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태서(曺台瑞)의 묘표(墓表) - 경신년 봄
지초(芝草)를 캐는 자가 산에 들어가 위희지(威喜芝)를 만나면, 밤에 보아도 빛이 있으며 태워도 타지 않는다.
때문에 남몰래 속으로 기뻐하며, “내가 산에 들어가서 이것을 만나 열흘쯤 캔다면 한 짐 가득 차겠지.”한다.
그리하여 깊은 골짜기를 샅샅이 뒤지고 우뚝한 산봉우리를 넘어 다녔으되, 삼순(三旬)이 지나도록 지초를 보지도 못하고 낭패해서 돌아온다. 그런 뒤에야 지초라는 것이 과연 얻기 어려운 물건임을 안다. 사물의 이치는 진실로 이와 비슷한 게 있기 마련이다.
나는 16살 때에 돌아가신 아버님을 따라 호남(湖南)의 화순현(和順縣)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현에는 진사(進士) 조태서(曺台瑞) 씨가 있어 시인으로 일컬어졌다. 나는 그와 더불어 종유하였는데, 그는 진실로 위대하고 뛰어난 호걸지사(豪傑之士)였다.
그의 자부심을 보면, 기개는 굴원(屈原)과 가의(賈誼)를 깔아뭉개고 눈은 조자건(曹子建)과 유정(劉楨)을 우습게 여기지만, 얼굴에 교만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논의는 천고(千古)의 간인(奸人)의 마음을 꿰뚫었지만, 편사(偏私)하고 궤격(詭激)한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해학을 좋아하고 겉치레를 꾸미지 않아 술이 취한 뒤에는 머리털을 쑥대처럼 헝클어뜨린 채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손바닥을 쳤으며, 하는 말은 모두 풍류스러운 것이었다. 나는 이때 스스로, “남자는 사방에 노닐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 고을에 이르렀는데도 이런 사람이 있으니, 하물며 사방에랴.하였다.
3년이 지나서 아버님께서는 영남 지방의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가셨는데, 영남은 우리나라의 추로(鄒魯)이다. 이윽고 다시 서울에 유학하며 태학(太學)에서 거처한 지가 7년쯤 되니, 당시의 명사(名士)라고 불리는 사람들을 모두 알게 되었고, 조정에 벼슬한 뒤에는 교분을 맺음이 더욱 넓어졌다.
그 사이 금정(金井)으로 귀양가서 호남(湖南)의 여러 군자(君子)들과 서로 왕복하였으며, 바뀌어 곡산 부사(谷山府使)로 가서는 서토(西土)의 인물이 많음을 보았다. 그 동안에 어찌 현인(賢人)과 호걸(豪傑)다운 자가 없었으랴마는, 조태서 같은 사람은 다시 얻을 수 없었다.
경술(經術)과 조행(操行)에 있어서 또한 태서보다 어진 사람이 없었으랴마는, 태서 같은 사람은 다시 얻을 수 없었다.
내 나이도 40줄에 들어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졌으니, 이 뒤로는 선비를 얻기가 더욱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서가 가끔 그가 지은 희고재문답(喜告齋問答)을 나에게 부쳐왔는데, 그가 예제(禮制)와 명의(名義)를 논한 것이 정절(精切)하고 진확(眞確)하였다. 서로 헤어진 지 20년인데, 그의 학문의 진보가 또 이와 같다. 이제 그의 풍류와 문채가 끝난 것뿐만 아니라, 올 봄에 그의 부서(訃書)가 왔으니, 아아, 광릉산(廣陵散)이 끊어졌도다.
조태서의 휘(諱)는 익현(翊鉉), 아버지의 휘는 수옥(粹玉), 조부의 휘는 선창(善昌), 증조의 휘는 정삼(挺三)인데, 모두 포의(布衣)로 일생을 마쳤다. 고조의 휘는 황(熀)인데 선공감역(繕工監役)으로 있으면서 병자호란 때에 의병을 일으켰으므로 그 마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또 6대조의 휘는 경중(景中)인데 이조 좌랑(吏曹佐郞)을 지냈다. 또 그 위로 5대조의 휘는 흡(恰)인데,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으며, 공희(恭僖)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조씨(曺氏)의 본관(本貫)은 창령(昌寧)으로 고려 때에는 평장(平章) 여덟 분과 소감(少監) 여섯 분이 배출되었다.
