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호 | 2011년 5-6월
매력만점 두리반
멍구 | 직장인, 마포촛불연대 카페지기, 멍구밴드, 멍구스틱, 쏭의 빅밴드, 이름하나못짓고 등의 밴드에서 드럼과 타악기를 치고 있다.
홍대 앞 ‘작은 용산’ 또는 ‘사막의 우물’. 서울 마포구 동교동 삼거리에 위치한, 한때는 칼국수 집이었지만 지금은 철거에
반대하는 농성장이 된 ‘두리반’을 일컫는 말이다. ‘작은 용산’은 참사가 일어난 용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두리반도 상가세입자
원주민의 권리를 무시하는 막개발 투기꾼들에 의해 무작정 길거리로 쫓겨났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사막의 우물’은 두리반 안종녀
사장의 남편 유채림 작가가 ‘작가의 방식’으로 싸우기 위해 언론에 기고한 글에서 비롯됐다. 가난한 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을
‘사막’으로,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어렵게 마련한 생존 수단인 두리반을 ‘우물’에 비유한 것이다.
홍대 앞 명소가 된 농성장
두리반은 지금 크기의 반만 한 우물이라도 지을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개발업자들은 이사비용 300만원, ‘물 한 바가지’만 줄
테니 나가라고 했다. 지역에서 터전을 잡고 살던 원주민의 삶이야 어찌되든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 쫓아내고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천박한 발상. 공항철도 역사 건설과 함께 개발이 진행됨에도 세입자에 대한 보상의무는 없게끔 만들어진 변칙적인 재개발법. 예외조항을
두어 상가세입자를 보호하지 않아도 되게끔 만들어진 상가임대차보호법.
이런 것들이 두리반이 ‘불법’점거 농성을 할 수밖에 없게끔 한 원인이다. 농성은 이미 1년을 훌쩍 넘겼지만 아직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 1년 새 두리반은 이제 홍대 앞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명소가 되었다. 농성장이 명소라니 이게
뭔 소린가? 뭔 소리긴, 농성장이 명소가 되면 안 되나? 아니, 철거민의 억울함과 재개발 과정의 부당함을 널리 알려 하루 빨리
개발자본 투기꾼들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철거 농성장은 명소가 되어야 하는 게 맞다.
알다시피(?) 두리반에서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열린다. 월요일 하늘지붕 음악회, 화요일 푸른 영상의 다큐 상영회, 금요일 칼국수
음악회, 토요일 자립음악회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문학포럼과 ‘불킨낭독회’도 있다. 그밖에 비교적 최근에 신설된
프로그램(?)으로는 서로의 지식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3층 강좌, 국제연대를 위한 영어모임, 우리 동네 자립과 공존을 위한
벼룩시장, 두리반 옥외 라디오방송, 인권활동가 박래군의 인권수다 등도 있다. 또 가끔씩은 특별기획 토론회, 클래식 음악회, 작은
영화제, 출판기념행사 및 농성후원 이벤트 같은 것들도 열리며 성미산 공동체, 팔당 농민, 쌍용자동차 노동자 등 다른 투쟁현장과
연대하는 행사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종교행사를 빼먹을 뻔 했다. 목요일에는 촛불미사/예배가 열리며 일요일엔 ‘은혜와 평화’
교회 분들이 예배를 마치고 두리반에 지지방문을 하고 있다. 3층 강좌에서는 트위터에서 유명한 어느 스님이 ‘불교와 사회운동’을
주제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수 십여 팀의 인디밴드와 수 천 명의 관객을 불러 모아 두리반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던
‘51+뉴타운컬쳐파티’도 빼놓을 수 없다. 토요일 자립음악회를 맡고 있는 자립음악생산자모임이 우연히(?) 기획하게 된 이
어마어마한 행사는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성황리에 열렸다. 이 행사는 앞으로도 대안적인 인디음악축제로 계속될 예정이다. 마지막으로
두리반에 들락거리는 이들이 모여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는 중요한 회의인 ‘두리반 반상회’도 나름 행사라면 행사다. 자, 이렇게
열거하기도 숨이 찰 정도로 많고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는 농성장을 생각해보라. 거기에 참여하고 구경 오는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댈
농성장을 생각해 보라. 두리반이 명소가 안 될려야 안 될 수가 없다.
나는 바로 그렇게 두리반에 북적대는 사람들 중 하나다. 직장에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두리반에 가서 음악공연도 보고, 영화도
보고, 낭독회도 듣고, 가끔은 술도 마시고, 그냥 죽치고 앉아서 멍 때리고 있기도 한다. 아, 그리고 친구들과 취미처럼 하고
있는 밴드가 있는데 가끔 두리반의 무대에 올라 연주도 한다. 워낙 설렁설렁하는 밴드라 어설프지만 두리반에 자주 들락거리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라’해주고 있다.
