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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자대전 제156권 / 신도비명(神道碑銘)
명곡(鳴谷) 이공(李公) 신도비명 병서(幷序)
명곡 선생 이공이 별세한 지 40여 년이 되는 인조조(仁祖朝)에 계곡(谿谷) 장공 유(張公維)가 공의 여서(女婿)인 수몽(守夢) 정공 엽(鄭公曄)이 찬(撰)한 행록(行錄)에 의거, 시장(諡狀)을 만들어 올리므로 임금이 충간(忠簡)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다시 50여 년이 되어 공의 현손(玄孫) 속(涑)이 나를 찾아와서, 충간공의 묘목(墓木)이 벌써 늙어 죽었는데도 신도(神道)에 아직까지 비석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어찌 글로써 빛내 주지 않겠느냐고 하기에 내가 늙고 병들었다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였더니 다시 간청하기를, 공의 대부인(大夫人)은 충간공의 큰딸과 축리(妯娌 형제의 아내끼리 서로 부르는 말)의 친분이 있으니 의리상 끝내 사양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므로 내가 놀라면서, 외로운 여생이 항상 그분들을 뵙지 못하는 슬픔을 품어 오다가 지금 그 말을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고 말하고, 드디어 장(張)ㆍ정(鄭) 이공(二公)의 글을 상고하여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공은 한산인(韓山人)인데, 가정(稼亭) 곡(穀)과 목은(牧隱) 색(穡) 두 선생이 이름을 세상에 크게 드날린 이후로부터 온 천하가 다 우리나라에 한산 이씨가 있는 줄을 알게 되었고, 목은의 증손인 대사성 우(㙖)는 공에게 고조가 된다.
증조 장윤(長潤)과 조부 치(穉)는 다 증직(贈職)이 있었고, 아버지 지무(之茂)는 공이 영귀(榮貴)하게 되자 영의정에 추증, 한창부원군(韓昌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고, 어머니 구씨(具氏)는 정경부인(貞敬夫人)에 추증되었다.
공은 가정(嘉靖) 기해년(1539, 중종 34)에 보령(保寧) 시골집에서 출생하였는데 휘는 산보(山甫), 자는 중거(仲擧)이며, 어려서부터 자질이 아름다워 언어동지(言語動止)가 성실하였고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로 그 숙부인 토정 선생(土亭先生) 지함(之菡)에게 배웠다.
일찍이 여러 아이들과 놀다가 이[齒]가 부러지자, 다른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꾸지람을 받을까 두려워서 거짓말로써 대답하기를 모의(謀議)하였으나 공은 ‘숙부님이 항상 나에게 속임이 없어야 한다고 가르쳤으니, 나는 마땅히 사실대로 대답해야겠다.’ 하였고, 토정이 농담으로 한 석불(石佛)을 가리키면서, 석불에게도 부모(父母)가 있느냐고 묻자, 공이 모든 물건이 다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삼고 있다고 대답하므로 토정이 크게 기이하게 여기면서 ‘이 아이는 반드시 대인군자(大人君子)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나이 17에 서울에서 납채(納采 청혼하였을 때 신랑집에서 신부집에 보내는 예물)하게 되었을 때, 토정이 모름지기 한 치의 시각을 아껴야 한다고 경계한 적이 있었는데, 그 뒤 강사(江榭)에 나가 글을 읽을 때 학우(學友) 7, 8명이 공을 억지로 배에 태워가지고 곧장 봉은사(奉恩寺) 아래에 이르러서는, 서로 앞을 다투어 봉은사에 들어가 놀다가 해가 저물어서야 배에 돌아와 보니, 공은 그저 배 안에 앉아 글을 읽고 읽다가 ‘부형의 경계를 어길 수 없다.’고 하였다.
일찍이 한 친우와 함께 과거에 응시하러 갔다가 그 친우가 갑자기 금고(禁錮)에 걸려 응시할 수 없게 되자, 공도 함께 되돌아오면서 행동을 차마 달리할 수 없다고 하므로, 사람들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 하였다. 정묘년(1567, 명종 22)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가 바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때 공의 종형 산행(山海)가 문예로 명성이 크게 떨쳤는데, 토정은 세상에서는 산해가 모(某)보다 낫다고 하지만, 그 현부(賢否)에 대해서는 아주 다르다고 하였다. 승문원 권지(承文院權知)로서 춘추관(春秋館)에 들어가 한림(翰林)이 되었고, 신미년(1571, 선조 4)에 서차에 의해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승진되었다가 예조 좌랑에 옮겨서는 어머니 봉양을 위하여 해미 현감(海美縣監)으로 나갔다.
