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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1일
어머님을 배웅하면서 인생에서 가장 긴 시간을 보냈고 큰 형님을 추모할 틈도 없이 지금의 나는 떠나간 형의 나이를 넘어섰다. 새벽에 눈을 뜨니 가정의 달 5월에 가족을 사랑하라고 당부하는 영식이 문자가 와 있는데 내 삶과 심정을 생각하고 보냈을 것이다. 아침식사를 하고도 잠이 쏟아져 1시간 더 자고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정리했더니 덥수룩하고 까칠했던 모습이 단정해졌다. 걸어서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점심을 하는 중에 학교에서 돌아온 딸과 논술교실에 가는 아내가 현관을 비켜 나가고 있다. 신설동에 가서 당분간 영업을 하지 않는 2층을 사무실 삼아 서류정리를 하고 조문객으로 온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감사의 문자를 보냈다. 오후에 학원으로 들어가 며칠 만에 수업을 준비했더니 중간고사 기간으로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집에는 10시에 들어왔지만 일을 모두 마친 사람처럼 할 일이 없고 허망함만 밀려오는 적적한 밤이다.
2일 오늘은 석가탄신일이고 5일 어린이날까지 징검다리 연휴가 시작되는 날이다. 가족과 여행이라도 가고 싶은데 오전에 아내의 수업이 있고 아들도 중간고사를 앞에 두고 있어 어쩔 수가 없다. 맑았던 날씨가 10시가 지나자 비가 내리고 친구 동선이에게 어머니를 보내고 나니 허전하다고 문자를 했더니 어제 술을 마셨느냐는 동문서답의 답장이 왔다. 토요일 아침에 아들과 딸을 학원에 보내고 산에 갈까 했는데 비가 내려 집에 있었고 날마다 다녔던 요양원조차 갈 일이 없어 실업자가 되어 적적한 오전을 보냈다. 마음을 잡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편으로 형한테서 받은 충격은 쉽게 가라앉지 않아 베란다에 나가 연신 담배만 피웠다. 오후에 신설동으로 가서 시간을 보내다가 청주라도 가 볼까 했는데 연휴기간 정체가 심하다는 뉴스에 생각을 달리했다. 저녁에는 신세계백화점에 아내와 딸이 나왔다고 해서 차를 몰고 이동하여 함께 쇼핑을 마치고 아들에게 줄 먹거리를 사 가지고 들어왔다.
3일 새벽에 창 밖을 보니 날씨가 쾌청하다. 거실에 나와 푸른 안산을 바라보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정리하고 새로운 계획을 구상했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9시에 북한산에 가려고 704번 버스를 타고 불광동과 북한산성을 통과하여 송추계곡 입구로 향했다. 잡념이 생기고 힘들 때는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면 좋고 오늘도 그 연장선으로 산행을 시작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10시가 지나 계곡을 출발하여 도봉산 오봉을 향해 올랐고 12시가 되어 정상에 도달하니 신록이 더욱 우거져 있다. 다시 1시간을 동쪽으로 걸어 우이암 근처 서울시내가 보이는 남쪽 방향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마음이 시원하다. 우울하여 원석이 아빠랑 용문산에 가고 있는 중이라는 여동생 문자가 왔는데 충분히 이해가 되어 매제가 고마울 뿐이었다. 형제 간에 욕심을 부리면 가족이 멀어지는 것을 지금은 여동생이 격고 있어 심적인 고통이 두 배로 클 것이다. 방학동 도깨비시장 근처로 내려와 친구 용석이 가게에 잠깐 들렀고 지하철로 서울에 들어오면서는 신설동에 내렸다가 집에 돌아왔다. 오늘 오랜만에 도봉산을 걸었더니 자연을 바라보는 시간만큼 갈등이나 잡념을 지울 수 있어서 하루가 그나마 편안하다.
4일 화창한 월요일이다. 얼마 전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들은 내 표정이 어둡다느니 술을 많이 마신다느니 여러 이야기를 하지만 모두 내 인생이고 내가 사는 길이다. 오전에 임대료를 처리하기로 약속하여 신설동 3층에 갔다가 연장하는 바람에 돌아왔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약속이나 일처리를 대충하려는 경향이 있어 문제다. 은행에 들어가 그 동안 형한테 이자로 보내준 금전내역서를 확인해보니 2005년 10월부터 2009년 4월까지 3천만 원이 넘었고 현금으로 직접 전한 것을 합하면 4천만 원 이상의 적지 않은 금액이고 북부지원 앞 법무사에 가서는 내 몫으로 돌아온 시골에 있는 1000평의 논에 대하여 소유권을 이전하려고 미리 상담을 했다. 성북동을 경유하여 돌아오면서 장원장을 만났고 집에 와서는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외식한다고 백가네 식당에 다녀오니 학원에서 과자파티를 했다는 딸이 즐거운 표정으로 들어온다. 밤에 여동생은 오늘도 슬프고 허전하다고 문자가 와서 순리대로 살아가자고 위로의 문자를 했지만 어린시절부터 외롭고 슬프게 자라온 동생이다.
