어. 네 얘기 하니까 잘 먹고 잘살아라.라고 전해 달라던데?"
"뭐야?"
"너, 승주 다시 만났다며?"
"응."
"그래 예전 느낌이 들던?"
"아직은..."
"나는 철규씨와 헤어지고 나서 딱 일주일을 울었어. 그 걸로 끝이야. 더 이상
철규씨에 대한 미련은 없어. 아니다라고 생각하니까 그 사람에게 가졌던 감정이
깨끗이 없어 졌어. 훗, 그리고 다시 그런 감정들이 생길 것 같지 않아."
"무슨 말 하는거야?"
"물론 넌 나와 다르겠지만 그냥 추억 속으로 묻어 두는게 오히려 나을 수도 있
어."
"나는 잊고 싶어서 잊은게 아니잖아."
"예전 보다 더 조심스러울텐데?"
"그럴까?"
"나도 잘 몰라."
"사람마다 틀리겠지."
"참, 너 철수에게 잘 해라?"
"응? 그 녀석 내게 삐쳤어."
"삐칠만 해."
"왜 삐쳤대?"
"그걸 왜 내게 물어 보니? 하여튼 나 약국 차릴만한 상가 있으면 연락해 줘.
이 번달 말에는 몇 일 네 방 신세를 좀 져야겠다."
"그래."
"전화 좀 해라 기집애야."
"너도 안 했잖아."
정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매정하지 못할 것 같던 그녀가 연인과 헤어졌다는
말을 참 담담하게 했습니다. 정희가 내 곁으로 온다. 내가 질투하게 될 지도 모
르겠군요.
"전화 바꿨습니다."
"나야, 정희."
"어? 누나가 왠일이에요?"
"너 목소리 듣고 싶어서. 사랑하는 사람 생겼다고 통 연락이 없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어딨어? 잠깐만요."
아버지의 눈초리가 날카롭게 변했다. 씩 웃어 주고는 전화기를 들고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왜?"
"울 아버지 옆에 계셨어요. 어쩐 일이에요?"
"나 잘하면 다시 학교로 갈 것 같애."
"그래요? 대학원 갈거에요?"
"아니. 약국 차릴려구."
"에? 좋은 직장 놔두고 왜 약국을 차려?"
"철수 보고 싶어서."
"나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는데, 약국 차리는 거 하고 무슨 상관이야."
"너네 학교 앞에다 차릴려구."
"우리 학교 앞에다? 누나는 우리 학교 안 나왔수?"
"차리게 되면 자주 놀러 와."
"약국 차리면 내가 셔텨맨 해 주지 뭐. 누나는 내 첫사랑이잖수."
"후후, 은정이와는 잘돼 가?"
"은정이 누나, 승주 그 새끼 만나잖아. 요즘 통 보이지도 않아요."
"은정이가 승주씨를 만나?"
"승주 그 새끼가 꽃을 무식하게 많이 싸가지고 학교로 찾아 와 완전 쌩 쇼를 했
다는 거 아닙니까. 누나가 그냥 좋다고 따라 가 버리대요."
"질투하니? 승주씨보고 자꾸 새끼라 그런다? 너보다 세살 많아."
"대통령도 안 보는데선 욕하는데 뭐 어때. 그나저나 오늘 누나가 전화해 줘
서 조금 위안이 되네요."
"나도 위안 좀 받으려고 했는데 접어 둬야 겠다."
"위안?"
"흠, 나 철규씨랑 헤어졌다? 그리고 병원도 그만뒀어."
"정말요?"
"잘됐지?"
"뭐가 잘돼? 왜 그랬어요?"
"잘됐잖아. 너 예전에 했던 말 물리면 안됀다. 나중에 애인에게 차이게 되면
너 찾아 오라고 했지?"
"차였어요?"
"내가 찼다."
"헛! 누나는 생각보다 매정한 거 같애요."
"그 말을 왜?"
"누나가 그 사람하고 사귄게 몇 년이야? 누나는 참 순정파인거 같았는데, 결국
은 헤어지는군요. 누나가 항상 그랬죠? 밋밋하지만 그게 편할 것 같다.라는 말.
왜 이제는 헤어지는 게 더 편할 것 같던가요?"
"응."
"지금 그 사람 많이 생각나지는 않죠? 누나가 그 사람 얘기를 할 때 목소리가
전혀 바뀌지 않았어요."
"헤어진 지 한 달 가까이 되어가."
"혼자서 너무 많은 걸 정리하지 말아요."
"니 걱정이나 해. 은정이가 승주씨를 다시 만난다? 넌 차이겠네?"
"내가 언제 은정이 누나하고 사겼어요?"
"사랑한다며?"
"우쒸, 내가 언제 사랑한다고 했어요. 맘이 있다고 했지."
"그게 그거지 뭐. 은정이는 철수를 후배로만 생각했을테고, 그리고 옛사랑이 다
시 나타났다? 승주가 언제 찾아 왔었니?"
"삼일 전에요. 둘이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래!"
"은정인 나보다 덜 매정해. 끊고 맺고 하는게 겉으로 보기에는 확실한 거 같지
만 나 보다 더 여린 애야."
"그래서요?"
"그렇다는거지. 네 생각 많이 할걸 아마."
"됐어요. 누나 언제 약방 차릴건데요?"
"약국이다 임마. 아마 12월달 중순?"
"이제 애인도 없으니까 크리스마스가 참 쓸쓸하겠네요?"
"철수하고 보내면 되지 뭐."
"내가 뭐 항상 솔로로 있을 줄 알아요?"
"후후, 은정이 아니면 나겠지 뭐."
"철수야 전화기 가져 와!"
"저 소리 들었죠?"
"응. 이만 끊을게."
"네. 약방 차리게 되면 자주 놀러 갈게요."
"그래. 안녕."
나이 많은 여자 하나가 내 삶 속으로 돌아 오려 한다. 내 주위엔 왜 나이 많은
여자들만 있는 겨. 정희 누나를 좋아하지만 이제 은정이 누나에게 갖는 그런 감
정은 없다. 그래도 쓸쓸했던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은정이 누나가 승주를 만나
면 난 정희 누나를 만나면 된다. 잘해 봐라 그래.
정희 누나가 했던 말이 기분 나쁘다. 자기 아니면 은정이라구? 세상 반이 여자
다. 다 공주병 환자들이여. 씨.
제목 연하가 뭐 어때.33회
일요일날 곰곰히 나 혼자 생각하다 답도 없는 답을 내렸다. 은정이 누나가 좋긴
하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다. 누나는 승주가 준 그 꽃다발을 들고 내 곁을 내겐
시선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내게 좋은 모습 많이 보여주며 내 마음을 빼앗아
간 것은 누나가 외로웠기 때문이었나 보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누나 본의에
의해서다. 내게 승주 그 새끼가 가져 온 꽃다발을 원했던 건 나를 그 사람에게
잠시 견주어 본 것.