다시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들어갔다가 병조 좌랑에 옮겨진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의 상(喪)을 만나 보령(保寧) 묘소에 초막(草幕)을 짓고 애통해하면서 예(禮)를 다하였다. 상을 마치고 병조 정랑에 제수되어서는 명을 받고 어사(御史)가 되어 함경도를 순찰하였고, 조정에 돌아와서는 홍문관 수찬(修撰)ㆍ교리(校理)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을 거쳐 이조 좌랑이 되었다.
이때 동서(東西)의 당론(黨論)이 이미 형성되어 전랑(銓郞 이조 정랑)으로 있는 자들이 제각기 좋아하고 미워하는 감정에 치우쳐 눈을 부릅뜨고 서로 양보하지 않았으나, 공만은 치우치는 누(累)가 없으므로 청의(淸議)가 중하게 여겼다.
정축년(1577, 선조 10)에 양모(養母)의 심상(心喪 상복을 입지 않고 마음으로 슬퍼하는 일)을 위하여 서천(舒川)에 내려와 있었다. 서천은 본시 외딴 고을로 풍속이 매우 비루하였는데, 공이 온 뒤로부터 공의 덕의를 관감(觀感)하고 선(善)에 분발하여 선비된 자가 자못 학문에 뜻을 두고 행동을 단속할 줄 알게 되었다.
다시 성균관 전적에 제수되었다가 누차 옮겨서 의정부의 검상(檢詳)ㆍ사인(舍人),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 홍문관의 응교(應敎)ㆍ전한(典翰)ㆍ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일찍이 야대(夜對)에 입시하여, 당론이 날로 치열해 가는 것과 사람을 용사(用捨)하는 데 공정하지 못한 것을 적극 진언하였고, 야대를 마치고 물러 나오려 하면 상이 다시 앉기를 명하고 시사(時事)에 대해 하문하곤 하였다.
이 때문에 용사자(用事者)들의 큰 미움을 받고 신병을 핑계로 종부시 정(宗簿寺正)에 체임되었다. 이로부터 거의 1년 동안 산직(散職)에 있었다. 마침 삼사(三司)에서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를 무함(誣陷)하므로 상이 노하여 박근원(朴謹元) 등을 유배(流配)하고 공은 다시 집의(執義)로 제수했다가 바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승진시켰다. 얼마 후 서추(西樞 조선 시대 중추부(中樞府)의 별칭)로 옮겨졌다가 성균관 대사성ㆍ호조 참의ㆍ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문성공이 별세한 뒤로 시사(時事)가 크게 달라졌다. 김우옹(金宇顒)이 부제학으로 입대(入對)하여 문성공의 소행을 들어 훼방하였는데, 이때 공이 우승지(右承旨)로 입시하였다가 문성공의 도덕 학문을 극구 칭찬하자 상이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였고, 김우옹의 말이 나오면 상이 문득 공에게 이 말이 어떠냐고 묻곤 하므로 공은 하나도 숨기지 않고 죄다 아뢰었다가 더욱 시기(時忌)에 저촉되었다.
얼마 안 되어 대사헌에 특배(特拜)되었으나 공을 미워하는 자들의 중상을 입어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나갔는데, 쌓인 민폐를 제거하고 외로운 자를 무휼(撫恤)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것으로 치도(治道)의 선무(先務)를 삼았다. 체직되어 돌아와서는 예조 참판을 한 차례, 형조 참판을 세 차례, 한성 좌우윤(漢城左右尹)을 두 차례 역임하였다.
다시 황해 감사(黃海監司)로 나가서도 그 치도가 일체 영남(嶺南)에서와 같았으므로 사민(士民)들의 덕정(德政)을 사모하여 비석을 세워 칭송하였다. 기축년(1589, 선조 22)에 역변(逆變 정여립(鄭汝立)의 반란)이 일어나자, 부름을 받고 들어와서 다시 대사간이 되었고, 경인년에 하절사(賀節使)로 명 나라에 갔다가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이때 역옥(逆獄)이 오래 끌어 걸려드는 자가 더욱 많아졌는데, 공이 공정과 관용을 위주하여 사건마다 원만히 처리하므로 위구(危懼)해 하던 무리가 안심하게 되었고, 평소 공을 비방하던 자들도 그제야 크게 부끄러워 머리를 숙이면서 모두 후덕 장자(厚德長者)로 일컬었다.
