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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수필사랑 원문보기 글쓴이: 김희자
맨발
김희자
남편은 오늘도 탁발승처럼 종일 세상을 헤매다가 들어왔다. 작은집으로 돌아온 그는 침대 위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나는 침대 끝에 숨을 죽이고 앉아 이불 밖으로 나온 남편의 맨발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작고 핏기 없는 맨발을 보니 눈이 시리다. 몸 중 가장 늦게 세상에 나와 제일 낮은 곳에서 큰 하중을 견뎌내는 것이 발이다. 애잔한 발을 가만히 보다가 손끝을 슬쩍 갖다 댄다. 그는 날 선 세상에 맨발을 베듯 움찔 놀라며 발을 거두어들인다.
맨발로 세상을 이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편처럼 자신을 던져 일가를 지키는 사람도 있다. 하룻밤을 빌려 저렇게 쉬고 나면 내일 아침 또다시 길을 가야 하는 사람이다. 두툼하지 않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품을 떠나 할머니의 그늘에서 유년을 보냈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대학을 다녀 엔지니어가 되었다. 성당에서 연이 닿은 그와 나는 내일을 꿈꾸며 혼배를 올렸다. 남편이 가진 재산이라고는 선한 성품과 험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나직한 발이 전부였다. 물질보다는 사랑의 힘이 더 위대하다고 믿으며 그와 함께 맨발로 길을 들었다.
남편은 휴일도 없이 맨발에 물집이 잡히도록 일을 했다. 나는 앞날의 희망에 가득 차서 조그만 구멍가게를 차려 살림에 보탰다. 나이테를 만드는 세월처럼 날이 갈수록 통장의 동그라미는 늘어갔다. 성실한 그는 최고의 기술자로 인정받아 직장도 옮겼다. 꿈꾸는 날도 서서히 다가서는 듯해 달떴다. 선량한 그의 성품이 다른 사람의 미끼가 될 줄은 차마 몰랐다. 철석같이 믿고 마음을 보냈던 동료에게 발등을 찍혀 일구어 온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졌다. 느닷없이 닥친 불운을 처음에는 세상 탓으로 돌리며 맨발로 땅을 쳤다.
이름 석 자를 빌러주었다는 이유로 아무런 손도 쓰지 못한 채 맨발로 다시 세상에 섰다. 계속되는 채권자의 빚 독촉에 하루가 열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입에 풀칠하기 바쁜 부모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내밀 수도 없었고 배짱 또한 두둑하지 못해 피붙이들의 도움을 얻지 못했다. 그는 십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신용불량자라는 멍에를 지고 절뚝거렸다. 무거운 세월을 지고 오는 동안 온몸의 마디마디는 시린 빗줄기로 박히고 지독한 인내로 말없이 사는 법을 터득했다.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가장인 그가 맨발로 부대껴 온 하루하루는 얼마나 험난했을까. 그의 수척한 발을 보면 슬픈 이유는 자신이 감당하지도 못할 짐을 혼자 지고 왔기 때문이다. 고달프게 지고 온 짐을 겨우 내려놓는가 싶더니 후유증으로 병까지 얻어 주저앉았다. 의사는 오십 고개를 넘기 전에 골수이식을 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견디어 보겠노라며 포기했다. 고초를 겪은 나에게 미안쩍어 누울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언제나 물질 앞에서 주저앉는 맨발의 사내였다. 원수 같은 돈은 눈이 멀었는지 비껴갔다.
간난한 사람의 아내로 살아가는 길 또한 험난했다. 바쁜 꿀벌처럼 슬퍼할 틈도 없이 부지런히 몸을 굴러야 했다. 그를 따라 비 온 뒤의 진흙탕에 빠지기도 했고 뜨거운 자갈밭을 서푼서푼 걷기도 했다. 피할 수 없는 오물을 만나 미끄러지기도 했고 돌부리에 걸러 발을 베이기도 했다. 그와 함께 걸었던 나의 맨발은 언제나 만신창이가 되었다. 궁핍한 사람은 넘어졌다 다시 일어서기에도 숱한 시간이 걸렸다.
그가 주저앉아 일어나지 못할 때 발만 동동 구른 사람도 함께 가는 나였다. 바닥으로 내몰린 처지를 부정하고 회피하려고 발버둥 쳤지만 헛수고였다. 한 지붕 아래서 살았지만 수 년 동안 입을 봉한 채 살았다. 내가 안달복달할 때마다 남편의 발에는 궁핍이 누룽지처럼 눌어붙었고 텅 빈 가슴에는 빈곤함이 쌓여 갔다. 하지만 그는 가솔을 위해 비칠거리며 걷고 또 걸었다. 자신이 아니면 회사가 돌아가지 않는 양 곱절로 일을 했다. 손발이 작은 사람은 일복을 타고 난다더니 노상 일에 묻혀 헤어나지 못했다. 일에 치여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면 검불처럼 늘어져 곤드레만드레가 되었다.