두리반에 북적대는 사람들 중엔 나처럼 평범한(?) 직장인도 있고, 백수(요즘말로 잉여)도 있고, 직업 활동가, 대학생, 청소년,
음악가, 사진작가, 영화인, 문학인들도 있다. 그런데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딱 나누기는 애매하다. 평범한 사람도 때론
두리반에서 뭔가 맡아서 일을 하는 활동가가 되기도 하고, 사회단체에서 일하는 활동가들도 두리반에 공연을 보러 오는 평범한 관객이
되기도 한다. (사실 공연을 보러오는 것도 일종의 연대 활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청소년인권 활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음악
활동가도 있고, 사진 활동가, 다큐멘터리 활동가도 있다. 모두 각자의 영역에서 각자의 삶을 살며 각자의 활동을 하다가도 두리반에
와서는 두리반 활동가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또 각자의 사정으로 두리반에 자주 오지는 못하지만 트위터 상에서 두리반을 얘기하고
알티(리트윗)하는 것으로 연대하고 있는 이들도 볼 수 있다.
지금은 두리반이 ‘새로운 농성문화’로 언론에도 소개되며 마치 복합문화공간이나 클럽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다양한 행사와 사람들로
북적대지만 사실 시작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다양한 사람들과 예술가들이 자기가 제일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두리반에
연대하고자 하다 보니 이렇게 된 것일 게다. 아쉽게도 다른 철거 농성장들도 두리반 같이 북적대면 좋겠지만 그렇지는 못하다.
유채림 작가가 소설가라는 것과 두리반 위치가 음악가/예술가들이 모이고 유동인구도 많은 ‘홍대 앞’이라는 것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리반도 결국 다른 농성장과 마찬가지로 철거민 스스로가 용기를 내어 ‘기어이 싸우고 말겠다’는 의지를 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억울하고 부당한 현실에 맞서, 그 부당함을 당연한 것처럼 꾸며주는 ‘매트릭스’의 법체계에 맞서, 저
거대한 투기개발자본에 맞서,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정당성이 있음을 무기로 삼고서 말이다.
좀 거창하고 무겁게 말한 것 같다. 인간으로서의 권리, 즉 ‘인권’을 지키는 일이란 결국 부당한 일을 겪을 때 느끼는 인간적인 억울함과 ‘살고 싶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소망을 당당하게 외치는 일이 아닐까 싶다.
운동권도 아니었던 내가 어쩌다가?
이쯤에서 내가 두리반에 들락거리게 된 사연을 얘기해 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 두리반 얘기는 잠시 접어두고 나에 대한 얘기를 좀
늘어놓아야겠다. 나는 현재 생계를 위해 직장에 다니고 있지만 인권과 여러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고 될 수 있으면 작은 행동이라도
하면서 그 관심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 시간 날 때 마음 맞고 생각이 통하는 친구들과 이런저런 집회나
농성장을 찾곤 한다. 대학 다닐 땐 ‘운동권’도 아니었고 사회문제에 큰 관심도 없었던 내가 언제부터 어쩌다가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걸까? 어쩌다가라니, 운동권도 아닌 사람이 ‘그런 관심’을 가지면 이상한 일인가?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나 인권과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맞다. 그래도 굳이 내가 언제부터 무슨 연유로 ‘그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인지 말해보자면,
아마도 알바로 건설현장 일용직, 일명 노가다를 하면서 ‘아니, 이렇게 힘들고 지루한 일을 시키면서 고작 요것 밖에 안주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였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먼지 속에서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하면서도 계속 그 일을 전전해야만 하는 늙은
일용직 노동자를 보았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우아해만 보이던 강남의 대형 커피숍에서 알바를 하면서 ‘아니 이렇게 수익이
많이 남는데도 대부분의 일을 하는 알바한테는 겨우 요것 밖에 안주다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느 날
버스에서 『전태일 평전』을 읽다가 남몰래 눈물을 훔쳤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느 날 아침, 학교나 직장에 가기 위해
일어나는 것이 너무 귀찮고 짜증난다고 느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학창시절 두발제한과 체벌, 야자를 앞세운 폭압적이고
지루한 생활의 스트레스를 날리고자 락음악에 빠져 들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어느 날 새벽 라디오 DJ가 읊어준
요절한 시인의 시를 들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인간사의 부조리를 거침없이 조롱하는 염세적인 프랑스 산문가의 글을
읽으면서 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영화판에 기웃거리면서 영화산업이 얼마나 기만적인 시스템인지 겪고 난 후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각종 인권영화제나 노동영화제에서, 여전히 끊이지 않는 전쟁과 착취와 인권침해에 관한 다큐멘터리들을 보면서
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범죄전과가 있거나 조직폭력에 살짝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공익요원을 하면서 그들도 사실
별다를 것 없는, 같은 사람들이라는 걸 느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쩌면 어릴 때, 형에게 얻어맞는 것도 분한데 단지
동생이라는 이유로 세뱃돈까지 적게 받는 것이 너무 억울하다고 느꼈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언젠가부터 이런저런 집회판과 농성장을 기웃거리며 ‘그런 관심’을 갖게 된 것이고, 그러는 와중에 나랑 비슷한
생각과 성향을 가진 친구들도 만날 수 있었고, 국제인권단체 회원 활동을 잠시 하기도 했고, 몇몇 인권/사회단체의 활동가들과도
안면을 트거나 친구가 되기도 했다. PC통신과 인터넷이 관련 정보를 얻고 친구들을 만나는데 도움이 되었다. 잘 되지는 않았지만
뭔가를 모색하며 느슨한 소규모 활동 그룹을 결성한 적도 있다.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농성 중이던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연대하자는 결의도 세웠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농성장에 가서 밥을 하는 것 외에 다른 활동을 해내진 못했다. 아, 가장
흥했던 건 각자 연주할 수 있는 악기를 들고 역시나 느슨한 밴드를 만들어 집회 현장이나 길거리에서 공연을 했던 것이었다. 나름
인기도 있었고 재미도 있었다. 나는 아프리카 타악기인 ‘젬베’를 맡아서 연주하게 됐는데 대학 때 음악동아리를 했던 게 도움이
됐다. 그때 이후 나는 또 다른 이런저런 밴드나 모임에 참여하면서 젬베나 드럼을 맡곤 했고 아주 가끔 홍대의 클럽에서 공연하기도
했다.