5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어머니를 추모하기 위하여 그 동안 기록한 내용을 바탕으로 투병기를 작성해 보기로 하였다. 2년 가까이 어머니를 거의 매일 보아왔고 하루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겼기에 거동을 못하시어 서울에 입원한 날부터 돌아가시는 날까지의 내용을 발췌해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지만 가급적 어머니를 오래 추모하고 특히 아들이나 딸이 자라면 살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를 느끼게 하는 것도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 길을 걸어 체육관에 갔다가 어제 영식이가 의정부 자신의 처남댁 농장에서 식사를 하자고 해서 차를 몰고 의정부 장암역에 도착했다. 농원이 산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고 면목동에서 처음으로 오는 정식이를 태우고 함께 들어가기 위해서다. 지하철에서 내린 정식이를 만나 농원에 도착하니 영식이 친구들과 선배들이 먼저 와 있어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고 앉자마자 어머니를 보낸 나를 위로하는 시간이 많아 고맙기만 했다. 점심부터 저녁까지 삼겹살과 토종닭 등으로 담근 술을 곁들여 시간을 보냈고 밤이 찾아와 정식이와 서울로 가려고 대리운전을 불렀는데 외곽지역이라고 큰 도로까지 차를 가지고 나오라 해서 이동했지만 기사는 오지 않았고 할 수 없이 내가 운전을 하여 서울로 출발했다. 불암산 아래 담터 3거리를 지나 삼육대 정문을 통과하는 중에 음주 검사를 실시하여 차에서 나와 몸을 피했는데 동작이 느린 정식이가 우두커니 서 있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돌아가 측정을 한 것이다. 어머니도 돌아가신 마당에 나에게 더 이상 무슨 고통이 있겠는가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사정이나 이유도 말하지 않았고 혈액까지 채취하겠다고 나섰다. 경찰과 동행하여 근처 병원에 갔더니 처음 0.14보다 높은 0.17 이상의 수치가 나와 면허취소는 물론이고 오히려 벌금만 늘어나게 되었다. 그 동안의 슬픔이 커서 그럴까 상대적으로 담담했지만 술을 마시고 운전을 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할 여지가 없다. 20일 후에는 무면허가 되고 벌금도 내겠다는 약정을 하고 집에 들어와 아내에게 이야기를 하니 황당하다고 화를 내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고 괴로움이 더한 밤을 보냈다.
6일 어제의 일이 꿈이었나 싶고 아내나 아들 딸에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스스로도 답답한 아침이다. 50대에 들어선 내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았고 오늘부터 중간고사를 실시하는 아들에게는 아무 말도 못하고 학교에 가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영식이에게도 어제 일에 대하여 별 것 아닌 것처럼 말은 했지만 항상 정확하고 바른 친구를 볼 면목도 없어졌다. 내 상황을 모르고 딸은 오늘 학교별 육상대회에 나간다고 어제 구입했다는 예쁜 츄리닝 바지를 자랑하듯 보여주며 나간다. 아들과 딸을 보내고 어제의 이야기를 아내와 나눴더니 우선 슬픔이나 형에 대한 분노를 버리라 하고 아들과 딸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10년은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며 진지하게 이야기하여 미안함과 고마움이 함께 생겼다. 9시가 지나 아내와 안산에 올랐다가 11시에 내려왔고 바로 신설동에 가서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사 먹고 2층에 앉아 오후를 보냈다. 시간이 지나면서 위축되는 나를 극복하기 위해 우현이와 마라톤을 해 볼까 전화를 하여 어제의 일을 먼저 이야기 했더니 엉뚱한 행동을 했다고 질책만 들었다. 지금의 나는 분명 불안하고 분노에 쌓여 하루를 보내고 있지만 음주문제는 벌금을 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기름값도 아끼고 건강도 찾고 반성의 시간도 가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바꿔 나갔다. 아내도 요즘 나 때문에 긴장의 하루하루를 산다고 말했지만 살다보면 황당한 일들이 많고 뜻하지 않는 어려움도 생길 수 있는 것이다. 남은 5월을 잘 보내자는 다짐을 하고 학원에 가서 수업을 하고 집에 왔더니 오늘 중간고사를 본 아들과 육상대회에 다녀온 딸이 거실에 앉아 있다. 미안한 마음으로 할 말도 없이 초라하게 있는데 언제 만들었는지 아내는 은어매운탕을 준비하여 저녁식사로 가져온다.
7일 잠을 푹 자니 몸이 가뿐하고 머리가 맑다. 오늘은 아내가 인창중학교 시험감독으로 가서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들까지 함께 학교에 태워다 주었다. 집으로 돌아와 특례학생 수업할 프린트를 준비하고 문자를 했더니 당분간은 바빠서 수업을 못하고 6월에 다시 하자고 한다. 체육관에 도착하여 땀이 나도록 운동을 하고 돌아오니 국어시험을 보았다는 아들이 문법 띄어쓰기 문제 등을 질문하여 설명해 주었다. 아들과 닭볶음탕으로 점심을 먹는 중에는 바이올린을 가지러 왔다가 서둘러 나가는 딸을 보면서 어색한 어울림으로 악기를 든 모습이 상상이 안 되었다. 저녁에 정식이가 지난 번 미안했다는 전화를 하더니 식사를 하자고 하여 영식이까지 불러 남영동에서 해물탕으로 저녁을 먹었다. 인생 전체로 따지면 한 순간의 실수나 고통은 크게 탓할 일이 아닌데 고통 속에서 여유가 없이 살아가는 내가 안타까울 뿐이다.
