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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7월 9일 선데이서울 표지모델. |
[다시보는 선데이서울-표지모델편 ②]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70년대와 80년대를 주름잡던 여배우를 아시는가?
84년 결혼과 함께 무대뒤로 사라진 배우. 바로 정윤희(53)다.
지금은 40대 이상이 되었을 팬들의 기억속에는 사진속 처럼 여전한 미모로 존재할 것이다.
타 배우들과는 달리 은퇴후 공식적인 외출을 극도로 삼가해 그녀의 근황은 좀처럼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2001년 7월 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정윤희 영화주간’ 행사에 자신의 큰 딸, 막내아들과 동반해
‘깜짝 외출’을 했다.
이날 정씨는 “애들 아빠가 가보라서 해서 왔다.”며
“요즘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그녀의 남편은 중앙산업 회장인 조규영씨.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나우뉴스 박종익기자 pji@seoul.co.kr
<출연작>
사랑의 찬가 (1984)
동반자 (1984)
사랑하는 사람아 3 (1984)
질투 (1983)
안개마을(1982)
죽음보다 깊은 잠(1979)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1980)
정부(1982)
목마와 숙녀(1976)
속 사랑하는 사람아(1983) 사랑하는 사람아 3(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1981)
그는 1975년 '욕망'이라는 영화로 데뷔해 총 36편의 영화를 찍고 84년 '사랑의 찬가'를 끝으로 스크린을 떠났습니다. 80년과 81년에는 2회 연속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해 연기파 배우로도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첫 영화 '욕망'에서 탤런트 노주 현을 상대역으로 시작, 당대 최고의 남자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충무로 캐스팅 영순위의 여배우였지요. 7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정윤희, 유지인, 장미희. 인기, 스타성, 외모는 정윤희가 압도적으로 인기가 많았더랬죠.
이외에 한 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가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인기를 누린 스타였다는 것입니다. 정윤희가 지금 열풍이 불고 있는 한류의 원조 격이라는 사실. 정윤희의 뛰어난 미모는 일본과 대만에도 알려져 외국 감독들에게까지 러브콜을 받을 정도였답니다.
또한 세계적인 톱스타들만 참석한다는 동경가요제에 한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초청 받아 영화 '러브스토리'의 스타 알리 맥그로우와 시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대만에서도 영화가 개봉됐었는데 정윤희가 대만을 방문했을 땐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나와 큰 뉴스가 되기도 했답니다.
당시 홍콩 최고의 무술스타였고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인 성룡과 정윤희의 스캔들 또한 정말 유명했습니다. 첫눈에 반한 정윤희 때문에 성룡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너무 사랑하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지요. 이렇듯 정윤희가 한류 최초의 스타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불타는 입술과 농염한 몸매로 까까머리 소년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던 정윤희. 20년이 지난 후에 광복 60주년 기념행사로 영화계 리더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한국 여배우 최고 미인설문에 심은하 1위 정윤희 2위로 뽑힌것을 보면 그 미모가 가히 전설인듯 합니다 은퇴한지가 언젠데.....솔직히 심은하도 비슷하긴 하지만 정윤희 씨의 그 모든 매력에는 심은하가 다소 부족하죠.
양귀비의 환생이라는 말- 한국 영화 역사상 최고 미인이라 칭송받는 그녀. 아시아에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모라는 말은 .당시 아시아의 전설이었다는~~ 사진기술 화장기술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라했던 시절 그녀는 그냥 카메라만 들이대도 저런 영상이 잡혔다고 하니 성룡이 반할 만도 하지요 거기다 100% 순수 천연미인 또 언제 저런 미인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일본에서 초콜릿 광고등 광고도 여러 편 찍으셨죠. 동양의 최고 미인이란 말은 일본인들이 붙여 줬네요.그러고 보니까. [퍼옴. 글 쓰신 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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