참사가 날 뻔 한 풍동 철거촌
2004년 한 친구를 따라 일산 풍동 재개발지역의 철대위(철거민 대책위원회)를 방문했다. 그 곳엔 더 이상 갈 곳 없는 12세대의
철거민들이 ‘소망빌라’라는 이름의 3층짜리 빌라 한 동을 점거하여 공동생활을 하고 있었다. 한 마을 전체가 공사용 펜스로 빙
둘러쳐져 있었고 온통 철거된 잔해들이 널브러져 있던 가운데 철판과 망루로 무장된 소망빌라가 홀로 서 있었다. 이미 해를 넘기며 몇
차례 전쟁을 치러왔던 그 곳엔, 테러리스트가 아닌 평범한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계셨다. 회의에서 아주머니들이 “함께
투쟁하며 공동생활을 하는데 왜 맨날 우리만 밥을 하냐?”며 ‘남녀 구분 없이 밥 당번을 정하자’는 의견을 통과시켰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몇몇 아저씨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곧 아주머니들의 거친 목소리에 평정됐다. 친구들과 나는 가끔 풍동에서 새벽규찰을
서기도 하고 아저씨 아주머니들이 해주는 밥도 얻어먹었다. 또 철거 잔해들 사이에서 진행된 문화제에서 공연하기도 했고, 다큐집단
‘푸른영상’에서 <상계동 올림픽> 등의 작품을 빌려와 철거된 건물 벽을 스크린 삼아 ‘변두리 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사실 그에 앞서 큰 사건이 하나 있었다. 친구 혼자만 풍동에 가 있던 어느 날 새벽, 용역깡패들이 대형 새총, 화염병과 함께
불법개조한 포클레인을 앞세워 들어왔다. 시공사인 공기업 대한주택공사의 의뢰로 ‘행정대집행’을 하려는 것이었다. 거대한 포클레인은
겉에 두꺼운 철판과 철골빔을 덕지덕지 용접해 붙여서 마치 장갑차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말 오늘에야 말로 일을
성사시키겠노라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것이었다. 포클레인이 소망빌라 외벽을 쿵쿵 쳐댔다. 거기 사람이 있음에도 용역깡패들이
망루로 화염병을 던졌고 망루 바닥과 철거민의 옷에 불이 붙었다. ‘풍동참사’가 날 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소화기와 모래를 동원해
겨우 불을 끌 수 있었다. 곧 철거민들도 자신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포클레인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다. 그러자 망루에 화염병이 날아
들 땐 가만히 대기하고 있던 소방차가 급히 포클레인에 다가와 물을 뿌려줬다. 포클레인은 수억이 넘는 값비싼 물건이니 그랬을
터이다. 그런데 멀찌감치 떨어져서 무전기를 든 채 이 모든 상황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용역깡패들의
행정대집행에 아무런 법적하자가 없었음을 인증해 줄 입회인, 경찰이었다. 경찰이 직접 특공대를 투입해 진압에 나서지 않았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했을까? 철거민들의 필사적으로 저항했고 다행히 그날 행정대집행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모든 게 참으로 기가 막힌 장면들이었지만 철거민들은 카메라도 없었고 사용법도 몰랐다. 하지만 다행히 그 친구가 만약을 대비해
가져간 캠코더로 그 모든 것을 찍었다. 나와 친구들은 여기저기 방송국과 기자들에게 연락했고, 또 한 친구는 다음 날 용역깡패의
경비를 뚫고 현장에 들어가 촬영본 테이프를 밖으로 빼내 왔다. TV 뉴스에 ‘도심 속 전쟁’이 소개 됐고 경찰의 묵인도 들통이
났지만, 역시나 아랫사람들 몇 명만 책임자로 몰려 잘렸다. 용역깡패도 소수만 검찰에 고발당했고, 그것도 나중엔 집행유예로
풀려났다고 한다. 어쨌든 방송이 나간 이후로는 용역깡패들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반년 정도 후 풍동철대위는 주택공사로부터
가수용 단지와 임대주택 등의 요구사항을 얻어내어 투쟁승리대회를 열었지만, 곧 풍동철대위 간부들은 불법행위 주동자로 수감되었다.
