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風雲의 옥돌
風雲의 옥돌 서문
우리 인류역사상 전무후무했던 가장 값진 보물 화씨지벽(和氏之璧)에 대한 이야기다.
이 천하의 보물 화씨벽옥(和氏璧玉)은 훗날 < 완벽(完璧)은 없다 > 라는 명언을 창출해 내며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야기의 전개를 쉽게 하고자 천하 모든 제후(諸侯)들의 호칭을 왕(王)으로 한다, 이는 이미 초(楚)나라가 천자의 윤허도 없이
왕호(王號)를 쓰고 있는데 그보다 더 큰 나라들의 임금을 공(公)이라 칭한다면 이해가 힘든분들은 헷갈릴수도 있거 니와
나아가 공평치못한 호칭 아니겠는가 ?
다만,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종주국 주(周)나라만이 왕호(王號)를 썼고 그 주나라가 봉한 열국(列國)의 제후국
(諸侯國)들은 공호(公號)를 써서 주나라와 군신관계(君臣關係)였슴을 아울러 밝히고 주나라 임금을 천자(天子)라 했으며
그때
까지만 해도 황제(皇帝)란 호칭은 없었다. 훗날에 진나라 시황제(始皇帝)가 황제호칭의 시원이된다.
따라서 제후국들은 왕이라 했지만 감히 천자라 하진 못했다. 이점을 미리 밝혀 이해를 돕고져 함이다.
화씨벽옥(和氏璧玉)은 야광지벽(夜光之璧:밤에도 빛나는 옥)으로도 유명한데 여기서 벽(璧)이라 함은 둥글고 넓적하며
가운데 구멍을 낸 옥이란 뜻이다. 여기서 벽(璧)자는 가문데 구멍이 뚫린 넓적한 옥돌이란 글자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겨울에는 화로보다 따뜻하고 여름에는 부채질 보다 시원했으며 벌레들도 퇴치했다 한다.
이 화씨(和氏)의 옥이 세상에 출현하게 된 동기와 그 역사를 간추려 보면 대략 이렇다.
대개 어느 역사적 사실들이 단편적으로만 흩어져 이따금 역사나 소설 따위의 한 장면을 이루기는 하지만 그 처음과 끝
을 꿰뚫어 한목에 알아볼수 있도록 설명한 자료가 하나도 없었기에 이참에 그 화씨벽의 일대기와 그 화씨의 옥으로 인하
여 벌어지는 사건과 전쟁, 영웅호걸들의 이야기를 엮어보기로 했다.
물론 이책 저책에서 뽑아내고 인터넷에서도 간추려야 가능한 일이지만 그것도 쉬운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인터넷에 올라있는 블로그, 카페등 여러곳에 올라있는 정보들이 엉터리가 수두룩 하기때문이다.
인터넷 정보 ... 열중 아홉이 올린이의 영웅심에 아는척 자랑하는 마음으로 올린 내용이 너무나 많아 사람의 이름,지명,
시의내용 등등 헤아릴수없이 많은 틀린 엉터리 내용들이 범람하는 시대에 와 있기때문이다.
천하보물 화씨벽옥(和氏璧玉)의 등장
변화(卞和)라고 하는 사람에 의해 발견된 옥돌이 초왕(楚王)에게 들어갔고 뒤이어 조(趙)나라의 국보가 된 후 진(秦)나라
의 탐내는바 되었던바 그 이후 또 우여곡절 끝에 진,한(秦,漢)나라 전국옥새가 되었으며 한나라 말기 손견과 원술의 손에까지
들어갔던 옥새의 운명.... 천하 영웅들이 다투었던 그 옥의 역사를 열어보자는 이야기다.
참고로 전국옥새(傳國玉璽)라 함은 나라를 이어가는 왕의 상징, 나라의 도장이란 뜻이니 이로부터 옥새가 나라를 상징하
는 의미가 두드러져 고금의 역사에 그 의미가 깊어지게된 시원(始原)이 되었다.
변화(卞和기원전 320년경)는 초나라 형산(荊山 ↔ 오악중 하나인 衡山이 아님)에 사는 이름없는 옥공(玉工)이었다.
다시 말해 이 형산(荊山)은 오늘날의 황하(黃河)의 중하류 지역에 있는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산이고 그 지역이 당시
초(楚)나라의 강역에 해당했다.
그가 옥을 감정하는 사람으로서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슴은 때와 사람을 만나지 못했슴과 아울러 제대로 된 옥을 만나지
못했슴에 연유할뿐이지 결코 재주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날 변화는 형산에서 봉황(鳳凰)이 바위에 깃드는걸 발견하고 틀림없이 그 돌속에는 천하에 진귀한 보물이 있
슴을 알아차리고 그 바위를 깨어 드디어 박옥<璞玉 :사람의 머리보다 더 큰 옥돌의 원석(原石)>을 구해 초려왕(楚厲王)에게 바쳤다.
여기서 한가지 덧붙일 설명이 비록 봉황(鳳凰)이 전설속의 새이나 그 봉황은 벽오동(碧梧桐)나무에만 깃들며 오동나무 열매만
먹는다 했으며 봉황이 내려앉는 자리는 모두가 상서로운곳이라 했다. 물론 이것도 다 전해오는 말이다.
초려왕(楚厲王)은 그 박옥을 궁중의 이름있는 옥공에게 감정을 하도록 명한결과 그 돌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석
(雜石)이라 복명했다. 옥공은 그 신령스런 보물을 알아보지 못했던것이다.
이에 크게 격노한 초려왕은 하찮고 천박한 백성이 감히 군왕(君王)을 기만(欺瞞)한 죄를 용서할수없다 하여 변화에게
월형(刖刑:발꿈치를 잘라내는 형벌)을 가해 왼쪽발을 잘랐다.
과연 변화가 임금을 속이고 기만하였다면 응당 목을 잘라도 마땅한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이후 초려왕이 강대국 제나라에 잡혀가 세상을 떠나고 뒤를이어 초려왕의 동생 초무왕(楚武王)이 등극하자
또 다시 변화는 발을 절뚝거리며 그 옥돌을 들고가 초무왕(楚武王)께 바쳤다.
무왕이 당신의 형이 그랬던것처럼 옥공을 불러 감정을 시킨결과 역시 이번에도 옥공들은 그 옥돌의 진면목을 알아보지
못하고 잡석판정을 내렸고 이에 분기탱천(憤氣撐天)한 무왕역시 임금을 속인죄 용서할 수 없다하여 변화의 나머지 오른
발 발꿈치를 잘라내는 형벌을 가했다.
이로써 변화(卞和)는 마침내 걸을 수 없는 다리병신이 되어 형산에서 박옥을 품에 안고 사흘낮밤을 슬피 울었다.
