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에서 기사 하나를 봤습니다. 기사 내용은 12년 전 빠뜨린 ‘너트 하나’가 원인이 돼 전투기가 추락했다는 기사입니다. 이런 내용은 실제 미 항공우주국 나사에서도 일어난 일입니다. 이번에 본 기사에서는 좀 더 색다른 걸 느꼈습니다. 기사를 읽고서 이 기사를 신앙에 접목해봤습니다. 추락한 전투기는 420억 짜리 전투기였습니다. 너트 하나가 420억 짜리 전투기를 추락시킨 가장 큰 원인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마찬가지이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 노후가 돼 문제점이 노출이 될 수 있겠지만 이 사건에서는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너트가 체결되는 정비공의 실수가 큰 화를 불러온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트가 체결되지 않아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연료가 공급되긴 됐지만, 그게 정상적인 공급이 지속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되더라도 문제는 안고 있었지만 그 문제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 비정상적인 연료공급이 누적이 돼 결국에는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른 데 따른 결과로 이어진 것입니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많은 기계장비에는 너트가 많이 들어갑니다. 문제는 이 너트가 어떤 부분의 너트냐가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바로 전투기의 엔진에 연료를 공급하는 핵심 부분에 있어야 하는 너트였습니다. 가령 단순한 부분에 있는 너트의 결합이 문제가 됐다면 그 부분만 나중에 문제점이 발생했다면 다시 점검 후에 원인을 해결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리 크게 문제가 될 소지는 없는 것입니다. 사고 전투기의 너트는 전투기의 심장부와 같은 엔진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는 구동축과 관련된 너트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기사를 보며 두 가지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 너트가 우리 신앙인에게는 무엇과도 같은 것이며 이 기사가 신앙인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제가 가장 주목한 부분은 너트의 결합인 체결입니다. 체결이라는 단어를 잘 묵상하고 싶습니다. 전투기에는 하나의 볼트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볼트와 너트가 필요로 할 것입니다. 그렇게 다 완전하게 체결이 잘 돼야 전투기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게 될 것입니다. 마치 전투기로서의 기능과 역할이 우리가 말하는 신앙생활에 비유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볼트와 너트가 체결된 전투기처럼 우리도 체결돼야 할 게 많습니다. 가령 기도와 또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자로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지켜야 하는 의무 등 갖가지 많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사고가 난 전투기에서 너트처럼 우리 신앙의 핵심과도 같은 마치 전투기 엔진에 연료공급장치 부분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그 너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와 사랑입니다. 신앙인에게 기도와 사랑이 없다면 12년간 비행 후 2년간 휴지 시간을 가지며 600시간을 비행하면서도 문제가 한동안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해서 문제가 없었던 게 아닙니다. 문제는 그게 누적돼서 더 이상은 그 문제가 단순히 보완되지 않으면 안 될 지경까지 갔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결과는 추락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지금 기도와 사랑실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성당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데 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사랑실천은 하느님과 결합되는 가장 원초적인 행위입니다. 지금은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못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전투기가 마치 12년을 비행해도 큰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은 느낄 수 없지만 언젠가는 하느님과 결합되고 합일이 이루어지는 이런 신앙의 기초를 소홀히 하게 되면 전투기가 추락하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지금은 순항을 하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추락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추락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단 하나로 정의하긴 어렵지만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이 성사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비행을 하는 중입니다. 이 비행을 잘 하기 위해서는 평소에 뭔가 문제점이 있는지 잘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점검을 게을리하게 되면 바로 이 전투기와 같은 신세가 될 것은 자명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사랑실천은 너무나 다 잘 알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와 관련해서 기도를 한번 잠시 생각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기도에 대해 흔히들 잘못 이해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 하면 우리는 정해진 어떤 고정정인 형식을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기도손을 하고 조용히 어떤 기도 공간에서 한다든지 하는 그런 형식을 취해야만이 기도생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게 기도생활의 전형이라면 아마도 돈보스코 성인은 성인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돈보스코성인이 성인이 되는 조건을 심사할 때 부정적인 반론을 제기한 사람이 제기한 문제는 바로 성인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전형적인 기도생활이 부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에 무게중심을 둔다면 돈보스코성인은 절대 성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연히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는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돈보스코성인의 기도생활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도도 물론 하셨겠지만 그분은 그런 기도도 기도지만 삶으로, 행동으로, 사랑으로 신앙을 증거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몸으로 행동으로 기도를 삶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전형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기도는 복음에 나오는 바리사이들이 율법을 중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율법이라는 틀에 매여 정작 율법이 강조하는 사랑을 도외시하는 그런 행동 말입니다. 전형적인 기도를 기도라고 정의를 한다면 지금과 같은 시대에는 특정한 사람들 외에는 예를 들면 수도자와 성직자와 같은 분들을 제외하고는 또 일부 열심한 신자를 제외하고는 신앙인의 가장 기본이라고 하는 이 기도와는 전혀 동떨어진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어쩌면 무늬만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전형적인 기도생활만 기도로만 간주한다면 말입니다. 그와 같은 기도는 물론 신앙인으로 더없이 좋은 기도라 그런 기도도 해야 하지만 그런 기도 외에도 우리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늘 하느님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길을 끊임없이 묵상하며 그걸 행동으로 실천하려고 하는 작은 행동이 오늘날 같은 시대에는 또 하나의 훌륭한 기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바로 이게 추락한 전투기 속의 너트와 같은 역할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