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가을 나와 항렬이 같은 재종동생 결혼식이 있어 부산에 간 적이 있었다. 시골 고향에선 관광버스로 집안 어른들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부산역 부근 예식장에서 예식을 끝내고 정해둔 식당에서 점심을 들었다. 관광버스는 광안대교를 둘러보고 마산 거쳐 고향으로 간다고 했다. 그 버스 타고 창원으로 돌아올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시외버스 터미널로도 가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지하철을 탔다. 부산역에서 1호선을 타고 하단을 지나 신평 종점에 내렸다.
낙동강 하구언 위치를 물어 걸었다. 강둑에 오르니 민물과 바닷물이 합류하는 곳에서 태공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나는 계속 걸어 차량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하구언을 가로질러 을숙도로 건너갔다. 양복 입은 채로 무성한 갈대가 꽃을 피워 너울거리는 드넓은 을숙도를 빙글 둘러 걸었다. 석양에 건너 하단 쪽 아파트 창에 불이 하나 둘 켜질 때까지 서성거렸다. 철이 철인지라 겨울새 한 마리 찾아들지 않은 을숙도를 가을에 찾았던 것이다.
어느 해 봄방학 때였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이었다. 창원에서 마산 댓거리 가는 버스를 탔다. 경남대 앞에 내려 다시 마산의 외곽인 구산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차창 밖에는 계속해서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밤밭고개 넘어 덕동을 지났다. 반동 삼거리에서 내려 갯가를 찾아 원전마을까지 걸었다. 길을 넓히느라 차가 지나면 흙탕물이 마구 튀었다. 봄을 맞아 바다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었다. 낚시와 무관한 나는 그냥 걷고 싶어 찾았던 것이다.
원전에서 되돌아 나와 반동 삼거리에서 따뜻한 우동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다시 힘을 내어 구복으로 들어갔다. 갯마을과 포구 두어 개를 지나 한참 걸어 들어가 폐교를 활용한 예술촌을 둘러보았다. 아침부터 내리던 봄비가 그쳐 우산은 받쳐 쓰지 않아도 되었다. 다시 저도를 건너는 ‘콰이 강의 다리’를 찾았다. 약간의 어지러움을 느끼며 다리를 건너갔다 되돌아 나왔다. 발아래 코발트빛 깨끗한 바다와 양식장 하얀 부표가 대비되어 아름다웠다. 그날 역시 낚싯대를 메지 않았고 운전대를 잡지 않았다.
이처럼 나는 걷는 것에 익숙하고 은근히 즐긴다. 하여, 오늘 마음먹고 나선 걸음이 먼저 창원수영장 건너편에서 10번 버스를 탔다. 내가 탄 버스의 종점은 북면 온천장이었다. 나는 이 온천장에 목욕하여 가는 길이 아니었다. 서너 해 전에 백월산에 오르려고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백월산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내가 다른 글에서 신라 때 백월산서 득도한 두 도반의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오늘은 산이 아니라 들판을 맘껏 다녀볼 요량이었다.
여기서부터는 초행길이었다. 가까이 낙동강이 있다는 정도 가늠되었다. 파릇한 보리가 싹이 터서 자라는 들판을 바라보며 걸었다. 겨울보리를 보면서 우리의 산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들도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한우전문 식당이 나오고 보육원 표지판도 보였다. 강둑이 가까워지자 배수장이 나타나고 바깥신천 마을에 닿았다. 주변의 지형을 잠시 정찰하고 강 언저리로 내려섰다. 도로를 따라 위로 가서도 둑으로 걸어서도 안 되겠다 싶었다.
강변을 내려서니 둔치의 면적이 장난이 아니었다. 가을채소 수확을 끝내고 트랙터로 깨끗하게 갈아 놓았다. 군데군데 봄갈이를 위하여 두엄을 쌓아 두었다. 인적 없는 그곳에서 나만의 호젓한 사색의 시간이라 너무 좋았다. 경작지 지나 모래밭엔 등산화가 푹푹 빠졌다. 이럴 땐 무아지경으로 그냥 뚜벅뚜벅 걸으면 되었다. 강둑 안에 다시 물이 흐르는 강이 있었다. 자갈 망태로 둑을 쌓은 곳 아래 낙동강 본 가닥이 흐르고 있었다.