누나에게 가졌던 마음을 이 쯤에서 접자. 흠, 이제 더 이상 누나 곁에 있는다
는 건 무의미하다. 나 승수를 질투한다. 그런 질투심에서 나오는 추잡한 행동들
로 난 비겁해질 것 같다. 은정이 누나는 그런 나에게 실망을 하고 날 나쁜 놈으
로 정의 내리겠지. 그리고 이름없이 사라져간 누나 인생의 엑스트라들처럼 그렇
게 잊혀 질것이다. 나도 내 인생에선 내가 주인공이다.
헛! 헛웃음이 나온다. 누나에게 아직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사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왜 누나를 피해 다니면서 며칠 통학을 했을까? 늘 하던대로 하면
된다. 누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 시간 전의 모습으로 말이다. 은정이 지가 뭔대.
은정이 누나를 봐도 절대 어색한 표정이나 초라한 모습 보이지 말고 당당하자.
그리고 더 이상 누나에게 마음이 가지 않도록 불친절해지자. 옛사랑이 꽃다발 들
고 찾아 왔다고 그냥 가버린 여자에게 내가 무슨 의미가 되었겠나. 나는 그냥 친
한 후배였을 뿐이다. 나만 홀로 앞서 갔었던 것일 뿐, 누나는 나를 의미있는 존
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주가 그런 모습 보여 준게 고맙다. 내가 하지
못했던 그런 짓, 그래 승주 넌 아주 쪽팔리고 밥 맛 떨어지는 그런 유치한 짓을
했지만 누나나 나에게 잘 한 것이다. 박 철수, 은정이란 나이 많은 여자에게 태
연해 지자.
아버지 말씀처럼 나이 많은 여자에게 너무 정주지 말자.
월요일 아침에 새로운 기분으로 학교를 갔다. 아침 수업 포기하고 아주 늦은 아
침에 집을 나왔다. 레옹처럼 모자를 쓰고 한 손엔 화분을 들고 전철을 탔다.
롱코트는 없어서 못 입었다.
화분을 들고 자취방으로 들어 가다 은정이 누나 방 문을 쌔게 걷어찼다. 지금
이 시간에 방에 있지는 않겠지. 나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아무리 태연해 지기로
마음 먹었지만 방 문 걷어차는 것은 한 동안 계속 해야 겠다. 걷어 차자 마자 문
이 열렸다.
"너, 뭐야?"
"엉?"
은정이 누나의 모습을 보자 많이 반가웠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
었다는 듯 날 쳐다보는 저 가증스런 얼굴. 내 숨어서 다 봤어. 아휴, 친한 척 하
기도 싫다. 그냥 모른 척 내 방쪽으로 갔다.
"야, 박 철수!"
부르면 내가 대답할 것 같냐? 못 들은 척 내 방 문고리에다 열쇠를 꼿았다. 문
을 따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보였다. 그래도 한 번 뒤돌아는 봐야 겠
지? 멀뚱히 날 보고 서 있는 누나가 얄밉다. 지나간 사랑도 못잊는 바보 같은
뇬. 어디 잘돼나 보자.
이제 내 사랑은 이 화분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다 화분을 올려 놓았다. 그
승주가 준 266송이의 장미는 한 번 시들면 그 뿐, 다시 피어나지 않겠지만 이 장
미나무는 내년에도 후 내년에도 꽃을 피울 것이다. 266송이를 피울 때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어린 왕자가 꿈 꾸던 그 장미다. 내 여인이 생기면
이 화분에 핀 장미를 마주 보며 사랑의 속삭임을 나눌 것이다.
에이쒸, 문을 잠궈 버리는 건데. 지 방이여 뭐여. 왜 남의 방을 저렇게 맘대로
들어오냐. 은정이 누나의 옷차림이 외출하려는 모습인데, 갈 길이나 가지 여긴
왜 들어온 겨?.
"왜 남의 방에 맘대로 들어와요?"
"너 또 삐쳤지?"
"내가 뭐요?"
"너 왜 날 또 피하는거야?"
"내가 누나 안 만나면 그게 피하는거에요? 그냥 보기 싫으니까 안 찾는거지. 누
가 피했다고 그래."
"그게 그거지. 너 저 번주에 통학했지?"
"통학 하면 안돼나?"
"말투가 왜 그래?"
"이런 말투 한 두번 듣는 것도 아니잖아요?"
"너 그럼 나도 삐친다?"
"삐치던지 말던지. 누나는 좋겠수, 첫사랑이 돌아와서..."
"너 정말. 니가 내 애인이야 뭐야. 그 일로 니가 날 왜 피하는데?"
"피한거 아니라니까. 꽃다발이 좋던가요? 그냥 따라 나가 버리대?"
"그런 상황에서 내가 따라 가지 않았음? 나 사람 많은 그 자리에서 매정히 그
사람 행동을 물릴 칠 수 있을 만큼 나쁘고 독한 여자는 아니야. 자리가 어색했잖
아."
"누가 뭐래요? 참내, 예전 태수형에겐 잘만 그러더만. 밥 사준다고 오랬으면
서. 첫 눈 오면 눈 쌓인 거릴 같이 걷자고 하고선. 옛 사랑 나타나니까 나는 하
나도 생각나지 않죠? 나는 뭐 사랑하는 사람 생길 때까지의 심심풀이였나봐. 에
구 불쌍한 박철수."
"야, 말은 똑바로 해. 니가 내게 뭔대 그런 말을 해? 눈 올때 나 보고 싶었음
니가 연락해야지. 내가 옛사랑을 다시 만나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누가 상관을 한다고 그래요? 지금 상황은 누나가 내 방 들어와서 따지고 있는
거에요."
"나를 다시는 안 볼 작정이야? 나 지금 심하게 기분 상했어?"
다시는 안 볼거다? 조금 위협적인 말이다. 여기서 지면 난 놀이개감 밖엔 되지
않는다.
"다시 안 볼거다. 왜?"
"뭐야?"
"나 볼 시간이나 있을까? 어색해서 자리 피하는 행동이 그 승주씨가 준 꽃다발
을 꼭 껴안고 승주씨 걸음걸이와 보조 맞춰서 간 거였나? 어디가서 뭐 했어요?
보조석에 다소곳이 앉은 모습이 다시 만났으니 어디 멀리 같이 가고 싶어하는 표
정이더만..."
"기분 나쁘다 너?"
"나도 기분 나빠요. 누나가 지금 나한테 따지는 태도가 날 아주 어리게 보는
것 같네요? 누나가 누굴 만나던, 어떤 짓을 하던 난 동생이고 후배니까 그냥 계
속 누나를 좋아해 주겠지하는 생각. 웃기지 마요. 누나 분명 이 생각도 했을 거
야. 승주를 애인이라 생각해도 아닌 척 나와 밋밋한 인연을 남겨 놓고 필요할
땐 부려 먹는다."
"너 그 말 취소해."
"못해."
"너 내가 다른 남자 만날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잖아."
"이 번 경우는 다르지. 나하고 생일 파티 하고 난 바로 다음 날이야. 아무리 내
가 동생이고 후배지만 숨어 있는 걸 봤으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지나치냐?
그것도 오라고 해 놓고선. 그 때 마로니에 공원 갔을 때도 마찬가지야. 누나는
그 승주란 사람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 걸 잊기 위해 나를 가지고 논 거
잖아."