나중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마르고 피가 흘렀다.세상과 역사는 이를 일컬어 화씨지혈읍(和氏之血泣)이라 했다.
사람들이 변화에게 『당신은 그 옥을 바친 죄로 다리가 잘려 슬피우는가, 아니면 큰 상을 타지 못해서인가 』라고 묻자
변화는 오로지『내 월형을 당해서 우는게 아니요,옳은걸 옳게 보지 않고 보옥을 돌이라 하여 참된자의 올바른 말을 거짓
으로 알고 우롱하는것이 원통해서 슬퍼하는것이요』했다.
천하보물의 행보
이즈음 초무왕(楚武王)은 나라에 반란이 일어나 죽고 그의 아들이 등극하니 그가 바로 초문왕(楚文王)이었다. 문왕이
형산 밑에서 변화가 밤낮없이 돌을 안고 운다는 이야길 들었다. 참으로 괴이하고 알수없는 일이로다 !
초문왕(楚文王)은 그 즉시 변화를 데려오게 한 다음 필시 이는 곡절이 있을듯하여 그 돌을 옥공에게 주어 정교하게
다듬게 하였다. 그러자 그 보잘것없어 보이던 돌이 드디어 그 존귀(尊貴)함을 천하에 드러내게 된다.
너무나도 은은하게 희고 광채를 내는 가운데 서늘한 기운을 발하는 그옥돌은 만물의 기이한 이치를 품은듯 했다.
이에 초문왕은 둥근 고리옥으로 다듬게 하고 그 가운데 구멍을 내고는 화씨지벽(和氏之璧)이라 명명했다.
양양부(襄陽府)의 남장현(南漳縣) 형산(荊山) 위에 연못이 있고 바로 그 곁에 석실(石室)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석
실이
있는 바위를 포옥암(抱玉巖)이라 한다. 이곳이 변화가 옥돌을 품에안고 울며 살았던곳이다.
물론 초문왕(楚文王)은 변화에게 감동하여 큰 상을 내리고 평생을 대부(大夫)의 국록을 받게했다.
주로 공경대부(公卿大夫)라 함은 공은 3공(三公) 다음이 6경(六卿) 그다음이 대부인데 대부정도면 군수급 이상으로 추정
된다.
천하의 명주(名珠) 화씨벽옥(和氏璧玉)은
추운 겨울엔 화로보다 따뜻하고
더운 여름엔 부채질 보다 시원했으며
서늘한 기운에 파리와 모기를 쫒았고
밤엔 야광(夜光)을 발산했다.
여기서 우리가 간혹 천자문(千字文)을 읽다보면 주칭야광(珠稱夜光)이란 구절은 바로 이 벽옥을 말함인데 아다싶이 천자
문은 천년을 이어온 단 한자도 중복없는 동양의 한자교본(漢字敎本) 아니던가 ? 그토록 이 화씨지벽은 유명했던것이다.
그러고는 우여곡절 끝에 이 보물은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 들어가게 되는데 그 과정이 참으로 기가막히다.
이 화씨벽옥은 값으로 따질수없을만큼 진귀한 천하의 보배였다.
원래 왕조시대에는 값으로 따질수없고 구할 수 없이 진귀한 물건은 왕이 아닌 다른 사람이 가질수 없었고 가져서도 아니
된다.
가졌거든 임금에게 바쳐야 옳고 임금이 주었다면 목숨을 다해서라도 그것을 보전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아니면, 죽음밖엔 돌아올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하기야 왕은 자신뿐만 아니라 온 일족의 목숨을 걸고 나라를 창업하니
안되면 몰살이요 잘되면 대를이어 왕이되니 얼컬어 나랏님이라 한것은 온 천하 억조창생(億兆蒼生)의 생사여탈(生死與奪)
권을 한손에 쥐고있는 지존(至尊)이라 심지어 신하의 아내라도 달라면 주어야 했던 시대였다. 그게 고대사의 진면목이다.
얼마후 초나라는 임금이 바뀌어 초위왕(楚威王)이 등극했는데 정승 소양(昭陽)이 위나라를 쳐서 이기자 그 공로로 화씨의
옥을 하사했다. 소양은 출타할 때도 항상 화씨의 옥을 가지고 다니며 잠시도 떼어놓지 않았다.
종적을 감추어 버린 화씨벽옥
어느날 소양은 적산(赤山)이란곳에 놀러갔는데 그를 따라간 빈객(賓客)과 수행원만 해도 100명이 넘었다.
그 적산 아래에는 깊은 못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 옛날 강태공이 낚시질을 하던곳이라 하는데 그 못가에 아름답게 지어진 높은
누각이 있었다.
참고로 강태공(姜太公)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을 도와 은(殷)나라 폭군 주왕(紂王)을 쳐 멸망시킨 공신으로 주나라로
부터 제(齊:산동일대)나라 임금에 봉해진 인물이다. 그는 주나라 문왕(文王)의 사부이기도 했다.
여기서 姜太公이란 주문왕(周文王)의 조부(祖父)인 태공(太公)이 기다리던 현인(賢人)이 강상(姜尙:본명)이었슴에 망(望)자를 붙여 태공망(太公望)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그의 낚시에 얽힌 고사는 근래 낚시광들의 대명사가 되었다.
소양 일행은 바로 그 정자에서 음악과 춤을 즐기며 술을 마셨고 모두가 얼근히 취했을때 빈객들이 소양에게 그 화씨의
벽옥을 보여달라고 청을 하니 소양이 수하를 시켜 화씨의 옥을 가져오게 했다.
이윽고 정승의 수레에서 칠(漆)이된 상자를 가져와 열고 옥을 꺼내니 지극히 순수한 옥빛이 구경하는 모든사람들의 얼굴을 곱게
비추자 사방에서 감격과 경탄의 신음소리가 끓일줄 몰랐다. 이때 바로 못에서 1장(丈;약 3m) 남짓한 거대한 물고기가 뛰어
올라 요동을 치니 덩달아 다른 물고기들도 뛰어올랐다. 이 기이한 물고기들의 물위로 뛰어 오르는 모습에 모든 사람들이 신기
한듯 바라보고 있었다. 뒤이어 갑자기 동북쪽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오더니 댓줄기 같은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양 일행은 황급히 돌아갈 채비를 하는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화씨의 옥이 감쪽같이 사라진것이었다.
모두가 못에서 뛰어오르는 거대한 물고기떼의 솟구치는 모습을 보고있을때 그 순간에 없어진것이었다.
(일설에는 그 못의 물고기 화신이 가져갔다고 하는데 그 진실은 알수없다.)
