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시대 단학(丹學)의 원조인, 북창 정렴(鄭北窓, 1506∼1549)선생은 매월당 김시습과 토정 이지함과 함께 조선 3대 기인으로 불리었다. 정북창 선생은 “입산 3일에 시지천하사(始知天下事)라”, 입산(入山) 3일에 세상의 모든 일을 알았다고 평할 만큼 뛰어난 도인(道人)이었다. 당시 유학 이외의 학문이 금기시 되던 때에 그는 속세를 버리고 산속에 들어가 도를 닦았다. 그후 북창 정렴 선생은 신선술(神仙術)의 수련법을 담은 『용호비결』을 저술했으며, ‘용호대사(龍虎大師)’라고도 불렸다.
정북창(鄭北窓, 1506∼1549) 선생은 천문, 지리,의약, 수학, 복서(卜筮) 등 학문에 뛰어났으며, 스승 없이 스스로 터득하여 깨쳤다고 전해진다(장유의「북창고옥양선생시집서」中에서 ).
허목(許穆, 1595~1682) 선생이 저술한 『기언(記言)』과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도교사』에는 정북창의 재주가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구체적인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북창이 14살 때 명나라로 사신使臣을 가는 아버지를 따라 제자군관弟子軍官이 되어 북경으로 갔다. 사신(使臣)으로 가는 도중에 압록강을 건너 중국사람을 만나면 곧바로 중국말을 하였다"고 한다.
북창 정렴은 조선 중종中宗, 인종仁宗, 명종明宗 대를 살았다. 자字는 사결士潔이며 북창北窓은 그의 별호다. 그의 시조 정보천 (鄭普天, 900~ ?)은 고려 때 벼슬하여 호부상서를 지냈고, 정희貞僖라는 시호를 받았다. 중중 원년인 1506년 병인 3월 갑신일에 6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온양으로 예종과 성종 연간에 걸쳐 증조부인 충기忠基는 승문원 교리를 지냈고, 조부는 사간원司諫院 헌납獻納을 지낸 정탁(鄭鐸,1452∼1496)으로 2대를 벼슬하면서 가문이 번성하여졌다. 정탁이 정순붕(鄭順朋)을 낳으니 바로 정북창의 아버지다. 정북창이 천문, 지리, 음률, 의약 등 모르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뛰어나자 조정에서는 그를 인재로 추천 발탁하여 장악원(掌樂院: 음악,무용 담당청) ‘주부’겸관상감(觀象監: 천문,지리,책력 담당청)과 혜민서(惠民署: 의약,치료 담당청) ‘교수’직을 준다.
그는 또한 의술이 뛰어나고 약리(藥理)에도 정통하여 중종이 위독했을 때 내의원들이 북창을 ‘명의(名醫)’라고 천거할 정도였고, 인종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도 그가 직접 진찰하기도 했다.
이렇듯 비상한 재주로 인해 당시 인종은 세자 시절부터 공부방 병풍 위에 ‘우의정 정북창’이라 써놓았고 3정승 중 한 명으로 이미 마음속으로 꼽고 있었다.
하지만 지극한 효성과 너그러운 성품으로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던 인종은 안타깝게도 9개월의 짧은 치세 끝에 문정왕후(13대 명종의 모후)에 의해 독살됨으로써 정북창은 큰 뜻을 펼칠 기회가 사라진다.
의술(醫術)로도 명망이 높았던 그가 항상 했던 말은 이러했다. “의원이란 의논한다는 것이니, 마땅히 음양陰陽과 한열寒熱을 살펴 증상에 맞게 약을 투여하면 거의 다 완쾌할 수 있다. 그런데 세상의 의원들은 진부한 서적에 국한되고 한 가지 방술에 집착하여 변통變通할 줄을 모르고 증상의 반대로 약을 쓰고 있으니, 어떻게 효과를 볼 수 있겠는가?”
그후 포천현감抱川縣監이 되어서는 임기가 차기 전 관직에서 물러나 세속과는 인연을 끊고 과천의 청계산淸溪山과 양주의 괘라리掛蘿里에 은둔하며 지냈다. 정북창 선생의 아버지 정순붕(鄭順朋,1484~1548)은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전주 부윤으로 좌천되었다가 면직되고, 이듬해인 1521년에는 관작까지 삭탈당한다.[조선왕조실록]
『명종실록』, 『조선고금 명현전』,『용주선생유고』등의 기록을 보면 정북창의 욕심 없는 처세와 달리, 부친 정순붕은 17년간의 경제적, 정신적 고초를 벗어나고자 출세에 대한 야망을 불태운다. 그러다가 부친이 복직된 1537년에 정북창은 사마시(생원, 진사시험)에 급제한다. 그러나 사마시는 예비시험격인 소과(小科)여서 관직을 받으려면 대과(大科)를 치러야 하지만, 그는 더 이상 과거를 치르지 않았다.