풍동에서는 관공서, 개발업체, 용역깡패, 경찰, 소방서까지 모두 한패였다. 철거민만 빼고. 2006년 대추리에서도, 2009년
용산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홍대 인근 주민으로 만난 마포촛불연대
두서없지만 다시 내 얘기로 돌아와야겠다. 이런저런 연유로 나름 세상과 사회에 불만이 많게 된 나는 여기저기 집회판과 농성장을
기웃거리더니, 급기야는 스스로를 그저 좀 더 비싸고 잘 팔리는 상품으로 만들 것을 강요하는 위계적인 사회질서를 거부하기로 했다.
대학을 중퇴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그냥 공부하기가 싫었다. 성적에 맞춰 대충 간 학과였으니 적성에는 영 안 맞았고, ‘국방의
의무’(공익)를 다 한 후로는, 복학을 계속 미루며 놀다 알바하다를 반복하다보니 학교에서 점점 멀어지게 된 것이다. 어쨌든 나름의
결심으로 중퇴를 하겠노라고 부모님께 선언했고 예상대로 부모님은 반발하셨다. 나는 딱히 무엇을 하겠다는 목표도 없이 터무니없는
돈을 들고서 무작정 독립을 시도했다. 집안 경제사정이 굳이 내 힘까지 필요로 하는 정도는 아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독립을
하고나니 부모님은 전보다 더 잘 대해주고 이해해주는 것 같았고, 나도 부모님에 대해 좀 더 깊이 생각할 수 있었으니 독립하길 잘한
것 같다.
아무튼 서울에서 혼자 자취하기 적당한, 화장실, 샤워시설, 부엌까지 갖춰진 ‘싼’ 방을 찾는 것이 목표였는데 역시 쉽지 않았다.
엄청나게 발품을 판 결과 최종 후보는 봉천동 후미진 골목의 보증금 50만 원에 월 20만 원짜리와 보증금 100만 원에 월 20만
원짜리 합정동 옥탑방으로 좁혀졌다. 방 크기, 전체적인 구조와 시설은 봉천동이 더 좋았지만 결국 ‘홍대 옆’ 합정동의 옥탑방을
선택했다. 예전부터 락과 인디음악/예술에 관심을 가지면서 ‘홍대 앞’에 대한 로망 같은 것도 있었고 근처에 사는 친구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조그만 옥탑방에 살면서 집주인과 참 많이 싸웠다. 갑자기 겨울이 되자 계약 때에는 말도 없던 가스 값을 터무니없이 많이 내라고
요구한다거나, 옥상에 유아용 간이 수영장 같은 걸 만든다거나, 월세를 5만 원이나 올려달라고 한다거나(적은 돈 같지만 기존
월세의 4분의 1이다!)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만나고 클럽에 공연을 보러 가기엔 참 좋았지만 역시 그 옥탑방은 정말 춥고,
덥고, 좁았다. 나는 방세를 내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이후에 좀 더 살만한 집으로 이사를 가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다.
하지만 대학교를 중퇴하고 특별한 기술이나 자격증도 없으니 적당한 일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알바나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취업과
실업을 반복했고 그다지 알뜰한 성격도 아니어서 돈을 모으지도 못했다.
아무튼 겨우겨우 돈을 모아 4년 만에 합정동 옥탑방을 나왔다. 다시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서대문역 근처 종로구 ○○동으로 이사를
갔는데 이번엔 1천만 원에 30만 원짜리, 꽤 넓고 그럴듯한 방이었다. 곰팡이가 피는 ‘반지하’였지만. 계약서 특약사항엔 “재개발
공사로 철거 시 즉시 이주하는 조건임”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뉴타운 개발이 확정된 지역으로 조만간 헐릴 예정이라 싸게 들어간
것이었다. 다행히(?) 조합 내부에서 시공사인 G×건설사 측에서 심어 놓은 사람과 원주민 사이에 긴 법정소송이 진행 중이어서 금방
공사가 시작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사를 가자마자 집 근처에서 매일 대규모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때는 2008년
5월이었고, 광화문이 바로 집 근처였다. 수많은 청소년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는 것이 정말 인상 깊었다. 교복을 입은 한 학생의
피켓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서의 1분 1초가 우리에게 가장 큰 공부다!” 나는 이삿짐도 다 못 푼 채로 거의 매일 밖으로
나갔다. 집이 바로 근처다보니 차 끊길 걱정도 없이 밤새 좀비처럼 촛불을 들고 광화문 일대를 돌아다녔다. 사실 집을 구하면서 집회
나가기에 편해서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사하자마자 그런 상황이 올 줄은 몰랐다.
