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에 비가 부슬부슬 내리니
길가는 행인 마음이 넋을 잃을 정도로 서글퍼지네
술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니
목동은 멀리 살구꽃 핀 마을(杏花村)을 가리키네 (두목의 시 ‘청명’)
세계적으로 5000년 이상의 재배역사를 가지고 있는 살구는 개살구, 시베리아살구와 같은 야생종과 중국 및 중앙아시아와 유럽에 분포하는 여러 품종의 재배종 살구로 구분된다.
우리나라의 재배종 살구는 중국 북부와 몽고지방에 걸친 산악지대가 원산지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70년대 초부터 우량품종이 선발 보급되어 규모화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품종에 따라서 껍질 색깔과 단맛, 신맛이 매우 다른 특성이 있다.
살구는 환경적응성이 커서 유라시아대륙 전역에 걸쳐 재배되며 추위에 견디는 힘도 강하여 영하 30℃까지도 견디는 품종도 있고 토양 적응성도 높아 생육기 중에 강우량이 적은 유럽 및 중앙아시아 국가에서 대부분 생산되고 있다.
살구꽃이 피는 시기는 지역마다 기후 때문에 차이가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청명, 한식, 식목일과 거의 맞아 떨어진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꽃놀이에 적당한 시기로 옛날에는 술집에서도 선비들이 꽃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살구나무를 심었다.
술집을 살구꽃이 피는 마을 ‘행화촌(杏花村)’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비들이 술을 즐기는 동안 농부들은 곡식의 씨를 뿌리고 논과 밭둑을 손질하고 못자리를 만드는 농사로 바쁘게 움직이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살구는 역사적으로 의미 있게 취급되어온 과일이기도 하다.
꽃은 겨울을 지나 가장 먼저 피어나므로 부활, 생명의 상징으로 쓰였고 중국의 신화집인 《산해경》에는 ‘영산에 복숭아, 자두, 매화, 살구나무가 많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인재선발, 학업, 의술 등 다양한 이미지로 묘사되기도 한다.
공자가 살구나무 아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는 고사에서 ‘행단’은 학문을 닦는 곳을 의미하며 살구꽃은 과거시험 합격자에게 수여된 꽃으로 ‘급제화’라고도 불렸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 각 지방의 향교에서는 은행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벌레가 끼지 않는 은행나무처럼 유생들이 청백리로 살아가라는 의미라고 한다.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에서 명성이 높았던 의사 동봉이 살구나무숲에서 빈민을 구제한 것에서 유래하여 진정한 의술을 펴는 의사를 ‘행림’이라고 한다.
우스갯소리로 ‘개가 살구를 먹으면 죽는다(살구/殺拘)’는 속설이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1400∼1700년대 발간된 문헌에 보면 ‘살(ᄉᆞᆯ)고’가 어원으로 살(ᄉᆞᆯ)은 ‘해’나 ‘하늘’을 의미한다.
살구의 영양적 가치는 비타민A가 다른 과실에 비해 20∼30배가 많고 식이섬유, 불포화지방산, 철분도 풍부하다. 또한 고유의 향기와 아름다운 색으로 세계인의 기호과실로 부각되고 있다.
한방에서는 살구의 씨를 행인이라 하여 기침을 멎게 하고 가래를 삭혀주는 한약 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살구는 같은 핵과류에 속하는 과일이지만 복숭아의 화려함과 자두의 상큼함 그리고 매실의 향기의 그늘에 가려 크게 빛이 나지 않는 수수한 과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알 듯 모를 듯 그것이 매력인지도 모른다. 꽃말도 ‘아가씨의 수줍음’이다.
‘살구꽃이 필 때면 돌아온다던 내 사랑 순이는 돌아올 줄 모르고 서쪽하늘 문틈 새로 스며드는 바람에 떨어진 꽃냄새가 나를 울리네 가야해 가야해 나는 가야해 순이 찾아 가야해 누가 이런 사랑을 본적이 있나요 나이는 18세 이름은 순이’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평화로운 고향과 희미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어린 시절 여자 친구를 떠올리게 만드는 향수를 자극한다.
6∼7월이 아니면 시장에서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생산시기도 짧고 생산량도 적은 귀한 과일이면서 껍질째 먹을 수 있는 매력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1500년 7월 9일에 ‘살구가 지금까지 있으니 괴이한 일이다. 나쁜 일인지 좋은 일인지 알아보고 시를 짓게 하라’는 연산군의 어명에 있자 신하들이 이르기를 ‘늦은 열매가 오래도록 견딘 것이니 좋은 일이라 여긴다.’고 하였다. 추운 날씨를 이겨내고 꿋꿋하게 견디는 생명력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살구는 열매뿐만 아니라 씨는 화장품과 의약품 원료로도 이용되고 있다.
빛 좋은 개살구의 오명을 벗어버리는 그 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