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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215호 / 목은 이색의 영정
牧隱(목은) 李穡(이색)
고려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이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고,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할 수 있었다. 1352년(공민왕 1) 아버지가 죽자 귀국해 토지문제·왜구대책·학교교육론·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했으며, 이듬해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에 가 회시(會試)·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이어 고려에 돌아와 전리정랑(典理正郞)·내서사인(內書舍人)을 지냈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전선(銓選)을 장악하게 되었다.
1365년 신돈이 등장하고 개혁정치가 본격화되면서 그는 교육·과거 제도 개혁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367년 성균관이 중영(重營)될 때 이색은 대사성이 되어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과 더불어 정주성리(程朱性理)의 학문을 부흥시키고 학문적 능력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유신들을 길러냈다. 1371년 신돈이 제거되고 이어 공민왕이 죽자 그의 정치활동은 침체기를 맞았다. 그후 1375년(우왕 1)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판삼사사를 역임했다. 138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해에 판문하부사 조민수(曺敏修)의 아들이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동지공거 염흥방(廉興邦)이 그를 합격시킬 것을 청했으나 거절했다. 그는 1377년 장경(藏經)을 인성(印成)하고, 1387년 서보통탑(西普通塔)의 탑기(塔記)를 짓는 등 주자성리학자이면서도 불교를 선호하며 긍정하고 있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에 임명되었다. 고려왕조의 존립을 전제로 하는 가운데 개혁정치를 희구한 이색은 1389년(공양왕 1) 도평의사사에서의 사전혁파(私田革罷) 논의 때 이숭인·변안렬(邊安烈) 등과 같이 옛 법은 경솔히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불법적인 대토지소유에 반대하고 있었지만 사전개혁과 같은 급격한 전제개혁에도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위화도회군을 군령을 위반하고 왕의 명령을 거역한 행위로 이해했으므로 그 주체세력이나 동조세력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위화도회군의 중심인물과 동조세력은 당대의 대유(大儒)인 이색과 같은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다. 오사충(吳思忠)·조박(趙璞)·정도전(鄭道傳)의 상소로 인하여 그는 장단으로, 아들 종학(種學)은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후 김저(金佇)의 옥(獄)과 윤이(尹彝)·이초(李初)의 사건에 연루되어 정치적 노선을 같이하는 이숭인·변안렬·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투옥되거나, 금주·여흥 등지로 유배당하는 등 고려 말기의 정치권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이색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어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이 되어 해도(海島)에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1396년 여주 신륵사(神勒寺)에 가는 도중에 죽었다. 이색은 원나라에서의 유학과 이제현을 통하여 이 시기 선진적인 외래사상인 주자 성리학을 수용했고, 이를 바탕으로 고려 말기의 사회혼란에 대처하면서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그는 원의 주자학을 받아들였으므로 그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이(理)·기(氣)·태극(太極)과 같은 주자학의 핵심개념을 사용하여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설명했고, 주자학의 수양론인 성학론(聖學論)을 전개했다. 그러나 주자학에서 말하는 수양론과 달리 죽음과 인간적 고뇌와 같은 초인간적·종교적 문제는 여전히 불교에 의존했다. 또한 송대의 혈연·의리·도덕·윤리 등을 말하는 도통론(道通論)을 전개한 것이 아니고 원의 형세론적 도통론을 전개했다. 즉 그의 주자성리학의 발원지인 원의 영향과 불교의 영향 속에서 송대의 주자학과 구분되는 정치사상을 전개했다. 저서로 〈목은유고〉·〈목은시고〉 등이 있다. 장단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백과사전>
목은의 일대기
이색은 어려서부터 뛰어나게 총명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고, 한번 보기만 하면 다 외웠다. 지정(至正) 신사년에 이색의 나이 겨우 14세였는데, 본국의 성균시에 합격하여 우뚝하게 이미 명성이 있었다.
막 관례를 하고 혼인을 해야 할 시기에 한때의 고문 망족(高門望族)으로 사위를 가리는 이들이 모두 이색에게 자기 딸을 시집보내려 하여 심지어 혼인하는 날 저녁까지도 서로 다투었다. 끝내 안동권씨로 명위장군(明威將軍) 제군만호부 만호(諸軍萬戶府萬戶)에 선수(宣授)되었고 본국에서 중대광(重大匡)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진 권중달(權仲達)의 딸이며, 원조(元朝)에서 조열대부(朝列大夫) 태자 좌찬선(太子左贊善)이 되었고, 본국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 도첨의 우정승(都僉議右政丞)을 지낸 권한공(權漢功)의 손녀에게 장가들었다.