8일 어버이 날이다. 낮에는 초여름 날씨라고 예보하는 청명한 날씨에 아들은 중간고사 마지막 날 학교에 가고 아내는 안산을 걷다가 들어와 10시가 지나서 건강검진으로 병원에 갔다. 식사를 조금 마친 나도 체육관으로 가서 1시간 운동을 하고 신설동 3층으로 이동하여 밀린 임대료와 미납보증금 7백만 원을 받았는데 긴 신경전이었고 사람한테 돈을 받아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점심을 사 먹고 2층 가게에 앉아 집중하여 투병기를 작성하다가 저녁에 학원에 가서 강의를 했는데 중간고사가 끝난 시점이라 수강생 대부분이 결석을 하였다.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청량리 롯데백화점에서 형수와 여동생을 만나 저녁식사를 하고 호프도 한잔 마셨다는 아내가 어머니 유품을 가지고 왔다. 내가 전 타임 마감강사로 화려한 시간을 보낼 때 어머니를 직접 모시고 가서 사 드렸던 녹색 반지와 목걸이 그리고 금반지 1개다. 모두 형이 그 동안 보관했는데 무슨 생각으로 나에게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덩그러니 남은 어머니의 흔적을 바라보니 생전의 모습이 어른거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9일 평소에 어머니가 그리울 때 핸드폰의 사진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더 심난한 마음이 생길까 미루어 두고 있던 터에 어제 유품이 도착하여 울컥했고 어머니의 온기가 전해지는 듯했다. 새벽에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 동창이 일요일에 고속버스 편으로 김치를 보낸다고 터미널에 나와서 받아가라는 전화가 왔다. 마음이야 고맙지만 시간도 없고 강남터미널까지 나가는 과정도 불편하여 다음으로 미루었다. 어제 어버이 날에 청주에서는 우리만 참석을 못하고 나머지 가족들이 모여 나로서 미안함이 있었는데 오늘은 장모님께서 서울에 오신다는 연락이 왔다. 오전에는 조카가 와서 장례식 때 들어온 효정이 몫 부조금 88만원을 전달하고 딸과 함께 연희동 칼국수집에 가서 점심을 먹고 지하철로 배웅했다. 차를 몰고 신설동에 나가 투병기를 계속 작성하며 몇 시간을 보내고 왔더니 장모님과 처제가 집에 와 있어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10일 거실에서 주무신 장모님께서 새벽에 안산을 걷고 오셨는지 내가 일어나자 벌써 밖에서 들어오셨고 물김치를 담그고 여러 음식을 준비하시며 바쁘게 아침을 보내신다. 일요일이라서 산에 가려고 집을 나서 회기역에서 중앙선을 갈아타고 운길산 수종사를 향하여 올랐다. 신록이 우거진 5월의 중순 완연한 초여름의 모습이 되었고 오늘은 기온이 높다보니 휴일임에도 등산로가 한산한 정도다. 정상 반대방향으로 40분을 걸어 수종사 500년 은행나무 아래에 서니 북한강과 남한강이 변함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수종사 여기에 온 것은 산란함 마음을 정리하기 위함으로 녹색 천을 깔아 놓은 듯한 짙푸른 숲속에 누었다가 일어나니 마음이 그대로 힐링이다. 다시 운길산역으로 걸어 내려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들어왔고 냉장고 음식을 먹으려니 상한 것이 많아 실망이 컷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음식이 상하면 건강에 좋지 않으니 조금씩 사 두는 것이 신선하고 절약하는 방법이라고 아내에게 내 생각을 충분히 설명해 주었다
11일 기온이 높아 잠자기가 불편하여 눈을 뜨니 새벽 4시가 되었고 아내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거실에 나가 앉아 있다. 날이 밝아 오면서 비가 내리고 아침 뉴스에서는 개그맨 주병진 씨가 음주에 걸렸다는 보도를 하는데 내 신세와 다르지 않고 오히려 공인이라서 생활하기가 더 쉽지 않을 것이다. 비오는 아침에 아내는 동사무소에 영어를 배우러 가고 늦잠을 잔 아들은 식사도 못하고 허겁지겁 학교에 간다. 작년만 해도 오늘처럼 비라도 내리면 아들부터 차에 태워서 학교에 다녀왔는데 요즘은 나를 추스리기에도 쉽지가 않다. 운동을 하려고 체육관에 도착하고 보니 운동화와 장갑 등 준비물을 가지고 오지 않아 정신을 어디에 두고 다니는지 내가 한심했다. 12시에 PC방에 들어가 어머니 투병기 원고를 정리하고 집에 돌아와 생선김치찜으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 임대료를 미납하고 있는 신설동 1층 세입자한테 전화를 하여 독촉을 했고 경기학원에 가서 계속하여 투병기를 작성했다. 어머니를 부르며 글을 정리하는 동안은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하게 추모의 마음이 생기어 더 없이 편안한 시간이다. 오후 7시경 강의실에 들어서니 오늘도 늦게 오는 학생들이 많아 분위가 어수선해졌고 가까스로 수업을 마치고 11시에 집에 돌아왔다.