아무리 찾아도 뒤져도 나오질않자 정승 소양은 화씨의 옥을 잃어버린체 부중(府中:정승의 집무실)으로 돌아갔다.
소양(昭陽)이 모든 문객들에게 분부하길 풀을 헤치고 돌을 들쳐서라도 찾아내라 , 하여 법석을 떨고 찾았지만 좀체로
화씨옥을 찾아낼 길이 없었다. 이때 한 문객이 소양에게 고한다.
그날 적산(赤山)에 갔던 사람들중에는 그런 나쁜 짓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장의(張儀) 한 사람뿐일것입니다.
그는 매우 가난하므로 가난하면 못할 짓이 없는게 고금의 이치 아니겟사옵니까.
여기서 잠깐 장의(張儀)에 대한 설명을 해야겠다.
춘추(春秋)에 전하기를 귀곡자(鬼谷子) 귀곡선생(鬼谷先生) 문하(門下)에서 유명한 4명의 역사적 인물이 배출된다.
손빈과 방연(孫臏,龐涓)이 그 문하에서 주로 병법(兵法)을 동문수학한 의형제이나 악독한 방연에 의해 형제의 의는 깨어지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손빈이 제나라의 전략가가 되어 위나라의 대장군 방연을 죽이는 대목은 열국지의 백미에 해당한다. 그 손빈이 바로 저 유명한 오(吳)나라에서 명성떨친 병가(兵家) 손무(孫武)의 손자였다.
또한 말 잘하고 유세에 능통한 두사람을 배출하니 그들이 바로 소진과 장의였다. 합종연횡책은 바로 그들이 시원이다.
소진(蘇秦)은 역시 귀곡선생(鬼谷先生) 문하로 합종책(合從策)의 주창자로서 강대한 진(秦)나라에 맞서 싸우고자 약한 천하 6국(韓,魏,趙,燕,齊,楚)이 동맹을 맺도록 주장하여 육국의 정승이 된다. 이것이 합종책(合從策)이요
장의(張儀)는 그와 반대로 연횡책(連橫策)을 주장하며 강한 진(秦)나라에 대항할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나라에 우호를 맺어 안전을 도모하는것이 상책이다 라며 소진이 애써 만들어 놓은 6국의 맹약을 일일이 다니면서 와해시키고 각나라들이
개별적으로 진나라와 우호를 맺도록 한 다음에 차례차례 한 나라씩 멸망시켜 갔다. 그 주인공이 훗날의 진시황이다.
아무튼 소진과 장의 역시 동문수학한 친구들이지만 장의의 인간답지 못함이 이와같았다. 합종연횡,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건 다 훗날의 이야기다.
소양은 즉시 장의를 잡아들여 화씨의 옥을 내놓으라고 욱박질렀지만 가져가지도 않은 옥이 장의에게 있을리 만무했다.
장의는 한사코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지만 소양은 저놈이 바른말을 할 때까지 매질을 하라 명하여 곤장 수백대를 치니
장의는 매를 이기지못하고 기절하고 말았다. 장의가 거의 죽음에 이르게 될즈음 매질을 중지시켰고 끌어내다 버려진
장의를 그의 친구가 업어다 장의의 집에다 누이니 그날 밤에서야 겨우 깨어났다.
장의의 아내가 터지고 찟어진 살점과 부러진 뼈로 인해 피범벅이 된 장의를 향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길
당신이 오늘날 이렇듯 곤욕을 당하게 된것은 그저 책만 읽으면서 그 빌어먹을 유세술(遊說術)인지 뭔지를 공부한때문이요, 일찌감치 시골구석에 들어앉아 편안히 농사나 지었더라면 어찌 이런 꼴을 당했으리요 ! 하며 책을 안아다 불질러 버리자 했다.
그러자 장의가 움직일수 없는 몸으로 입을 간신히 열며 말하기를 여보부인 ~ 내 혀가 아직 있소 ? 없소 ?
장의가 하는꼴이 하도 우수워서 그의 아내가 빈정대며 답하기를 ~ 아직 있긴 있네요 ...
그러자 장의가 엄숙한 표정으로 ~ 혀는 나의 모든 밑천이요 혀만 살아있어 말을 할 수 있다면 무엇을 근심하겠소 ?
그로부터 몇달이 지나자 장의(張儀)는 완쾌되었고 이 한많은 초(楚)나라를 떠나갔다.
초나라가 장의에게 가한 그 혹독한 매질, 그 결과는 훗날에 장의가 진나라의 실력자가 되어 되갚는 보복의 역사가 펼쳐진다.
화씨지벽(和氏之璧) 조나라 보물이 되다.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에게는 믿고 총애하는 내시(內侍) 한사람이 있었으니 이름을 무현(繆賢)이라 했다.
내시중의 으뜸벼슬인 환자령(宦者令)에 있었던바 늘 왕의 총애를 받는지라 모든 정사(政事)에 간섭했고 그로 인하여
그의 세력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한 그에게도 적지않은 사람들이 줄을 대려했고 사귀고져 했다.
그러던 어느날 어떤 나그네가 무현을 찾아와 하나의 백옥(白玉)을 내놓고 말한다. 이 옥을 사십시요 팔려고 왔습니다.
무현은 백옥의 빛이 맑고 윤이 나서 비할바없이 곱기에 500금을 주고 사게되었고 옥공을 불러 그 옥을 감정시켰다.
옥공이 백옥을 보고 깜짝 놀라며 이게 어디서 났습니까 ? 이 옥은 바로 저 유명한 화씨(和氏)의 옥입니다.
옛날에 초나라 정승 소양(昭陽)이 잔치 자리에서 장의(張儀)를 의심한것은 바로 이 옥을 잃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일로 인하며 장의는 죽도록 매를 맞고 진(秦)나라로 갔고 소양은 천금을 내걸고 이 옥을 찾았으나 끝내 못찾았습니다.
그러한 옥이 이제 대감의 손에 들어왔으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옵니다. 천하의 보물이니 함부로 남에게 내 보이지 말것이며 깊이 감추어 두소서 했다.
무현이 묻기를 이 옥이 아무리 좋다기로서니 어찌 천하의 보물이라 하는가 ? 이에 옥공이 답하기를
이 옥은 어두운곳에 있을수록 더욱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절대 먼지가 끼지 않으며 모든 재앙(災殃)을 막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옥은 겨울이면 화로보다 따뜻하고 여름이면 서늘해서 파리와 모기가 가까이 오지않습니다.
이에 무현이 시험해본즉 과연 옥공의 말이 틀림없었다. 하여 무현은 보물상자 속에 화씨의 옥을 넣고 깊이 간직하였다.
그러나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가는법, 어떤자가 이 사실을 조혜문왕(趙惠文王)에게 알렸다.