무자년에 가정(稼亭) 선생이 원조에서 중서사 전부(中瑞司典簿)가 되었으므로, 이색은 조관(朝官)
의 자제로서 국자감 생원이 되었다. 학교에 있는 3년 동안에 중국의 연원 있는 학문을 받아서 절차탁마하고 깊이 연구하여 더욱 크게 진취되었고 성리(性理)에 관한 글에 더욱 조예가 깊였다.
신묘년 정월에 가정이 본국으로 돌아와서 작고하자, 이색이 분상하여 3년상을 마쳤다.
계사년 5월에 공민왕이 과거를 설치하여 선비들을 시험 보였는데, 이색이 장원하여 숙옹부 승에 제수되었다. 가을에는 장동행성의 해원(解員)에 합격하고, 곧 진봉사(進奉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충원되어 경사(京師)에 갔다.
무술년에 국사를 말한 것으로 권귀(權貴)에게 미움을 받게 되어 한때 간관(諫官)들이 모두 좌천(左遷)됨에 따라 이색은 상주(尙州)로 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행장을 갖추고 새벽에 떠나려 하였는데, 그날 밤에 어명이 내려져 유독 그만이 통의대부(通議大夫) 추밀원우부승선 지공부사(樞密院右副承宣知工部事)에 승진 임명되었다.
왕이 재상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색은 재덕(才德)이 출중하여 다른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니니, 용사(用舍)를 이렇게 하지 않으면 인심(人心)을 굴복시킬 수 없다.”
이로 말미암아 후설(喉舌)의 자리에 가까이 있어 기밀한 일을 참여하여 관장한 지 무릇 7년 동안에 계책을 진설하고 성심으로 인도하여 국정을 보익한 것이 매우 많았다.
공민왕이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위하여 왕륜사(王輪寺)의 동편에 그의 영전(影殿)을 짓는데, 극도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하여 수년 동안이나 일을 완성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마암(馬巖)의 서쪽에 땅을 가려서 더욱 극도로 굉장하게 영전을 짓다 보니 노동력과 비용이 대단히 많이 들었다.
그러자 시중(侍中) 유탁(柳濯)이 동지밀직(同知密直) 안극인(安克仁), 첨서밀직(簽書密直) 정사도(鄭思道)에게 말하기를, “마암의 역사(役事)는 백성들을 괴롭히고 재물을 손상시킬 뿐만 아니라, 술사(術士)의 말에도 여기에 집을 지으면 나라에 이롭지 않다고 하니, 내가 부재(不才)한 사람으로 외람되이 백관(百官)의 대표가 되어 사직(社稷)을 걱정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차라리 죽기로써 간하겠소.”라고 하였다. 이에 상서(上書)하여 그 불가함을 극력 말하였다.
그러자 왕은 크게 노하여 유탁 등을 하옥시키고, 다른 일로 트집을 잡아 그를 죽이려고 이색에게 대중에게 유시(諭示)하는 글을 짓게 하였다. 이에 그가 죄명을 묻자 왕이 이렇게 답했다.
“오랫동안 수상(首相)으로 있으면서 불의(不義)한 일을 많이 행하여 큰 가뭄이 들게 한 것이 첫 번째이고, 연복사(演福寺)의 전답(田畓)을 빼앗은 것이 두 번째이고, 노국공주가 죽었을 때 3일 동안 제사에 불참한 것이 세 번째이고, 노국공주를 장사지낼 때 예(禮)를 강등시켜 영화공주(永和公主)의 전례에 따라서 한 것이 그 네 번째이다. 불충하고 불의하기가 무엇이 이보다 더 크단 말인가?”
이색은 이에 이렇게 대답했다.
“이것은 다 지나간 일입니다. 요즘에 유탁이 상서하여 영전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였으니, 지금 비록 네 가지 일로 죄를 주더라도 나라 사람들은 모두 상서한 일로 죄를 받는다고 여길 것이고, 또 이 네 가지 일은 모두 죽일 만한 죄가 아니니, 다시 생각해 주시옵소서.”
왕은 더욱 노하여 글을 지으라고만 더욱 급히 재촉하였다. 그러자 공은 엎드려서 다시 말하였다.
“신이 차라리 죄를 얻을지언정, 어찌 감히 글을 지어서 죄를 만들 수 있겠습니까? 또 상서한 일은 영도첨의(領都僉議) 또한 알고 있습니다.”