12일 어제에 이어 아침까지 긴 시간 비가 내리는 아침이다. 요즘 내 인생을 돌아보니 40대 초반까지는 꿈이 있고 희망이 많았는데 50대에 들어선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돈도 없고 몸이라도 아프면 어쩔까 고민과 걱정이 부쩍 많아졌다. 계란국으로 아침식사를 하고 비가 부슬 내리는 중에 아파트 마당에 나와 아내에게 운전을 지도하면서 일단 전진과 후진을 연습시켰다. 자동차에 대한 감각이 우선 중요하여 10시에 자유로에 도달하여 일직선으로 전방주행을 실시했는데 내 면허증이 정지되면 아내가 차를 몰아야 하는 이유로 절박함이 있었다. 1시간을 직진하여 임진각에 다다랐고 다시 서울로 들어와 강변북로 용산 남영동 서울역 거쳐 집에 돌아오니 3시간이 지났다. 삼겹살로 늦은 점심을 하고 아내는 논술교실 나는 학원에 가서 중간고사 대비 국어수업을 열심히 했다. 저녁에 정식이를 만났더니 오늘도 고기와 술을 사주며 4월부터 생긴 어려운 나의 상황에 위로를 여러 번 해 준다. 30년 전에 청바지와 청자켓을 걸치고 캠퍼스를 누비며 젊은 날을 함께 보낸 놈인데 오늘도 옛날을 이야기하며 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13일 새벽 2시에 자고 7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니 밥 맛이 있을 리가 없다. 아들은 독후감 쓰기가 과제로 나왔는지 열심히 책을 읽고 감상문을 쓰고 엄마의 도움까지 받으며 부지런하게 준비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 아들이 학교 보컬그룹에 들어가 리더로 노래를 하고 조만간 공연까지 한다고 하여 공부는 언제 할건지 쓴 웃음이 나왔다. 나와 아내가 노래를 못하고 평소에 아들의 노래는 들어 본 일이 없는데 무슨 근거로 음악인의 행세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식사를 하고 쉬다가 오늘도 운전연습을 하면서 집을 출발하여 광화문 성북동 신설동 종로 그리고 불광동까지 서울시내를 돌면서 2시간 이상을 보냈더니 어제보다 훨씬 부드러운 느낌이다. 오후에 대치동 마원장과 경기학원 장원장이 수익금과 강사료를 입금해 왔고 학원에서는 조용하게 일처리를 잘하는 수학선생이 그만둔다고 하여 난감함이 있었다. 수업을 마친 저녁에 노원경찰서에서 지난 번 채혈한 결과를 통보해 왔고 벌금과 면허정지 통보를 우편으로 보내겠다고 한다. 평소 같으면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지만 어머니를 보내고 가족까지 두 동강 난 지금은 두려울 일도 없고 아무런 감각도 없었다.
14일 아침 식사를 마치고 일찍 집을 나와 한글회관 강의시작 전까지 아내에게 운전 연습을 시켰는데 분명한 것은 운동신경이 다른 사람에 비해 느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독립문과 인창중을 거쳐 동대문으로 갔다가 을지로를 돌아 광화문까지 돌아온 서울시내 주행을 실시했다. 10시30분에 한글회관으로 아내를 들여보내고 체육관으로 가서 열심히 운동을 하다가 12시에 다시 아현동과 신촌을 거쳐 홍제역 근처로 돌아오는 연습을 했다. 주행을 하면서 감각이 없다고 순간순간 타박을 했지만 아내는 묵묵부답이었고 불안한 중에 사고없이 연습을 마쳤다. 갈비탕으로 함께 점심을 먹고 신설동에 나가 임대문의로 온 손님을 만난 뒤 방배동에 사는 고향 친구의 자녀를 불러 객지에 나와서 고생한다고 저녁을 사 주었다. 밤에는 영식이를 만나 우리의 단골 전주집에 들어가 식사를 하고 12시가 거의 되어 집에 도착하니 1만3천원 택시비가 나왔다.
15일 날이 흐리다. 어제 늦게까지 술과 음식을 많이 먹어서 밥 생각이 없다. 더구나 요즘 먹는 밥은 진천 쌀이라고 10킬로를 아내가 엊그제 사 온 것인데 명성과는 다르게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 아침에 사립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스승의 날 휴일이고 반대로 공립초등학교를 다니는 딸은 선생님 줄 선물이라고 학교에 가기 전에 열심히 포장을 하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스승의 날에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기리는 것은 아름답고 좋은 일이지만 과도한 선물공세나 촌지로 인하여 요즘에는 말이 많고 평가도 엇갈리고 있다. 오늘도 아내에게 운전 연습을 시키기 위하여 집을 나섰고 독립문과 서울역을 지나 한강대교를 건너 국립묘지를 거쳐서 방배동 영식이네 아파트 정문까지 갔다가 돌아서 나왔다. 잠깐 휴식을 하고 다시 반포대로를 통과하여 동작대교를 넘어 왔고 이어서 강변북로를 달리다 동부간선도로에 진입하여 중랑천을 옆에 두고 장안교 근처로 나와서 정식이 사무실 근처에서 커피를 마셨다. 운전연습을 시키면서 서울을 온통 헤집고 다니는데 길도 알아야 하지만 내 면허증이 사라지는 날 가족을 위해서 아내가 운전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집중해서 할 필요가 있다. 장안동을 출발하여 집에 도착하니 12시가 지났고 오늘은 아내의 운전 실력이 무리가 없을 정도로 나아져 내가 목소리도 내지 않고 다닌 날이다.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외출을 하는 아들과 논술학원에 가는 아내를 보내고 PC방으로 달려가 투병기 작성에 다시 몇 시간을 매진하였다. 저녁이 될 때까지 컴퓨터와 보내다가 밖에 나왔더니 길모퉁이에 세워둔 차가 견인이 되어 홍제역 차량보관소에 걸어가서 과태료 4만5천 원을 지불하고 찾아왔다. 오후에 학원에 가서 강의를 마치고 밖에 나오니 비가 내리고 스승의 날 꽃과 선물을 승용차 뒷자리에 가득 싣고 온 때가 있었는데 오늘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16일 새벽에 일어나 신문을 보고 투병기 작성을 하면서 프린터기를 작동하니 불량이라서 짜증스러웠고 아들은 어제부터 학교 과제로 “소외된 북한“에 대하여 발표를 한다고 열심이다. TV에서는 경북 영덕의 풍경이 비치어 영식이네 고향이라 관심있게 보았더니 동해바다 수평선과 밀려오는 파도가 아름답다. 9시에 글을 작성하러 PC방에 갔다가 12시에 집에 돌아와 점심을 먹고 아프리카 난민돕기 행사에 참여한다는 아내와 딸과 동행하여 장충동 국립극장에 갔다. 아들은 학교에서 직접 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고 운전은 아내가 하고 가는데 뒷자리에서 불안하다는 딸은 안절부절 못한다. 오늘 난민돕기는 딸이 신청한 것으로 비가 오지 않았다면 화창한 남산의 정경과 더불어 더 좋았을 뻔했다. 국립극장에 아내와 딸을 내려주고 신설동에 가서 투병기를 작성을 하며 긴 시간을 보내다 오후에 강의를 하러 갔다. 저녁에 집에 차를 두고 서대문 로터리에 나가 친구 형준이를 만나 김치찌개와 산낙지 등으로 식사를 하고 술도 마셨는데 남녀노소 누구를 막론하고 생각이나 관심사항이 비슷하여 소통이 잘 되면 그것보다 즐거운 일도 없다. 토요일이라 매제나 정식이 영식이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전화가 왔지만 모두가 취해 있는 밤으로 서대문에 있는 나도 예외가 아니다.