지난한 삶에 지쳐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고 용단했을 때 그는 무릎을 꿇었다. 나를 위해 다시 설 수 있는 기회를 달라며 눈물을 보였다. 나는 그때 내 남자의 슬픈 눈을 보았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 고난의 십자가를 떠맡고 가는지 안쓰러워 울며불며 두 손을 잡았다. 부드럽던 그의 발은 여기저기에 옹이가 박히고 되돌릴 수 없는 시간들이 맨발에 생채기를 남겼다.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던 그도 별 탈 없이 일어선 친구 집을 다녀오거나 형제들 간의 키 재기에 밀리는 날에는 쓸쓸해 보였다. 그런 날이면 가슴으로 숨을 쉬는 것이 아니라 어깨를 들썩이며 뒷모습을 보였다. 견고해 보이던 그의 등도 요동을 쳤다.
욕심을 버리고 낮아져야 삶이 유해진다 했던가. 내일 쓰러져도 오늘에 혼신을 다하는 남편과 금쪽같은 두 딸이 있어 나는 이 험로를 걷는 것이 아닐까. 그는 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하건만 나는 상처투성이인 그의 발을 한 번도 어루만져준 적 없어 무안하다. 사랑했던 날보다 원망했던 날이 더 많았지만 아옹다옹했던 세월들이 저만치 멀어져 간다. 곤하게 잠든 그의 맨발을 보고 있자니 지난 세월들이 파도가 되어 가슴에 일렁인다. 이젠 모순투성이였던 어설픈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
맨발이란 바닥에서 시작한다는 뜻이다. 상처 또한 입기 쉬우며 홀로 서는 것이다. 맨발로 뛰는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지칠 줄 모른다. 그들의 발에는 옹이가 생기고 피멍과 상처투성이지만 맹렬한 사해(四海)에서 나아간다. 치열하고 험난한 세상에서 앙버티고 서려면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용기와 진득한 열정이 필요하다. 서슬 퍼런 세상에서 상처가 나 자리를 틀어도 맨발로 나아가겠다는 일념만 품는다면 분명코 뜻을 이룰 수 있으리라. 속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끝까지 가는 사람이 인생의 승리도 할 수 있다.
남편과 나는 가시밭길의 끝에 서 있다. 이 길 끝에는 분명 희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는 가시덤불이 두렵지 않다. 긁히고 갈라져 상처가 덧나도 아무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상처에는 언제나 새살이 돋기 마련이다. 쓰리고 아픈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픈 세월을 견디었기에 그의 발은 성스럽다. 남편은 가끔 낮은 톤의 목소리로 "미안하오!" 하며 내 발을 끌어당긴다. 세상과 부딪히며 미숙한 길을 함께 걸어온 나의 맨발을 씻어준다. 자신의 발보다 더 굳은살이 앉고 건조해진 발을 어루만져 주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던 남편의 발이 다시 쏙 나온다. 작은 발을 두 손으로 살포시 감싼다. 연습 없는 인생을 걸어오며 매 순간 가슴 졸이며 얼마나 막막했던가. 신산한 세월을 헤쳐 온 지금 기쁨도 슬픔도 모든 것은 흘러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하게 되면 힘들고 어려운 길도 함께 갈 수 있고 만신창이가 된 발을 말없이 씻어줄 수도 있다. 죽은 부처님도 평생 길 위에서 맨발로 살다가 열반에 들었고 예수님도 제자들의 맨발을 씻어주지 않았는가. 어쩌면 우리 모두는 맨발로 와서 세파를 견디다 맨발로 돌아가는 존재들이 아닐는지…….
<2013년 수필과 비평 봄호>
창작에세이 비평연구 전문서
-창작문예수필 작품과 작법
<맨발- 작법 공부>
이관희
갑오경장(1894년)을 기점으로 우리나라 문학예술이 고전문학적 방법을 버리고 현대문예사조에 의한 창조적인 문학예술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곧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학론에서부터 시작된 서구문학이론에 근거한 문학을 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현대(contemporary)의 문학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너무나도 멀리와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를 전면에 세워 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떤 문학이론도 아리스토텔레스와 맥이 닿지 않고는 논의가 안 된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필자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대한민국의 수필이라는 글쓰기는 현대문학 초창기부터 다른 모든 문학예술처럼 현대문예사조에 의한 문학을 하기 시작하였다는 근거를 발견 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하면 다른 모든 문학예술이 서구문예사조를 받아들여 전혀 새로운 양식의 창조적인 문학예술활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수필만이 제외되어 다른 길을 걸어 온 것이다.