이때 신돈(辛旽)이 영도첨의가 되어 매우 총애를 받으면서 용사(用事)하였는데, 그가 막 왕의 곁에 있다가 마지못하여 말하기를, “노신(老臣) 또한 그 사실을 알았으나, 다만 왕께서 노여워하실까 하여 감히 고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왕이 시중 이춘부(李春富)에게 명하여 국인(國印)을 봉하게 하니, 이춘부가 엎드려서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다. 신돈이 “의당 말한 사람으로 하여금 봉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이색에게 명하니, 그는 왕이 더욱 노할까 염려하여 이에 국인을 봉하고 거기에 “신 이색은 삼가 봉합니다.”라고 썼다. 그러자 왕이 “내가 부덕(不德)하기 때문에 내 말을 따르지 않은 것이니, 이것을 가지고 가서 덕 있는 이를 찾아서 섬기거라. 우리 태조께서도 처음에 어찌 왕손이었던가! 내가 자리를 피해 가겠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정비궁(定妃宮)으로 옮겨가 거처하면서 좋은 음식도 윤허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음날 신돈이 왕의 노여움을 풀려고 왕에게 아뢰고, 왕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이색을 하옥시키고 책망하여 신문하였다.
이에 이색은 이렇게 말하였다.
“신이 포의(布衣)로부터 외람되이 주상의 알아줌을 입어 갑자기 재상 지위에 이르렀으므로, 주상의 덕에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이 있기만 하면 죽을힘을 다해서 말하여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시중 유탁이 옥에 갇혀 있는데, 신이 감히 죽을죄가 없다는 것을 남김없이 다 말한 것은 왕께서 감동을 받고 잘못을 깨달아서 대신(大臣)을 함부로 죽이지 않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다시 울면서 말을 이었다.
“신이 우는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다만 이 한 가지 과실로 인하여 왕의 명성이 후세에 아름답지 못하게 될까 염려해서입니다.”
옥관(獄官)이 이 사실을 왕께 갖춰 아뢰니, 왕이 마침내 깨달아 느끼는 바가 있어서 유탁 등을 석방시키고, 이색에게 목욕(沐浴)하고 조회하도록 하였다.
……
공이 집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먹을 것이 있고 없음을 묻지 않았고 비록 먹을 것이 자주 떨어지는 지경에 이르러도 그것 때문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다. 평생에 급한 말이나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고, 가인(家人)이나 노복(奴僕)이 혹 과실이 있을 경우에 반드시 천천히 사리로써 깨우쳐 타일러 주었고, 성내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술자리에서는 조용하고 침착하게 처신하여 또한 취하는 경우가 없었고, 심회가 쾌활하고 언동이 조용하며 희로(喜怒)와 규각(圭角)을 드러내지 않아서 혼연한 일단(一團)의 화기(和氣)일 뿐이었다.
오랫동안 총록(寵祿)의 지위에 있었으나 교만한 태도를 볼 수 없었고, 만년에 험난한 시기를 만났으나 실의에 찬 모습을 볼 수 없었으며, 감옥에 갇힌 것도 욕될 것이 없었고, 높은 관작도 영화로울 것이 없었으니, 그의 마음을 잘 수양하고 지켜 실천한 데에 대하여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았다고 이를 만하다.
『목은고(牧隱藁)』 중에서
경기도 여주 / 목은 이색선생 시비
목은 이색(李穡)작품
浮碧樓 부벽루
昨過永明寺 작과영명사 어제 영명사를 찾아 갔다가
暫登浮碧樓 잠등부벽루 잠시 부벽루에 올랐네
城空月一片 성공월일편 성은 텅 비어 있고, 달 한 조각 떠 있고
石老雲千秋 석로운천추 바위는 늙어 천 년 두고 구름이 흐르네
麟馬去不返 인마거불반 麟馬는 떠나간 뒤 돌아올 줄 모르고
天孫何處遊 천손하처유 天孫은 어느 곳에서 노니시는가
長嘯倚風磴 장소의풍등 바람부는 돌계단에 기대어 긴 휘파람 부니
山靑江自流 산청강자류 산은 푸르고 강은 저절로 흐르네
이해와 감상
* 永明寺(영명사) : 부벽루 서쪽에 있던 절. 고구려 광개토왕이 지은 아홉 절 중의 하나라고 전해짐.
* 浮碧樓(부벽루) : 평양 모란대 밑 절벽, 대동강변에 위치한 누각으로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 石老(석로) : 오래 된 바위. 조천석(朝天石, 기린굴 남쪽에 있는 큰 바위).
* 麟馬(인마) : 騏麟馬(기린마). 고구려 동명왕이 이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함.
* 長嘯(장소) : 길게 휘파람을 불다.
* 風磴(풍등) : 인위적으로 만든 돌다리를 일컬음.
* 기린마는 떠나간 뒤 ~ 어느 곳에 노니는가? : ‘기린마’는 고구려 동명왕이 이 말을 타고서 기린굴로 들어가니 땅 속에서 조천석이 나와 하늘로 올라갔다는 설화와 연관되고, ‘천손’은 동명왕으로 신화에 의하면 천상적 존재인 해모수의 아들이므로 자기를 천손이라 자처하였다는 설화 내용과 연관된다.