촛불의 위력이 엄청났지만 공권력의 탄압 또한 엄청났다. 얼마 후 광장에서의 촛불이 가로 막히자 소규모 지역 촛불모임이 생겨났다.
바뀐 것도 없이 ‘이대로 촛불을 끌 수는 없다’는 당위 때문일 것이다. 홍대 앞에도 ‘마포촛불연대’가 생겨났다. 친구가 같이
마포촛불연대에 가보자고 연락을 했다. 난 이사를 갔기 때문에 더 이상 마포구 거주자가 아니었지만 어쨌든 참여했다. ‘홍대 앞’은
내가 4년 넘게 살던 곳이고, 그 전부터 자주 갔던 곳이며, 앞으로도 자주 갈 곳이었다. 어찌 됐든 그곳은 내가 생활하며 살아가는
공간이었다. 가보니 역시 아는 사람과 여기저기서 보던 사람이 몇몇 있었다. 마포촛불연대는 매주 수요일마다 홍대역 앞 ‘걷고 싶은
거리’에 모여 촛불을 들고 공연이나 발언, 영상을 트는 등 문화제를 진행했다. 나는 거기서 오랫동안 집회현장에서 만났고 함께
밴드를 하기도 하는 친구이자 평화활동가 조약골, 쏭 등과 함께 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우여곡절 끝에
마포촛불연대의 모임 운영자로 선출되어버렸다. 한편 정부의 일방적 ‘개혁’과 촛불 탄압은 계속됐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촛불은
약해졌다. 여러 지역촛불도 점점 나오는 사람이 줄고 운영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내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지역촛불은 그 나름의
역할을 하긴 했지만 광장에서 익명의 개인으로 그리고 관심사를 공유하는 동호회로 모였던 ‘촛불’의 특성 상 지역이라는 타이틀
아래에서 오래 지속되기엔 다소 힘든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서울 도심에서의 규모 있는 촛불집회들은 간간히 이어졌고
마포촛불연대도 몇 명의 고정 멤버들이 꾸준히 나와 주어 근근이 이어 갈 수는 있었다.
어느 날은 마포촛불연대 문화제를 하는 장소였던 홍대역 앞 ‘걷고 싶은 거리’에서 한 부부가 촛불을 켜놓고 기타케이스를 모금함 삼아
공연하고 있는 걸 보았다. 용산참사가 있기 바로 얼마 전 추운 겨울날이었다. 나는 촛불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갔다.
남자 분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고, 여자 분은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있었다. 모금함엔 ‘2MB OUT’ 피켓과 “모아주신 정성은
지금 가장 급박한 기륭전자 여성조합원에게 보내집니다.”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나는 수요일마다 하는 마포촛불문화제가 사람도
줄고 내용도 채우기 힘들던 차에 이 분들을 섭외하면 참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본인들도 마포촛불연대 카페회원이긴 한데
생계를 위한 일 때문에 월요일밖에 시간이 안 난다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분들은 <청계천8가>로 유명한, 국내에
얼마 안 되는 민중 락밴드였던 ‘천지인’ 출신이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엄보컬 김선수’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 집회판과 농성장을
찾아다니며 노래하는 유명한 팀이 됐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이후 매주 월요일마다 용산 촛불미사에서 ‘엄보컬 김선수’의 공연을 볼 수
있었다.
그 겨울엔 또, 학생들에게 일제고사 선택권을 줬다는 이유로 초등학교 교사들이 해직을 당했다. 전교조와 해직교사들은 서울시 교육청
앞에서 노숙농성을 했다. 그런데 마침 또 교육청이 집 근처였다. 나는 가끔 퇴근길에 농성하는 교사들에게 캔 커피나 음료수를 갖다
드렸다. 청소년인권 활동가들도 일제고사 문제로 그 곳에서 함께 농성을 하기도 했다. 나는 시험으로 지긋지긋했던 학창시절을 떠올리며
교사와 청소년들을 응원했다. 해직된 교사들은 아침마다 자신이 쫓겨난 학교 앞에서 출근투쟁을 했는데 한 교사는 떠들고 노래 부르며
즐겁게 출근투쟁을 하고 싶다며 연주나 노래, 이벤트 등을 함께 해줄 사람들을 찾는다고 했다. 나는 젬베를 들고 그 학교 앞으로
찾아갔다. 거기에도 역시 여기저기서 몇 번 봤던 사람들이 또 있었다. 응원 나온 초등학생 제자들이 마치 친구처럼 반말로 “야,
도둑괭이~!’하며 그 교사의 별명을 부르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촛불 1주년 집회가 있었고 두 전직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집 앞이 또 다시 사람들로 넘쳐났다. 경찰과 검찰의 뻔뻔한 거짓말과
불법행위가 만천하에 드러났지만 용산참사 문제는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집과 회사와 홍대 앞과 그리고 집회현장을
오가며 살고 있었다. 가끔 용산에도 갔고, 가끔 여기저기 공연을 하기도 했다. 마포촛불연대의 초대 운영자는 촛불 1주년 집회 때
우연히 연행되었는데 사진 빨이 좋다보니 채증사진이 너무 선명하게 나온 바람에 구속되고 말았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부당한
대량 해고에 맞서 점거파업을 시작하던 즈음, 나도 다니던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당했다. 파견 계약직이었고 입사한지 딱 2년이 되는
시점에 재계약 연장을 안 한 것이므로 법적으론 하자가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있었던 사소한 일을 문제 삼았는데 따지고 보면
회사에서 적은 인원으로 무리하게 많은 일을 시키다 생긴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몰아 덮어씌우는 것이었고, 하필 그게 나였다.