고요한 강의 은폐 엄폐지에서 수백 마리의 가창오리 떼가 아침나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여느 날 볼 수 없던 불청객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새들은 나래짓하여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래, 내가 예고 없이 찾아와서 미안하네 그려. 나는 발소리를 죽여 갈아 놓은 둔치 밭을 살금살금 되돌아 본포 다리가 보이는 쪽으로 나가보았다. 모래밭이 꽤 넓어 한참을 걸었다. 샛강 어귀는 늘 그렇듯 강 버들이 숲을 이룬 군락이었다.
낙동강 분류와 북면에서 흘러내리는 강 언저리에서 아주 파릇한 순들이 자라고 있었다. 버드나무엔 강이 범람할 때 떠내려 온 농사용 멀칭비닐이 걸려 나부끼고 있었다. 나는 발길을 멈추고 파란 순을 살펴보았다. 보라색도 있고 파란색도 있었다. 저절로 자라난 갓이었다. 아마 상류 어디에선가 심었던 갓 씨앗이 흘러내려와 청청히 자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갈 수 없어 갓을 뽑아 배낭 가득 채웠다. 식탁에서 갓김치가 되든 갓나물이 되든 나중 생각하기로 했다.
샛강엔 물이 제법 흐르고 살얼음이 얼어 있었다. 징검다리가 없어 빤히 보면서도 건널 수가 없었다. 에스 자로 굽이굽이 돌아 겨우 강 건너편에 닿았다. 여름이었다면 아마존 밀림 숲을 헤치다시피 한 늪지 생태 탐험을 톡톡히 했다. 그 사이 천연 잔디 같은 둔치 보리밭을 지났다. 이때 밭두렁보다 보리를 밟으며 지났다. 서릿발에 솟은 겨울 보리밭은 알맞게 밟아주어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보리밭 임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나는 길손으로 할 일을 다 했다.
샛강 끝난 곳부터 벼랑이라 강 따라 걸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야트막한 산의 감나무 과수원을 넘을 계획이었다. 그곳에 본포다리와 나루가 나온다. 약간 땀흘려 야산을 넘어섰다. 내가 예상한 본포였다. 이미 둔치에서 빠져나오느라 시간을 많이 보낸지라 오후 두 시가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점심 먹을 곳이 없었다. 강가로 내려가 물에 손을 한번 담가보고 알려진 찻집 ‘알 수없는 세상’에 들어갔다. 나는 이 주변에 처음 오는지라 찻집도 처음이었다.
나이가 쉰 중반 쯤 헤아려지는 인생의 후반전을 사는 여주인이 맞아주었다. 주인의 친구인 듯 한 동년배 여성과 일상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백사장과 강물을 통째로 바라볼 수 있는 커다란 투명유리벽이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경치 좋습니다.”라 했다. 이어 나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인은 복분자차를 내어주었다. 복분자술은 들어도 차는 처음이었다. 나는 목이 말랐기에 맛을 음미하기보다 물처럼 마셨다.
마침 탁자 위에 지방지 신문기자가 쓴 책인 ‘나루를 찾아서’가 낙동강 따라 흘러간 삶의 풍경과 삶이라는 부제로 붙어있었다. 책의 중간 쯤 나오는 본포나루 이야기를 읽으면서 간간이 기가 막힌 바깥 풍광을 바라보았다. 넓은 모래밭과 유유히 흐르는 푸른 강줄기. 강 건너 둑 너머 마을이 창녕 학포와 밀양 반월이었다. 고독에 익숙하면 바깥으로 표출되는 것인가. 고즈넉한 강가 찻집 주인은 다변으로 친구와 계속 종알거렸다. 나는 남은 오후를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수 없었다.
그 찻집에서 일어서면서 주인과 나눈 나의 두 번째 말이 "자리 좋았습니다."였다. 그러자 주인은 찻값이 오천이라고 응수해 왔다. 문간 옆에 작은 칠판에 흘려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나의 베품은 모래에 새기고, 남의 베품은 바위에 새겨라.”였다. 뜻이 비슷한 한자어는 더러 익숙했으나 강변 모래밭에 와서 우리말로 풀어 놓은 것을 보니 새로웠다. 내가 문고리를 잡을 때 곁에 있던 주인 친구가 "다음 또 들려주세요."라는 인사를 뒤로 하고 배낭을 짊어지고 나섰다.