17일 새벽에 창밖을 바라보니 날이 흐리다. 어제 걷기대회에 참가한 아내는 피곤하다고 아침 9시가 지날 때까지 누워 있다. 일요일이라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식사를 늦게 마친 후 11시에 안산에 올랐더니 어제에 이어 오늘도 검은 구름이 하늘을 가렸고 화사한 꽃들을 대신하여 우거진 신록과 하얀 아카시아가 5월 중순을 지키고 있다. 연일 계속되던 높은 기온도 비를 몰고 오는 거센 바람에 자취를 감추었고 부지런히 오른 정상에서 가져간 과일을 먹으며 보내다가 중턱을 돌아서 내려왔다. 아침부터 소리도 없던 아들이 2시경 논술수업 하러 나간 뒤에 점심으로 무국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다시 투병기 작업에 몰두했다. 무슨 일이든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집중하여 반드시 이루어 내는 나의 성격이라서 오늘도 마찬가지다. 학원으로 나가서까지 글을 작성하다가 강의를 마치고 임대문제로 가서 상담을 하고 나오니 8시가 지났다. 저녁에 식사를 마치고 투병기 작업을 하는 중 새벽 1시에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왔고 2시 가까이 되어서는 영식이가 향우회를 마치고 고향 사람들과 지금까지 보냈다고 전화가 와서 통화를 했다. 대체로 서울에서 먼 거리에 고향을 둔 사람들일수록 모임이나 단합이 잘 되어 전남이 제일이라고 하지만 영식이네 경상도 사람들도 이에 못지 않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영식이와 어머니 투병기를 작성하는 내가 적어도 오늘만은 삶의 질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18일 월요일 아침의 하늘이 맑고 환하다. 어제 새벽 3시까지 글을 작성하고 잤더니 몸이 피곤한데 아내는 일찍 일어나 신문도 보고 여유있게 시간을 보낸다. 오늘 조선일보 1면에 논픽션 수필을 공모한다는 내용이 실려 반가웠고 어머니 투병기를 마무리하여 응모해 보리라 다짐했다. 날마다 어머니를 보면서 기록한 지난 날의 내용을 5월에 들어 정리하기 시작한 것인데 아들의 진솔하고 생생한 기록이라 충분히 대상도 가능하리라 확신했다. 아침에 아내는 수업을 하러 나가고 나는 본격적으로 조선일보에 응모할 원고를 규정이나 조건에 맞게 일단 수정하려고 앉았는데 오늘 새벽까지 작성한 4시간 분량의 내용이 컴퓨터를 잘못 조작하여 시작하면서 사라져 버렸다. 오호 통재라, 시간을 잃어버린 허망함이 금전의 손실보다 상실감은 더 컷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어 탄식만 하다가 새로 작성을 시작했다. 낮 12시까지 신문에 실린다는 마음으로 글을 정리해보니 지나간 어머니와의 시간이 그리웠고 아직도 옆에 계시는 착각으로 순간 행복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점심을 먹고 운전연습을 시킨다고 오늘도 아내와 홍제동에서 세검정을 거쳐 월곡동까지 갔다가 올 때는 곧장 내부순환도로를 이용하여 집에 돌아왔다. 오후 3시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신설동에 임대료를 받으러 갔다가 학원으로 이동했는데 부동산에 맡기면 될 것을 성격상 내가 직접 처리를 하려다 보니 바쁘지 않을 수 없다. 저녁에 강의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니 아들은 벌써 자고 있고 아내와 딸은 즐겁게 늦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19일 새벽에 신문을 보고 원고 작업을 하다가 아침식사를 하는데 학교에 가는 아들은 허공만 바라보며 거실을 나가고 늦게 일어난 딸은 부시시한 모습으로 식탁에 앉는다. 가급적 일찍 일어나 시간적인 공백이 많아야 밥도 맛있고 활기찬 하루가 될 수 있다고 여러 번 이야기를 했는데 메아리가 된 오늘의 아침이다. 오전에 원고작업 2시간 이상을 하다가 안산을 다녀온 아내와 운전연습을 하기 위해 차를 몰고 도로에 나섰다. 서울역과 이태원 고속터미널을 거쳐 잠실까지 갔다가 25년 전에 내가 생활했던 삼전동 4거리 똑다리 김치찌개 집에서 식사를 했다. 기사들이 추천하는 서울에서 소문난 음식점으로 역시 저렴하면서도 맛이 좋았고 식사를 마치고 밖에 나와 주변을 둘러보니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믾이 변했다. 다만 잠실 종합운동장 건너편 우성아파트는 그대로인데 이 곳에서 태권도장을 운영하다가 불이 나서 그만 둔 큰형의 지난날이 생각났다. 잠실을 벗어나 강변북로와 한양대 근처를 지나 내부순환도로에 들어서 오후 2시 집에 돌아왔고 아내의 운전실력은 여전히 불안했어도 시내를 다닐 만큼 많이 능숙해진 것도 사실이다. 집에 쌀이 없다기에 살면서 처음으로 친구 형님이 운영하는 김제정미소에서 7만5천 원을 지불하고 40킬로 주문을 했다. 오후에 신설동 2층 기존 세입자와 계약기간을 종료하는 서류를 작성했고 집에 와서는 몇 시간을 원고작업하며 보내는 중에 새벽1시 아들이 학원에서 돌아왔다.
