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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크로폴리스에서...
밤새 잠을 설쳤다. 더위때문이었다. 보통 12시가 넘으면 그래도 서늘한 기운이 찾아와 자기도 모르는 새 스스르 잠에 빠지곤 했었지만 이곳은 밤새 30도 아래로 수은주가 내려가지 않는 것 같았다. 정말 지독한 더위였다.
더군다나 나의 침대는 가운데가 푹 꺼진 것이었다. 어찌나 깊숙히 꺼졌던지 누워있으면 측면에서는 나의 배를 볼 수 없을 만큼 침대 속에 잠겨 있었고, 덥고 답답했다. 몸을 옆으로 돌려 꺼지지 않은 침대 가장자리에 몸을 의지하고 누워있었으나 이내 몸을 뒤척이고 싶어졌다. 밤새 성가시고, 열에 들떠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밤을 보냈다. 그날 밤은 고통스럽고 너무나도 길었다.
그런데 그런 나보다 더 가엾은 이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승희였다. 밤새 모기에 시달렸다고 하는데 밤 12시 쯤 되어 잠을 못자고 앉아있는 그가 너무 불쌍해서 비상시에 쓰려고 아껴두었던 바르는 모기약을 건네주었건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했다.
내가 열대야로 인해 문득문득 깨었던 시각인 밤 12시, 새벽 2시 반, 5시, 그 시각마다 그는 잠들지 못하고 자기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침대에 기운없이 주저앉아 온몸을 벅벅 긁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웠다. 그는 자다가 깬 나에게 12시에 이렇게 말했다.
"형, 모기가 물어요." 2시 반에는 이렇게 말했다. "형, 모기가 계속 물어요." 5시에는 이렇게 말했다. "형, 약도 안들어요. 모기가 엄청 물고 있어요."
엽기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의 몸을 살펴보니 수십군데에 물린 자국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이들이 모여들어 그의 몸을 살펴보며 경악하다가 그를 공격한 곤충이 과연 모기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모기향을 피웠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생명에 지장을 받지 않은 점, 또 바르는 모기약에도 전혀 거리낌없이 계속 그를 공격한 점, 그리고 피부 위에 줄지어 나있는 물린 자국으로 보아 그 곤충은 모기라기 보다는 벼룩 등 기타 위생 곤충류인 것 같았다. 더군다나 다른 아이들은 아무렇지도 않았었으니. 물론 증거는 잡지 못했지만 허름한 숙소의 위생상태나 침대의 관리 상태로 미루어 짐작컨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우리가 묵었던 이 곳 아나벨 호스텔은 공식 유스호스텔에서 불과 걸어서 몇 분 거리였다. 전날 유스에서 숙소를 구하지 못해 엄청 당황하고 있었는데 나를 제외한 넷 중 누군가가 이 곳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우리는 얼떨결에 여기에 오게 되었다.
숙소를 잡은 후 저녁식사꺼리를 사러 나왔다가 발견한 폭스바겐 승합차. 1985년 영화 '백투더 퓨처'에 아랍계 테러리스트들이 타고 나왔던 차로 기억하는데 당시에도 좀 낡은 차의 느낌이었으니 대략 20년도 넘은 차로 생각하면 될 거 같다. 전날 배낭을 짊어지고 아테네 거리를 걸으면서 도시에 대해 받았던 '퇴락하는 이미지'가 이 차 한대에 고스라니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아테네는 이듬해 올림픽이 열림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마치 시골의 군청 소재지 정도의 고요함이 느껴졌고 활기차지 않았다.
나는 그 곳 아나벨에서 여러차례 조금씩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일단 숙박비가 정말 싸다는 점이었다. 일인당 7유로만 내면 샤워를 할 수 있었고 잠을 잘 수 있었다. 먹을 물도 주었고 주방도 사용할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싼 게 비지떡이라는 옛말도 있듯이 모든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 아테네의 무더운 날씨 속에 에어컨 없이 잠이 든다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더위에 지쳐 침대 가장자리에 가까스로 버티고 누워 있으면서 호텔을 잡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를 몇 번 했지만 오늘 밤만 넘기면 다시 있지 않을 것이라는 위안으로 그 날 밤을 버텨냈던 것이었다. 인정과 죠셉은 잠만 잘 자더만 유난히 더위에 민감한 내스스로를 보며 '너 참 피곤한 존재다'라고 한탄하며 길고 긴 더위의 밤을 견뎌내었다.
이것은 아나벨 호스텔의 화장실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퀴즈! 볼 일을 보고 난 뒤 화장실의 물은 어떻게 내릴까?
1)변기 뚜껑 뒤에 레버가 숨어 있다.
2)하얀 통 측면에 호스로 연결된 은색 손잡이를 돌린다.
3)수세식 변기가 고장이 나서 물을 붓는다.
4)기타
정답은...
