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재란(1597~1598) 당시 명군 최고 지휘관 형개(邢玠·1540~1612)가 1597년 8월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게 보낸 상주문(황제에게 올리는 보고문)에는 병력 동원을
서둘러달라는 급박한 호소가 담겨 있다. 형개는 명나라 각지에서 병력을 징발해
속히 조선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하면서 “길이 멀어서 늦어져 일에 미치지 못할까
걱정”된다고 썼다. 이 무렵은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서 궤멸하고 남원이 함락되면서
일본군이 기세를 올리던 시기다.
이 같은 내용은 형개가 정유재란을 수행하면서 작성한 공문서들을 모아 1601년
발간한 <경략어왜주의(經略禦倭奏議)>에 실려 있다. <경략어왜주의>는 정유재란
당시 명군의 대응, 병력과 물자 조달, 전황, 논공행상을 둘러싼 명군 내부의 갈등,
전후 처리 과정 등을 명나라의 시각에서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자료다.
구범진, 김창수, 박민수, 이재경, 정동훈 등 한중관계사료연구팀 학자들이 이를
번역하고 주석을 덧붙인 역주서 <명나라의 정유전쟁>(사회평론 아카데미)이 최근
출간됐다. 총 4권으로 이뤄진 <명나라의 정유전쟁>은 국립진주박물관이 2017년부터 추진 중인 ‘임진왜란자료 국역사업’의 세 번째 성과물이다. <경략어왜주의>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형개의 상주문을 통해 확인되는 것은 전쟁에서 병사들이 직접 충돌하는 전투는
기나긴 전쟁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명나라는 1597년 초 파병을 결정했지만 조선땅으로 보내는 데만 1년 이상
걸렸다”고 말했다.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오면서 병사들을
먹이고 재우고 도망친 병사들을 잡아와야 했습니다.
흔히 전쟁이라고 하면 <삼국지>의 ‘적벽대전’ 같은 전투를 떠올리지만, 이런
번거롭고 소소해 보이는 일들이 신출귀몰한 작전이나 적장의 목을 베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고 전쟁의 실상에 가까운 문제들이었던 겁니다.”
이역만리 조선으로 파병된 명군이 겪는 어려움들도 구체적으로 소개된다.
“명군이 조선에서 고생을 많이 하는 와중에 월급을 은이 아니라 곡식으로 받게
되면서 불만을 터뜨리는 모습들도 나온다”면서 “명군이 조선에서 횡포를 많이
부린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 배경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명군 지휘부 일부가 전투의 공적을 과장했다는 혐의로 명 조정의 감찰관으로부터
탄핵되고 형개가 이를 옹호하는 과정은 전과를 둘러싼 정치 투쟁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당시는 정보가 제한된 시대여서 공적을 과장하더라도 확인이 안 됐다”면서
“공적을 과장하는 현상은 명군과 일본군 양측에서 모두 발생했다”고 말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일본의 철군으로 전쟁이 종결된 이후에는 명군의
조선 주둔 문제가 불거진다. “정유재란 초반 명군이 병력 동원에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의 재침에 대비해 군대를 남겨두려 했다”면서 “완전 철군을 하느냐
병력을 남기느냐, 남긴다면 얼마나 남길 것이며 주둔 비용은 어떻게 댈 것이냐
등의 문제를 놓고 명 내부에서 논쟁이 벌어진다”고 말했다.
<경략복국요편>이나 <경략어왜주의>는 근대 이전 한·중·일이 벌인 유일한
전면전이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사자인 명의 입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다. 일본의 전쟁의 많은 비용과 손실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의
이나라의 많은 도예기술관 인질로 많은 사람을 잡아가고 전공의 표시를위해
엉청난 귀를 가져 갔답니다 그 귀의 무덤에 자그만치 200만개나 된다는데
그만큼 희생이 많았다는걸 알수 있습니다 정유재란은 1597년이라 전쟁의
막바지 1597년에 전쟁을 마무리 했어요 일본의 왕은 그냥 상징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