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집사람과 같이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 별로 없어서 찾다가 노원까지 가서 봤습니다. 노원역 근처 롯데 백화점 구내에 있는 영화관에서 말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1Q84' 도입부에는 야나체크의 교향곡 '신포니에타'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 도처에는 음악들이 서사적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다른 모든 문학 작품에도 비슷한 측면들을 지적할 수 있겠다. 지난 3월 제주 세월호 추모관에 들렀을 때 양희은의 '하얀 목련' 노래가 그 특유의 음색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 오장육부를 훑고 지나가는 듯한 정서적 반응을 응시하며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나이가 들면서 자주 울고 싶어지고 실제로 운다. 음악에는 문외한이지만 삶에서 음악이 가진 그 놀라운 힘을 모르지 않는다.
영화 '헤어질 결심'을 떠올릴 때면 정훈희, 송창식 두 사람이 불렀던 노래 '안개'를 생각한다. 영화를 두 번 다시 보지 않는다 해도 그 영화의 서사와 분위기는 그 노래와 미묘하게 결합되어 오감을 진저리치게 자극한다.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그 가사와 분위기에 녹아들어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다. 그래서 성서에도 '슬픈 노래를 삼천 번 부르면 슬픈 영에 사로잡힌다'고 한 것일까.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제목부터 곱씹어 본다. '완벽한 날들'이란 것이 우리 삶에서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파우스트 박사가 자신의 영혼을 걸고 세상의 모든 경험을 원한 조건의 극한이 바로 '삶이여 너 아름답구나! 이대로 멈추어라!'라는 오르가즘적인 탄성, 즉 만족감에 대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인간들은 마약을 하고 술을 마시고 권력을 추구하고 명예를 좇고 생명력을 소진시키면서 쾌락을 추구한다. 하여 이 영화의 제목은 루이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이라는 노래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 언급했던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은 바로 이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용기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않는다. 영웅서사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화려한 전면에 대해서 호화롭게 채색된 영롱한 빛의 이야기도 아니다. 사회의 주류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라는 것이다. 한동안 자주 언급된 바 있는 소확행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도 아니다.
히라야마, 도쿄의 공공 화장실 관리회사에 소속된 쉽게 말해 화장실 청소관리자다. 청소부다. 영화는 자신의 서사를 갖고 관객 혹은 독자의 고유한 서사를 상기시킨다. 나의 아버지는 광부였다. 그리고 실업자였고 어느 시점에서는 서울의 청소부였다. 그리고 간암으로 45세의 나이에 세상을 하직하셨다. 이 지구상에 인류가 출현한 이래 생명의 연쇄는 멸종한 종들의 그 어느 유전적 특성까지도 포함하여 우리 안에 잠재적으로 계승되고 있다. 쉽게 말해 우리는 모두 초신성의 후예!(조금, 뜬금없는 말이지만)라는 점에서 세포 내 소기관으로 포섭된 공생의 원리를 말하지 않더라도 생명은 모두 이어져 있는 측면이 있다. 성자가 된 청소부 뭐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당당해질 필요가 있다. 수천 만이 살아가는 일본 도쿄의 메트로폴리탄 영역에서 혹은 서울을 비롯한 세계의 도시들 대부분에서 자신의 작은 공간을 확보하고 자신이 움직일 동선을 일정하게 궤도화하고 반복하면서 크든 작든 자신의 노동으로 벌어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다. 어떤 사회든 엘리트에 속하는 자들은 소수고 대다수의 평범한 민초들의 삶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많은 것들은 사실 하나의 환상일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만 그런 환상이 사람들의 의식을 이끌고 세뇌시키기도 한다. 그래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일에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초반부에 선택하도록 하는 빨간 약과 파란 약 사이에 인간과 AI의 차이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은 가족과 관계에 대한 것들이 많은 편이다. 청소부로 살아가는 중년의 히라야마는 일단 과묵하다. 언어는 관계의 도구다. 과묵함이란 인간적 관계의 확장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처세와 관련이 깊다.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차원을 지향하는 언어적 절제는 일종의 미니멀리즘이다. 어쩌면 퇴행일지도 모르겠다. 어린 아이들의 경우 언어를 배워가는 과정에서 단어들을 툭툭 던지듯이 발화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밥!, 아니, 싫어! 등등. 히키코모리의 문제도 이런 소통에 대한 거부일 수 있겠지. 자폐의 경우는 아는 바가 별로 없으니 쉽지 않다는 말만 하자. 그러나 히라야마의 경우는 모든 것이 문제가 없고 다만 스스로 선택한 언어의 단식이라고나 할까. 본인조차 그게 의식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차원에서. 이는 관객으로서의 나와 닮았다.