그 이듬해에 특명으로 다시 황해 감사에 제수되었다. 마침 사화가 크게 일어나 많은 사류가 찬축(竄逐)당하였다. 논하는 자들이 공까지 탄핵하려 하였으나 아무런 꼬투리가 없으므로, 공이 평소에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했다는 것만으로 공을 탄핵 파직시키자, 공은 한가로이 경사(經史)를 읽으며 스스로 즐겼다. 친구들이 혹 공을 위안하면 공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를 탄핵한 계사(啓辭)에, 나더러 하늘을 원망하고 남을 탓했다 하니, 이는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왜추(倭酋) 풍신수길(豊臣秀吉)이 그 임금을 죽이고 본국에 사신을 보내어 통신(通信)하기를 청하므로 그때 정신(廷臣) 중에서, 그들과 통신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헌의(獻議)한 자가 많았으나, 공만은 통신을 허용할 수 없다고 한 적이 있었다.
그 뒤 임진년에 왜구가 깊이 침입해 오자, 공이 보령에서 서울로 곧장 달려가서 주거한 지 며칠 만에 공을 다시 기용한다는 명이 내렸으므로 사은(謝恩)하기 위하여 입궐해 보니 대가(大駕)는 이미 서쪽으로 떠난 뒤였다.이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단기(單騎)로 대가의 뒤를 따라 동파역(東坡驛)에 당도하자, 대사간에 제수하였고 얼마 안 되어 이조 참판에서 이조 판서로 승진시켰다.
이때 왜적의 공세가 점차 핍근해 오자 상이 우선 요하(遼河)를 건너 명 나라에 내부(內附)하려 하여 군신(群臣)들에게 ‘누가 즐겨 나를 따르겠느냐?’고 묻자, 공과 이공 항복(李公恒福) 등 두서너 사람이 따르기를 청하였다.
얼마 후에 황제가 원군(援軍)을 크게 일으켜 동번(東藩 조선)을 보조하도록 하였는데,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군사를 요양(遼陽)에 주둔시키고 즐겨 출동하지 않으므로 공이 상의 명을 받고 제독의 군문(軍門)으로 달려가, 속히 압록강을 건너와서 다급한 정세를 구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어조가 간절하고 눈물이 말을 따라 흐르므로 제독이 주식(酒食)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그러나 공이, 군부(君父)가 지금 한데서 곤욕을 겪고 있으니, 의리상 주식을 차마 들 수 없다고 사양하고 뜰에 엎드려 통곡하자, 제독이 이를 보고 감동하여 군사를 재촉,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군(明軍)이 평양을 수복한 뒤 서울로 진격하여 오랫동안 왜적과 서로 대치해 있다가 군량이 다하여 퇴군하려 하므로 상이 이르기를,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이 새로 병란을 만나 관민(官民)이 모두 텅 빈 이때에 곡식을 거두어들인다면 백성들이 견디어내지 못할 터이니, 어찌해야 좋으냐?”
하며 걱정하자, 조정의 의론이 모두,
“이모(李某)가 일찍이 해서 지방을 안무(按撫)하였으니, 이모가 나서면 반드시 성과가 있을 것입니다.”
하여, 공에게 도검찰사(都檢察使)를 제수하였다.
공이 드디어 본 지방에 당도하자, 과연 늙고 어린 백성들이 모두 손을 이마에 얹고, 이 감사(李監司)가 왔다고 환영하면서, 곡식을 있는 대로 털어 이고 짊어진 행렬이 도로에 연이어 군량이 크게 모였다.
다시 명을 받고 삼남(三南)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었는데, 역시 평소에 백성들이 공을 신복(信服)한 터라 공이 왔다는 말을 듣고 저마다 국사에 앞장섰고, 대군(大軍)이 남하(南下)해서도 군수(軍需) 징수에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으니, 이는 공의 충신(忠信)스러움이 사람의 마음속 깊이 주입되었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그 힘을 얻은 것이다.