이 작품은 고려 말의 문신이었던 작가가 고구려의 유적지인 평양성을 지나다가 지은 오언 율시(五言律詩)다. 그 옛날 찬연했던 고구려의 모습은 이제 찾을 수 없고, 다만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하는 퇴색한 자취만이 남아 있는 데서 그의 시상은 출발한다. 이러한 인간 역사의 유한함이 자연의 영원함과 대비되면서 쓸쓸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하늘에 걸린 한 조각의 달과 천년 두고 흐르는 구름이 그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 준다.
그러면 그가 이 시를 지은 동기는 이러한 회고적 정서에 그치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막연하게 옛 왕조의 자취를 읊기보다 위대한 건국 영웅이었던 동명왕의 일을 노래한 점에 주목하게 된다. 이 당시 고려는 원(元)나라의 오랜 침략을 겪고 난 뒤여서 국가적으로 극히 쇠약한 형편이었는데, 시인은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고구려의 웅혼한 역사를 일으킨 동명왕의 위업을 다시금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로 소급해 올라가는 한편, 과거의 역사를 통해 다시금 현재를 비추어 보는 양면적 시각을 내포한다고 하겠다.
백설이 자자진 골에
白雪(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반가온 梅花(매화)는 어늬 곳에 픠엿난고
夕陽(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청구영언(靑丘永言)>
[시어, 시구 풀이]
백설(白雪) : 흰 눈. 여기에서는 ‘고려 유신(遺臣)’을 비유함
자자진 : 녹아 없어진
구루미 : 구름이. 여기에서는 당시의 정치 상황을 대표하는 조선의 ‘신흥 세력’을 의미
머흐레라 : 험하구나.
매화(梅花) : 지조. 충성. 여기에서는 ‘우국지사(憂國志士)’를 의미함
셔 이셔 : 서서
白雪(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루미 머흐레라 : 풍자적인 표현으로서 ‘구름’은 간신인 요승(妖僧)인 신돈(辛旽)을 가리킴
반가온 梅花(매화)는 어늬 곳에 픠엿난고 : 작자가 처하고 있는 현실의 어려운 상황을 뜻하는 구절
夕陽(석양)에 홀로 셔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 기울어 가는 국가의 운명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는 작자의 심정
[전문 풀이]
흰 눈이 잦아진 골짜기에 구름이 험하구나
반겨 줄 매화는 어느 곳에 피어 있는가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有感 유감
非詩能窮人 비시능궁인 시가 사람을 궁하게 할 수 없고
窮者詩乃工 궁자시내공 궁한 이의 시가 좋은 법이라
我道異今世 아도이금세 내 가는 길 지금 세상과 맞지 않으니
苦意搜鴻곤 고의수홍곤 괴로이 광막한 벌판을 찾아 헤맨다
氷雪뇨肌骨 빙설뇨기골 얼음 눈이 살과 뼈를 에이듯 해도
歡然心自融 환연심자충 기꺼워 마음만은 평화로웠지
始信古人語 시신고인어 옛 사람의 말을 이제야 믿겠네
秀句在羈窮 수구재기궁 빼어난 시귀는 떠돌이 窮人에게 있다던 그 말
觀物 관물 - 萬物을 바라보며
大哉觀物處 대재관물처 크도다! 사물이 있는곳을 바라보니
因勢自相形 인세자상형 형세 따라 절로 형상이 다스려진다
白水深成黑 백수심성흑 하얀 물이 깊어지면 검게 변하고
黃山遠送靑 황산원송청 누런 산이 멀리서는 푸른빛을 보내지
位高威自重 위고위자중 지위가 높아지면 위엄은 절로 무겁고