1545년 명종 1년인 을사년. 북창의 부친 정순붕과 동생 정현은 명종의 외척인 윤원형 일파가 되어, 인종의 외척인 윤임 일파와 당시 사림에 명망 있던 인물들을 모함하여 숙청하는 을사사화를 일으키게 된다.
이때 북창은 부친과 동생이 불의한 일로 출세하려는 의도를 알고는 이를 만류하고자 눈물로써 부친께 간諫한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동생(현)이 몽둥이를 들고 형 북창을 패서 죽이고자 했다.
이 일에 대해 대제학 조경(趙絅, 1586~1669)의 문집인 『용주선생유고』에는 “북창의 대효로도 부친과 동생이 남을 모함하여 출세하려는 사악한 짓을 막을 수 없었다. … 이는 ‘순(舜)임금의 고사(古事)’와도 비슷하나, 실제는 북창이 순임금보다 더 고통과 어려움이 많았다.”고 적고 있다.
아버지 정순붕(鄭順朋)은 임백령(林百齡), 정언각(鄭彦慤)과 함께 을사삼간(乙巳三奸)으로, 간신배로 칭하였다. 정순붕은 을사사화를 주도한 공로로 보익공신(保翼功臣) 1등에 책록되고 온양부원군(溫陽府院君)에 봉해졌다. 벼슬도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사(知經筵事)에 이어 우의정에 이르렀다.
정순붕은 을사사화 때 죽임을 당한 좌의정 유관(柳灌)의 가족을 노비로 들여 갑이(甲伊)라는 여종을 첩으로 삼았다. 그후 1578년(선조 11) 관직과 훈작이 삭탈되었다. 을사사화 다음 해(1546년) 정북창은 산속으로 은둔하는데, 출세욕에 빠진 부친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동생이 형을 죽이려고 하는 천륜파괴의 고통스런 상황으로 인해 그는 세속과의 인연을 끊고 산속으로 도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정북창은 산속에서 도학, 역학, 수학 등의 학문을 연구하고 신선술을 연마하며 도인(道人)의 삶을 살아간다. 이때 그는 산속에 살면서 한양으로는 머리도 돌리기 싫어 드나드는 대문과 방안의 창문을 모두 북쪽으로만 낸 채 살았다. 북창(北窓)이라는 별호도 이때 생긴 것이라 한다.
부친은 비록 불의했으나, 정북창의 효심어린 처신에 대한 일화가 전해진다.
정북창은 동네에 애경상문(哀慶喪問)이 있으면 가장 먼저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것은 그의 부친이 사람을 많이 죽이고 음해하여, 사람들이 모이기만 하면 그 불의에 대해, “고약한 놈, 나쁜 놈”하며 욕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정북창은 학식도 많고 명성이 있었기에 자신이 앉아있으면 부친에 대한 험담을 할 수 없으니, 가장 먼저 가서 앉아 있다가 가장 나중에 일어나곤 했다
북창 정렴의 동생인 고옥古玉 정작(鄭碏, 1533~1603)은 자를 군경君敬이라 하였고, 성질이 맑고 깨끗하여 도가서 읽기를 좋아했으며 일찍부터 형으로부터 단학을 배웠다고 한다.
후에는 형의 친구이자 화담 서경덕의 수제자였던 수암守菴 박지화(朴枝華,1513~1592)를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수년 동안 수련하기도 했다. 박지화는 서경덕에게 주역을 배운 제자인데 후에 정작(鄭碏)의 스승이 되기도 한다.
정북창은 시詩도 아주 빼어났는데, 시 평론가 홍만종(1643~1725)은 ‘정작, 박지화, 정북창 중에 북창의 시가 가장 뛰어났고 당시(唐詩)에 필적할 만하다’고 평했다. 정북창은 선도(仙道)에 밝았던 유학자 서경덕(1489~1546)을 존경하며 스승처럼 여긴다. 화담 서경덕은 소강절의 『황극경세서』에 나오는 ‘우주 1년의 원회운세(元會運世)’와 ‘선후천 시간대’의 이치를 깨우쳤다고 전해질만큼 수리학(數理學)과 역학(易學)에 아주 밝았던 분이었다.