나는 여기서 계속 걸어 수산다리까지 갈 작정이었다. 주변엔 제방 보강 공사로 대형트럭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조금 더 내려가서 도로에서 벗어나 둑으로 계속 걸었다. 나는 겨울 강둑을 하염없이 걸어보는 이 행복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다. 둔치에 비닐하우스 시설채소를 가꾸는 사람들이 가끔 눈에 띄었다. 강 건너 곡강마을이 보였다. 벼랑 끝 집들이 꼭 처마 밑에 지은 제비집 같았다. 저 아래쪽에 수산 구 다리와 신 다리가 보였다.
둑에서 특이한 모습을 보았다. 근처 싸움소 훈련장이 있나 보았다. 예각으로 뿔이 솟은 커다란 황소가 목에 쇳덩이를 치렁치렁 달고 뛰었다. 주인은 오토바이를 타고 뒤따르고 있었다. 강마을인 일동에 닿자 그곳 둔치에서는 덤퍼트럭 타이어 속에다 돌을 가득 채우고 밭이랑을 헤집으면서 끌고 있었다. 동물도 저런 강도 높은 훈련을 하는데 프로선수들은 어떻게 겨울을 날까 생각해 보았다. 나도 전문성 신장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할 지 반면교사로 삼았다.
마을 끝 수산다리에 닿자 배고픔이 느껴졌다. 시간이 무려 오후 네 시가 지났다. 다리를 건너가서 국밥으로 요기를 하고 갈까 망설이고 있을 때 마침 시내버스가 왔다. 종점에서 오기에 텅 빈 버스였다. 가술에서 들판 마을 구석구석 다녀 주남저수지를 에둘렀다. 낮에 본 가창오리를 비롯해 큰고니 재두루미들이 물 위에 한가로이 있었다. 먼 곳까지 먹이사냥을 나선 족속들이 저수지 위에서 활주로로 내리는 비행기처럼 하강하고 있었다. 저녁이면 집을 찾는 새들의 귀소본능이었다.
시내버스가 마산으로 가는 차라 소답동에 내렸다. 국밥집으로 향하면서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하니 바로 나오겠단다. 나는 돼지국밥을 먼저 시켜 놓았다. 잠시 후 어제까지 멀티미디어 활용 연수를 받았다는 친구가 왔다. 친구는 자리 앉자마자 푸념부터 늘어놓았다. 연말 입법예고 된 승진규정 때문에 부글부글 하고 있었다. 올해 교직생활 이십오 년째로 자기관리를 잘 한 친구는 교감 줄에 선단다. 들리는 이야기로 우리 동기가 몇 명 된다고 했다. 이미 장학사하는 친구도 함께 교감 연수를 받을 것이라 했다.
친구는 이삼 년 더 기다려야 하는데 개정될 승진규정으로 앞날이 걱정이라 했다. 남의 일이 아니지 싶은데 나는 좀 느긋했다. 낮에는 찻집에서 주인 여자의 다변을 옆자리서 들어야했고, 저녁엔 친구의 하소연을 앞자리서 들어주어야했다. 남에게 뒤쳐져도 모양은 좀 그렇긴 하지만 너무 서둘지 말게나. 먼저 몸이 건강해야 하고 마음이 따라 건강해야 한다고 했다. 아이들 속 썩이지 않고 자라주면 고맙고 남들한테 신망을 잃지 않고 살자며 다독였다. 배낭을 열어 낮에 강가에서 채집한 갓을 나누어 가지고 일어섰다. 날이 어둑했다.
첫댓글 “나의 베풂은 모래에 새기고, 남의 베풂은 바위에 새겨라.” 품고 갑니다.
주 시인의 막가는(?) 여정 부담 없는 낭만입니다. 10번 버스가 멋진 데를 안내한 것인가? 주신인의 발이 길을 안내한 것인가? 때로는 다 털고 이렇게 떠나는 마음의 여유를 누림이여. 자유인이 삶은 떠남에서 얻어지는가 보다. 그가 간 길을 함 더듬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