室陋德彌馨 실누덕미형 집이 누추해도 德은 더욱 향기롭네
老牧忘言久 노목망언구 늙은 이 몸은 말을 잊은 지 오래이고
苔痕滿小庭 태흔만소정 이끼 자국 작은 뜰에 가득하네
讀書 독서 - 글을 읽으며
讀書如遊山 독서여유산 글읽기란 산에 오르는 것 같아
深淺皆自得 심천개자득 깊고 옅음이 모두 自得함에 달려있네
淸風來徐寥 청풍래서요 맑은 바람은 천천히 하늘에서 불어오고
飛雹動陰黑 비박동음흑 나는 우박은 어두운 곳에서 내려오네
玄규蟠重淵 현규반중연 검은 교룡은 깊은 못에 서려있고
丹鳳翔八極 주봉상팔극 붉은 봉황은 하늘로 날아오르네
精微十六字 정미십육자 精微한 열여섯 글자
的的在胸臆 적적재흉억 분명하게 가슴에 간직하네
輔以五車書 보이오거서 다섯 수래의 책 읽어서 돕고
博約見天則 박약견천칙 능히 하늘의 이치를 본다네
王風久蕭索 왕풍구소삭 옳은 기풍 오래도록 쓸쓸하고
大道예荊棘 대도예형극 큰 길은 가시나무에 가려있네
誰知蓬窓底 수지봉창저 뉘 알랴, 蓬窓 아래에서
掩卷長太息 엄권장태식 책을 덮고 길이 탄식하는 것을
晨興卽事 신흥즉사 - 새벽 興을 즐기며
湯沸風爐鵲조첨 탕비풍로작조첨 風爐에는 국 끓고, 처마 끝에 까치 울고
老妻관櫛試梅鹽 노처관즐시매염 치장 끝낸 아내는 국물 간을 맞추네
日高三丈紬衾煖 일고삼장주금난 아침 해 높이 떠도 명주 이불 따뜻해
一片乾坤屬黑甛 일편건곤속흑첨 세상일 나 몰라라, 잠이나 더 자자
雪軒鄭相宅靑山白雲圖 설헌정상택청산백운도 - 청산 백운도
山本乎止本乎靜 산본호지본호정 산은 그침이 본색이고, 고요함이 본색인데
雲可以西可以東 운가이서가이동 구름이야 동서 어디라도 떠다닌다
本乎止靜者有體而附地 본호지정자유체이부지 그침과 고요함이 본색인것은 형체가 땅에 붙은 탓이고
可以西東者無心而隨風 가이서동자무심이수풍 동서로 떠다니는 것은 무심히 바람을 따른 탓이다
一動一靜將觀物所性 이동일정장관물소성 움직이고 쉬는 데서 사물의 성격을 보았네만
或靑或白已累吾之瞳 혹청혹백이누오지동 푸르기도 하고 희기도 해서 내 눈에 누를 끼쳤도다
詠雪 영설 - 눈을 보며
松山蒼翠暮雲黃 송산창취모운황 송악산 푸르름에 저녁 구름 물들더니
飛雪初來已夕陽 비설초래이석양 눈발 흩날리자 이미 해는 저물었네
入夜不知晴了未 입야부지청료미 밤들면 혹시나 이 눈이 그칠려나
曉來銀海冷搖光 효래은해랭요광 새벽되면 은빛 바다에 차가운 빛 출렁이겠지
閑寂詩 한적시
夜冷狸奴近 야냉리노근 차가운 밤 고양이는 가까이 붙고
天晴燕子高 천청연자고 맑은 하늘 제비는 높이 나누나
殘年深閉戶 잔년심폐호 남은 해, 깊이 문 닫아 걸고
淸曉獨行庭 청효독행정 맑은 새벽, 홀로 뜰을 걸으리
술(酒)
酒不可一日無 飮不可半盞多
주불가일일무 음불가반잔다
導行和氣滌邪穢 如洗甲兵挽天河
도행화기척사예 여세갑병만천하
或甘於口至於酗 百藥無計痊沈痾
혹감어구지어후 백약무계전심아
仁人義士節以禮 狂夫豪客流失和
인인의사절이예 광부호객유실화
靑山滿座白日靜 門前或値高軒過
청산만좌백일정 문전혹치고헌과
倒屣相迎石投水 捫虱坐談霜磨戈
도사상영석투수 문슬좌담상마과
是誰之力也歟哉 麴生之風兮之麴生薖
시수지력야여재 국생지풍혜지국생과
朝廷燕享天地泰 六合便爲安樂窩
조정연향천지태 육합편위안락와
驅我生靈入壽域 我亦製進南熏歌
구아생령입수역 아역제진남훈가
술은 하루도 없을 수없고
마시면 반잔으로 많다할 수도 없다.
온화한 기운 운행시켜 더러움을 씻어내니
무기를 씻어내려 은하수를 끌어당긴 듯
혹 입에서 달아 주정하기에 이르면
깊은 병 고치기엔 백약이라도 방법이 없다.
인인이나 의로운 선비는 예로써 절제하고
광기 사나이 호걸객은 휩쓸려 중화를 잃네.
푸른 산이 자리 가득하여 대낮이 고요하고
문 앞에는 어쩌다 고귀한 수레가 지나간다.
신을 거꾸로 마중하기 돌을 물에 던지듯 하고
이 잡으며 앉은 좌담도 서리로 칼을 간다.
이것들이 누구의 힘인가
국생의 풍채요 너그러움이다
조정의 잔치나 제사로 하늘땅이 태평하고
육합(六合)의 우주공간이 곧 안락한 집이 된다.