그 옛날에는 천하의 보배, 값을 메길수없는 진귀한 물건은 왕이 아니고서는 가져서도 안되고 가졌으면 왕께 바쳐야 하는
시대였다. 다만 왕이 신하에게 하사한 경우를 빼고 말이다.
어느날 혜문왕이 무현에게 그대가 화씨의 옥을 구했다던데 과인에게 한번 보여주기 바라노라 ! 하니
무현이 시침을 딱 떼며 누가 그런 말씀을 아룄는지 모르오나 신에게 어찌 화씨의 옥이 있겠사옵니까 ? 없사옵니다. 했다.
혜문왕은 무현의 거짓말이 괘씸했으나 더이상 묻지 않았다.
어느날 무현이 먼 곳으로 사냥을 나간사이 혜문왕이 친히 군사들을 이끌고 무현의 집으로 가 샅샅이 뒤져 화씨의 옥을 찾아 궁으로 돌아갔다. 사냥에서 돌아온 무현이 이 사실을 알고 크게 놀랐다. ... 이거 야단났군 ~ 살아남기 어렵겠어 ....
필경 왕을 속이고 거짓을 아뢴죄로 왕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 ~ 앉아서 죽느니 어디로든 달아나자 !
마음을 굳힌 무현은 하루빨리 달아날 채비를 서두는데 누군가 무현의 소매를 잡고 어딜 간다고 이 야단이십니까 ?
하는데 그는 다름아닌 무현의 집안일을 맡아보는 인상여(藺相如)란 사람이었다.
여기에 있다간 왕에게 죽음을 당하게 되오 나는 연(燕)나라로 달아날 작정이요.
이에 인상여가 묻기를 과연 연나라가 대감을 용납하겠사옵니까 ? 그것도 모르면서 경솔히 가시면 안됩니다.
무현이 과거에 왕을 모시고 연나라왕과 국경지대에서 만난적이 있는데 그때 연왕(燕王)이 내게 사귀고싶단 말을 했으니
아마 내가 그리로 가면 괄시하진 않을것이요. 한다.
대감은 잘못 생각하신겁니다. 우리 조나라는 강하고 연나라는 약합니다. 그런 조왕의 총애를 받고있는 대감을 사귀어 조왕의 환심을 사려고 한것이지 어찌 일국의 군주가 사사롭게 대감과 세교를 갖고져 함이 진실이라 믿사옵니까 ?
그런데 이제 대감이 조왕(趙王)에게 죄를 짓고서 연나라로 가면 연왕(燕王)은 조나라가 두려운 나머지 대감을 잡아 보내고 조왕의 환심을 사려 할것입니다. 그리되면 대감의 생사는 그야말로 위태하기 짝이없게 되옵니다.
그럼 이 일을 어이하면 좋겠소 ?
대감이 진 죄라야 과히 크진 않습니다, 다만 화씨의 옥을 속히 바치지 못했다는 것뿐입니다.
그러니 대감은 곧 궁문(宮門)앞에 나아가 웃옷을 벗고 부질(斧鑕:죄인 죽일때 쓰는 도끼와 쇠받침)을 짋어지고 석고대죄
(席藁待罪) 하십시요, 그러고 간곡히 머리를 조아리며 벌을 청하십시요 그러면 아무일 없을것이옵니다. 한다.
무현(繆賢)은 인상여(藺相如)의 계책대로 궁문에 나아가 죄를 청한결과 혜문왕은 무현을 죽이지 않고 용서해 주었다.
2.진(秦)나라, 조(趙)나라의 화씨벽옥을 탐내다.
이미 화씨벽옥이 조나라에 들어가 조나라의 국보가 되었다고 앞서 설명한바 있다. 그렇게 몇년이 흘렀다.
그 조(趙)나라 혜문왕(惠文王 16년)때의 일이다.사기열전(史記列傳) 염파. 인상여열전(廉頗. 藺相如列傳)에 이렇게 전한다.
염파((廉頗)는 조나라의 장군이 되어 제(齊)나라를 쳐 크게 무찌르고 양진(陽晉)을 함락시켰다.
그는 그 공로로 상경(上卿)벼슬에 올랐고 천하명장(天下名將)으로 제후(諸侯)들 사이에서 명망이 높았다.
이즈음 같은 조(趙)나라에 인상여(藺相如)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환자령(宦者令) 무현(繆賢)의 부하였다.
조혜문왕이 초(楚)나라로 부터 들어온 화씨벽옥을 무현에게서 얻어 가지고 있었는데 서쪽의 강대한 진(秦)나라 소왕
(昭王)이 이 사실을 알고 사신에게 서간(書簡:편지)를 보내 그 보물을 달라하였는데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 청하건대 진나라의 유양땅 15개 성읍과 그 화씨벽을 바꾸기를 원하옵니다 』했다.
조혜문왕은 대장군 염파와 뭇 신하들을 모아놓고 상의했으나 결국 진나라에 화씨벽을 주더라도 15성을 얻을수 없고 그저
속을것만 뻔하고 그렇다고 주지 않으면 진나라의 공격을 받을것만 걱정이 되어 좀체로 회의의 결말이 나지않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일을 맡아 진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가 제대로 외교를 펼칠만한 인재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환자령(宦者令)무현(繆賢)이 이르기를
『 신의 수하중에 인상여(藺相如)란 사람이 있는데 그라면 능히 이 일을 맡을만 하옵니다.』한다.
그러자 왕이 그 연유를 물으니 무현이 대답해 가로대 (繆賢→列國志, 穆賢→史記列傳) - 강촌은 무현으로 표기 -
신(臣)이 일찌기 죄를 범하여 몰래 연(燕)나라로 달아나려 했를때(화씨벽옥을 감추고 있던죄) 신의 부하 인상여(藺相如)의 계책대로 대왕께 죄를 청하였던바 왕께서 송구스럽게도 신을 용서해 주셨사옵기 오늘에 이르렀사옵니다. 신은 그 이후 그가 용기있고 지모(智謀)가 뛰어난 사람이란걸 알게 되었나이다.
그리하여 조혜문왕은 인상여를 불러 묻기를 진(秦)나라 왕은 15성을 가지고 나의 화씨벽과 바꾸자는데 벽(璧)을 주어야 하는가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인상여는 진나라는 강대하고 우리 조나라는 약소합니다. 주지 않을수 없사옵니다.했다.
화씨벽(和氏璧)만 받고 성을 내주지 않으면 어찌 하는고 ?
진나라가 성읍(城邑)을 주겠다는 조건으로 벽옥을 달라는데 조나라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 잘못은 조나라에 있사옵고
또 조나라가 벽옥을 주었는데도 진나라가 성읍을 주지않는다면 그 잘못은 진나라에 있사옵니다.