그 명백한 증거가 세 가지 있으니, 첫째는 현대문학 초창기에 수필의 명칭이 자그마치 25가지나 된다는 보고가 그 하나이고 (『수필문학의 이론과 실제』 오창익), 두 번째는 현대문학 초창기에 수필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여기의 문학’, ‘서자문학’이라는 것이었다는 점이고, 세 번째는 수필이라는 글에 대한 개념적 해석이 ‘붓 가는 대로’였다는 점이다.
고전문학의 수필명칭은 ‘隨筆’이었다. 현대문학의 수필명칭은 ‘에세이’이다. 그렇다면 수필을 처음부터‘隨筆’이라 하든지, 혹은‘에세이’라 하면 될 터인데 어찌하여 무려 25가지나 되는 별칭으로 전전하다가 수필로 자리잡게 된 것이냐? 이는 현대문학 초창기의 수필이 고전문학의 수필도 아니었고, 현대문학의 ‘에세이’도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두 번째로, 현대문학 초창기의 수필이 만약 고전문학의 수필의 맥을 잇는 수필이었다면 고전문학의 수필이 ‘여기의 문학’이었고, ‘서자문학’이었단 말이냐? 또 그것이 현대문학의 ‘에세이’였다면 몽테뉴가 ‘여기의 문학’이며 ‘서자문학’이란 말이여? 최남선을 필두로 한 이광수, 김동인 등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개척자들이신 저 큰 어르신들이 고전문학도 모르고 몽테뉴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었단 말이냐? 그런 게 아니라 ‘여기의 문학’ 운운은 수필은 처음부터 고전문학의 수필도 아니었고, 현대문학의 ‘에세이’는 더욱 아니었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세 번째 ‘붓 가는 대로’는 더 이상 말하기조차 역겨운 무책임하고, 무정견한 말이었을 뿐이다. 필자는 아직 ‘붓 가는 대로’가 고전문학의 이론이라는 증거를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붓 가는 대로’가 고전문학의 이론이었다면 무슨 보물찾기라도 된단 말이냐?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노무현 NLL발언 관련 국가 특급비밀이라고 중학시절부터 30년이 넘도록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의 눈에조차 발견되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붓 가는 대로’는 고전문학의 이론도 아니었고, 현대문학의 이론에서도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한 편의 창작에세이 작품을 놓고 작법 공부를 하기 전에 우리나라 수필문학의 문예사조적 내력을 간단하게나마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은 창작에세이(창작문예수필)는 지금 수필문학의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나라가 현대문예사조에 의한 새로운 문학(新文學)을 하기 시작한지 이제 막 1세기가 넘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시, 소설 등 타 문학 장르 이론은 더 이상 우리나라 문학이 서구문학 이론에 의한 문학이라는 말을 하기 촌스러울 정도로 우리 자신에 의한 눈부신 이론적 발전을 하여왔다. 마치 우리들이 입고 있는 옷이 더 이상 서양복식이라고 말하는 것이 촌스럽게 된 것과 같다 할 것이다. 우리가 만든 패션이 지구촌 시장 안 가는 데가 없다. 문학도 그렇다.
그런데 오직 수필만이 「맨발」 같은 작품을 앞에 놓고 창작론에 근거한 비평을 할 수 있는 수필창작이론이 없는 것이다. 부끄럽지들 않느냐? 당신들이 이러고도 수필비평가란 말이냐? 당신들이 이러고도 수필잡지 발행인이란 말이냐? 당신들이 이러고도 수필문학 교실의 선생들이란 말이냐? 당신들이 이러고도 수필이라는 글을 문학이라고 써내고 있단 말이냐?
수필이 이상(李霜)이냐? 수필이 뭐 그리 난해한 글이라고 내용해설을 해주어야 독자가 알아먹을 수 있단 말이냐? 대한민국 독자들이‘신변잡기’조차 무슨 글인지 알아먹지 못하는 저능아들이란 말이냐? 수필 내용해설 비평은 독자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당신들이 쓴 수필비평이라는 잡문에 개인적인 모독감을 느낀다. 필자는 내용해설 식의 비평문이야말로 수필보다 더한 잡문으로 여긴다. ‘신변잡기’내용을 해설해 주고 있다니!
현대문학 1세기가 흐르고 있는 오늘의 수필문학의 이론적 현주소가 이런 지경이다, 지금 우리는 시, 소설처럼 T.S. 엘리엇을 논하고, 프로이트를 들먹일 때가 아니다.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문학예술이란 행위에 대한 모방이라는 것이다. 문학에서 말하는 형상화 개념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서구 문예창작론의 핵심 본질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구성)론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플롯의 목적은 존재론적 형상화에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행위의 모방이라고 하였다. 이때의 행위란 인간 행위를 의미한다. 인간의 행위이므로 당연히 행위의 주체인 인간을 모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인간의 모방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있음직한’개인성의 인물을 형상화하는 일이 아닌가.