이조 판서에서 체직, 의정부 좌참찬에 제수되어서는 동궁(東宮)을 모시고 전주(全州)에서 홍주(洪州)에 이르렀다. 이때 갑오년 대흉(大凶 큰 흉년)이 들어, 굶주린 친척들이 모두 가족을 거느리고 공을 찾아왔으므로, 공이 녹봉(祿俸)을 나눠 구호해 주었고, 심지어 자기의 밥상까지 물려주느라고 매번 식사에 배를 채운 적이 없었다.
자제들이 민망히 여기고 그러지 말라고 간(諫)하자, 공이 탄식하기를,
“이 같은 때에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어찌 감히 배부르기를 바라겠느냐.”하였다.
동궁이 공을 명하여 기민(飢民)을 구휼(救恤)하는 일을 맡기므로 공이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면서, 현장에 직접 나가 죽(粥)을 나눠 주느라고 해가 저물도록 식사를 잊다가 마침내 허로(虛勞)에 겹쳐 병이 되었다. 동궁이 의원을 보내어 병을 보게 하자 의원이 거짓,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나의 병은 내가 스스로 잘 안다. 내 어찌 죽고 사는 것에 미련을 남기겠는가.”하였다.
병이 더욱 위중해져서는, 부인(夫人)을 급히 밖으로 나가도록 한 뒤에 가사(家事)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다만, 오늘의 변방(邊方) 정보가 어떠냐고 물을 뿐이었다. 이해 4월 28일에 5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조야(朝野)가 모두 통석(痛惜)해하였고, 백성들 중에는 철시(撤市)하고 흐느끼는 자까지 있었다.
상으로부터 애도하는 은전이 특별히 융숭하였고, 모년 모월 모일에 보령(保寧) 고만(高灣)에 있는 선영(先塋)에 안장되었다. 그 뒤 갑진년(1604, 선조 37)에 상이 호종 제신의 훈공(勳功)을 책록(策錄)할 때 공에게 충근정량 효절협책 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이란 훈호(勳號)를 내리고 영의정을 추증하였다.
공은 천품이 순수하고 기도(器度)가 관홍(寬弘)하여, 그 용모를 접하고 그 사기(辭氣)를 들어 보면, 후덕한 군자임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소시(少時)에 토정에게 배웠는데, 어묵(語默)ㆍ좌립(坐立)에 대해서 일체 가르친 대로 따르므로, 토정이 본시 학식이 고명하여 사람의 현능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았으나 항상 공을 칭찬하기를,
“그의 효제 충신(孝悌忠信)은 비록 공자의 문하에서 나온 자라 해도 그에게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하였고, 또, “오직 대인이어야 어렸을 때의 본심을 상실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아름다운 자질을 받았더라도 성장함에 따라 점차 그 본심을 상실하게 마련인데, 오직 그만은 거의 전자에 가깝다.”
하였고, 또, “그는 어린 임금을 보필할 만한 인재로서 빼앗을 수 없는 꿋꿋한 기절(氣節)이 있다.”하였으니, 이는 관후한 가운데 차착이 없는 법도가 있었던 것이다.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 받드는 데는 일체 《소학(小學)》을 따랐고 선대의 제사를 모실 적에 눈물이 얼굴에 가득했으니, 독실한 성효(誠孝)가 이와 같았다.
평소에 실없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고 태만한 용태를 일신(一身)에 나타내지 않았으며, 일신을 위하는 외물(外物)에는 그저 담담하여 마음에 두지 않았으므로 청사(廳事)의 방바닥이 무너져 불을 넣을 수 없으매 짚을 깔고 지내면서 안연 자적하는 등 오직 이인 제물(利人濟物)에만 급급하여, 궁색한 사람을 보면 자신의 기갈(飢渴)로 여겼다.
남의 한 가지 선행을 들으면 즐거워하며 칭찬하였고 남의 과오를 들으면 언제나 못 들은 척하였으며, 아무리 노복(奴僕)들이라도 과오가 있다 해서 가벼이 나무라지 않았다. 더욱이 종족과의 친목이 돈독하여 성심으로 무휼(撫恤)해 주었으므로 사이의 멀고 가까운 것을 막론하고 모두가 부형처럼 친애하였다.
제자(諸子)를 가르치는 데는 일찍이 영달하기를 힘쓰지 않고, 항상 말하기를, “마음을 세우고 행(行)을 닦는 것을 마땅히 고인(古人)으로써 법을 삼아야 한다.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그저 외사(外事)일 뿐이다.”하였다.