나의 생명 신령을 몰아 수역으로 든다면
나도 역시 남훈가(南熏歌)를 지어 올리리라.
시주가(詩酒歌)
酒不可一日無 詩不可一日輟
주불가일일무 시불가일일철
仁人義士心膽苦 欲寫未寫絶未絶
인인의사심담고 욕사미사절미절
湘魂沈沈水無波 蜀魂磔磔山有月
상혼침침수무파 촉혼책책산유월
手引深盃蒼海飜 口吟長句飛電決
수인심배창해번 구음장구비전결
盡將磊落付雲虛 不向須臾辨生滅
진장뇌락부운허 불향수유변생멸
人間詩酒功第一 多少危時保明哲
인간시주공제일 다소위시보명철
酒有狂詩有魔 禮法不敢煩麾呵
주유광시유마 예법불감번휘가
自述名網卽樂土 江山風月俱婆娑
자술명망즉낙토 강산풍월구파사
술은 하루도 없을 수 없고
시도 하루도 쉬지 못할 것이라네
어진 사람과 의로운 선비란 본래 마음이 괴롭고
시를 쓰려 해도 쓰지 못하고 술을 끊으려도 끊지 못하네
상수에 혼이 잠겨 물결도 일지 않고
촉백이 울 때 산에는 달이 뜬다
손으로 깊은 잔 잡으니 창해가 기울어지는 듯
입으로 긴 글귀 읊으니 번개가 번쩍이는 듯
쾌활한 모든 회포 저 빈 구름에 부치고
잠시동안 죽고 사는 것 상관하지 않는다네.
사람에게는 시와 술의 공이 제일 크니
위태로운 때 몸 지켜준다네
술에는 광이 있고 시에는 마가 있으니
예법이 어찌 감히 번거롭게 하리오
명예를 멀리하면 그게 바로 천국이니
강산의 바람과 달과 함께 이 세상을 살리라
여강미회(驪江迷懷) - 여강에서 정처없는 마음
天地無涯生有涯 천지무애생유애
천지는 끝없고 인생은 유한하니
浩然歸志欲何之 호연귀지욕하지
호연히 돌아갈 마음 어디로 가야하나.
驪江一曲山如畵 려강일곡산여화
여강 한 구비 산은 마치 그림 같아
半似丹靑半似詩 반사단청반사시
반은 그림인 듯 반은 시인 듯하다.
문서택경성(聞西宅經聲) - 서쪽 집에서 들리는 책읽는 소리
深院經聲過短墻 심원경성과단장 심원에서 책읽는 소리 담장 넘어들리니
東隣病客立虛堂 동린병객립허당 동쪽 이웃에 병든 나그네 빈 방에 그냥 서다
氣淸心淨秋來甚 기청심정추래심 화창한 날 맑은 마음이 가을이라 더해지니
始信靈臺卽道場 시신영대즉도량 마음이 바로 도량인 것을 비로소 믿게 된다
漢浦弄月 (한포농월)
日落沙逾白 일락사유백
해 질녁에 모래사장 더욱 희고
雲移水更淸 운이수경청
구름 지나가니 강물이 한결 맑다
高人弄明月 고인농명월
고고한 선비 밝은 달과 노니는데
只欠紫鸞笙 지흠자란생
다만 피리소리 없는 것이 한이다
靈芽茶 (영아차)
同甲老彌親 동갑노미친
靈芽味自眞 영아미자진
淸風生兩腋 청풍생양액
直欲防高人 직욕방고인
동갑되는 늙은이라 더욱 친하여
영아차의 맛은 절로 좋구나
양 겨드랑이에 바람이나니
바로 고상한 사람 찾아뵙고 싶네.
도대체 "영아차"가 어떤 맛이기에 '양쪽 겨드랑이에 맑은 바람 이노니(淸風生兩腋)'라고 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이 시구는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노동(盧同)이 쓴 다시에 '느끼노니 양쪽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솔솔 이네'라는 구절을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의 고전 중의 고전인 노동의 시를 자신의 시에 인용했다는 것은 이색이 절창(絶唱)의 다시들까지도 꿰고 있었던 다인이었음을 추측케 한다.
차인의 삶은 근본적으로 검박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와 지혜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거나 현재 모두 우리의 삶은 그 현상만 달라졌지 그 근본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거니 현재니 하는 시간적인 흐름은 현상을 바꿀 뿐이지 그 근원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차인에게 차는 늘 현실이요,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차의 모양에 따른 분류
① 작설차(雀舌茶) : 새의 혀처럼 생긴 찻잎의 모양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② 용봉단차(龍鳳團茶) : 용과 봉황의 모양에서 유래한다.