기타이다. 하얀 통 아래에 붙어 있는 검정 버튼을 누르면 물이 나오게 되어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버튼을 누르면 물이 손가락을 따라 팔까지 주루룩 흐르게 되어 있었다! 첨에는 좀 불쾌했지만 이내 용변후 따로 손을 씻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편리한' 변기였다.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주방도 무척이나 놀라웠는데, 일단 칼이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도 빵을 자르는 칼이었는데 약간 녹이 슨 그 칼로 빵도 자르고 야채도 다듬고, 써는 등 모든 작업을 해야 했다. 그릇이 짝이 안 맞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는 식사때 저마다 크기가 다른 크고 작은 그릇에 음식을 담았고 컵이 없어 밥그릇에 우유를 따르기도 했다. 빵과 계란이 담겨 있는 플라스틱 접시는 수많은 칼질 자국이 나있었고 그 틈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삶은 감자와 스크램블, 그리고 우유와 약간의 과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길을 나섰다.
아나벨 호스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오모니아 광장까지 걸어간 우리는 일단 그 날 저녁 배편을 예약해 두기로 했다. 아테네에서의 관광을 마치고 나면 죠셉과 나, 그리고 썸미는 배를 타고 에게해의 섬 산토리니로 이동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승희와 인정은 하루를 아테네에서 더 지내고 오기로 했다. 승희는 분실한 비행기 표를 재발권하고 인정은 터키까지 일정을 연장했기 때문에 집에서 송금을 받아야 했는데 공교롭게도 그날이 일요일이었기에 하루를 더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논의 끝에 모두들 배편 예약을 하러 가지는 않고 죠셉과 승희만 피레우스 항에 다녀오기로 했고 나와 인정, 썸미는 아크로 폴리스 입구 언저리에서 놀고 있겠다고 했다.
오모니아 광장 역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눈부신 벽화. 고대 그리스 시대의 상형문자같았다.
6유로를 내고 입장을 한 아크로 폴리스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걷기만 해도 비오듯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만일 선크림이라도 없다면 피부가 온통 익어버렸을 거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극도로 메마른 대지와 이국적인 모습의 교회 건축물과 이질적인 형상을 지닌 식물들이 있는 곳을 지나서 아크로 폴리스로 향하고 있었다.
아크로 폴리스로 가는 길. 저 멀리 파르테논 신전이 보이던 그 곳은 메마르고 햇살이 작열하고 있었다.
아크로폴리스로 오르는 길에 어느 바위 위에 앉아.
아크로 폴리스는 커다란 바위 언덕 같은 것이었는데 그래도 해발이 150m나 되는지라 위에서 아테네 시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아크로 폴리스에 오르는 계단은 붉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는데 너무 반질반질해서 비도 오지 않았음에도 엄청나게 미끄러웠다. 그 곳에서 낙상이라도 했다가는 최소한 반기브스라도 해야 될 것 같아서 조심, 또 조심하며 위로 올라갔었다.
아크로 폴리스에서 바라본 파르테논 신전.
아크로 폴리스에서 내려다본 아테네 시내와 불룩 솟은 언덕.
그렇게 아크로 폴리스 위에서, '이 곳에서 플라톤같은 철학자들이 학문을 논의했었단 말이지'같은 생각을 하며 둘러보고 있는데 내 등 뒤에서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웬 할아버지께서 서 있었다. 그는 다시 우리에게 말했다.
"안. 녕. 하. 세 요!"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외국인 할아버지가 한국어를 하다니. 놀랍고 황당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같이 정답게 인사를 하며 이야기를 조금 나누어 보았더니 그는 그리스 사람이었다.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한국어를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하였다. 그의 한국어 실력은 참으로 놀랍고 조금은 유머러스하게 느껴졌다.
예를 들면, 그는 대화중에 난데없이 코앞에 서있는 우리에게 '나는 한국어, 말하다!' 와 같이 외치곤 했다.한 번 상상해보라, 먼 이국타향에서 웬 외국인 할아버지가 '나는 한국어, 말하다!!'라고 고래고래 외치는 모습을. 게다가 나는 여지껏 살아오면서 '말하다'라는 동사원형을 실생활에서 사용하는 것은 그 때 처음으로 들어보았다. 그의 한국어가 강한 임팩트로 내 뇌리에 와서 박혔다.
그 외에도 그는 여러 한국어를 많이 알고 있었는데 이를 테면, '코레아, 서울, 멀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서울, 울산, 부산, 가깝다~!!'라고도 했다. 한국, 서울은 이 곳 그리스로부터 멀고, 서울에서 울산, 또는 부산은 상대적으로 가깝다라는 뜻이었는데 혼자 책을 보며 공부했을 그의 모습이 상상이 되어 웃음이 났다. 우리는 그의 한국어 실력과 한국에 대한 지식에 상당히 놀라면서 또 재미난 언어 습관에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모든 동사 부분을 길게 늘이며, 또 크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것을 intonation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었다.
서울--, 부산--, 가↗깝↗다 !!
그가 말하는 것을 바로 앞에서 듣는 것이 약간은 부담이 되었다. 침이라도 튈까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조그마한 선물이 있다며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더니 썸미에게 건넸다. 그리스 우표였다. 그리스 우체국의 소인이 찍힌 꼬깃한 우표를 건네는 그의 주름진 손을 보며 내 가슴으로 무엇인가가 마구 밀려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비록 사소한 우표 한 장이었지만 거기에는 그의 진심어린 호의가 담뿍 담겨 있었다.