회식자리에서 운동권 이력을 술안주삼아 떠벌리던 상사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으니 더 화가 났다. 부당해고를 철회하라며 복직투쟁을 벌이고
싶었지만 여러 여건상 그러기는 힘들었다. 태어나서 첨으로 정규직도 돼보겠구나 싶었는데(그래봤자 반쪽짜리 ‘파견’ 정규직이었지만)
좀 아까웠다. 나는 아는 분의 도움으로 지방노동위원회에 진정서를 냈고 퇴직금 이외 한 달 치 급여를 더 받아내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그 와중에 쌍용자동차 점거파업엔 경찰특공대가 투입되었다. 용산참사 때와 마찬가지로 경찰은 ‘불법’이라는 이유로 파업
노동자에게 무자비한 폭력 진압을 휘둘렀지만, 용역들과 사측 구사대의 불법폭력엔 침묵하거나 공동작전을 폈다.
두리반 칼국수를 먹다
마포촛불연대 사람들과 전 운영자 석방을 위한 후원주점을 열면서 새로 구직 활동을 하는 등 정신없는 생활을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동교동 삼거리의 상가 건물에 ‘철거’라는 글자가 락카로 크게 휘갈겨 써져있는 걸 보았다. 풍동과 용산을
떠올리며 ‘아, 저기서도 뭔가 일이 생기려는 건가’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에이, 뭐 모든 철거 지역이 다 그렇겠어?’라며 애써
지나쳤다. 그런데 얼마 후 이번엔 건물 외벽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건물주에 뺨맞고 시공사에 짓밟혔다” “영업보상은
고사하고 보증금도 못 돌려줘? 그게 사람짓이냐?” “세입자 보상 없이 알거지로 몰아내기. 주연:GS건설. 조연:한국토지신탁,
남전디앤씨” 여느 투쟁현장과는 사뭇 다르게 ‘문학적 센스’들이 돋보이는 문구였다. 현수막까지 걸었으니 대책위도 꾸려졌고
진보정당이나 사회단체들도 연대하고 있겠거니 했다. 사실 ‘내 생계 꾸리기도 힘들고 마포촛불연대 자체 운영도 힘겨운 상황인데, 굳이
되지도 않는 역량으로 나서거나 할 필요는 없겠지’ 생각하고 있었다. 마포촛불연대를 하면서 도움을 받고 알게 된 마포지역 M당,
J당, 몇몇 사회단체 사람들에게 혹시 동교동 삼거리 상가 철거문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아느냐고 물어봤다. 한두 번 연락이 오간
적은 있지만 잘 모른다는 대답을 들었다. 얼마 후엔 그 상가 앞을 지나가게 됐는데 현수막이 걸린 외벽 아래 멋진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재개발에 맞선 투쟁을 형상화한 작품도 있었고 용산참사 현장에서 꾸준히 봐오던 이윤엽 판화작가의 <여기 사람이
있다> 같은 것도 그려져 있었다. 녹색의 ‘전철연 동교동 철거민대책위원회’ 깃발도 보였다. 나는 아무래도 직접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포촛불연대가 마포구에서, 그것도 주로 활동하는 홍대 앞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냥 모른 척할 수는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혼자서 ‘동교동 철대위’를 방문했다. 사실 혼자서 현수막만 보고 불쑥 찾아가기는 뭔가 좀 쑥스러웠다.