"말이 심하다 너? 넌 연하잖아. 넌 내가 아끼는 후배야. 승주는 승주고 넌 너
야."
누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약간 울먹거리는 투다.
"연하는 뭐 감정도 없어요? 연하는 뭐 남자 아닌가? 승주씨 만났으니까 이제 승
주 형 힘들게 하지 말아요. 아무나 보고 꼬리치지 말라구요."
"짝!"
으씨, 씨바. 졸라 아프다.
"너 나뻐!"
누나의 눈동자에 눈물이 조금 고여 있다. 저거 아무래도 자기 분에 못이겨 나
온 눈물 같다.
"누나 방 가서 울어요. 누나 이제 안 볼거야 씨."
"너 나보고 사귀잔 말도 한 번 없었잖아. 그래 놓구서는..."
"아휴, 그랬으면 나만 비참한 꼴 당했지. 그리고 난 연상에겐 관심없다 그랬잖
아요!"
"그랬으면 그냥 동생처럼 굴어야지."
"동생이라 생각하면 왜 따져요? 순전히 자기 편한대로야."
"나도 너 이제 안 만나."
"아끼는 동생이라고 말했으면서 이런 말 했다고 걷어 차냐? 만나던지 말던지."
"쾅!"
"쾅!"
"쾅!"
앞에 것은 누나가 문을 쌔게 닫아서 난 소리고 바로 뒤에 것은 누나가 내 방문
에 발길질해서 난 소리다. 그리고 그 다음 것은 누나 방문 닫히는 소리다. 정희
누나 오면 누나 빈자리 매꿔 줄거다. 안 본다고 그러면 내가 쫄 줄 아냐? 나 지
금 쫄고 있다.
저 여자가 내게 왜 저럴까?
창 가에 놓여 있는 장미 나무를 보았다. 아까 내 방에 온 그 여자를 생각하고
산 장미 나무다. 내게 삐삐를 쳐 주던 사람, 공주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연
락하기를 꺼려 하던 저 여자는 새벽에 우리 집에 전화한 적도 있다. 옥수수 서
리 할 때 망을 봐주던 여자. 수영장에서 내 목숨을 구해준 여자. 그리고 내가 사
랑한 여자다. 다시 안 보면 내가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 같다. 내가 지금 뭔 짓
을 한거야? 어제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해 가지고 말이야. 지금 가서 잘못했다고
한 번 빌어 볼까? 나를 아끼긴 아꼈던 사람이다. 내가 서운한 감정 들어 너무 심
한 말을 했던 건 아닐까? 우쒸, 그런 거 같다. 가서 빌자. 사나이 한 번 칼을 뽑
았으면 밀고 나가야지. 꼴랑 십분도 지나지 않아 이랬다 저랬다 하냐? 아니다.
이런 생각했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그래, 내가 누나 애인도 아닌데 왜 저딴 대화
를 누나와 나누었어야 했나? 그래도 내 자존심도 있으니까 딱10분만 있다가 싹
싹 빌러 가야지. 시계 바늘 참 늦게 간다. 누나가 외출을 했을려나? 누나 방문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나는 방에 있다. 이제 가자.
"딩동!"
"누나 문 좀 열어 봐요."
대답이 없다.
"내가 잘 못했다니까."
"야이, 홍은정. 문 좀 열어 봐요."
"누나, 승주 형 왔어요."
"야이, 잘난 여자야. 제가 잘 못 했어요."
"진짜 안 본다 그럼."
문 앞에다 대고 독백을 소리내어 지르니까 졸라 쪽팔리다. 쪽팔린게 지금 문제
야. 경험상 빨리 빌면 누나는 내게 크게 삐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문이 슬며시 열였다. 누나의 눈 동자가 빨갛다. 울었나 보다. 그깐 일로 우냐.
태수형 찰 때 모습과 그 옆동 빌라 사는 놈과 말싸움 할 때도 그렇고 승주형이
다시 왔을 때도 울지 않았던 게. 겨우 나이 어린 나랑 싸웠다고 우냐? 공주 맞
어?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 여자도 마찬가지일까? 돌아서 손가
락에 침을 발라 눈에다 찍었다. 누나가 갑자기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뀌었
다.
"나 다시 너 안 볼거야."
"내가 잘못했어요 누나. 정희 누나가 여기 온다는 말 듣고 내가 간이 커졌나 봐
요. 누나가 승주형 만나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그런 말 듣는다고 맘이 풀어 질 것 같니?"
"누나하고 나하고 좋았던 기억들이 많잖아요."
"너, 말 잘했다. 그래 그 좋았던 기억들이 많은데 난 이유도 모른채 그 기억들
을 잊어야 할 뻔 했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
할 뻔 했어? 벌써 풀어 진거네 뭐. 박철수 승리다. 그래도 좀 더 빌어야지.
"내가 아직 어리잖아요. 속이 좁았어요."
"허? 너도 너 유리한 쪽으로 말하네? 그럴때만 연하지?"
"화 풀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혹시나 니가 이렇게 내 곁을 떠날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
는 줄 아니?"
"누나도 나 좋아하는 거에요?"
"그럼 좋아하지. 아닌 거 같니?"
"흠, 그래도..."
사랑하는 감정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죠? 이렇게 물어 보고 싶은데...
"이번만 참는다?"
"화풀린 거에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너에겐 왜 이렇게 화가 빨리 풀리는지."
"헤, 잘생겼잖아요."
"그래."
누나가 내 볼을 사랑스럽게 어루 만졌다. 아까 때릴 때는 언제고... 사랑스런
모습이다. 승주 그 새끼가 밉다. 왜 나타난겨?
"승주형하고 잘 되길 빌어 줄게요. 이제 옹졸해지지 않으렵니다. 나 참 변덕스
럽죠?"
"사람 감정이란게 그렇지 뭐. 나 승주하고 잘 될 수 있을까?"
"왜요?"
"다시 만났지만 예전 감정은 아냐."
"그래도 사랑했던 사람이니까 곧 예전으로 돌아 가겠죠."
"그럴까?"
"누나 방에서 차 한잔 얻어 먹을게요."
"그래, 문 앞에서 우리가 뭐하는 짓이니?"
"누나 시험 잘 봐요. 우리 학교 대학원 다닐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정희가 오면 더 재밌겠지?"
"헤헤, 그렇겠네요."
재밌을까? 누나하고 단 둘이 있을 때 보다 승주 그 새끼랑 정희 누나가 끼어든
미래가 더 재밌을까?
오늘 나도 쇼를 했다.
친구로 생각하며 누나라 생각하며 감정을 죽이며 이 여자 곁에 버틸수 있을 때
까지 버텨 보자.
나는 그 날 밤부터 다시 누나 곁으로 돌아 갔다. 도서관을 나가기 시작했고,
한 동안 예전처럼 지냈다.
뭐 나도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을 나가야 했다.
커다란 엿을 두개 샀다. 포크 하나 샀고, 두루마리 휴지 하나 샀다.
"나, 대학원 시험 본다고 이렇게나 많이 사왔어?"
"착각하지 마요. 누나 몫은 이 엿 하나 뿐이야. 나머진 내 동생꺼."