선도(仙道)에 몰두했던 정북창도 말년에는 ‘이유 없이 몸이 마르는 병’을 앓았는데, 이는 일종의 ‘울화병’으로 불의했던 부친과 다투다가 근심으로 얻은 병이었다. 그는 자신의 병을 연단술(煉丹術)로써 스스로 치료했다. 그 방법은 ‘폐기-현빈일규-태식-주천화후-결태’의 신선수련법으로, 효과가 뛰어나서 한 달 정도만 하면 백가지 병이 모두 없어질 것이라고 자신의 『용호비결』에 기록하고 있다.
“폐기(閉氣)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책상다리로 단정히 앉아서 위 눈꺼풀을 내려뜨려 내려다보고 눈으로는 코끝을 대하고, 코로는 배꼽둘레를 대하고 숨을 들이 마시기를 오래 계속하고
내쉬기를 조금씩 하여, 늘 신기(神氣)가 배꼽아래 한 치 세 푼에 있는 단전에 머물게 하는데, 그것이 현빈일규(玄牝一竅)이며, 그 다음에 태식(胎息)이 되고, 태식에서 주천화후(周天火候)가 되고, 주천화후에서 결태(結胎)가 된다.”([용호비결] 中에서)
우암 송시열과 예송 논쟁으로 유명한 대학자 미수 허목 선생은 『미수기언(眉叟記言)』에서 정북창을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정렴은 남과 더불어 말할 때에는 단 한마디라도 공자(孔子)의 학문에서 벗어난 적이 없으니, 이미 그 깨달음은 중(선禪)과 같고, 그 행적은 노자(老子)와 같았으나, 사람을 가르치는 데는 한결같이 성인(聖人)으로 종(宗)를 삼아서였을 것이다." 자신의 수명을 친구에게 떼어주고 44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한 대학자, 대도인(大道人) 용호대사 북창 정렴, 정북창은 죽음에 이르러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위로하는 만사(挽詞, 죽은 사람을 위해 쓴 글), 자만(自挽) 시(詩)를 남긴다.
一生讀破萬卷書, 일생동안 만권의 책을 독파하고
一日飮盡天鍾酒. 하루에 천잔 술을 마시었네.
高談伏羲以上事, 복희씨 이전 일을 고고하게 담론하고
俗說往來不掛口. 속설은 입에도 담지않았네.
顔子三十稱亞聖, 안자顔子는 삼십을 살아도 아성이라 불리었는데,
先生之壽何其久. 선생의 나이는 어찌 그리 길더뇨?
미래의 일도 훤히 알았던 정북창은 장차 인류에게 닥칠 천지 대변국의 환란에 대해 가사형식의 비결인 ‘궁을가(弓乙歌)’를 남겨 후세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이 가사에는 환란시대에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가와 개벽 이후 도통 문명시대가 열리게 됨을 전해주고 있다. 아래는 그 내용의 일부다.
“애고 애고 저 백성아. 간단 말이 어인 말고. 고국본토 다 버리고 어느 강산 가려는가. 부모처자 다 버리고 길지(吉地)찾는 저 백성아. 자고(自古) 창생 피난하여 기만명(其萬名)이 살았던가.
남천북천(南遷北遷) 어인 일고, 차시지화(此時之禍) 궁궁을을 용화(龍華)로다.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 사명당(四明堂)이 갱생하니 승평(乘平)시대 불원이라. 창생도탄 없어진다. 포덕포화(布德布化)하는 때라.
대성지화(大聖之化) 돌아오니 궁을노래 불러보자. 태극(太極)궁을 신명(神明)이라. 궁을궁을 성도(成道)로다. ”
남천북천(南遷北遷): 남북극 빙하가 대량으로 녹아내리는 과정에서 23.5도 기울어진 지구 자전축이 바뀌는 극이동이 있다고 한 것이다. 앞으로 지구 1년이 360일이 된다는 이치를 나타내는 괘도가 정역팔괘(正易八卦)다.
궁을가(弓乙歌)에는 앞으로 인류에게 닥칠 천지 대변혁기에 살길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궁을(弓乙)을 찾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궁을(弓乙)은 우리나라에 있는 여러 예언서나 비결서에 나오지만 그동안 알 수도 없고, 풀기도 어려운 도비道秘로서 지금까지 가장 난해한 수수께끼를 남긴 말이 되어 왔다.
궁을(弓乙)은 본래 풍수지리학에서 나온 용어로 산의 용맥이 굽이치는 형상인 궁弓과 물이 흐르는 형상을 나타내는 을乙을 상징하는 용어다. 그래서 궁을弓乙을 산과 물이라고 여길 수 있으나 모든 비결서마다 한결같이 산과 물에서는 찾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궁을弓乙은 사람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고, 격암 남사고 선생 역시 궁을弓乙은 천하창생을 구제하는 사람 중의 사람(眞人), 신인(神人)이라고 밝히고 있다.