공은 영조(英祖) 정사년(1737, 영조 13)에 태어나 정조(正祖) 경신년(1800, 정조 24)에 졸(卒)하였다. 현(縣)의 동쪽 봉림산(鳳林山) 서쪽 기슭에 장사지내었는데, 그 묘의 좌향(坐向)은 갑좌(甲坐)이다. 부인은 전의 이씨(全義李氏)로 응부(應敷)의 따님이며, 어머니 함양 박씨(咸陽朴氏)는 심(燖)의 따님이다. 아들 영희(永禧)를 두었는데 또한 글을 잘 지었고, 딸은 박도(朴燾)에게 시집갔다. <끝>
[ 註解]
[주01] 위희지(威喜芝) : 영지(靈芝)의 일종으로 위희(威喜) 위에서만 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송진이 땅속에 스며들어 천년이 지나면 복령
(茯笭)이 되는데, 다시 만년이 흐르면 그 위에 위희지가 생겨난다고 한다. 이 지초(芝草)는 밤에 보아도 빛을 내며, 만지면 매우 보
드랍고 태워도 타지 않는다고 한다.《酉陽雜著 廣動植華編》
[주02] 추로(鄒魯) : 추(鄒) 나라는 맹자(孟子)의 출생지이고 노(魯) 나라는 공자의 출생지이므로 공맹(孔孟)의 이칭(異稱)으로 추로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여기서는 추 나라와 노 나라 같이 성인의 덕화(德化)를 입은 지역을 의미한다.
[주03] 광릉산(廣陵散) : 금곡명(琴曲名). 삼국 시대(三國時代) 위(魏)의 혜강(嵇康)이 낙서(洛西)에 노닐다가 화양정(華陽亭)에 묵으면
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다. 갑자기 어떤 나그네가 앞으로 나와 거문고를 달라고 하더니 광릉산을 연주하여 들려주었는데, 성조가 매
우 뛰어났다. 결코 남에게 그것을 전해 주지 않을 것을 맹세했는데, 혜강이 사마흔(司馬昕)에게 해를 당하기 직전에 한 번 타고 죽
으니, 결국 곡조가 끊겼다고 한다.《晉書 嵇康傳》 <끝>
다산시문집 제17권 / 묘표(墓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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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曺台瑞墓表 庚申春
采芝者入山而遇威喜芝。夜視有光。燒之不焦。竊竊然自喜曰吾入山而遇之。若采之旬日。吾擔其盈矣。旣而窮幽壑陟絶巘。三旬而不見芝。狼狽而歸。然後知芝之果難獲也。物固有相類者。余年十六。從先君至湖南之和順縣。縣有進士曺台瑞氏。以詩人見稱。與之遊。眞瑰奇卓犖豪傑之士也。其自負也。將氣磨屈賈。目短曹劉。而驕衿不著于色。其尙論也。有足以破千古奸人之膽。而偏私乖激之談。所不爲也。好諧謔。不肯修飾邊幅。酒酣以往。鬢髮蓬然。掀髥抵掌。咳唾皆風流也。余於是自語之曰。男子不可以不遊乎四方者。至一縣已有此人。矧四方哉。旣三年。家君移守嶺南之醴泉郡。嶺南東國之鄒魯也。旣而轉而遊京師。居太學者七年。盡與當世之號名士者識。旣仕于朝。其結交益廣。間謫金井。頗與湖右諸君子相往復。轉知谷山。又見西土人物多矣。其間豈無賢豪間者哉。而台瑞不可復得也。若經術操行。亦豈無賢於台瑞者哉。而台瑞不可得也。余年垂四十。今髮已種種。今而後知士之難獲也。台瑞間以其所著喜告齋問答寄余。其論禮制名義。精功眞確。相別二十年。其學問之進又如此。今不唯其風流文采已矣。今年春。其訃書至。嗚呼。廣陵散絶矣。台瑞諱 翊鉉。父諱 粹玉。祖父諱 善昌。曾祖諱 挺三。皆以布衣終。高祖諱 熀 繕工監役。丙子倡義旌其閭。又其祖諱 景中 吏曹佐郞。又上五代祖諱 恰。兵曹判書。封玉川君。 賜諡恭僖。曺氏本貫昌寧。在高麗時。平章八少監六。公生于英宗丁巳。卒于正宗庚申。葬于縣東鳳林山之西麓。其穴負甲。配全義李氏。應敷之女。母咸陽朴氏。燖之女也。有子永禧。亦善爲文。女適朴燾。<끝>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第十七卷 > 墓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