이 두 계책을 비교해 보면 역시 들어 줌으로써 잘못을 진나라에 돌리는것이 합당하다 사료되옵니다.
하면. 그 사자(使者)로서 합당한 인물이 누구겠소 ?
이에 인상여는 머리를 조아리며 대왕께 적임자가 없으시오면 신으로 하여금 벽옥을 가지고 진나라로 갈수 있도록 하여
주시오소서!
만약 약속대로 15개 성읍을 주면 벽옥을 진나라에 줄것이오나 성읍이 수중에 들어오지 않을때에는 신은 벽옥을 완전하게
조나라로 돌아오도록 하겠나이다.
이리하여 인상여는 벽옥을 받들고 서쪽 진나라로 들어갔고 진나라 왕은 장대(章臺)에 앉아 신하들과 인상여를 접견했다.
인상여가 벽옥을 진소왕에게 올리니 진왕은 크게 기뻐하며 벽옥을 돌려가며 좌우의 시신(侍臣)들에게 보였다.
좌우의 시신들은 모두 만세를 불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진왕은 그 화씨벽을 내궁의 궁녀들에게까지 보내 돌려보게 한
다음 다시 가져오게 하였다. 이에 인상여는 진왕이 성읍을 내줄 의사가 없슴을 간파하고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대왕이시여 ! 그 옥에는 흠이 있나이다. 그것을 신이 대왕께 보여 드리겠나이다. < 여기서 완벽(完璧)은 없다 > 고사가 유래
진왕이 벽옥을 인상여에게 주는순간 상여는 그 벽옥을 머리위로 들고 기둥에 기대어 섰는데 머리털이 곤두서 머리에 쓴 관(冠:모자)
을 밀어올릴정도로 성난 얼굴로 이렇게 말하였다.
일찌기 대왕께서 조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나라의 벽옥과 진나라 15개 성읍을 바꾸자 하였을때 조나라 조정은 군신(君臣)이 모두
모여 상의 하기를 진나라는 저네들의 강대함만 믿고 벽옥만 받고 성읍은 아니줄것이 뻔하므로 불응하는것이 타당하다고
결정 했을때
그러나 신만은 무의무관(無意無官)의 필부(匹夫)의 사귐에서도 서로 속이지 않거늘 하물며 큰 나라간의 외교에 있어서이겠습니까 ?
그래서 조나라 왕께서는 5일간 목요재계 하신후 이 벽옥을 신에게 주시어 대국(大國)의 대왕께 전하라 하시었나이다.
그러 함에도 불구하고 신이 이제와 보니 대왕께서는 신을 빈객으로 대우하지 않고 뭇 신하들과 더불어 신을 접견 하시니 이는 타국의
사신에 대한 예가 아니오며 또 천하의 보물 벽옥을 하찮은 궁녀들에게까지 돌려보게 하여 신을 희롱 했사옵니다.
이 몇가지만 보아도 대왕께서는 벽옥만 받고 성읍을 내어주시지 않을 생각임을 알겠습니다.
그래서 신은 거짓으로 이 벽옥에 티가있다 하여 돌려받은것이옵니다. 물론 대왕께서 힘으로 이 보물을 빼앗고자 하실지
모르오나 그러나 신은 이 옥을 산산조각으로 깨어버리고 이 기둥에 머리를 짓찧어 죽을지언정 결코 대왕께 이 옥을 넘겨주지 않을것입니다. 인상여는 그즉시 기둥을 향해 옥을 던질자세를 취했다.
진소왕은 인상여가 죽는것 보다 옥이 상할까 겁이나서 대부(大夫)는 잠깐 기다리오 과인이 어찌 조나라에 신의를 잃을 짓을 하리요 ! 하면서 곧 지도를 가져오라 명하여 유양땅 성읍 15군데를 일일이 지적하며 조나라에 어김없이 주어라 ! 한다
그러나 인상여는 이 역시 속임수라 간파하고 우리 조나라 왕께서 5일간 목욕재계 하시고 이 보물을 전했듯이 대왕께서도 마땅히 닷새간 목욕재계하시고 좌우에 수레와 모든 문물(文物)을 펴서 예의를 갖추시옵소서 그러면 그때 신이 이 보물을 바치겠나이다. 했다.
그리하여 진소왕(秦昭王)은 닷새간 목욕재계 할 것을 약속하고 인상여(藺相如)를 공관에 나가 쉬도록 했다.
인상여는 공관으로 나와 즉시 그의 수하를 거지차림으로 변복시키고 화씨벽옥과 한통의 서찰을 내어주며 이르기를 그대는 이 보물을 가지고 지름길로 달려가 조왕께 전하여라 나는 여기서 죽기를 원하노라 ! 했다.
물론 화씨벽옥(和氏璧玉)은 안전하게 조나라 혜문왕에게 돌아갔고 인상여의 서찰을 읽게되었다, 거기에 하였으되.
『 신 인상여는 진왕이 성읍 열다섯을 내줄 의사여부를 알수없나이다. 하여 우선 화씨옥을 돌려보내옵니다.장차 신이
진나라에서 죽을지언정 결코 조나라의 위신을 손상시키지 않겠나이다 .』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은 감탄을 거듭하며 과연 인상여는 천하의 용기있는 선비요 충신이로다 ! 했다.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물론 진소왕(秦昭王)은 목욕재계도 아니하고 경건한 마음도 없이 정전(正殿)에 높이앉아 좌우에
예물(禮物)을 가득 늘어놓고 모든나라 사신들까지 청해들이고는 자신이 화씨옥을 받는 모습을 보게하여 천하열국(天下列國)에 진나라를 과시할 작정이었다.
이때 인상여가 조용히 들어와 진왕께 두번 절하는데 손에는 아무것도 든게 없다. 진왕이 인상여를 굽어보며 묻는다.
과인은 대부(大夫)의 요청대로 닷새간 목욕재계하고 예를 갖추었는데 어찌 화씨의 옥을 가져오지 않았는가 ?
이에 인상여는 추호도 흔들림없이 또랑또랑한 어조로 아뢴다. 대왕이시여 이 외신(外臣)의 말씀을 들어 보소서 !
진(秦)나라는 진목공(秦穆公) 이후로 20여대가 지났으나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속임수만 써왔습니다. 들어 보소서 !
기자(杞子)는 정(鄭)나라를 속였고 맹명(孟明)은 진(晉)나라를 속였으며 근자엔 상앙(商鞅)이 위(魏)나라를 속였고
장의(張儀)는 초(楚)나라를 속였사옵니다. 이렇듯 진(秦)나라의 역사가 매사 속임수 아니면 배신의 역사이온데 이제 또
신(臣)이 대왕께 속는다면 신은 우리 조나라를 져버리는 결과라 판단하고 이미 그 옥을 조나라로 돌려 보냈나이다.