"아참, 너에게 수능 볼 동생이 있지?"
"응. 누나 시험 잘 봐요."
엿 하나를 꺼내 주었다.
"그럴게."
"나는 내일 동생 시험 때문에 이만."
"동생에게 나도 합격 빌어 줬다고 얘기해 줘?"
"우리 동생은 누나 몰라요."
수능 시험 아침에 내가 직접 운전해서 동생을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잘 봐."
"내가 대학 가면 꼭 오빠 애인 만들어 줄게."
"시험 보러 들어가는 애가 쓸데 없는 말 한다."
"오빠는 내 우상이야."
"다른 집엔 두살 터울 남매끼린 많이 싸운다 그러더만."
"어릴 때부터 아빠랑 엄마가 오빠에게 대들면 야단쳤잖아."
"참 신기하지 그치? 난 구박받았고 넌 귀하게 컸는데, 왜 너한테 그렇게 교육시
켰을까?"
"그게 좋잖아."
"모르겠단 말이야. 같은 말썽이라도 니가 저지르면 용서가 됐고 내가 저지르면
야단 맞았던 적이 많은데 너하고 나하고 싸우면 널 야단쳤어."
"후후. 나 이제 들어간다? 시험 잘 볼게."
"그래 임마. 올해는 안전하게 원서 함 넣어 보자."
"특차로 합격해 줄게."
내년엔 또 하나의 응원군이 생기겠군요.
우리 여동생 공부 잘하고 이쁜이에요. 내 동생이지만 참 예쁩니다. 앞에 등장하
지 않았던 것은 공부하느라 바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년간 나하고 대화 나누
는 시간이 적었지만 친남매 사이거든요. 내 말 한마디면 꿈벅 죽는애에요. 날 서
럽게 했던 여자들아 두고 보자.
내 여동생, 아버지가 참 곱게 길렀어요. 나 처럼 막 키우지 않았거든요.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학창 시절 나 쟤 오빠라는 이유 때문에 제법 거들먹 거리
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쟤 중 고등학생일 때 쟤 짝사랑 한 놈들이 우리 집 앞까
지 따라 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중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아, 대학생
도 한 명 따라 온 적 있어요. 이름이 이 하늘이랬나? 내 여동생 따라 온 놈 중
한 놈을 잘 못 팼다가 저 파출소 끌려 간 적 있어요. 우리 여동생 수희는 정희
누나도 인정한 우리 동네 귀염둥이였지요. 그런 내 동생이 올해 못다 이룬 대학
생의 꿈을 내년엔 꼭 이루기를 바랍니다. 제가 좀 기가 죽겠지만, 한의대 거 뭐
좋다고... 걔 성적이면 이대 약대정돈 문제 없을텐데... 참, 우리집이 한약방 하
지. 아 그렇구나.
"시험 잘 봤어?"
"응. 오빠, 올 크리스마스는 내가 곁에 있어 줄게."
"치. 오빠도 만날 사람 있어."
"웃기지마."
으이쒸.
나에겐 미소 하나 남겨주고 승주 그 새끼에게로 가 버리는 누나. 누나가 대학
원 합격하던 그 날 난 방학이 시작됐는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자취
생활을 하며 누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학교를 갔었다. 승주 그 새끼가 어떻게 알
았는지 율전까지 찾아 왔었다. 시험 치기 전에 엿까지 먹였건만 누나는 내게 어
슬픈 미소 하나만을 남겨 준 채 그 새끼에게로 가 버렸다. 섧어라... 또 한 판
싸울까? 성격 좋고 맘씨 착한 내가 참자.
밤에 홀로 내 자취방에 누워 있다. 베개를 베고 누나가 준 커다란 호랑이 인형
을 발 밑에 깔고 그렇게 누워 있다. 마지막 달 12월이 벌써 두 날짜를 차버렸
다.
"딩동."
"여긴 왜 왔어요?"
"왜 오긴. 너 서울 안 갔어?"
"안 갔으니까 여깄지. 애인 만났으면서 일찍 돌아 왔네요?"
"우리 아직 애인 사이로 만나는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사인데? 별 이상한 짓 하고 있어."
"너 또 삐칠까 봐 일찍 돌아 왔다. 너 배고프지?"
"라면 끊여 줄까요?"
"이게 뭘까?"
누나가 등 뒤로 숨겼던 넓다란 판때기를 꺼내었다. 피자구만. 나 피자 별로 안
좋아하는데...
"무슨 피자에요?"
"슈퍼 슈프림."
"나 피자 별로 안좋아해요."
"난 좋아해."
"그럼 자기가 먹을려고 사온거네."
"응. 나 다 못먹으니까 너도 좀 먹어."
"틈만 주면 자기가 공주라는 걸 일깨우네요?"
"응."
누나하고 내 자취방 방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피자를 먹었다. 제법 따끈하
다. 꼴랑 승주 만나서 예 근처에서 놀았나 보다. 멀어 봤자 수원이다. 콜라 한
병을 옆에 끼고 누나랑 마주 앉아 피자를 먹었다. 호호, 저 여자 피자 먹는 모습
이 제법 귀엽다. 혓바닥은 왜 내미냐? 피자도 그런대로 먹을 만 하네.
"애인 만났으면 오래 놀다 와야지?"
"치, 너 아까 표정 보니까 또 질투하는 것 같던데? 넌 바로 근처에 살지만 승주
는 멀리서 왔잖니."
"왜 지레 겁먹고 그래요? 나 태연해지기로 했어요. 누나가 애인 만나는데 날
왜 신경쓰나?"
"너 삐치지 마?"
"나 안 삐쳤어요."
"나 합격해서 기쁘지?"
"응. 뭐 자기 학교 대학원도 떨어지면 죽어야지."
"너 씨. 그래도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약사 고시나 준비 잘해요. 근데 승주형은 어떻게 알고 왔대요? 갑자기 발표 난
거 아닌가?"
"저 번 주부터 계속 연락이 왔었어. 언제 합격 발표 나냐구? 왜만하면 다 합격
하는 거라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 그랬는데, 예전에 자기가 내게 소홀했던 걸 만
외하고 싶은지 꼭 오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오라고 연락 했어."
"그렇게 소상히 알려 주지 않아도 돼요."
"너 삐치면 무서워."
"아휴, 높으신 공주분이 절 무서워해요?"
"참, 너 여기 몇 일 더 있다 가라."
"왜요?"
"정희가 한 삼일 정도 내 방 신세를 질거야. 내일 온다고 그러네?"
"그래요? 그럴까? 그러지 뭐."
누나는 더 이상 핏자를 먹지 못하고 내가 먹는 모습을 쳐다 보고만 있다.
"맛있니?"
"누나도 먹어요."
"나는 더 못 먹겠어."
피자 별로 안좋아하지만 자취생이 먹는 걸 마다하리... 누나 꼴랑 두조각 먹었
다. 나머지 다 내가 먹었다.
"다음 부턴 치킨이나 족발 같은 걸로 사오세요."
"다 먹어 놓고선..."
"커억! 어 좋다."
"야, 숙녀 앞에선 고개 돌리고 트림 해."