공은 본시 충후(忠厚)를 주로 삼았으나 선악 시비를 판단하는 즈음에는 수지(守持)가 매우 확고하여 처리함이 구차하지 않았으며, 조정에 나선 지 10여 년이요 경연에 있은 지 10여 년에 고충(孤忠)과 솔직(率直)이 그 전부였다.
언제나 율곡을 대현으로 숭배하여 뭇사람의 잡음을 불고하였고 정사(政事)하는 데 있어서는 성심 간의(誠心懇意)를 다할 뿐, 절대로 명예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가는 곳마다 감화되어, 급난한 시기에 그를 많이 힘입었다. 우계 선생 성혼(成渾)ㆍ송강 정철(鄭澈)ㆍ익성군(益城君) 홍성민(洪聖民)과 절친하여 일생 동안 변함이 없었다.
대저 공은 경전(經傳)의 본지(本旨)를 끝까지 궁리하여 그 본의를 이미 확립하였고 송(宋) 나라 현인(賢人)들의 글에도 두루 관통하였는데, 그중에 《역학계몽(易學啓蒙)》에 더욱 깊었으니, 이는 대개 토정에게서 얻어진 것이다. 또 상위학(象緯學)에 정통하여, 신묘년(1591, 선조 24) 연간에 위로는 천문을, 아래로는 인사를 관찰하고 나서 국사를 깊이 걱정하였는데, 왜란이 일어나 과연 그 말대로 들어맞았다 한다.
부인은 덕수 이씨(德水李氏)로 부도(婦道)가 높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 근엄하였다. 소생은 2남으로 장남 경탁(慶倬)은 문과(文科)에 장원하였는데 벼슬이 도사(都事)에 그쳤고 경완(慶俒)은 생원이었는데, 다 일찍 죽었다.
여서(女婿)는 3명으로 맏은 현감 송승조(宋承祚)이니 바로 나의 숙부이고, 둘째는 바로 수몽공(守夢公 정엽(鄭曄)이니 당세의 명신이었고, 셋째는 별좌(別坐) 정준연(鄭俊衍)이다. 도사의 아들은 준발(畯發)이고, 진사(進士)의 아들은 준성(畯成)ㆍ준생(畯生)ㆍ준량(畯良)이다.
준발의 아들은 상우(商雨)로 군수(郡守)이고, 준성의 아들은 두장(斗章)이고, 준생의 아들은 규장(奎章)ㆍ익장(翼章)이고 준량의 아들은 성장(星章)이다. 군수의 아들은 정(濎)인데 그 막내가 바로 속(涑)이며, 내외 증손ㆍ현손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만력(萬曆) 계해년(1623, 인조 1)에 많은 유생(儒生)이 보령(保寧) 청라동(靑蘿洞)에 사당을 지어 토정 선생과 함께 향사(享祀)하고 금상(今上 숙종) 병인년에 ‘화암(花巖)’이라 사액(賜額)하였으니, 성조(聖朝)의 융숭하게 보답한 은전(恩典)이 참으로 유감이 없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지난 선묘 시대에 / 在宣廟世
세도가 매우 밝고 / 世道休明
다사가 왕업을 도와 / 多士煕載
날로 융성해 갔는데 / 日邁月征
이때 충간공이 / 維時忠簡
진정 노성한 이로서 / 展也老成
모나면서도 남을 박해하지 않고 / 廉而不劌
내부에 아름다운 덕 간직하였네 / 含章可貞
아울러 문성공에게 / 允矣文成
큰 정책 있었으므로 / 大猷是程
공과 뜻이 서로 같고 / 公與志同
도가 서로 부합되었으니 / 道與之合
그 도란 대체 무엇인가 / 其道伊何
성의 정심 떳떳한 법으로 / 誠正常法
임금을 보도하고 나라를 안정시킨 것이 / 正君定國
고인과 아주 부합되었네 / 與古允協
시론이 뒤틀리고 / 時論乖張
대현이 쓰러지자 / 大賢躐跲
공이 그 의를 바로잡는 데 / 公正其義
두려워하지도 겁내지도 않았네 / 不懼不懾
임진왜란 때에는 / 壬辰之變
뒤따라 대가(大駕)를 호종했다가 / 追執羈靮
칡덩굴 길게 뻗었건만 / 旄丘葛誕
백숙이 귀먹은 체하므로 / 充耳伯叔
진정에 나가 통곡하여 / 痛哭秦庭
삼군이 감동되고 / 三軍動色
비휴 같은 대군이 / 貔貅十萬
강을 건너오니 / 渡江而來
하늘을 찌르던 흉적의 화염이 / 爇天凶焰
금방 죽은 재로 변하였네 / 欻如死灰
군사가 굶주려 / 師旅饑饉
백사(百事)가 다 어려울 제 / 百爲艱難
지혜와 생각 있는 대로 다했거니 / 竭智殫思
몸에 굳은살 생긴들 어이 꺼릴쏜가 / 腁胝奚憚
비바람마저 몰아쳐 / 風雨之漂
그 울음 처절한데 / 其音嘵嘵
죽은 뒤에야 그만두기로 / 死而後已
몸 바쳐 전력하였으니 / 身殲務勞
나라에 만약 군자가 없었다면 / 不有君子
어찌 이처럼 훌륭할 수 있겠는가 / 斯焉取斯
성조에서 표창하고 / 聖朝褒崇
선비들이 사당 세웠으니 / 多士立祠
백세 이후에도 / 百世之下
이 글 그대로 유전되리 / 文在于茲
<끝>
[註解]
[주01] 야대(夜對) : 임금이 밤에 신하를 불러서 경연(經筵)을 열고, 고금(古今) 치란(治亂)에 관하여 대강(對講)하던 일.