③ 자순차(紫荀茶) : 찻잎의 붉은 빛깔에서 유래한다.
④ 유차(乳茶) : 어린 찻잎으로 만들었다.
⑤ 영아차(靈芽茶) : 찻잎의 신령스러움을 나타낸 것이다.
對菊有感 대국유감
人情那似物無情 인정나사물무정
인정이 어찌 무정한 물건과 같겠는가?
觸境年來漸不平 촉경년래점부평
부딪히는 곳마다 점점 불평스럽기만 하네
偶向東籬羞滿面 우향동리수만면
우연히 동쪽 울타리 향해 부끄러움이 얼굴에 가득함은
眞黃花對僞淵明 진황화대위연명
진짜 국화를 가짜 도연명이 마주보고 있는 탓이다.
목은의 작품 / 한산팔영(8경)
목은 이색의 대구(對句)
고려 때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중국에 들어가 과거에 급제했다. 이때 학사 구양현(歐陽玄)이 그를 변방 사람이라 하여 경솔히 여기고 글한 짝을 지어서 조롱하는 것이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왕래하느냐?"(獸蹄鳥迹之道 交於中國)
하자, 목은은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개 짖고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오고 있다."(犬吠鷄鳴之聲 達于四境)
하여 구양현을 놀라게 했다. 짐승의 발자취와 새의 발자취가 어찌 중국에 와서 다니느냐 ? 한 것은 우리를 극도로 멸시하여, 너희들 새나 짐승같은 것들이 어찌 감히 우리 중국 땅을 더럽히느냐 하는 글이다.
그러나 여기에 화답한 목은의 시가 더욱 묘하다.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사방에 들려옵니다. 즉 이것은 우리 조선을 새나 짐승으로 취급한다면 당신네 중국은 역시 개나 닭이지 뭐냐는 기막힌 풍자였다. 구양현은 기이히 여기고 또 글 한 짝을 지었다.
"잔을 가지고 바다에 들어가니, 바다가 큰 줄 알겠도다."(持盃入海 知多海)
하자, 목은은 또 즉석에서,
"우물에 앉아 하늘을 보고, 하늘을 작다고 하는도다."(坐井觀天 曰小天)
하고 회답하니, 구양현은 크게 경탄하여 항복하고 말았다. 이때 목은과 성명이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것을 비유해서 어느 중국 사람이 목은을 조롱하는 말로,
"인상여와 사마상여는 이름은 서로 같으나 성은 서로 같지 않네."(藺相如 司馬相如 名相如 姓不相如)
하자, 목은은 즉시 대답하기를,
"위무기와 장손무기는 옛날에도 꺼릴 것이 없고 지금에도 꺼릴 것이 없네."(魏無忌 長孫無忌 古無忌 今亦無忌)
하였더니, 그 사람은 일어서서 절하면서,
"동방에는 이런 글재주가 있으니 우리가 공경하지 않을 수 없도다."
하고 목은을 자기들의 스승으로 대우했다는 이야기다.
아아! 목은의 이 세 차례의 회답한 글은 다만 대구로서만 용할 뿐이 아니라, 실로 문장과 이치가 모두 구비해서 하늘의 조화로 자연을 이루어놓은 것과 같으니 실로 그는 동파(東坡)나 그밖의 이와 대등한 여러 사람에게 못지 않다 하겠다.
<출처: 순오지>
달관의 경세가 이색
목은 이색은 (1328-1396)은 고려 말엽에서 조선 초기에 걸친 사상적 또는 정치적 전환기에 살았던 당대의 대문호이자 철학사상가였다. 그리고 40여 년을 관직에 몸담아 재상의 영위에까지 이르렀던 정치가이기도 하다. 그의 부친은 가정 이곡으로 익재 이제현과 동시대인으로 역사가이자 이제현으로부터 그 사상적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부친인 가정이 원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종사할 때 조관 자제의 신분으로서 20대 초기에 원의 국자감 생원으로 3년간 재학하였다. 그 후 일시 귀국하였다가 27세 때 다시 원나라에 가서 그 곳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관리로 재직하다가 공민왕 때 돌아왔다.
목은은 원나라에서 수학할 때 이미 유학 일반에 매우 정진하였다. 더욱이 고려에서 단편적으로 소개됐던 성리학을 섭렵하여 그 사상적 인식을 깊게 하였다. 그는 그 때 마음 씀의 중요성에 대하여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
“마음의 쓰임이란 큰 것이다. 한번 그 마음을 정하면 천하에 못할 것이 없다”<목은집>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일갈하였다.