"누나가 무슨 숙녀야. 나 그냥 동생하기로 했어요. 누나는 내게 있어 더 이상
여자가 아니야."
"그래?"
누나가 약간 서운한 표정이다. 에구, 그런 마음먹고 태연하게 지내고 있지만
곧 또 한계가 올 것 같다. 여자를 어떻게 여자로 안 볼수가 있냐.
제목 연하가 뭐 어때.34회
추운 겨울 아침이 좋다. 창을 열고 아침 공기를 마셨다. 장미 나무도 한 번쯤
찬 공기를 마실 필요가 있다. 이른 아침은 아니지만 서리는 창 틀에 그대로 남
아 있었다. 오늘 제법 춥겠다. 멀리 보이는 학교 분위기는 썰렁하다. 가방을 챙
겼다.
아침을 먹었다. 집이었다면 엄마가 차려 주시는 따끈한 밥을 부담없이 많이 먹
을 수 있었을 테지만 어떤 여자가 온다고 오늘은 집에 가지 못할 것 같다.
도서관에선 내 자리까지 잡아 논 누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자리를
왜 잡아 놓았을까? 옆 자리에다 왜 가방을 올려 놓았을까? 사방이 다 빈자리다.
대부분 빈자리지만 그래도 자기 옆 좌석에 가방을 올려 놓은 건 자기는 예쁘기
때문에 남학생 누군가가 앉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저 공주병을 누가 치료해
주나? 공부하는 누나 옆으로 가 앉았다. 누나 가방을 치우자 그 밑에 뭔가 궁금
한 서류 봉투만한 종이 봉투가 놓여져 있었다. 누나는 공부하는 척 나를 쳐다 보
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좀 쳐다 봐라.
"누나 가방 가져 가요. 그리고 이 종이 봉투는 뭐야?"
"어제 하나 샀어. 너 가져."
"뭔대?"
"목도리."
내꺼야? 호호. 나 마후라 목도리 있는데... 어제 언제 샀을까?
"승주 형 만났을 때 산거에요?"
"아니, 헤어지고 돌아 오다."
"시장에 떨이로 파는거지?"
"나는 싸구려는 안 사. 어느 옷 점을 지나치다 마네킨 목에 걸려 있는 게 예뻐
서 하나 샀어."
"승주형이나 주지?"
"승주보다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너 주는거야."
"내가 옷걸이는 좋지, 암. 뜯어 봐도 돼요?"
"그러렴."
후후, 마후라 같은 목도리는 아니지만 제법 좋아 보인다. 음, 올 겨울 목은 따
뜻하겠구만. 어울려 보이냐? 당연히 좋은 조화를 이루겠지.
"괜찮아 보여?"
"응, 그런대로."
좀 솔직해라. 졸라 잘 어울려 보이잖아.
"누나는 공부하고 있어요."
"왜? 넌 가방만 던져 놓고 바로 갈려구?"
"도서관 나온 것만도 나에겐 대단한 일이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목에 목도리를 감고 도서관에서 정문까지 거만하게 걸었다. 보는 사람들이 너
무 없다. 방학이라 학교가 썰렁하다.
어디 사람 많은 곳이 없나 생각하나 전철로 뛰었다. 바로 서울로 갔다. 깜박 잊
고 있었다. 오늘 울 동생 원서 넣는 날이다. 기집애가 시험 잘 봤다더니 다른 사
람들도 잘 본 모양이다. 특차는 낙방했다.
목도리를 날리며 신사역에서 울 집까지 거의 일키로 미터가 넘는 거리를 뛰었
다.
"너 왜 이제와 임마."
계단을 뛰어 올라 가는데 약방에 계시던 울 아버지가 근엄하게 꾸짖었다.
"헥헥, 제 방에 전화 놔주세요. 수희는 원서 넣으러 갔어요?"
"오후에 간단다."
"아 예, 제가 데리고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라. 차 열쇠 내 서제 서람에 있을거다."
"오늘도 제가 기름 넣어야 합니까?"
"당연하지."
"지하철 타고 갔다 오겠습니다."
집에 들어 갔더니 못보던 신발이 있었다. 예쁜 여자 구두. 누구야? 수희 얘가
구두를 샀나? 새 구두는 아니다.
"똑!똑!"
"누구세요?"
"나다."
"어! 오빠 왔어? 들어 와."
동생 방으로 들어 갔다. 저게 오늘 원서 집어 넣는 학생의 자세냐?
"그쪽은 누구세요?"
방에는 여자가 둘이 있었다. 동생 얼굴에 열심히 화장을 해 주고 있는 제법 예
쁜 숙녀가 하나 있었다.
"오빠는 얘 모르나? 중,고등학교 때 우리집에 자주 왔었는데. 중학교때도 고등
학교 때도 내 단짝이었던 은정이잖아."
은정이? 왜 하필이면 이름이 은정이야. 전에 본 것 같기도 하지만 낯선 얼굴이
다.
"안녕하세요? 전 오빠 기억하는데... 서은정입니다."
"아, 네."
"왠 존댓말?"
이것아, 숙녀를 처음 보았을 땐 존댓말을 해야지. 수희 친구면 대학 일년생이거
나 아니면 같은 재수생일텐데 은정이라는 애는 제법 성숙한 숙녀의 모습이다.
"하던 일 계속 해요."
화장발이 무섭구나. 방 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내 동생이 변신해 가는 모습을
관찰했다. 19살에서 22살로 수수함에서 섹쉬함으로. 저 애가 화장 기술이 제법
있나 보다.
"은정이는 대학생이에요?"
"네. 수희하고 친했는데 작년엔 거의 못만났어요. 올해는 다시 뭉칠려구요."
"얘, 올해도 떨어지면요?"
"오빠!"
"미안. 은정이는 어디 학교 학생이에요?"
"말 놓으세요. 숙대 약학과 95학번입니다."
제법 예의가 바르네. 뭐여, 얘도 약대생이여?
"참 예쁘네요."
"쿠쿠, 오빠한테 안 예뻐 보이는 여자가 있긴 있어?"
"야!"
"오빠 목도리나 좀 풀고 얘기해라."
은정이라는 애가 참 귀엽게 웃는다.
"수희도 참 예쁘잖아요."
헤헤, 자네도 참 예쁘다.
동생 방을 나왔다. 은정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예쁜가? 은정이 누나
와 같은 이름에 같은 약대생? 쟤하고 묘한 인연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
가?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목도리를 감은 내 모습이 겨울 나그네에 나
오는 강우성 같다. 푸하하! 잘 생겼단 말이지.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었다.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라면은 참 맛있다.
"이 번엔 합격하겠지요?"
"그래야 되는데."
"만약 떨어지면. 지방 쪽으로 내려 보내야 되나?"
"꼭 한의대 갈 필요 있나? 불안해서 어떻게 지방 내려 보내니. 그리고 성적이
아깝잖아. 약대 보낼까?"
"약대요? 쩝."
엄마와 식탁에 앉아 동생의 진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특차에서 아쉽게 떨어졌으니 합격하겠지?"
"공부 잘하는 애들은 그냥 갈데 많아 좋겠구나 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니가 공부를 조금만 잘했어도 지방쪽으로라도 한의대 넣어 봤을텐데. 그러면
쟤 아무데나 편히 가라고 할수도 있고 말이야."