삶의 리듬에 대하여! 삶의 유형을 구분할 때 정착민과 유목민적 기질로 나누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익숙한 삶의 리듬은 우리에게 안정감을 준다. 일정한 시간에 알람에 의해 깨어나든 비질하는 소리에 깨어나든 의식이 돌아오면 숨을 한 번 길게 들이쉬고 기립성 현기증이 일어나지 않게 조심해서 일어난다. 이불을 개고 접어 치운다. 좌식 생활 방식에 대한 공감. 작은 화분에 담긴 식물들에게 분무기로 물을 주고 싱크대에서 이를 닦고 간단하게 세수를 하고 작업복을 챙겨 아침 일찍 근무하러 나가기 전에는 캔 커피 하나를 늘 마신다. 작업도구가 실린 차를 몰고 새벽 도쿄의 도로를 달려 자신이 담당한 화장실을 청소하고 비품을 갈아 넣고 일을 마치면 단골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주기적으로 단골 책방에 들러서 읽고 싶은 책을 주로 헌책으로 구입해서 읽고 단골 술집에서 술을 한두 잔 하고 단골로 가는 동전 빨래방에서 작업복과 옷을 빨고 단골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는다. 단골 가게에서 필름 카메라의 필름을 교체하고 사진을 현상해서 마음에 드는 것은 정리해서 보관하고 청소 작업 중의 점심은 빵과 우유로 근처 신사의 일정한 장소에 가서 먹는다. 이것이 주인공의 일상을 구성하는 일과 즉 루틴이다.
가끔은 이러한 일상의 흐름을 교란하는 일이 벌어진다. 영화는 그 교란과 원상 회복의 과정을 섬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파문이 일고 다시 잔잔해지는 호수의 표면의 변화를 관찰하는 것과 비슷한 시선으로 관객인 우리는 그것을 읽도록 초대받고 있는 셈이다. 가끔은 자신의 개인적 서사가 불려나와 영화의 서사와 뒤엉키는 경험도 하게 될 것이다. 집사람이 눈물을 훔치는 것을 살짝 엿보았다. 친정 아버지, 내게는 장인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주인공은 요양원에 있는 아버지와 화해의 만남을 권유하는 여동생의 마음을 거절한 뒤에 그녀를 살짝 안아주는데 거기에는 영화에서 친절하게 제시하지 않은 숨겨진 감정들과 열린 서사적 상상의 여백이 자리하고 있는 셈이다. 살면서 회한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랴! 영화 '헤어질 결심'에서 남주인공은 '나는 완전히 파괴됐어요!'라고 말한 바 있다. 어느 순간에는 가지 않았어야 할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일들이 우리에게 왜 없겠는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하고, 이별하지 말았어야 할 이별을 하고, 마음과 어긋나는 언행을 한 순간들이 왜 없겠는가! 주인공의 삶은 계속 될 것이다. 그에게 청소일을 할 육체적인 기력이 있고 병들지 않고 외로움을 버틸 수 있는 자기애가 존재하는 한 당분간 그의 삶은 그가 해오던 루틴(일상)대로 진행될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절실하게 깨닫는 바가 있다면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점이다. 위파사나 수행을 하는 사람처럼 걷고 먹고 잠자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고 일상의 자잘한 일에 의미를 확인하면서 될 수 있으면 풍요롭게 살 필요가 있다. 한 잔의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는 점에 감사하고 영화 한 편을 아내와 함께 보고 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다. 영화 한 편을 보는 행위가 나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당선되면 나의 삶은 어떤 영향을 받을까. 무언가가 달라지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히라야마가 자신의 일상에 끼어든 돌발적인 상황을 겪으면서도 이내 자신의 삶을 회복하듯이 나 역시 나의 길을 계속 가지 않을까 싶다. 살아 있는 한 계속 자신의 삶을 이야기를 써 나갈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