그러니 이제 신을 죽여 주시오소서 !
이에 대로(大怒)한 진왕이 좌우의 무사들을 꾸짖어 어서 저 조나라 사신을 결박하여라 ! 하니
무사들이 달려들어 인상여를 묶어 꿇렸다. 그러나 인상여는 낮빛하나 변하지않고 태연히 아뢴다.
대왕이시여 ! 신의 말씀을 들어 보소서 !
오늘날의 형세로 말할것 같으면 진(秦)나라는 강하고 우리 조(趙)나라는 약합니다.
그런 연유로 진나라가 우리 조나라를 배신하면 했지 어찌 약한 조나라가 진나라를 배신할리 있겠사옵니까 ?
그토록 대왕께서 화씨의 옥을 갖고져 원하신다면 먼저 우리 조나라에 유양땅 15개 성읍을 주시오소서 ! 관리 한사람만 보내면 되는 일이옵니다. 그리하면 우리 조나라는 틀림없이 그 화씨옥을 보낼것이옵니다.
그러고도 아니된다면 강대한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조나라를 친대도 천하 어느누구도 진나라의 잘못이 아님을 알것이옵니다.
이제 신은 감히 대왕을 속인죄 살아날수 없슴을 아옵니다, 하여 신은 이미 조나라 임금께 소신이 살아가기 어려움을 서찰로 통지하였나이다. 대왕께선 어서 신을 끓는 가마솥에 넣어 죽이시기 바라나이다.
지금 이자리엔 천하 모든나라의 사신들이 보고있나이다. 진나라가 화씨의 옥을 탐내어 조나라 사신을 죽였다는 소문이 머잖아 모든 나라에 퍼질것입니다. 누가 옳고 그른가는 신이 죽은 후에 밝혀질것이오니 어서 형을 행하도록 명하소서 !
정전(正殿)안은 삽시간에 찬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진소왕(秦昭王)은 모든 신하와 얼굴만 마주볼뿐 말이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각국의 사신들은 인상여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슴을 감지하고 일제히 진왕께 사정했다.
『 조나라 사신 인상여를 살려주기 바라오 』
이에 진소왕이 씩 웃으면서 신하에게 분부하기를 조나라 사신을 죽여도 화씨옥을 얻지 못할바에는 공연히 좋지못한
소문만 퍼뜨릴것이니 차라리 저자를 살려보내고 우리 진나라와 조나라가 우의를 다지는것이 나으리라 !
이리하여 인상여(藺相如)는 살아서 조나라로 돌아갔다. 염옹이 이 대목을 시로읊은 내용이 있으나 생략한다.
나라의 위신을 세우고 임금의 근심을 한몸, 세치의 혀로써 깨끗히 해결하고 돌아온 인상여(藺相如)는 그야말로 화씨의
옥 보다도 귀한 나라의 보배라며 조혜문왕(趙惠文王)은 인상여(藺相如)에게 상대부(上大夫) 벼슬을 주었다.
물론 이로써 진(秦)나라는 유양땅 15개성을 조(趙)나라에 주지 않았고 조(趙) 또한 화씨옥을 진(秦)에 주지 않았다.
이후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암만 생각해도 조(趙)나라를 휘어잡지 못한것이 원통하고 약이 올랐다. 그래서 진소양왕은
다시 조나라 왕에게 사신을 보내 『 서하(西河)밖 민지(渑池)땅에서 군후(君侯)와 회견하고싶소 』우리 우호를 위해 만나
십시다. 하고 청했다.
이에 조혜문왕(趙惠文王)이 모든 문무백관을 모아놓고 이르기를
지난날 진(秦)나라는 초(楚)나라에 속임수를 써서 회견하자 청해놓고 초회왕(楚懷王)을 함양(咸陽:진나라 도읍)으로 끌
고가 감금했고 결국엔 죽였소, 이로인해 아직도 초나라 사람들은 진나라를 원수로 여기는바인데 이제 저들은 과인과 회
담하자 사신을 보내왔으니 , 과인(寡人) 역시 초회왕(楚懷王) 처럼 함양(咸陽)으로 붙들려 가지나 않을까 두렵소.
이에 염파((廉頗)가 인상여(藺相如)와 의론하고 아뢴다.
만일 대왕께서 진왕(秦王)의 회담제의에 아니가시면 우리 조나라가 매우 약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옵니다.
인상여(藺相如) 또한 아뢰길 신이 대왕을 모시고 가겠나이다, 그간 염파가 세자를 모시고 나라를 지키게 합시요 ! 한다.
조혜문왕이 기뻐 가로대 인상여는 화씨의 옥도 지켰으니 경이 따라만 간다면야 과인이 무엇을 근심하리요.
이때 곁에있던 평원군(平原君)이 아뢰길 옛날에 송양공(宋襄公)이 수례만 타고서 대회에 갔다가 초왕(楚王)에게 붙들려
갖은 모욕을 당한 일이 있었나이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이번에 인상여만 대동할것이 아니라 좌우 사마(司馬:군의 수뇌)와
정병(精兵) 5천을 거느리고 가소서 ! 또한 회견장으로 부터 30리허에 대군(大軍)을 둔(屯)쳐야만 안심할수 있나이다.
하면, 5천의 정병은 누가 이끌것인가 ? 하니 평원군이 답해 올리길 신이 생각컨대 이목(李牧)이 적임이옵니다.
그는 전부리(田部吏:조세징수 장관) 벼슬에 있아온데 조세에 태만한 관리들을 무려 아홉이나 죽였사옵니다. 그때 신은
이목을 불러다 크게 꾸짖은바 있사온데 그의 말은 오로지 국가의 법을 세우고 나라를 보전하기 위해선 그리할수 밖에 없
었으며 앞으로도 그 방침엔 추호도 변함이 없다 하며 자신의 방침이 왕께서 마땅치않다 하시면 언제든지 물러가 초야에
엎드려 은거할 생각이라 들었나이다. 이런 사람이라야 능히 왕을 지켜 절충어모(折衝禦侮)를 다하리라 여겨지옵나이다.
참고 → 절충(折衝) : 적의 창끝을 꺾는다는 뜻, 어모(禦侮) : 외부로 부터의 모욕을 막아냄 ,<예, 折衝將軍,禦侮將軍>
조혜문왕은 즉시 이목(李牧)을 불러들여 중군대부(中軍大夫)에 제수하고 5천의 군사를 이끌고 떠나갔다.