20일 새벽 2시에 자고 7시에 일어나 아침 식사를 하려는데 오늘은 일찍 일어난 아들이 식탁에 앉아 있다. 요즘에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학교생활은 잘 하는지 아들과 오랫동안 대화가 없어 알 수가 없다. 어느 때는 축구를 하겠다는 소리가 들리고 이번 주 토요일에는 10여일 전에 언급한 대로 학교 보컬에 참여하여 신촌에서 공연을 한다고 하여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와 아내가 노래를 못하고 그것보다 아들의 노래를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보컬 싱어라니 아마 사춘기 시절의 우쭐대는 한 순간의 행동일 것이다.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가고 아내도 영어를 배우러 간 뒤에 혼자 남아서 어머니를 부르며 원고작성에 몰두하였다. 12시가 지나 산에서 내려온 아내에게 운전연습을 권했더니 피곤하다고 다음으로 미루어 점심을 먹고 신설동 미납수도료 정산을 했다.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하더니 오후로 갈수록 하늘이 어두워지고 저녁에는 친하게 지내는 고등학교 후배 부친상이라고 연락이 와서 신탄진 보훈병원에 우현이와 내일 가기로 했다. 영식이는 부산에서 배의 서류를 정리하여 내일이나 서울에 온다는 전화를 하고 집에 도착해서는 오늘도 늦게까지 원고작업을 계속했다.
21일 남부 지방에만 비가 온다더니 아침이 되면서 서울에도 비가 내린다. 오늘 신탄진 후배 부친상에 가면서 청주에 다녀오려고 아내에게 대화를 했는데 말의 엉뚱한 소리만 하여 답답한 마음으로 거실에 나와 원고작업을 시작했다. 평소보다 일찍 거실에 나온 아들이 학교에 간다고 부지런히 서성대더니 한참 후에 시계를 잘못 보았다고 잠을 자러 다시 방으로 들어간다. 비가 오는 아침에 새벽 기분이 아직도 남아 있어 한글회관 강의를 들으러 가는 아내를 무시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었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듯이 누구라도 상대에 따라 선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악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12시경까지 원고작업을 하다가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니 수업이 없다는 아내는 방에서 책을 읽고 학교에서 돌아온 딸은 모처럼 엄마가 오후에 집에 있어 좋은지 표정부터 밝아진다. 신탄진 상가에 가려고 우현이에게 연락을 하고 동인천역으로 지하철로 이동했더니 여의도 승용이 후배가 먼저 와서 기다린다. 우현이 차로 출발하여 8시에 신탄진 장례식장에 도착했는데 싸이클을 예찬하는 승용이의 이야기에 2시간이 금방 지나버렸다. 무슨 일이든 열정을 가지고 생활하는 여의도 학원장 승용이는 나와는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는 관계이고 그와 친구인 부친상을 당한 덕화는 해태그룹 부장으로 1달 전에 어머니 상가에도 왔었던 능력있는 후배들이다.
22일 어제 신탄진 상가에서 저녁을 보내고 10시경 출발하여 여의도에 도착했고 새벽 1시에 택시로 집에 돌아와 잠을 잤다. 아침에 아내는 고속터미널에 오신다는 장모님 마중을 나갔고 나는 신설동에 나가 원고작업을 하다가 유자원에서 어머니 생전에 찍은 사진을 전달하기 위하여 온다는 간병사를 만났다. 어머니 임종 전까지 간병을 맡은 사람이라 특별나게 기억이 나는데 시간이 한 달 전으로 돌아가 어머니의 체취가 다시 나오는 듯 했다. 사진을 받아보니 4월8일 벚꽃이 만발했을 때 마지막으로 외출하시어 나와 찍은 10여장의 모습으로 이승과 저승이 함께 있는 시간이었다. 감사하다는 인사와 한사코 거절하는 것을 달래어 5만원 사진 비용을 전달하고 3층으로 올라가 여름 장마철이 오기 전에 수도와 옥상 방수문제로 의견을 나누었다. 6시에 학원으로 이동하여 수업을 했고 늦은 시간에 비가 내리는 이유로 영어선생을 녹번역에 내려주고 집에 11시에 들어왔다. 오늘 장모님께서 서울에 오신 것은 지난 번 두고 간 안경을 가지러 오신 것인데 오늘은 다시 핸드폰을 놓고 가시어 서울에 또 오셔야 한다.
