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론 5. 가톨릭교회의 분열, 천추의 한이 되다.
가톨릭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고 정치와 혼합되어 성직자들이 통치자가 된 것이 오히려
가톨릭교회의 순수성을 잃어버린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성직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봉사자가 아니라 백성들을 다스리는 권력자가 됨으로써 가톨릭교회는
권위주의에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사실 인간이 있는 곳 어디에나 분열이 있기 마련입니다.
가정에서도 부부사이에 미운 마음이 들고, 섭섭한 마음이 들고,
마침내는 갈라서고 마는 경우가 있는 것처럼, 분열이란 인간이 근본적으로 나약하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교회는 정치와 결합함으로써 교회의 순수성이 왜곡되었습니다.
권위주의와 형식주의, 자만함과 윤리적 부도덕함... 당시에는 가톨릭교회가 유럽역사 전체였습니다.
가톨릭교회가 곧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국가든 문제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만 따로 떼어서 부패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계속되면서 교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회개와 쇄신이 필요하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때마다 뛰어난 개혁가들이 구약시대의 예언자처럼 나타나
가톨릭교회의 실상을 경고하고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가톨릭교회가 두 번에 걸쳐 분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분열
첫 번째 분열은 1054년, 가톨릭교회가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로 갈라진 것입니다.
395년, 로마제국이 동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되면서 하나였던 교회의 운명도 바뀌게 됩니다.
서로마제국의 로마주교는, 자신이 베드로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모든 교회가 로마주교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해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주교는, 로마교회가 전체교회 일치의 상징일 뿐이며
모든 교회는 서로 동등하다고 주장하면서 양 교회가 서로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불화 속에 500여년이 지나면서 동서방 교회는 더욱 대립하게 되었는데 마침내
1054년 동서방 교회는 서로를 파문하면서 갈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갈라진 교회를 ‘가톨릭교회와 정교회’, 또는 ‘서방교회와 동방교회’, 또는
‘라틴교회와 비잔틴교회’라고 부릅니다.
가톨릭교회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되지만,
정교회는 나라별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루마니아 정교회... 등으로 나누어 부릅니다.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는 7성사도 꼭 같고 크게 다른 점이 없는데, 다만 가톨릭교회는
교황님을 전체 가톨릭교회의 대표로 인정하지만, 정교회는 그걸 인정하지 않고
서로 동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릅니다.
가톨릭교회는 약 11억명, 정교회는 2억5천만명의 신자를 가지고 있고,
한국가톨릭교회는 가톨릭교회 소속입니다.
한국정교회는 1897년에 러시아 정교회에서 진출했었는데, 현재는 서울마포구 아현동을 비롯,
부산, 인천, 전주, 양구, 춘천 등에 성당이 있고, 성직자 10여명과 신자 2500명으로 파악되고 있습니다.
2.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분열
1500년대 당시는 정교혼합의 폐해가 곳곳에서 가톨릭교회를 황폐화시켰습니다.
가톨릭교회지도부는 권위주의와 족벌주의에 물들어 있었고, 각종 세금에 시달리던 신자들은
교회에 대한 원성이 높았습니다.
부도덕한 성직자들이 많았고, 종을 부리면서 수도생활을 하는 수도자들도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세상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중세가 무너지고 르네상스로 대변되는 근대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무조건적인 복종보다
인간의 삶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변화되는 세상을 분석하고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중세의 낡은 유산을 버리고 순수한 복음정신으로 돌아갈 것이 필요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시급한 변화와 개혁의 요구에 대처하기에는
가톨릭교회가 공룡과 같이 너무나 낡고 노쇠하였습니다.
특히 1500년대 유럽에는 가톨릭교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개혁의 요구에 교회지도부는 안일하게 대처했고,
오히려 처벌과 단죄로 개혁을제한했습니다.
나아가 더욱 강력한 복종과 순명을 강조하였고, 여차하면 종교재판으로 마녀로 몰아 화형시켰습니다.
마녀화형식은 당시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습니다.
수백년간 계속된 마녀화형식으로 200여만명이 처형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많은 개혁가들이 구석구석에서 교회를 개혁하는데 일생을 바쳤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수도회를 창설하거나 개혁하여 지리멸렬했던 가톨릭교회에
복음정신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오라토리오회의 창설자였던
필립보 네리(1515-1595)
까르멜회 개혁자였던 아빌라의 대데레사(+1582)
십자가의 요한(+1591)
우르술라회 창설자였던 안젤라 메리치(+1540)
천주의 요한(+1550)
가롤로 보로메오(+1584)... 등등이 강력한 교회개혁가들이었습니다.
이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개혁가는 아무래도 예수회를 창설한
이냐시오 로욜라(1491-1556)일 것입니다(+표는 사망연도입니다).
독일 아오스딩수도회의 젊은 수사신부였던 마르틴루터신부(1483-1546)도 개혁을 간절히 원했습니다.
하지만 루터는 영웅심리가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루터는 성인처럼 살기 원했지만 돋보이기를 좋아했습니다.
불행하게도 38살의 루터는 다른 개혁가들처럼 가톨릭교회 내에서 개혁하지 못하고 동조자들과 함께
교회를 뛰쳐나가 새로운 교회를 세웠던 것이고, 이것이 너도나도 교회를 세우는
개신교의 출발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루터가 가톨릭교회를 떨어져나가서 루터교를 세운 것이 1521년,
스위스의 본당신부였던 쯔빙글리가 쯔빙글리교를 세운 것이 1525년,
프랑스의 평신도였던 요한 칼빈이 장로교를 세운 것이 1536년,
영국의 왕 헨리8세가 성공회를 세운 것이 1533년 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공회에서 즉시 침례교, 감리교, 성결교가 갈라져 나왔습니다.
그 이후 너도나도 마구 교회를 세워 안식일교, 몰몬교, 여호와의 증인, 통일교... 등등
수백개교회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고, 지금도 이상한 신흥종파가 계속 생겨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1970년대에 엄청난 주목을 끌었던 박태선장로의 신앙촌, 수많은 여신자들을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된 JMS의 정명석 총재, 서울 구로동 만민중앙교회의 이재록목사 등등...
교회분열은 인류역사에 천추의 한으로 남을 뼈아픈 실패일 것입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지도부는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변화의 트렌드를 읽지 못하고
중세의 낡은 시스템을 고집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았습니다.
독일북부에서 일어난 조그만 불씨를 제대로 잡지 못하고 오만과 독선으로 안일하게 대처하다가
인류를 갈라놓는 거대한 폭풍이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또 루터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가들의 극단적인 태도도 원망스럽습니다.
개혁하겠다는 마음은 좋지만 다른 개혁가들처럼 가톨릭교회 안에서
개혁했더라면 분열은 없었을 것을...
38살의 젊은 나이에 무어 그리 완전한 교회를 세우겠다고...
개신교가 결코 완전한 교회가 아니지 않습니까...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급진적인 개혁가들과 교회지도부의 안일한 대처로 교회가 분열되었고,
결과적으로 후대로 이어지는 분열의 폐해는 종말까지 계속될 천추의 한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인류역사에 이보다 더 큰 손실이 어디 있겠습니까.
전쟁은 한때 지나가는 손실이지만, 교회분열은 아마도 종말까지 계속될 손실이 아니겠습니까.
- 대구대교구 전광진 엘마노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