「맨발」은 간난(艱難)한 일생을 살아 온 남편의 이야기를‘맨발'의 형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한 마디 말을 하기 위해서 필자는 우리나라 현대문학의 역사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흔히 형상화라는 말을 묘사와 혼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묘사와 형상화는 다르다. 묘사는 붓질이고, 형상화는 완성된 그림이다. 그러니까 묘사는 기법이고, 형상화는 완성된 존재·사물을 의미하는 것이다. 기법은 어떤 종류의 글쓰기에서도 다 사용되는 문장법의 하나다. 묘사가 잘 된 글이라고 해서 형상화가 된 글은 아니다.
문예창작법에서 형상화의 절대조건은 구성법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 아무리 묘사가 잘 된 명문장이라도 구성법에 의한 형상화가 되어있지 않은 글은 현대문학 이론에서는 작품(作品)이라 하지 않는다. 이것이 동양문학과 서구문학의 본질적인 차이인 것이다. 동양문학은 문장론의 문학이다. 그러나 서구문학은 창작론의 문학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나라 문학예술이 갑오경장 이래 서구문예사조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던 것이다. 마치 소달구지를 버리고 자동차를 타게 된 까닭이 자동차 엔진에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동양문학론에는 서구적 개념의 창작론이 없었던 것이다.
「맨발」이 남편의 이야기를 맨발의 형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말의 뜻은‘남편의 이야기’가 ‘맨발 이야기’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말을 그림으로 예를 들어 말하면 화자가 맨발 그림을 그려 놓았다는 뜻이 된다. 또 조각으로 예를 든다면 맨발조각품을 만들어 놓았다는 뜻이 되고, 노래로 예를 들면 작곡가가 맨발을 노래한 곡을 창작하였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그림, 그 조각, 그 노래의 의미가‘간난(艱難)한 일생을 살아온 남편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남편의 이야기를 옛날이야기 하듯 직접적으로 그린 간난한 일생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각이 맨발 조각을 통해서, 노래가 맨발 곡을 통해서 남편의 일생을 말하듯 ‘맨발 형상화’를 통해서 남편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형상화의 의미다.
남편의 이야기를‘서사 구조’로 형상화 하는 문학의 대표적인 문학양식이 소설이다. 그런데 소설의 이야기는 허구적 서사다. 그러나 창작에세이의 이야기는 사실의 소재의 이야기인 것이다. 소설의 창작성은 허구창작에서부터 시작된다. 문학이란 상상적·허구적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에는 졸작은 있어도‘신변잡기’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의 이야기는 사실의 소재의 이야기이다. 사실의 소재의 이야기는 창작방법에 실패하면 졸작이 아니라 곧장‘신변잡기’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의 이야기를 적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의 이야기를 제 아무리‘문장 났다’할 만큼의 명문장으로 묘사해 놓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광화문 네거리 이순신 동상 같은 형상화(形象化)는 아닌 것이다. 이것이 소설문학과 창작에세이 창작론의 다른 점이다.
‘신변잡기’란 잡문을 의미하지 않는다. 잡문이 아닌 명문장의 글이라도 창작·창작적인 방법의 글이 못되면‘신변잡기’일 수밖에 없는 것이 현대문학의 창작이론이다.
그렇다면 창작에세이는 어떻게 사실의 이야기를 가지고 시, 소설에 어깨를 견줄만한 당당한 창작문학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 찰스 램 이래 지난 2백여 년 동안 수필문학이 지난한 창작문학 쪽으로 진화의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그 결과가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 창작에세이의 기본 작법인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구성법〉인 것이다.
창작에세이가 〈소재에 대한 비유 창작+구성법〉의 문학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에세이의 창작문학화작업은 구성법만으로는 완벽을 기할 수 없는 수필문학만의 독특한 양식 때문이었던 것이다. 에세이는 태생적으로 사실적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문학이다. 사실의 이야기를 제아무리 창조적인 구성법으로 ‘있음직한 이야기’로 바꿔 놓는다 해도 여전히 사실의 이야기의 흔적을 감출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의 소재를 창작비유 속에 집어넣으면 배속의 아이는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그 어머니의 아이가 되는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고 하면 마음이 호수 속으로 들어가 버려서 마음으로서의 호수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작에세이 창작에서 형상화라는 말의 의미는 소재의 이야기를 잘 묘사해 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구성법에 의해서‘이미 있었던 이야기’로서의 소재의 이야기를 ‘있을 법한 이야기’로 바꿔 놓는 것을 의미하고, 그 위에 + 그 이야기를 창작비유(은유·상징) 속에 집어넣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은 간난한 일생을 살아 온 남편 이야기를 끈질기게 맨발에 접목시키므로 마침내 남편의 간난한 일생을 ‘맨발의 형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