“마음이 밝으면 인심이 화합하게 되고 마음이 그윽하면 영물도 오게 된다”<목은집>
목은은 이에 유학을 진작시키고 특히 성리학의 본격적 교육에 헌신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성균관을 중영시키고 목은을 대사성으로 보임시켰다. 이에 그는 정몽주, 박상충,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삼고 매일 명륜당에서 수업과 토론을 장려하였다.
이처럼 성리학을 체계적으로 교육한 결과, 유풍으로 내려오던 이른바 기송사장, 즉 시문이나 암기하고 읊던 관습은 일소되었고 심신성명의 이를 궁찰하는 사상적 학술 풍토가 조성되었다. 그는 항상 제자들에게 충성과 의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대개 사람을 사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까닭은 충성함과 의리가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 사람이 세상 풍속과 다른 일을 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여도 이 충성과 의가 아니면 귀하게 여길 만한 것이 못 된다. <목은집>
목은의 성리 철학적 견해는 정주자의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인륜과 사회질서의 합리적 제도화, 규범화에로 귀결되고 있다. “덕은 있어도 이름이 나타나지 아니하든가 이름은 있어도 지위가 높지 않거나 하더라도 군자는 결코 근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덕이 나타나지 않거나 그 지위나 이름이 그 실정에 지나치는 것은 군자가 크게 두려워한다”<목은집>
조선 왕조가 건국되면서 이른바 “배불승유”의 정책 아래 성리학을 정치 이데올로기로 내세우면서 이를 통치 강화를 위한 사상적 근거로 삼았다. 이와 같은 사상의 현실적 구현은 목은 사상에서도 저류를 이룬다. 목은은 성리학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심취한 사변가이기보다 고려라는 당시의 국가관에 투철한 관심을 가졌다. 기성 사회의 부조리와 혼란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그는 당시 유학자들에게 각성을 촉구하였다.
“옛날 학자는 성인되기를 뜻했는데 오늘의 학자는 관록에만 마음 쏟고 시서나 읊조리며 궁행의 도에는 길지 못한 한편 문자 기교에나 능할 뿐이다. 장구나 다듬는 데 마음 쏟기 지나치니 성의정심의 노력이 어디 있겠는가. 혹자는 뜻을 바꾸어 붓을 버렸음을 자랑하고 혹자는 늙어도 이룩함이 없다고 잘못했음을 탄식만 한다. 그런 중에 영특 걸출하여 유학의 종사가 되고 국가의 기둥과 초석이 될 자 몇이나 있겠는가!”
목은은 또 당시 불교로 인한 폐혜를 지적하여 언급하였다.
“ 아 태조(왕건)가 나라를 세운 후 사찰에 민간인이 섞여 살던 것이 매우 무질서하니 중엽 이후로 그 무리가 더욱 많아졌다. 오교양종의 모든 수도장이 사리사욕의 소굴로 변해 버리고 개울가나 산기슭에 절 없는 곳이 없게 되었으니 승려들이 비루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놀고먹는 백성이 또한 많아져 식자로서 가슴 아픈 일이다.”
따라서 목은은 승려를 정리하여 인원을 제한하고 사찰 신축을 금지 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지방 토호의 전지 겸병을 반대하였으며, 하나의 토지 주인이 7,8인이나 되는 현상에서 부모와 자식을 부양할 수 없고 세금조차 낼 수 없는 농민 실정을 통탄했다. 따라서 전지의 구획을 재정리하여 지주의 농지 침탈을 금하고 농민 보호에 힘쓸 것을 역설하였다.
그러나 목은의 이 같은 전제개혁론은 당시 조준과 정도전 등의 급진적인 개혁파의 주장에는 반대되어, 이들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보수파 내지는 당시 토호 계층의 대변자라는 혐의를 받게 되었다. 목은은 구법을 일소하고 종래의 토호와 농민의 사회적 계층을 일괄적으로 해체시키는 개혁에는 반대했던 것이다.
후일 목은을 가리켜 이른바“ 여말 3은”의 으뜸이라고 평가하거니와 이는 바로 성리학 사상을 경국치세의 실천적 문제와 연결시켜 유가적 사회국가를 구현시키려 했던 구세의 정신과 행적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려사 열전>의 <이색전>에는 그런 목은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국가가 무사 할 때에는 공경의 말이라도 홍모보다 가벼이 여길 수 있고 국가가 유사한 때를 당한 뒤에는 필부의 말이라도 태산보다 중하다 하였다”
출처: <한국인물사>, 이현희 지음
목은 이색(李穡) 기념관
(영덕군 영해면 괴시마을)

기념관 내부 모습




기념관 외부 팔각정

이색선생 유허비각 내부

유허비각 외부

이색선생 상

<사진자료: 문화관광해설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