"수희는 우리집에서 참 귀한 자식이군요."
"원서 넣을 때 따라가?"
"그럴게요. 근데 쟤 자신 있나 봐요. 화장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불안하니까 그런거야. 어제 코트하고 겨울 정장한 벌 사줬다."
"나는요?"
"넌 집에 없었잖아."
"너무 하십니다 어머니. 저도 무스탕 같은거 하나 사주면 안될까요?"
"무스탕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럼 롱코트라도?"
"다리도 짧은게."
"저 제법 큰 키에요."
"수희 합격하면 고려해 볼게."
미치겠네 진짜.
지이잉! 어랏 삐삐가 왔네. 음성이다.
"야, 너 어디로 사라진거야? 밥 안 먹을거야? 오후에 정희 온다고 했으니까 빨
리 연락 해."
아, 맞다. 목도리 자랑하려다 서울까지 왔구나. 전화 해 줘야 겠다.
"나 저녁에 갈게요."
"왜?"
"오늘 동생 원서 넣는대요."
"그래? 따라 갈려구?"
"네. 일 마치고 저녁에 갈게요."
"니 가방은?"
"누나는 가방 두개 들 힘이 없어요?"
"니 가방은 좀 무식하게 생겼잖아."
"야이 씨, 그렇게 살면 말년에 고생해요."
"알았어. 나 오후에 자리 뺄거니까 도서관으로 오지말고 내 방으로 와."
"그러지요. 참, 오늘 누나하고 이름 같은 애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내 동생 친군
데 무지 예뻐요."
"호호, 그래? 원래 은정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예뻐."
"걔나 꼬셔 볼까?"
"후후, 또 차일려구?"
"내가 미팅 가서 많이 당했지만 여자한테 차인 적은 없어요."
"그게 차인거지. 니 맘대로 하세요."
"나중에 봐요."
"그래."
원서 넣으러 가는 애가 참 멋을 부렸다. 수희는 어제 산 옷을 입고 아주 숙녀같
은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오빠, 나 예뻐?"
"그런대로."
"솔직히 예쁘지?"
"그런대로."
"그런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면 오빠 애인 못 만든다? 나 화장하니까 연예인
같지?"
"그런대로."
"은정이 얘는 예뻐?"
"응, 참 예쁘다."
수희도 예쁘지만 은정이의 모습도 참 예쁘다. 아까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서 있으니까 키도 제법 크고 긴 머리칼을 찰랑거는게 상당히 고급스럽게 보였
다. 은정이 누나보다 큰 것 같다. 수희보다 한 삼,사 센티미터 커 보인다. 은정
이 누나의 외모와 맞 먹을 만한 저 애와 나란히 걷는 모습을 은정이 누나에게 보
여주고 싶다. 그러면 누나가 기가 좀 죽겠지?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만 나도 가능성을 보일 수는 있다. 푸하하, 얘한테 잘해 줘야 겠다.
"수희 넌 키가 얼마야?"
"나? 164정도 돼."
"그럼 친구는 167이나 8정도 되겠다?"
"흠, 169에요."
어휴, 고운 미소가 남자 여럿 잡겠다.
"너 표낸다? 키도 막 가르쳐 주고?"
"응?"
뭘 표낸다는거야?
진짜 지하철 타고 가고 싶었는데, 동생 친구도 같이 간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아
버지 차를 빌렸다. 타자마자 계기판에 들어 오는 빨간 불. 기름 넣어라.
울 동생도 상당히 공주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떡 상석에 앉았다.
"이게 학교냐? 공원이지. 저 병원이라고 적어 놓은 건 꼭 호텔 같다. 공원 앞
에 있는 호텔."
"오빠야 동생이 다닐 학교를 그런식으로 말하면 안돼지."
"아직 너네 학교 아니다? 자가용 들어 갈 수 있나? 입장료 받지 않나?"
"들어 가 보자."
"관광하는 셈 치고 들어 가 보지. 돈을 쓸데 없는 데 참 많이 틀어 박았다."
"뭐야?"
"그렇지 않냐? 우리 학교 와 바. 허허 벌판에 참 경제적으로 지어 났다?"
"수원에 있죠?"
동생 친구가 내가 어디 다니고 있는 줄 아나 봐?
"수원 시내에 있으면 내가 말도 안 해. 깡촌이야 깡촌."
"왜 거기로 가셨어요?"
"난 대학로에 있는 줄 알았지."
"울 오빠 좀 바보야."
경쟁율을 별로 높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이 원서 접수 마지막 날은 아니다. 원
서 넣을 때 주위 원서 넣는 남학생들이 동생하고 은정이란 애를 힐끔 쳐다 본
다. 은정이란 애가 참 예뻐 보이고 동생도 참 예쁜 축에 속해서 그런가 보다. 후
후, 그래도 성숙미나 조숙함, 그리고 섹시함에서 은정이 누나에게 못 미치는 것
같다. 은정이란 애는 나하고 사귀면 참 좋을 듯한 나이지만 내 느낌엔 어려만 보
인다. 나이든 여자들하고 어울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 나이 여자들에게 시선
이 맞추어졌나 보다. 나 지금 분명 앞서가고 있다. 은정이란 애가 나랑 무슨 관
계라고 이런 생각을 하나? 앞날이 불길하다.
은정이란 애를 집까지 태워 주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이른 시간이지만 내
동생이 걔를 집에다 보내 버렸다. 그 덕에 은정이란 애가 사는 아파트를 알게 되
었다. 잠원동이면 우리 동네 근처네. 하기야 수희하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으
니 우리 집하고 멀지 않은 곳에 살았겠지.
"태워줘서 고마워요."
"아, 아네요. 내 동생 때문에 오히려 번거로운 걸음을 했을텐데..."
"다음에 보면 말 놓으세요."
다음에? 그래 동생하고 어울리다 보면 자주 볼 수도 있겠다. 잘 가라.
"오빠 쟤 예쁘지?"
친구가 사라지자 동생은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제법 예쁘네."
"쟤 남자 친구 없거든?"
"그래서?"
"소개시켜 줄까?"
"벌써 소개 받았잖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오빠 태도가 다르다?"
"뭘? 니가 생각했던 건 뭔대?"
"헤헤, 빨리 소개시켜줘 언제 날 잡아 좋은 자리 한 번 마련하자. 이럴 줄 알았
는데."
"나 많이 가지고 논다 너?"
"쟤가 오빠한테 관심있는 거 모르지?"
"허허, 기분 좋은 말이네. 쟤가 날 언제 봤다구?"
"오빠 상당히 거만하게 나오네? 이런 반응 보이면 안돼는데?"
"왜? 니가 생각한 반응은 또 뭔대?"
"내가 생각한 거? 나한테 관심이 있어? 그럼 이야기 다 끝났네. 당장 사귀자고
연락해 줘라."
"후후, 쟤가 진짜 나에게 관심이 있었어?"
"오빠 쟤 진짜 기억안나?"
"모르겠는데?"