염파가 진나라 경계까지 조혜문왕을 따라가 전송하며 간하길 왕께서 이제 범의소굴 같은 진나라로 들어가시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수 없사와 왕께선 신과 한가지 약속을 하여 주실것을 감히 청하나이다. 그래 무엇인고 ?
왕께서 진왕(秦王)과 회견하고 돌아오시는 날까지 30일간으로 정하시고 만약 그 기간 안에 돌아오시지 않으시면 신은 세
자를 왕으로 즉위 시키겠나이다. 이는 진나라의 농락을 피하기 위한 만부득한 계책이옵니다. 한다.
조혜문왕이 처량하게 한탄하며 " 그렇게 하오 " ! 대답하고 곧이어 경계를 넘어 진나라로 들어갔다.
인상여(藺相如) 천하를 진동시키다.
< 무릇 武란 文의 배후에서 그 성취를 옹호하고 지켜 나가는 한 위엄이요 영광이요 미덕이다. 그러나 文의 전면에 나서
그 성취와 과실을 독점하고 정신의 질서를 힘의 질서로 대치시키려 들면 흔히 오룍이요 악이되고 만다.>
각설
조혜문왕(趙惠文王)이 민지(渑池) 땅에 당도한후 얼마 안되어 진소양왕(秦昭襄王)도 당도하여 역관에서 쉬고 회견날이
되었다. 두나라 왕은 서로 예로써 회견하고 주연(酒宴)을 열어 술을 권하고 마시니 서로가 얼근히 취하게 되었다.
이윽고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조혜문왕(趙惠文王)에 수작을 건다.
과인이 듣자하니 군후(君侯)께선 음악에 능통하시다 들었습니다. 여기 과인이 아끼는 좋은 거문고(비파라는 설도있슴)
가 있으니 청컨대 한 곡조 탄주(彈奏)해 주십시요 ! 한다.
이에 조혜문왕은 창피한 생각이 들어 얼굴을 붉혔으나 거문고를 못타겠다고 거절할수가 없었다.
동등한 일국의 임금으로로서 악공들이 타는 연주나 들을 일이지 어찌 상대국 임금을 위해 거문고를 탈수있는가 ?
이는 모욕이며 아예 작심한 진왕의 수작이었다.
진(秦)나라 시자(侍者)가 조혜문왕 앞에 거문고를 갖다놓았다. 조왕은 하는수 없이 거문고를 가까이 끌어다놓고 상령곡
(湘靈曲)을 탄주했다. 진왕은 음악을 들으면서 시종 찬탄해 마지않았다.
음악이 끝나자 진왕은 껄껄 웃으면서 " 듣건대 조나라 시조 열후(烈侯)가 음악을 좋아했다던데 군후께선 집안 내력을 잘
물려받으셨구려 " 조롱하고 곁에 있는 어사(御史:역사담당 벼슬)를 불러 분부한다.
오늘 과인 앞에서 조왕이 거문고를 탓다는 사실을 역사에 기록하여라 ! 하니 사관이 쓰기를
< 모년 모월 모시에 진왕(秦王)은 민지땅에서 조왕(趙王)과 회견하고 조왕으로 하여금 거문고를 타게 하다 > 했다.
이때 인상여(藺相如)가 앞으로 나아가 아뢴다.
우리 조왕(趙王)께서는 진왕(秦王)께서 진(秦)나라 음악에 정통하시다는 말씀을 우뢰(雨雷)처럼 들으셨나이다.
신(臣)이 이제 질장구(丘:진흙으로 구워만든 화로모양의 악기)을 바치겠나이다 대왕께서 질장구를 잘 치신다니 서로
음악으로 즐기심이 가한줄로 아뢰오 ! 하며 질장구를 가져다 진왕앞에 놓는데 진왕이 치려한지 않는다.
질장구 치는 모습은 거문고 타는것 보다 한층 더 천박해 보이게 되어 있다. 양손으로 추썩대며 두둘겨야 하기때문이다.
진왕이 대단히 불쾌한 낮색으로 응하지 않자 인상여가 술이 가득든 와기(瓦器)를 들고 진왕앞에 무릎을 꿇고 청한다.
대왕께선 이 와기(瓦器)라도 쳐서 이 자리의 흥취를 돋워주시기 바라나이다. 그러나 진소양왕(秦昭襄王)은 꼼짝 않는다.
인상여(藺相如)가 유유히 위협하기를
대왕께선 진나라가 강하다는 것만 믿고서 이렇듯 신의 나라와 주군(主君)을 모욕하실수 있나이까 ? 이제 신과 대왕의
사이는 불과 다섯걸음도 못 되옵니다. 신 인상여는 대왕을 피로 물들일수 있나이다. 어찌 하시겠사옵니까 ?
이에 진(秦)나라 신하들이 외친다. " 저 무례한 인상여를 잡아 내려라 " 진나라 무사들이 우르르 몰려 들었다.
순간 인상여(藺相如)가 눈을 딱 부릅뜨고 우레같은 목소리로 진나라 무사들을 꾸짖는다.
네 이놈들 ! 썩 물러가지 못할까 !
그 순간 인상여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빳빳이 일어섰다. 진나라 무사들은 그 위엄에 깜짝놀라 부지중에 몇걸음씩 물러났다.
진소양왕(秦昭襄王)은 인상여가 무서워 상을 잔뜩 찌푸린 채 하는 수 없이 질장구를 쳤다. 그제야 인상여가 일어나 조나
라 어사(御史)에게 말하길 " 어사는 이 일을 기록하오 " 하니 어사가 붓을 들어 죽간(竹簡)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 모년 모월 모일에 조왕(趙王)은 민지 땅에서 진왕(秦王)과 회견하고 진왕으로 하여금 질장구(丘)를 치게 하다 >
이에 진나라 신하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조혜문왕(趙惠文王)에게 대들기를 오늘 조왕께서 각별한 대접을 받았으니
이 자리를 빛내는 뜻에서 조나라 성(城) 열다섯을 우리 진(秦)나라에 바치시요 한다.
그러자 인상여(藺相如) 또한 일어나 진소양왕(秦昭襄王)에게 대드는데 " 자고로 예란 서로 주고받는 것이옵니다. 우리 조
나라는 이 자리에서 진나라에 열다섯 성을 바치겠사오니 진나라는 우리 조나라에 진나라 도읍 함양성(咸陽城)을 주시오
소서 " 했다. 이에 진소양왕(秦昭襄王)이 손을 들어 제지하며 이르기를 오늘 이 자리는 두 나라가 친선차 모인 자리이니
너무들 흥분하지 말기 바라오 " 했다.
그리고 나서 모두에게 권한다. 자 서로 술이나 권합시다 ~ 진왕은 애써 너털웃음을 지어가며 불쾌한 심정을 감췄다.
