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원전신첩>((이명: 신윤복필 풍속도 화첩) 중 '주사거배(酒肆擧盃)', 신윤복(申潤福), 18세기 후반~19세기 초반, 종이에 담채, 28.2×35.6cm, 간송미술관
'주사거배'를 역사적으로 풀이한 글 중에서
별감과 나장 등이 등장하는 이 술집은 조선 전기에는 없던 것이다. 조선 전기에는 술을 병에 넣어 판매만 할 뿐 현장에서는 마실 수 없었다. 즉 술과 안주를 판매하는 술집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과 같은 술집은 숙종실록 22년 7월 24일 업동에 관한 사건 기록에서 처음 보인다. 이러한 술집은 증가하는 추세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전 만호(萬戶) 이태배(李泰培)가 상소를 올려 당시 서울에서 양조로 소비되는 곡식 규모가 전에 비해 크게 늘었음을 지적하고 있다. 수십 년 전만 해도 도성 근처 술집은 100곳 정도였고 큰 가게도 없었으나 근년에 이르러 도성 방방곡곡에 술집이 생겨 10실(室)의 마을에 5가구가 술집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술집이 많다 보니 도성에서 술 빚는 데 들어가는 쌀이 식량으로 소비하는 양과 같아 1년에 몇 만 석 이상이 소비된다고 하였다.
1728년(영조 4) 형조판서 서명균(徐命均)은 도성 백성의 생활이 어려워져 술을 팔아 생업을 삼는 자가 늘어난다고 하였는데, 이는 술 판매의 이익이 상당히 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당시 서울에서 양조로 소비되는 쌀의 양은 주식 소비량의 절반 정도로 추정되며, 1783년(정조 7) 좌의정 유의양(柳義養)은 서울의 미곡 소비량을 100만 석으로 추정하였다. 서울 인구를 20만 명으로 잡고 하루 2승씩 주식을 소비하는 것으로 보아 1년에 100여만 석이 소비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1783년 술로 소비되는 쌀은 50만 석이 되는 셈이다.
각 지방에서의 장시 발달은 양조를 더욱 촉진하였다. 특히 여러 상인들이 모이는 경강 지역에 양조가 성했는데, 이렇게 양조가 성행하면서 쌀값이 올라갔다. 1833년(순조 33)의 대규모 쌀 소동은 미곡 상인들의 농간에 의해 미곡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이들의 가격 조정 때문에 돈을 가진 자들도 미곡을 구입할 수 없었다. 쌀값 조정이 가능했던 것은 양조로 쌀이 많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쌀값이 올라가는 현상은 헌종 대에도 이어졌다. 1838년(헌종 4) 우의정 이지연은 상소를 올려 도성 근처 양조 실태를 지적하고 있다. 흉년이 든 것도 아닌데 쌀값이 매해 크게 오르는 이유는 경강과 도성 각처에서 술을 많이 빚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금주령을 내려 거두지 말고 계속 이어갈 것을 주장하고 있다.
양조로 소비되는 쌀의 양이 많았으므로 흉년이 예상되는 시점이나 흉년이 든 직후 금주령이 실시되었다. 금주령은 어느 정도 경과 조치를 두고 시행하였는데, 갑자기 시행할 경우 백성들이 법령을 두려워하여 빚은 술을 모두 버림으로써 또 다른 낭비로 이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개월 정도 한정하여 빚은 술을 다 판매하고, 그 후에는 다시 술을 빚지 못하게 금하였다. 그러나 예고 기간이 일정한 것은 아니었다. 주금의 실시는 한문과 한글로 써서 도성 방방곡곡에 붙였다. 주금령을 효과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정부에서는 범양자(犯釀者)를 처벌하고 해당 관원을 문책하였다. 1733년(영조 9) 범양자에게 속전을 받지 말고 처벌할 것을 명하였고, 1759년(영조 35)에는 하급 관료들이 주금령을 무시하고 음주를 하자 해당 관료뿐 아니라 상급 관료들까지 문책하였다. 1762~1763년은 가장 엄중한 주금령이 행해진 때였다. 서울부터 각 도까지 주금령을 위반한 자는 교수형에 처하도록 한 것이다. 영조는 남병사 윤구연(尹九淵)이 주금령 기간인데 매일 술을 마신다는 상소를 받자 그를 참수하기도 하였다. 이를 말리는 상소를 올린 재상과 관리들은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이후에도 주금령은 계속 내려졌으나, 영조 이후에는 그다지 큰 성과가 없었다. 그 이유는 양반들이 주금령에도 불구하고 계속 양조를 하였고, 범양을 단속해야 할 관리들이 속전을 받고 단속을 소홀히 하였기 때문이다.
【05집필자】♣[강진갑(康鎭甲), 경기대학교/ 강문석, 한국학중앙연구원]
【06참고문헌】♣강명관, <book>조선의 뒷골목 풍경</book>, 푸른역사, 2004.<br>
강명관, <sbook>조선 후기 서울의 중간 계층과 유흥의 발달</sbook>, <book>민족문학사연구</book>2,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1992.<br>
김대길, <sbook>조선 후기 서울에서의 삼금 정책 시행과 그 추이</sbook>, <book>서울학연구</book>13,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9.
이태호·양숙향, <sbook>간송미술관 소장 『혜원풍속화첩』을 통해 본 19세기(순조∼고종 연간) 민간의 복식과 생활상</sbook>, <book>강좌미술사</book>15,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00.<br>
첫댓글 금주령이 내린다고 안 마실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