마포촛불연대라는 모임에서 왔는데 어떤 상황인지 궁금해서 와봤다고 했다. 당시에는 두리반이 아닌 다른 가게에서 철대위 위원장을 맡고
있었는데 “철거 농성하는 거 다 떼쓰는 짓이고 남의 일인 줄만 알았지, 이렇게 단 한 푼도 없이 빈털터리로 쫓아내려 할 줄은
정말 몰랐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두리반에서 식사도 했다. 안종녀 사장은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자기도 촛불을 지지하며 남편도
용산에 자주 가고 촛불집회에 나갔다 연행되어 재판 중이라고 했다. 전철연과 몇몇 단체엔 자문을 구하는 중이고 몇몇 언론에서
취재했는데 아직 기사화된 건 없단다. 나는 ‘동교동철대위’의 소식과 사진을 마포촛불연대 카페에 올렸다. 하지만 게시판에 글을 올린
것 외에 다른 어떤 행동을 하진 못했다. 모두들 각자의 생활과 사정으로 계속해서 시간을 내기 힘들었다. 마포촛불연대는 전
카페지기가 석방된 후 점차 활동력이 소진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 홍대 앞에서 술을
마시고 우연히 그 앞을 걸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엔 그 철대위 위원장이 있던 가게 건물이 완전히 철거되어 있었다. 아. 결국
벌써 끝난 건가? 하지만 두리반은 현수막과 함께 그대로였다. 며칠 뒤 다시 두리반을 방문했다. 저번에는 유기농 야채비빔밥을
먹었었는데 이번엔 간판 메뉴인 칼국수를 주문했다. 주변 건물은 철거가 진행됐지만 두리반의 점심시간은 여전히 근처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안종녀 사장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 주셨다. 함께 싸우던 세입자들이 협박과 회유에 못 이기고 하나 둘
떨어져나갔지만 두리반은 홀로 남더라도 계속 싸울 것이라 했다. 옆 테이블 직장인들이 우르르 몰려오더니 메뉴판도 안 보고 만두전골을
주문해 맛나게 먹었다. 칼국수도 무척 맛있었지만 다음에는 저 만두전골을 꼭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리반
만두전골을 먹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추운 겨울이 왔고 한해가 또 지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취업을 해서 새 직장에 적응을 해 나갈 무렵, 일전에 만났던 해직교사
‘도둑괭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뭔가 부탁할 일 때문이었는데 얘기하다 두리반이 점거농성 중이라는 걸 알았다. 아차, 싶었다.
‘내가 거길 잊고 있었다니, 벌써 철거가 되었다니, 이 겨울에 천막농성을 하고 있는 건가? 어떻게든 몇몇 사람들에게라도 좀 더
알렸어야 했는데.’ 나는 며칠 후 다시 두리반을 방문했다. 식당 내부가 파손되고 집기가 들려나간 상태였지만 다행히(?) 건물
자체가 철거된 건 아니었다. 노트북으로 인터넷 카페 ‘작은 용산 두리반’을 정비하고 있던 유채림 작가가 따뜻한 녹차를 건넸다.
두리반은 위기를 넘기며 꿋꿋이 투쟁 중이었고 촛불을 켜는 그리스도인, 작가회의 사람들, 그리고 마포촛불연대를 할 때 알게 됐던
마포지역 진보정당 사람들도 이미 연대하고 있었다. 또 반갑게도 걷고 싶은 거리와 용산에서 만났던 ‘엄보컬 김선수’가 매주 월요일
‘하늘지붕 음악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오랜만에 마포촛불연대 사람들에게 ‘하늘지붕 음악회’에 함께 가자는 번개를 잡았고,
쓰지 않고 있던 앰프나 발전기 등 각종 마포촛불연대 집기도 두리반 농성장에서 필요할 때 쓸 수 있게 갖다 놓기로 했다. 다큐집단
‘푸른영상’에서는 화요 다큐상영회를 시작했다. 풍동에서 보고 눈물 흘렸던 <상계동 올림픽>이 두리반에서도 상영되었다.
얼마 후엔 몇몇 홍대 인디뮤지션들이 토요일 자립음악회를 시작했다. 예전에 함께 밴드를 했던 친구가 ‘천재’라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아마츄어 증폭기-한받’도 있었고, 용산참사 현장의 문화제에서 보았던 ‘머머스룸’도 있었다. 홍대 인디씬 뮤지션들이
농성현장 문화제에 공연 팀으로 섭외되는 경우는 간혹 봤지만, 이렇게 주체적으로 연대하여 직접 행사를 기획하는 경우는 거의 처음인 것
같아 매우 놀랍고 반가웠다. 곧이어 여기저기 농성현장에서 왕성한 활동을 해오던 친구 조약골도 해직교사 도둑괭이와 함께 금요일
칼국수음악회를 열었다. 두리반은 곧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마포촛불연대에서 봤던 사람도 몇 있었고, 촛불집회와 교육청 앞에서
보았던 청소년인권 활동가들도 있었다. 내가 만나고 보아왔던 많은 사람들이, 여기 ‘두리반’에 있었다.
두리반, 우리의 상징싸움
유채림 작가는 두리반의 투쟁방식에 대해 ‘상징싸움’이란 표현을 즐겨 쓴다. 개발투기꾼들이 돈과 용역깡패의 폭력 같은 ‘물질적
힘’에 기대고 있다면, 그에 맞선 두리반은 음악, 문학, 예술 등이 갖고 있는 ‘상징적인 힘’을 통해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으며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으로 두리반은 철거싸움의 상징적인 곳이 되어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개발투기꾼들은 협박이나 전기를
끊는 등 물질적 힘으로 두리반의 상징적 힘을 무력화 시키려 한 적도 있었다. 한여름 전기가 끊기자 공연 장비 사용은 물론, 당장
농성장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웠다. 이에 안종녀 사장은 홀로 마포구청으로 가 항의점거를 감행했다. 지역 주민이 전기가 끊겨 생계가
위험하니 구청에서 해결하라고 요구했고, 농성도 구청에서 승인한 엉터리 개발계획 때문이니 역시 책임을 지라는 것이었다. 마포구청은
결국 두리반에 전기를 공급할 발전기를 줬지만 연료는 주지 않았다. 어쨌든 두리반은 그때 얻은 발전기로 상징 싸움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게 됐다.