[주02] 칡덩굴 …… 귀먹은 체 : 옛날에 여(黎)의 신하가 나라를 잃은 뒤 위(衛)에 오랫동안 의탁해 있는 사이에 계절의 변천을 보고 시를
짓기를 “칡덩굴 벌써 길게 뻗었건만, 위(衛)의 백숙(伯叔 위(衛)의 제신(諸臣)들을 가리킨 말)은 왜 귀먹은 체 우리를 구해 줄 줄 모
르는가.” 하였다. 《詩經 旄丘》
[주03] 진정에 …… 통곡 : 춘추 시대 초(楚)의 대부(大夫) 신포서(申包胥)가 진(秦)에 가서 7주야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궁정(宮庭)의 장
벽(墻壁)에 기대어 서서 호곡(號哭)하여 진의 원군(援軍)을 얻게 된 고사. 《春秋左傳 定公4年》
[주04] 비바람마저 …… 처절 : 주 무왕(周武王)이 죽은 뒤 주공 단(周公旦)의 두 아우가 주왕(紂王)의 아들 무경(武庚)과 반역을 꾀하여
왕실(王室)을 동요시키므로 주공 단이 이를 토벌하였다. 그런데 성왕(成王)이 그의 괴로운 뜻을 알지 못하므로 그가 자신을 새에,
왕실을 새집에 비유하여 시를 짓기를 “나의 집 아직 완성되지 못했는데 비바람마저 몰아치니, 나의 울음 처절하다.” 하였다.
《詩經鴟鶚》
[주05] 나라에 …… 있겠는가 : 공자(孔子)가 그 제자(弟子) 복자천(宓子賤)에게 “본국(本國)에 군자가 없다면, 그가 어찌 이처럼 훌륭하
게 될 수 있었겠는가.”고 칭찬하면서, 노(魯) 나라에 군자가 있다는 것을 아울러 자랑한 말. 《論語 公冶長》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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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鳴谷李公神道碑銘 幷序
鳴谷先生李公沒四十餘年。當仁廟朝。谿谷張公維。據公女壻守夢鄭公曄行錄爲諡狀。上賜諡忠簡。又五十餘年。而公玄孫涑來謂時烈曰。忠簡公墓木老死。而神道無顯刻。盍爲文而賁之。余以老病固辭。則又要責曰。公之大夫人。與忠簡長女爲妯娌。親義有所不可終辭者。余瞿然曰。孤露餘生。恒懷不洎之悲。今聞子言。不覺涕涔涔也。遂按張,鄭二公文而序之曰。公韓山人。自稼亭穀,牧隱穡二先生大鳴於世。天下皆知東國之有韓山。牧隱之曾孫大司成堣。於公高祖。曾祖長潤。祖穉。皆有贈職。考之茂。公旣貴。以追典爲領議政。開號爲韓昌府院君。妣具氏貞敬夫人。公以嘉靖己亥。生于保寧村舍。諱山甫。字仲擧。幼有美質。凡言語動止。必以誠實。早孤。學于其叔父土亭先生之菡。嘗與群兒戲而折齒。群兒恐受長者責。謀以飾辭對。公曰。叔父常敎我以不欺。吾當以實對。土亭嘗戲指石佛曰。是亦有父母乎。對曰。凡物皆父天而母地。土亭大奇之曰。此兒當爲大人君子矣。十七。將委禽于京師。土亭戒之曰。須惜寸陰。嘗讀書于江榭。有諸友七八輩拉而登舟。直抵奉恩寺下。爭先入寺游觀至暮而歸。則公在船中讀書自如曰。父兄之戒。