궁을가에는 ‘궁궁을을성도(弓弓乙乙成道)’라는 말이 후렴구로 자주 반복되고 있다. 동학의 창시자 최수운 대신사가 상제님으로부터 무극대도를 받을 때부터 궁을弓乙을 찾았고, 갑오동학혁명 당시 동학군들은 궁을부(弓乙符)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인류구원의 소식과 미래의 일을 훤히 내다보았던 정북창 선생은 궁을가를 통해 장차 우리나라에 덕이 높은 인류구원의 성천자聖天子가 출세한다는 소식을 우주원리 차원에서 노래하였고 그 변국과정과 구원에 대한 열쇠를 후세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은 궁을가에 나오는 일부 내용이다.
궁을가(弓乙歌) -용호대사 정북창 선생
요순지풍(堯舜之風) 되건마는 도인이외(道人以外) 뉘 알소냐.
발동(發動)말고 수도(修道)하면 도하지(道下止)가 이것이라
애고애고(哀苦哀苦) 저백성(這百姓)아 간단말이 어인말고
고국본토(古國本土)다 버리고 어느강산(江山) 가려는가
가고가는 저백성(這百姓)아 일가친척(一家親戚) 어이할고
차시구복(此時九復) 불원(不遠)하니 천하태평(天下太平) 절로 된다
부모처자(父母妻子) 다버리고 길지(吉地)찾는 저백성아(這百姓)
자고창생(自古蒼生) 피난(避亂)하여 기만명(機萬名)이 살았든가
저기가는 저소년(這少年)아 궁을가(弓乙歌)를 웃지마소
사궁을(四弓乙)이 성도(成道)할제 일인지화(一人之化)도 극난(極難)이라
오복(五福)이 돌아온다 궁을궁을(弓乙弓乙) 성도(成道)로다
부귀빈천(富貴貧賤) 원(願)치 말고 사람마다 때가 있네
일편수신(一片修身) 아니하고 가고가면 살아날까
웃읍고 가소(可笑)하다 남천북천(南遷北遷) 어인일고
분리친척(分離親戚) 가지말고 인의상대(仁義相對) 근본(根本)하라
시호시호(時乎時乎) 조을시구(鳥乙矢口) 남아득의(男兒得意) 이때로다
을시구(乙矢口)나 조을시구(鳥乙矢口) 창생도탄(蒼生塗炭) 없어진다
포덕포화(布德布化) 하는때라
조선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統君子) 또있구나
사명당(四明堂)이 갱생(更生)하니 승평시대(昇平時代) 불원(不遠)이라
구변구복(九變九復) 차시지화(此時之化) 궁을궁을(弓乙弓乙) 용화(用化)로다
이대천지(以待天地) 구복시(九復時)에 궁을도통(弓乙道通)이 유현(維賢)이라
대성지화(大聖之化) 돌아오니 궁을(弓乙)노래 불러보자
궁을지화(弓乙之化) 현발(現發)하면 요순시절(堯舜時節) 돌아온다
일가친척(一家親戚) 생각(生覺)컨대 궁을도통(弓乙道通) 하여보소
천은배반(天恩背反) 뉘가살가 가도역시 (亦是) 죽나니라
억조창생(億兆蒼生) 신지(信地)없어 피난(避亂)하려 가지마오
동요(童謠)듣고 근심하면 일심정도(一心正道) 못할소냐
길지(吉地)찾어 가지말고 금일(今日)부터 갱심(更心)하소
낙반사유(落盤四維) 뉘알소냐 인의예지(仁義禮智) 적선(積善) 이라
천지정배(天地定配) 다시되니, 애고애고 저백성아 간단말이 어인일고
고국본토 다버리고 어느 강산 가려는가, 부모처자 다버리고 길지찾는 저백성아
자고창생(自古蒼生) 피난하여 기만명이 살았던가
사궁을(四弓乙)이 성도(成道) 할새 일인지화(一人之化) 극난(極難) 이라
남천북천(南遷北遷) 어인 일고
조선강산 명산이라 도통군자가 또있구나
사명당(四明堂)이 갱생(更生)하니 승평시대(昇平時代) 불원(不遠)이요
이재궁궁(利在弓弓) 이것이라 늘부르면 용화(用化)로다
선악을 구별하는 태극궁을(太極弓乙) 신명이라
물욕지심(物慾之心) 다버리고 궁궁을을(弓乙弓乙) 놀아보자
길지찾아 가지말고 금일부로 갱심하소
춘(春)아춘(春)아 태평춘(太平春)아 사시안정(四時安定) 태평춘(太平春) 아
궁을궁을(弓乙弓乙) 성도(成道)로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
네, 즐거운 주말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