"오빠가 쟤하고 제법 마주쳤는데? 오빠가 내 방 문 함부로 열었다가 나하고 걔
하고 속 옷만 입고 있는 걸 본 적도 있고, 오빠가 쟤 여드름도 짜 주었을 걸.
걔 울었던 적도 있잖아. 얼굴에 뽀드락지 난 거 기어이 여드름이라고 우기더니
가만히 있는 애 얼굴 잡고 난리쳤던 거 기억 안나? 오빠 시화 만들어 놓았던 것
중에 쟤가 하나 들고 갔을 걸."
"엉? 걔가 아까 쟤니? 걔는 그렇게 예쁘지 않았는데. 머리도 졸라 짧았고 선 머
슴애 같았는데."
"조금 기억이 나니? 내가 친구가 주었다면서 발렌타인 데이 때 초컬릿 준 건 기
억나?"
"그게 걔가 준거였니?"
"응. 여자는 변하는 거야."
"몰라. 매치가 안돼. 걔 이름이 은정이었어?"
"너무한다."
"너하고 나하고 자주 보질 못했잖아. 너네들 중학생일 때 난 고등학생이라 바빴
고, 나 대학 가서는 니가 바빴으니. 야, 나 이제 대학 4학년이다. 벌써 4-5년 지
난 일인데 내가 어떻게 일일히 기억하니."
"그렇다고 이름도 까 먹냐?"
"너 내 친구중에 이름 기억하는 애 있냐?"
"그건 그렇고. 쟤하고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다리 놔 줄까?"
"됐어 임마. 니 걱정이나 해. 아직 합격 발표 안 났어?"
"왠 배짱? 혼자 사는게 적응이 됐나 봐?"
우쒸, 나 좋아 하는 여자들 많아. 은정이 누나, 정희 누나. 다들 나이가 좀 많
다는 게 흠이지만...
집에 들어 갔다가 동생 앉혀 놓고 몇 마디 했다. 합격해야지 암.
"실험 할 게 있어서요. 저 이 번주는 자취방에 있어야돼요. 오늘은 수희 때문
에 잠깐 올라 온거에요."
"그래. 그럼 넌 가봐."
매정하신 부모님. 뭐 먹을거라도 좀 챙겨 주시지. 저녁만 먹고 집에 올 때 모
습 그대로 집을 떠났다.
집 앞에 주차 시켜 놓은 승용차. 저거 탈 사람 없다. 아까, 내 돈 내고 기름 넣
은 게 졸라 아까웠다. 아버지 어짜피 출근 하실 때 삼층에서 일층 아니십니까.
푸하하, 내 손에 들려 있는 자동차 키. 바로 차를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부르
렁.
자취방 앞에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누나 방 창을 보았다. 불이 켜져 있다. 주
차 시켜 놓은 차가 좀 불안하다. 괜히 가져 온 것 같다. 아버지가 내일 당장 차
가져 오라고 할 것 같다. 아니 지금 당장 갖다 놓으라고 하실 것도 같다. 내 삐
삐 번호 알까? 에이, 모르겠다.
"딩동!"
"누구세요?"
이 목소린 정희누나 목소리?
"접니다. 박철수."
문을 열었다. 반가운 정희 누나의 모습이다.
"오랜만이다 너?"
"그렇죠? 하하."
웃다가 웃음이 싹 가셨다. 정희 누나 뒤에 있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참 곱지
만 어색했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는 은정이 누나 맞은 편에 꼴 보기 싫은 놈
이 앉아 있다. 내가 즐겨 앉던 자리에 승주 그 새끼가 앉아 있다. 저 새끼 왜 온
겨.
"어제 보고 또 보죠?"
"네."
"내가 불렀어. 상가에 대해서 아는게 있어야지. 우리 학교 말고 다른 데도 알
아 보고 다녔지."
정희 누나가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승주 저 새끼가 뭐 좀 아나?
"상가는 구했어요?"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 일단 우리 학교 앞에 좋은 상가가 하나 있긴 해.
들어 와서 얘기 해."
누나 침대에 가 앉았다. 승주 저 새끼가 곁눈질 해 나를 쳐다 보았다. 확 들어
누워 버릴까 보다. 그려, 나 이 침대에서 자 보기도 한 사람이여? 부럽냐?
"승주형은 올 해 졸업반이에요?"
이야기 하기 싫었지만 그냥 예의상.
"아니에요. 복학을 애매하게 해서 내 년에 코스모스 졸업할 겁니다."
"아, 네. 전공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도시 공학과에 다녀요."
도시 공학? 도시 공학과에 다니는 새끼가 상가에 대해 뭘 안다고...
"제가 형이 어느 학교 다니는 거 모르거든요? 물어 봐도 돼요?"
"시립대 다녀요."
"부동산 시세 같은 거 잘 아시나 봐요?"
"아니에요. 그냥 뭐."
은정이 누나가 승주 형보다 나쪽을 더 살핀다. 내 말투가 조금 거슬릴거다.
"난 이제 가볼게?"
"그럴래?"
그래 가라 새끼야. 제법 눈치가 있구만. 승주 형은 내가 자리에 앉자, 채 십분
이 지나지 않아 일어 서 집에 갈 차비를 했다. 나란 존재가 좀 어색했나? 승주형
이 일어 나자 은정이 누나도 따라 일어 섰다. 조심스런 모습이다. 서로 잘 어울
려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 사이엔 장난스러움이 없어 보였다. 다소곳하고 수줍
어 하는 연인의 모습이다. 부럽다.
"집이 어디신데요?"
내가 왜 물어 봤지?
"왕십리 쪽이라 지금 출발해도 10시 훨씬 넘겨야 집에 들어 갈 거에요."
새끼가 끝까지 존댓말 쓰네.
"정희 누나는 오늘 여기서 잘 거에요?"
"응."
"승주형은 직접 운전해서 온 거에요?"
"하하, 저 자가용 없어요. 전철 타고 가야죠."
"에?"
은정이 누나가 내 손을 잡더니 쿡쿡 찌른다. 맞다, 저 형은 내가 그때 그 삼류
영화를 봤던 것을 모르겠지? 그때는 그럼 아버지 차였나?
저 형 태도가 날 어려워 하는 것 같다. 내게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자식인
데, 내가 너무 쌀쌀맞게 대한 거 같다. 아버지 차도 오늘 밤 여기 두어서는 아니
되겠다 싶다.
"제가 태워 드릴게요."
"엉?"
정희 누나가 날 빤히 쳐다 보며 묻는다. 나도 베스트 드라이버에요.
"너 차가지고 왔니?"
"네. 아무래도 집에 차를 갖다 놔야 겠어요. 저 아버지 차 몰고 왔거든요."
"아, 안 그래도 되요."
"어짜피 가야 돼요. 말도 안하고 가져 온 거라."
"다시 오기 힘들텐데."
"집에 들어 가 자면 돼요."
내가 왜 이럴까. 적과의 동행이다. 은정이 누나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하다.
억지로 승주 새끼를 차에다 태웠다. 정희 누나는 춥다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지
만 은정이 누나는 배웅을 했다.
"조심해서 가."
"알았어요."
"나중에 연락할게."