不可違也。嘗與親友同赴擧。其友忽被錮。公亦與同歸曰。不忍異同也。人以爲難 。及丁卯捷司馬試。旋闡大科。時公從兄山海以文藝。聲名大振。土亭曰。世以山海爲優於某。然賢否則懸矣。由承文院權知。薦入史苑爲翰林。辛未。序陞成均館典籍。移禮曹佐郞。爲養出爲海美縣監。以司諫院正言召入。遷兵曹佐郞。未幾。丁具夫人憂。廬于保寧墓側。哀毀盡禮。制終。拜兵曹正郞。承命爲御史。巡按咸鏡道還。歷拜弘文館修撰,校理,司憲府持平,司諫院獻納。爲吏曹佐郞。時東西黨議已成。爲銓郞者。各執好惡。睢盱不相下。公獨無偏頗之累。淸議重之。丁丑。持收養母心喪。廬居舒川。舒僻邑也。鄕俗甚陋。自公之至。覿德興善。爲士者頗知慕學飭行。拜成均館典籍。屢遷議政府檢詳,舍人,司憲府執義,司諫院司諫,弘文館應敎,典翰,直提學。嘗侍夜對。極陳黨論日盛。用捨不公。對罷將退。上命坐賜問。以此大爲用事者所惡。引疾遞。爲宗簿寺正。自是置散殆一年。會三司誣詆李文成公珥。上怒命竄朴謹元等。而公復拜執義。尋陞承政院同副承旨。俄遞西樞。歷成均館大司成,戶曹參議,司諫院大司諫。文成公旣沒。時事大變。金宇顒爲副提學。入對毀文成所爲。時公以右承旨入侍。盛稱文成道德學問。上擊節嘉歎。宇顒有所言。上輒問公曰。此言何如。公輒盡言不諱。益觸時忌。無何。特授大司憲。爲忌嫉者所中傷。出爲慶尙監司。其治務以袪積弊恤惸獨。養老興學爲先。旣遞歸。參判禮曹者一。刑曹者三。貳京尹者再。復出按黃海道。治理一如嶺南。士民慕德。立石頌之。己丑逆變起。召入再爲大司諫。庚寅。以賀節使赴京師還。又長憲府。時逆獄久益滋蔓。公持議平恕。隨事鎭靖。危懼之徒。恃以無恐。舊嘗訾毀公者。至是大慙服。皆稱以厚德長者。明年。特命再授黃海節。會士禍大起。一時士流多被竄逐。論者欲彈公。無毫毛可擧。只以怨天尤人劾公。公罷官閒居。唯以經史自娛 。所親或唁公。公笑曰。彈辭謂我怨尤。可謂不知我者。先是倭酋秀吉弑其君。遣使請通信。時廷臣獻議者。多以通信爲便。公獨以爲不可許。壬辰。倭寇深入。公自保寧赴都。居數日。始蒙收敍。公將謝恩詣闕。則大駕已西幸矣。公不復還家。單馬追駕扈行。至東坡驛。拜大司諫。尋以吏曹參判陞判書。時賊鋒漸逼。上將渡遼內附。問群臣誰肯從我。公與李公恒福數三人請從。天子大發援師。以存東藩。李提督如松駐軍遼陽。不肯前。公承命馳詣軍門。請亟濟師鴨江。以救呼吸之急。辭氣懇切。淚隨言發。提督具酒食以待之。公曰。君父在草莽。義不忍當此。遂下庭慟哭。提督感動。卽趣師渡江。天兵旣復平壤。進薄京城。與賊相持久。糧且盡欲退軍。上憂之曰。海西新中兵。公私赤立。括粟蜚輓。民必不堪。將奈何。廷議僉曰。李某曾按此道有遺惠 。往必有濟。遂拜公都檢察使。公比抵境。民老幼咸手額曰。李監司至矣。傾儲輸粟。負戴繈屬於道。軍餉大集。又命往莅三南。公素爲士民所信服。聞其至。人爭趨事。大軍南下。軍興未嘗乏。蓋公忠信入人者深。故所在咸得其力矣。辭遞吏書。拜議政府左參贊。陪東宮。自全州至洪州。屬甲午大饑。親戚之窮餓者。皆扶携而歸。公分俸濟活。至輟盤飧以哺之。每食未嘗飽。子弟愍之以爲言。公歎曰。此時喫飯幸矣。敢望飽乎。東宮命公管賑饑民。早夜焦勞。親莅其糜粥。日昃忘食。以勞憊成疾。東宮遣醫視之。醫陽言疾可爲也。公曰。吾病吾自知之。豈以死生關念。疾亟。