23일 하늘이 잔뜩 흐리고 휴일 토요일이라 아들과 딸은 한결 여유가 있는 아침을 보낸다. 식사를 마치고 TV를 시청하는 중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음독이라는 속보가 나와 놀랐고 여러 채널을 돌려가며 긴장으로 보는 중에 SBS에서는 노무현 사망을 다른 방송에서는 심폐소생 중이라고 보도를 한다. 결국 투신 사망으로 바뀌었지만 전직 대통령이 자살이라니 믿기지 않았고 온 국민의 충격과 함께 또 하나의 불행한 역사가 새겨지는 오늘이다. 깨끗하게 살아온 자신의 63년 인생이 어느 순간 본인은 물론 측근이나 가족까지 검찰에 불려 나가는 치욕스러움을 감당하기 어려워 그의 고향 경남 김해 봉하마을 뒷산 부엉이 바위에서 스스로 몸을 던져 운명을 했는데 산 자는 죽은 자의 심정을 알 수는 없다. 오늘 신촌 밀레오레 광장에서 서대문 음악경연대회를 준비한다는 아들을 학교에 태워주고 PC방에 들어가 원고 작업을 집중하여 이어갔다. 조선일보에 제출할 분량이 원고지 800매이기 때문에 틈만 나면 작업을 하지만 어머니를 추모하는 심정으로 반드시 완성하여 제출할 것이다. 오후에 아내와 딸을 태우고 신촌 밀레오레 공연장에 갔더니 오늘 노래 대표라고 아들이 나왔고 아무튼 기대보다는 걱정이 많았다. 시간이 촉박하여 공연은 못 보고 먼저 나왔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노래 부르는 아들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24일 전직 대통령의 죽음으로 국가가 큰 혼란이고 모든 국민은 큰 충격으로 슬픔에 빠져 있다. 그의 유서에는 “삶과 죽음은 자연의 한 조각과 같은 것으로 미안해 할 필요도 원망할 필요도 없고 모든 것은 운명이다 ” 라고 적혀 있다. 멀리 산행을 하기 위하여 준비했다가 혼란한 현실이 심란하여 가까운 안산에 올라 정상을 거쳐 대운동장에 내려와 기구운동을 하고 중턱으로 이동하여 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상념에 잠겨보니 정말이지 우리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으로 때가 되면 떠나야 하는 미약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양아파트 뒤로 하산하여 해장국 집에서 점심을 먹고 막걸리 한 잔을 마시며 달력을 보니 지난 달은 어머니를 오늘은 전직 대통령을 보내는 슬픈 4월과 5월의 시간이다. 밖으로 나오니 갑자기 소나기가 내려 PC방으로 달려 들어가 원고작업을 하고 저녁에 딸과 삼겹살로 저녁을 했는데 대화가 잘 통하여 어머니 떠난 자리가 메워지는 것처럼 마음이 편했다. 뉴스마다 전직 대통령 추모 물결이 계속 되고 그의 죽음에 우리는 무엇을 느껴야 하는 것인지 산 자로서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래도 생명은 고귀하다는 것이다.
25일 월요일 새벽 5시가 지나 신문을 보는 중에 엊그제 두고 간 청주 장모님 전화벨이 울려 식구가 모두 잠을 깼고 밖은 벌써 환하게 밝았다. 다음달 하지까지는 계속 낮이 길어지고 밤이 짧아질 텐데 누구나 수면 조절을 잘 하여 각별히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할 때이다. 아들이 일찍 학교에 가고 딸은 철원 비무장지대 땅굴 견학을 간다면서 김밥을 싸고 과자와 음료를 준비하여 소풍가는 아침처럼 들떠서 나간다. 식사를 마치고 오전내내 원고작업에 몰두했고 오후로 가면서 580일의 기록 1차분을 완성했다. 완성이라고 해도 내용만 발췌했을 뿐이고 이제부터 정리하고 퇴고하는 과정이 더 길고 힘든 과정이다. 오전 11시에 동사무소 영어를 마친 아내는 안산에 오른다고 나가고 나는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젓갈을 이용하여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오후에 신설동 2층 임대하겠다는 사람을 만나 설명을 하고 학원으로 이동하여 수업을 하고 마쳤는데 날도 덥고 시국도 시끄러워 정신이 없었다. 11시경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늦은 시간까지 2차 원고작성을 하면서 보냈는데 컴퓨터 실력이 부족하여 고생을 많이 했다.
26일 일찍 일어나 신문을 펼쳐보니 온통 전직 대통령 서거와 관련된 글이다. 삶과 죽음이 자연의 한 조각이라며 바위에서 몸을 던진 사람, 친근한 서민의 대통령이었기에 안타까움이 더 크게 와 닿는 아침이다. 식사 후 아내와 안산을 올라 걷다가 11시에 내려와 양복을 입으려고 찾아보니 마땅한 것이 없어 점심을 먹고 운전연습을 하면서 신세계백화점으로 갔다. 여름 양복을 구입할까 했는데 옷 가격이 터무니 없이 높아 남대문시장으로 이동하여 나름 만족스럽게 9만원 양복을 선택했다. 집으로 오는 중에 아내를 서대문에 내려주고 임대문제로 신설동으로 급히 갔다가 다시 PC방으로 들어가 긴 시간 원고작업을 이어갔다. 글쓰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머니를 기리는 과정이라 행복이고 보람의 시간이 아닐 수 없다.
