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내면이라고?
내용이 문제지 형식이 무슨 대수냐고?
이 구구절절 옳은 가르침들을 한순간에 우스갯소리로 만드는 장르가 있으니 바로 코스튬드라마(costume drama)다.
시대극의 비슷한 말인 코스튬드라마는 구경거리의 장르다.
이 세계에서 외관과 치장은 고해성사만큼이나 진정하다. 옛 집과 거리가 노래를 부르고 사락거리는
옷자락이 메시지를 속삭이는 코스튬드라마에서 눈요기는 부록을 넘어서는 영화의 본론이다.
지나간 시대의 의식주를 연대를 명시하는 기호 정도로만 이용하는 시대극이 많았던 상황에서 10월 초 개봉하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기억할 만한 한국의 코스튬드라마가 될 것으로 보인다.
“침이 마르게 예찬하는 한국의 미가, 5천년 전통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정녕 저게 다일까?”
기존의 TV나 영화의 시대극을 보면서 오랫동안 공복감을 느껴온 이재용 감독과 정구호 프로덕션디자이너는,
“제대로 보여주리라”는 야심으로 과거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이재용 감독은 원작소설의 강력하고 선명한 스토리가 버티고 있었기에 안심하고
‘제대로 보여주기’에 매진할 수 있었다. 근원도 모르는 물건을 섞어놓는 퓨전 시대극에는 애당초 뜻을 품지 않았다.
감독과 미술팀은 집도 옷도 직접 짓고 소품도 손수 만들고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진품에 가장 가까운
물건을 수집한다는 꼬장꼬장한 원칙으로 조선 후기 상류사회 일상사 재현에 뛰어들었다.
아무리 섬세한 감식안도 시간과 돈의 도움 없이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건축과 풍속,
복식을 고증하는 스터디를 포함해 프리 프로덕션만 10개월에 달했고 미술 비용은 20억원(순제작비 50억원)이 소요됐다.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는 하나의 문화를 다른 문화로 번역하는 작업에 재미를 느끼는 감독과
패션뿐 아니라 식문화, 인테리어를 종합적으로 사고하는 습성을 지닌 디자이너의 합작품이기도 하다.
알려진 대로 <스캔들…>의 원안은 쇼데를로 라클로가 프랑스 혁명 직후에 쓴
귀족사회 성풍속 소설 <위험한 관계>와 스티븐 프리어즈 감독의 동명영화.
이재용 감독은 매체와 양식은 달라도 조선 후기 남녀의 욕망과 사람살이가 동시대
프랑스 귀족과 혹은 현대의 한국인과 별나게 다를 리 없다는 전제에서 접근했다.
프랑스 귀족에게 은근한 남녀의 시선이 오가는 오페라 감상이 있다면 조선에는 다과회가 있고,
현대에 모양 비디오 사건이 있다면 당대에는 춘화 스캔들이 없으란 법 없다는 유추다.
과거의 역사를 경외하는 대신 일상의 시선으로 바라봄으로써 고증과 상상으로 재현해야 할 세부는 역설적으로 대폭 늘어난 것이다.
<스캔들…>의 제작진은 손바느질과 잘 보이지도 않는 자잘한 소품에 들어간 공력을 회고하며 한숨을 쉰다.
합성섬유가 아닌 진짜 모발로 삼은 가체의 값과 무게가 스크린에서 차이를 드러내 줄지,
진품에 감싸여 배우들이 느낀 시대와 계급의 감각이 관객에게도 과연 전달될지 알고 싶어한다.
궁금증의 답은 후일을 기약하고, 여기서는 <스캔들…>이 그려낸 복식과 주거,
생활의 풍속도를 감독과 프로덕션디자이너의 안내로 미리 일별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