갑작스런 선물에 조금 당황한 썸미는 자신도 보답을 해야한다는 압박감이 작용했는지 잠깐만 기다리라며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녀는 한국에서 미리 준비해 온 10원짜리 동전을 그에게 건넸고 그는 뜻하지 않은 답례를 받아들고 무척 즐거워했다.
아크로폴리스에서 '우리의 죠르바'와의 짧은 조우가 끝나고 그는 헤어질 때 말했다.
"꼬레아, 친구!"
나는 총총히 멀어져가는 '그리스 친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그에게 있어서 썸미가 건네준 10원짜리는 과연 얼마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을까?
그 날 이후로 나는 모든 것의 액면만을 믿지 않게 되었다. 비록 사물의 진정한 가치를 꿰뚫어보는 눈은 아직까진 보잘 것 없지만.
*다음 이야기는 공사가 한창이었던 파르테논 신전을 구경하고 지하철 역 앞에서 거지처럼 점심을 먹는 일행의 이야기예요. --; 그리고 산토리니로 떠났답니다. 그러나 떠나기전에 또 사고를 치고 마는 승희와 인정!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기대해 주세요~★
소년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시나요?^^;저두 왠지 모기가 아닐듯한; 저두 피렌체 허름한 호스텔에서 가려워서 잠을 못잤거든요..새벽에 기차타러 가려구 짐챙기다가..전 발견했슴다. 톡 터지는 벌레를 헉 ㅋㅋ(그와중에 터뜨려봄- -;)그 이후로 몸의 왼쪽이 모기랑 전투를 벌인 아이처럼 다녔답니다 ㅎㅎ
첫댓글 기대하고 있을테니까 얼른 다음편 올려주세요^^ 재밌게 잘 보고 있습니다.^^*
ㅋㅋㅋ이등~!소년님의 사진과 제사진이 흡사한게 정말 많네요~그리스사람들불친절하던데 소년님은 운좋게 좋은할아버지를 만나셨네요~접때 말씀드렸다시피 아테네에서 바가지를뒤집어쓴 경험이있는지라 아테네가 썩 좋진않다는..다음얘기도 올려주세요
더운데 잘자는 사람들 늠 부럽네여....그리스 할아버지는 십원짜리 아직도 갖고 있을까여?
아~ 글을 읽다보니 불현듯 온몸이 가렵네요...내게도 위생 곤충이~~? ㅠㅜ;드디어 다음편은 기다리고 기다린 산토리니 편이군여~~
다음은 산토리닌거야~그런거야~!! 점심먹구 배 두들기며 여행기 한편을 디저트 삼아 보는 오늘의 기분은~~!! 울랄라~**
산토리니 아닌거야.. 그런거야.. --; 아직 배탈때까징 얘기 함 더. --; 난다고레 사진이 그케 비슷 하다면 함 올려바바바바~~
짧은 시간동안의 일들을 재미나게 풀어내는 능력을 가진거 같애여~~전 아테네서 반나절 정도 있었지만..그리스사람이 말 안걸어오더라구요~ㅋㅋ
우히히~ 할아버지 느무 웃겨요 ㅋㅋㅋㅋ 글구... 화장실도 대박-_-;;
전 작년에 뮌헨에서 한국말..그것도 부산 사투리로 아주 유창하게 하는 독일 할아버지를 만났는데 그 분은 한국 욕도 메들리로 하시더라구요..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나두 그리스 가보고 싶어요..
저두 모기한테 잘 물리는 지라...위에 분의 고통이 왜 남 일 같지 않은지...ㅋㅋㅋ....저도 그리스에서 한국말 잘하는 할아버지 만났었는데...혹시 같은 사람 만나거 아니예요^^
소년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저 기억하시나요?^^;저두 왠지 모기가 아닐듯한; 저두 피렌체 허름한 호스텔에서 가려워서 잠을 못잤거든요..새벽에 기차타러 가려구 짐챙기다가..전 발견했슴다. 톡 터지는 벌레를 헉 ㅋㅋ(그와중에 터뜨려봄- -;)그 이후로 몸의 왼쪽이 모기랑 전투를 벌인 아이처럼 다녔답니다 ㅎㅎ
다들 나 피하고 ㅋㅋ 암튼 기억이나네요~ ㅎㅎ 그리스 못갔는데..참 아쉽네요~여행기 사진 잘봤으요^^
글게, 미쳐야. 혹시 같은 사람 아닐까? 약간 마르고 키는 대략 168~170 정도. 얼굴과 목 등에 주름 많고 머리가 조금 센 사람. 아니냐? 이정도로 생각되는데. 글고 니에베 님 안냥.
ㅎㅎㅎ 난 파르테논 신전이 바로 눈 앞 보이는 숙소에서 잤는데... 이곳 찾다가 죽을 뻔했습당!! 그립군여~~ 그래도 넘 더워서 다시 가고 싶은 맘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