27일 연일 30도를 오르는 무더운 날씨는 이번 토요일이나 일요일까지 계속된다는 예보를 한다. 요즘 밤낮으로 원고작업에 매진하여 시간 가는 줄을 모르지만 800매 원고를 작성하는 대장정을 반드시 달성할 것이다. 나아가 조선일보 논픽션 대상을 통과하여 TV에까지 나간다는 목표를 잡다보니 의욕도 생기어 좋은데 모르는 사람들은 돈도 안 되는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거실에 나와 창문을 열어 보니 낮에는 더워도 새벽 공기는 상쾌하다 못해 아직도 차가운 5월 하순의 아침이다. 잠도 많이 못 자고 식사도 하지 않고 눈을 비비며 학교에 가는 아들과 딸이 안타까웠는데 요즘은 밤이 짧아 누구나 수면 양이 적을 수 밖에 없으니 저녁에 일찍 자는 수 밖에 없다. 오전에 아내와 안산에 올라 집에서 가져온 오이를 씹으며 정상과 중턱을 걷고 내려오니 1시간 30분이 지났다. 점심을 하고 신설동에 나가 원고정리를 하다가 밀린 수도료 입금과 3층 화장실 변기작업과 옥상 방수처리를 점검했다. 부산에서 온 영식이는 우리 집에 미역과 동해안에서 잡은 방어를 가지고 가는 중이라고 하여 집에 두라고 하고 학원에 들어가 수업을 했다. 오늘은 수강생 전원이 출석을 하여 재미있게 강의를 했지만 퇴근하면서는 또 임대문의가 와서 상담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영식이가 가져다 준 방어는 나로서는 처음 먹는 생선이라 저녁에 매운탕을 아내가 만들었는데 맛의 기준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28일 전직 대통령 장례는 7일장으로 치루어져 오늘이 마지막 조문을 할 수 있는 날이다.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아내에게 운전연습을 시키다가 한글회관 강의 시간에 맞추어 내려주고 대통령 분향소가 차려진 가까운 역사박물관에 도착하여 조문과 묵념을 했다. 분향소가 광화문 근처에 있다 보니 오늘도 정재계 인사들과 시민들이 많이 왔고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국화를 헌화하고 조문을 마쳤다. 죽은 자는 최선의 선택이고 대단한 용기라 생각할 것이지만 남은 자의 슬픔은 끝이 없기에 가족이나 국민 입장에서 보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극히 이기적인 행동으로 여겨질 뿐이다. 그러기에 오늘처럼 조문을 하면서도 슬픔속에서도 원망의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여길 수 밖에 없다.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PC방에 가서 3시간 원고 작업에 몰두했다. 저녁에는 영식이와 만나기로 해서 남영동에 나가 사업 현황을 들어보니 돈만 투자하면 되는 줄 알았던 일도 들어보니 파도로 인한 조업 중단과 영역 침범으로 억류되는 일 그리고 기계 고장으로 인한 표류 등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정해진 날에 배가 입항하지 못하여 금전적인 타산이 맞지 않는 경우가 생기는데 편하게 돈을 버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29일 새벽에 TV화면을 보니 경남 김해에서 운구차가 출발하여 국민장을 거행하려고 서울 경복궁으로 향하여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다. 시신을 실은 영구차가 먼 경남 김해에서 서울로 왔다가 다시 김해로 돌아가는 장거리 이동인 것이다. 오전에 식사를 하고 체육관으로 나가서 운동을 마친 뒤에 시내에 나갔더니 경복궁 근처는 아예 통제가 되어 다닐 수도 없다. 강남에 가서 고향 친구를 만났고 오후에는 대치동 원당감자탕 집에 들어가 비싸기는 해도 맛있는 식사를 했다. 국민장으로 슬프고 어수선한 날이지만 산 사람과 죽은 사람과는 이렇게 극명한 차이가 있다. 저녁에 봉하마을의 모습은 전국에서 모여든 추모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여당과 야당 우파와 좌파의 불신과 대립이 갈수록 심화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30일 사는 과정은 행복 속에 괴로움이 있고 또한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도 행복한 순간들이 있다. 어쩌다 초등학교나 중학교 동창 등을 만나면 그 동안 살아온 환경이 달라 완전 변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과거의 기억만 가지고 서로를 대하여 갈등과 오해가 생기는 경우가 빈번하고 더구나 금전적인 문제가 개입되면 서로를 이해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늦게까지 쏘다니다가 새벽에 택시로 돌아오면서 요금문제로 대리기사와 다투었다. 오전에 아내와 안산에 올라가 5월의 마지막을 보내고 집에 와서 비빔국수를 만들어 함께 먹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오후에는 원고정리를 하며 꼼짝하지 않고 컴퓨터 앞에서 보낸 주말 오후 시간이다. 딸은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간다고 하고 8시에 논술학원에서 돌아온 아내를 대신하여 내가 설거지를 하고 저녁식사로 옻닭을 만들어 두었다.
31일 어제는 술도 안하고 맛있게 식사하고 일찍 잠을 잤더니 오늘은 새벽에 일어나도 더 가뿐하고 기분도 좋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평소에 술 조금 마시고 절제하는 삶이 반드시 필요한데 의지가 약하여 실천하는 데에는 항상 문제가 따른다. 오늘은 5월의 마지막 날이고 내일부터는 6월이 시작되는데 기온이 높아 올해 무더운 여름을 예고 하는 것 같다. 아침에 등산복 차림으로 도봉산에 가는 중 신설동에 들러 임대문의를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1호선으로 방학동에 갔다. 영식이를 만나 우이암으로 걸어 오르니 도시의 기온과 다르게 산바람이 불어와 시원한 산속이다. 오후 1시경 점심을 먹고 하산을 하여 산 아래에서 버섯낙지 전골과 감로주로 뒷풀이를 하고 영식이는 7호선 나는 1호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두워지는 5월의 밤, 창밖의 아카시아 향기는 6월을 알리며 밀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