命夫人出。語不及家事。但問今日邊報何如而已。四月二十八日卒。得年五十六。訃聞。朝野莫不痛惜。民至有罷市流涕者。自上隱卒之典特厚。以其年某月日。葬于保寧之高灣先兆也。後甲辰。 上錄扈從諸臣勳。賜公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號。贈領議政。公天資醇粹。器度寬弘。接其容貌。聽其辭氣。可知其爲厚德君子。少從土亭學。語默坐立。一遵其敎。土亭有高識。於人少許可。常稱公曰。孝悌忠信。雖出於孔門。可以無愧。又曰。惟大人不失赤子之心。世人雖有美資。稍長。漸失本心。惟某也庶幾矣。又曰。可以託六尺之孤。毅然有不可奪之節也。蓋其寬厚之中。自有規度不差也。其事親敬長。一依小學。祭時薦獻。涕淚被面。其誠孝之篤如此。平居謔浪之語。不出於口。惰慢之容。不設於身。外物奉身之具。泊然無所入於其心。廳事土牀。廢而不火。至籍藁以處。而晏然自適。惟急於利人濟物。見有厄窮。猶飢渴之在身。聞有一善。喜而稱道之。或言人過惡。恒若不聞也。雖僮僕有過。亦不輕加詬罵。尤篤於宗族。誠心撫恤。故無論戚疏。戴之如父兄。敎諸子。未嘗以榮進爲務。常曰。立心修行。當以古人爲法。科第乃外事也。公雖以忠厚存心。至淑慝是非之際。守之甚確。處之不苟。立朝近三十年。在經幄首尾十餘年。孤忠朴直。常以栗谷爲大賢。不顧衆咻 。至其施諸政事。則誠心懇惻。切不喜聲名。所在化服。急難之日。多賴其力焉。與牛溪成先生渾,趙重峯憲,鄭松江澈,洪益城聖民相友善。終始不渝焉。蓋公於經傳之旨。無不究極。本旣立矣。至於濂洛諸書。亦皆淹貫。而尤深於易學啓蒙。蓋得之土亭。又洞曉象緯。當辛卯年間。仰觀俯察。深以國事爲憂。及倭變之作。其言果驗云。夫人德水李氏。甚有婦道。治家謹嚴。有二男。慶倬以魁科進。官止都事。慶俒生員。皆早卒。女壻三人。長縣監宋承祚。卽余叔父也。次卽守夢公。爲世名臣。季別坐鄭俊衍。都事男畯發。進士男畯成,畯生,畯良。畯發男商雨郡守。畯成男斗章。畯生男奎章,翼章。畯良男星章。郡守男濎。其季卽涑也。內外曾玄。多不能盡錄。萬曆癸亥。章甫立祠於保寧靑蘿洞。與土亭先生醊享焉。今上丙寅。賜額曰花巖。聖朝崇報之典。無餘憾矣。銘曰。
在宣廟世。世道休明。多士煕載。日邁月征。維時忠簡。展也老成。廉而不劌。含章可貞。允矣文成。大猷是程。公與志同。
道與之合。其道伊何。誠正常法。正君定國。與古允協。時論乖張。大賢躐跲。公正其義。不懼不懾。壬辰之變。追執羈靮。
旄丘葛誕。充耳伯叔。痛哭秦庭。三軍動色。貔貅十萬。渡江而來。爇天兇焰。欻如死灰。師旅饑饉。百爲艱難。竭智殫思。
腁胝奚憚。風雨之漂。其音嘵嘵。死而後已。身殲務勞。不有君子。斯焉取斯。聖朝褒崇。多士立祠。百世之下。文在于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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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一百五十六 / 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