승주 새끼가 은정이 누나에게 고운 미소를 보냈다. 누나도 그런 미소를 지어 보
인다.
"그래. 잘 가."
보조석에 앉혔지만 거의 침묵한 채 서울로 왔다. 왕십리 역 가까이 와서야 몇
마디 나누었다. 승주 형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대답을 해 주어야 했다.
"은정이와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에? 정희 누나 때문이지만 은정이 누나가 내게 잘못을 했죠. 흙탕물을 튀겼거
든요."
"흠, 은정이 좋아해요?"
"에?"
"부러운 모습이네요. 은정이 곁에 철수씨 만큼 자연스러워 보였던 사람이 없었
던 것 같아요."
"아, 친한 후배라서 그렇지요 뭐."
"은정이가 철수씨한테는 조금 조심스러워 하더군요."
에? 안 그런데. 자네한테 훨씬 더 조심스럽더만.
"헛! 전혀 아닙니다."
"난 항상 은정이에게 조심스러웠죠. 지금도 자신있게 대할 수 없어요."
그런 말을 내게 왜 하냐.
"너무 소극적이지 마세요."
"흠. 자기 앞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 당당하면 그 사람에게 소극적으로 변할수
밖엔 없어요. 날 좋아한다면서 내 마음을 참 아프게 했지요."
"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죠? 요즘은 은정이에게서 그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
한 그런 감정을 느껴요."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거 하려구?
"다시 만났으니까 조금 다르겠죠."
"후후, 전에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날 대할 땐 내가 젤 앞이었어요.
그런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죠. 근데 요즘 은정이의 모습을 보면 내가 누군가에
게 밀려 난 느낌이에요."
무슨 말이야. 무시하자.
"저기 왕십리 역 보이거든요. 어디 세워 드릴까요?"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 주세요."
"그러죠."
좋겠다 새꺄. 은정이 누나와 오래 사귄거 자랑하냐? 밀려난 거 같어? 맨날 동생
으로만 취급 받는 나는 죽어야 되게?
"태워줘서 편히 왔습니다. 고마워요."
"뭘요."
"훗, 은정이에게 저처럼 그런 모습은 보이지 마세요."
"에?"
"조심해서 가십시오."
내가 니가 했던 그런 삼류 버라어티 쇼를 할 수 있을 것 같냐?
집 앞에다 차를 갖다 놓았다. 지금 시각 열 시 오분. 아슬 아슬 하다. 집으로
들어 갈까. 다시 율전으로 내려 갈까? 쌈쟁이 할머니가 웬 보따리를 들고 지나가
는 모습을 보았다.
율전 가자.
신도림 역에서 아슬하게 수원 가는 전차를 잡아 탈수 있었다. 자취방 앞에 도착
하니까 11시 50분 가까이 됐다. 늦은 밤이다. 오늘 참 많이 돌아 다닌 거 같다.
피곤하다. 그냥 자야지.
내 방으로 그냥 들어 갈까 하다 은정이 누나 방에 불 빛이 새어 나와서 초인종
을 한 번 눌러 보았다.
"누구세요?"
"아직 안 자요?"
"응? 너 다시 내려 온거야?"
그럼 여기 안 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나? 아무리 내가 거리감 없는 연하지만 그
렇게 잠옷을 입고 나와 문을 열면 안돼지.
"정희 누나는요?"
"침대에 있어. 걔 옷차림이 지금 좀 야해."
"후후. 안 자고 뭐했어요?"
"이런 저런 얘기. 들어 올래?"
"들어가도 돼요?"
"허, 니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우습다. 승주는 잘 갔니?"
"네."
"데려다 줘서 고마워."
"훗, 뭐 둘이 사귄다고 대신 감사하는 거에요?"
"아니 그것보다 오늘 니가 좀 성숙해 보여서."
"하하, 저 원래 성숙해요."
"에그, 칭찬 좀 해주면 도로 돌아오지?"
누나 방에 들어 갔다. 이불을 감싸고 날 빤히 쳐다 보는 정희 누나에게 괜히 장
난을 치고 싶었다.
"야, 밤 늦게 숙녀 방을 이렇게 꺼림낌 없이 들어와도 되는거야?"
"여기 누나 방 아니잖아요."
화장 지운 정희 누나의 얼굴을 본 게 얼마만이냐.
"철수야, 차 한잔 끓여 줄까?"
"차 한잔 하고 가도 될까요?"
"그래라."
은정이 누나가 차 끓이는 동안 이불을 감싸고 안은 정희 누나 곁에 앉아 보았
다.
"누나 얼만큼 야한 옷차림인데?"
"궁금해?"
"나 같이 반가운 사람이 왔는데도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 이거 문제 있
는데?"
이불을 잡아 당기는 포즈를 취해 보았다.
"난 은정이 하고 틀리다?"
"뭐가?"
"이불 당기면 그 날로 넌 날 책임져야 돼."
그러니까 더 궁금하다. 눈 딱감고 이불을 잡아 당겨 볼까? 지가 야하면 얼마나
야하다구...
"책임질게."
"야!"
잠시간의 어색한 눈이 마주쳤다. 정희 누나가 이불을 꽉 붙들고 있는 줄 알았는
데, 그래서 잡아 당겼는데 이불은 힘없이 내게로 와 버렸다. 누나의 허리 아래까
지 이불은 걷어져 버렸다.
"누나 안 추워요?"
"너 죽었어."
그날 밤 참 남사스런 꼴을 봤다. 아무리 입을 게 없다고 저딴 걸 얻어 입었냐.
정희 누나는 씩씩 거리며 침대 속에 있다. 나하고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렇
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이건 비밀인데, 나 어릴적에 엄마 따라 대중탕 갔다
가 정희 누나 알몸도 봤다. 뭐 같이 놀았는데...
은정이 누나와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키득 거렸다.
"정희 누나가 입고 있는 저거 누나 꺼죠?"
"응."
"저런 거 입고 잤었어요?"
"너 한 번 봤었잖아. 니가 잠옷 사주전에 간 혹 저거 입고 잤었어."
"그게 저거였어요?"
"응."
"참 자연스럽게 말하네요."
"뭐 어때."
고개를 돌렸다. 정희 누나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서... 정희 누나를 빼꼼히 쳐
다 보았다. 속옷 같은 하얀 잠 옷에 정희 누나 진짜 속 옷이 확연이 드러 났었
다. 물론 위만 봤지만.
"나이를 생각해라. 까만 브라자 뭐냐. 다 비치더라 다 비쳐."
"너 씨. 내 나이가 어때서?"
"너네 둘인 진짜 친했나 보구나?"
은정이 누나가 날 보며 고운 미소를 보냈다. 지금 상황이 그런 미소 보낼 때가
아니지. 하여튼 나이 많은 여자들은 나이 어린 남자에게 별 조심성이라던지 부끄
러워 하는 표정을 잘 보이지 않는다. 서럽다. 내가 정희 누나를 은정이 누나보
다 덜 부담스러워 하는 건 아마 사소한 감정 하나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래 사소한 감정이다. 그 감정만 없어진다면 은정이 누나에게도 정희 누나에게 하
는 것처럼 할 수 있다. 이마가 아니라 입술에 키스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