내가 두리반에 자주 들락거리며 공연을 하고 연대하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 상징싸움인 것 같다. 두리반에는 내가 여태껏 만나왔던
사람들, 여태껏 보고 듣고 느끼고 겪었던 많은 것들이 녹아들어 있다. 마치 내가 살아왔던 날들의 상징처럼. 그래서 두리반의 투쟁에
연대하고 두리반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곧 내 삶을, 내 인권을 지키는 일인 것이다.
뭔가 좀 비장하고 낭만적으로 말한 것 같아 약간 손발이 오그라들기도 하는데, 사실 이것저것 다 떠나서 두리반에 가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여러 공연과 행사를 즐길 수 있으니까. 어쩌면 두리반에 북적대는 사람들 중엔 두리반의 싸움에 관심을 갖고
연대하는 것 보다는 그냥 좋아하는 공연을 즐기는 것에 비중을 두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내가 두리반에 자주 들락거리게 되는
이유 중에 분명 그런 부분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두리반 농성에 대해 전혀 모르거나 공감하지 않음에도 그냥 공연을 보기위해
두리반에 오게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문화생활과 예술을 즐기는 것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누려야 할 권리다. 하지만 가난하면
예술을 할 권리도, 즐길 권리도 부정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인디예술의 성지라던 ‘홍대 앞’은 이제 인디예술의
‘무덤’이라 불린다. 이런 현실에서 두리반의 무대와 공연은 다시 한 번 더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갔건 간에
두리반에 가면 결국 그 뜯어지고 깨진 흔적들 앞에서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실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곳이 이를 악물고 버티며
싸우고 있는 철거농성장이라는 것을. 두리반에서 공연을 보다 보면, 혹은 공연을 하다 보면 뭔가 색다른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공연자가 공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두리반이라는 공간이 공연자와 관람자 모두를 통해서, 그들 모두에게 보여주는 처절한 ‘외침’의
퍼포먼스 같다고나 할까. 공연이 끝난 후 발전기가 꺼지면 두리반은 다시 어둠에 잠긴다. 그것조차 두리반이 세밀하게 연출한
퍼포먼스의 일부인 것만 같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리얼리즘 예술이 아닐까? (좀 너무 나갔나?) 어쩌면 두리반에서의 그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느낌 때문에 두리반에 자주 가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렇게 결국 두리반의 외침에 공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
같다. 함께 밴드를 하고 있는 친구가 두리반에서 만든 노래 가사 중에 이런 부분이 있다. ‘당신을 유혹하는 매력 만점
철거농성장. 사랑과 연대 저질러 놓고 …’ 두리반에서 자주 공연하고 있는 ‘야마가타 트윅스터’의 노래 일부를 패러디한 것이기도
하지만, 역시 두리반의 ‘상징적 힘’이 갖고 있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잘 표현한 가사가 아닐까 싶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
혹시 두리반과 철거민들의 투쟁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의심을 품는 이가 있을까 싶지만, 나는 그렇더라도 일단 한번쯤은 두리반에
방문해 보길 권한다. 그냥 공연만 즐기고 가더라도 나쁠 건 없다. 메마른 도시의 일상에서 두리반의 공연으로 ‘오아시스의 신기루’를
잠시 본 듯한 청량감만 느끼고 가더라도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거기에서 두리반의 외침을 듣고 조금만 더 귀 기울인다면
두리반은 이 도시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겉모습은 갈수록 화려해지지만 사실 평범한 사람들은 더욱 살아가기 힘든 ‘사막’이
되어 갈 뿐이라는 것을. 법이라는 것조차 그저 시스템의 부당한 횡포를 은폐해주는 ‘매트릭스’ 같은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 그대, 두리반으로 오라. 메말라 버리기 쉬운 이 ‘사막’에서, 두리반은 당신과 우리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줄 ‘우물’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난 언젠가 두리반의 만두전골을 꼭 먹어볼 것이다.
첫댓글 원문은 http://durl.me/83m2g 에 있습니다.
단문으로 쉽게 읽을 수 있도록, 그러면서도 짠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멍구의 글이 그렇다. 아, 참 좋은 글이다.
네.그러게요. 멍구님 잘 읽었어요; 사실 제가 속한 잡지인데. 이제야 읽었어요.(퍽)
솔직담백해서 마음을 울리는 글~~전철 안에서 읽다가 눈물이 나와~ 쩔쩔맸어여~
진짜 좋은글이다 너무너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