해가 기울자 잔치는 파했고 조나라나 진나라 군신들 모두가 각기 역관으로 돌아갔다.
진나라 객경(客卿) 호상(胡傷)이 참을수 없는 모욕감에 강력하게 조왕(趙王)과 인상여(藺相如) 를 잡아 가두자 아뢴다.
안될 말이다. 세작(細作)의 모고에 의하면 지금 30리 밖에 조나라 대군이 와 있다한다. 만일 섣불리 저들을 건드렸다간
큰 낭패를 보기 십상이고 그리되면 천하에 웃음거리밖엔 안된다. 일이 이쯤 되었으니 차라리 조왕을 극진히 대접하고
형제의 의(義)를 맺고 서로 불가침 조약을 맺는것이 상책이다. 세자 안국군(安國君)의 아들 이인(異人)을 조나라에 볼모
로 보내도록 하라 !
<이인은 자초(子楚), 훗날 여불위가 자신의 아이를 잉태한 여인을 이인에게 바치고 그녀가 낳은 아들이 진시황제가 됨>
이에 진나라 신하들이 의외란듯 묻기를 조약 맺는것 까진 좋으나 볼모까지 보낼 이유는 없지 않사옵니까 ? 하자
진왕이 웃으며 답하기를 조나라의 실력은 만만치가 않다, 우리가 저들을 단번에 꺾어 누룰수는 없다 만약 볼모를 보내지
않으면 저들은 우리를 믿지 않을것이다 그러니 볼모로 안심시켜 놓고 오로지 이제부턴 한(韓)나라를 도모해야 할것이다.
순망치한(盾亡齒寒)이니 한나라가 망하고 나면 저 조나란들 별수있겠는가 .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웃었다.
문경지교(刎頸之交)
<서로 죽음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막역한 사이, 즉 벗을 위해서라면 대신 목이 잘려도 여한이 없을 만큼 친밀한 사이를
이르는 말이다 (刎목벨 문, 頸목덜미 경)>
이리하여 조나라와 진나라는 우호를 맺었고 조혜문왕(趙惠文王)은 무사히 조나라 도읍 한단(邯鄲)으로 돌아갔다.
과인은 인상여(藺相如)의 도움으로 민지 땅에서 태산(泰山)처럼 흔들리지 않을수 있었다.인상여야 말로 우리 조나라에
있어 주(周)나라 구정(九鼎:아홉개의 거대한 솥, 천자의 상징)보다 더 귀중한 존재다. 과인은 인상여에게 이 나라 최고의
벼슬 상경(上卿) 벼슬을 제수 하겠노라 !
이리하여 상경(上卿)이 된 인상여(藺相如)는 정승(政承)인 염파(廉頗)보다 윗자리에 앉게 되었다.
대군을 호령하고 적을 무찔러 나라를 지키는데는 천하에 둘도없는 명장이요 충신인 염파((廉頗)가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
했고 공공연히 투덜대기 시작했다.
나는 숫한 전쟁에 나아가 목숨을 걸고 싸워 적을 무찔렀고 강토를 넓혔으며 백성을 지켰으며 왕을 보필했다 헌데, 저 인상여(藺相如)는 한갓 세치 혀를 놀려 수고한 일밖엔없다. 천만뜻밖에 그런자가 나보다 웃자리 벼슬에 앉는다니 ~ 세상에
이럴수가 있는가 ? 더구나 그자는 환자령(宦者令) 무현(繆賢)의 집사(執事)질이나 하던 미천한 출신 아닌가.
내 어찌 그런자의 아랫사람이 되어 일할수 있으리요, 언제고 내눈에 뛰면 그놈을 쳐 죽이리라 !
이 말은 곧바로 인상여의 귀에 들어갔다. 그호로 인상여는 병(病)을 핑계대고 궁중 조회에 나가지 않았고 염파((廉頗)를
만나는것을 몹시 무서워 하는듯 했다.그러자 인상여(藺相如)의 부하들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대감은 너무 겁이 많다 그래 정승 염파가 무서워서 궁에도 나가지 않고 생병(生病)을 앓다니 참으로 딱한 일이다.
그러던 어느날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인상여가 바깥행차를 나갔다가 저편에서 오는 염파의 행차를 보았다.
인상여가 황급히 어자에게 분부하기를 정승 염파에게 들키지 않도록 속히 수레를 옆 골목으로 몰아라 어서 속히 !
급급히 골목으로 몸을 피한 인상여는 염파의 행차가 다 지나간 후에야 큰길로 나왔다. 그날 인상여의 부하들은 격분했다.
인상여에게 떼로 몰려가 따지기를 " 저희가 고향과 일가친척을 모두 멀리하고 대감 문하로 온것은 대감을 당세(當世)의
대장부로 믿고 기꺼이 모시기 우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공(公)께서는 염장군 보다 지위가 높은데도 그의 버릇없는 말을 누
루지 못하고 오히려 겁을먹고 궁에도 못가시더니만 오늘은 염장군을 피해 골목으로 숨기까지 하셨으니 이 꼴이 도대체..
저희는 도무지 창피해서 더이상 대감을 모실수도 따를수도 없나이다. 대감 편히 계시오소서 소인들 고향으로 가나이다! "
이에 인상여가 말리며 말하길 내가 염장군을 피하는 이유를 그대들이 몰라서 아마 이러는 모양이구려 그러지들 마시오 !
소인들은 소견머리가 좁아 그런지 그 이유를 통 모르겠사오니 원컨대 대감께서 그 까닭을 들려 주시오 한다.했다.
인상여(藺相如)가 천천히 말하길 그대들은 염장군과 진왕(秦王)중 어느쪽이 더 무섭소? 그야 진왕이 더 무섭지요.
지금 천하에 진왕을 상대할 나라는 없소, 그런데 나는 지난날 진나라 조정에서 진왕을 꾸짖고 진나라 신하들을 모욕했소
그뿐이겠소 ? 얼마전 민지땅에서는 그 창칼이 숲처럼 삼엄한 가운데서도 나는 눈하나 깜짝않고 진왕을 욕보여 우리 상감
의 위신과 체통을 지키게 했으며 나아가 우리 조나라에 인물이 없지않음을 상기시켜 더이상 넘보지 못하게 한바 있소이다.
그러한 나 인상여, 진나라 왕도 두려워 않는 내가 어찌 염장군을 두려워 할리 있으리요 !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오 !
강대국인 진나라가 감히 우리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염파장군이 있기때문이요, 만일 우리 두사람이 범처럼
서로 싸운다면 누구든지 둘중 하나는 죽어야만 끝장이 날거외다. 그러면 진나라가 가만 있을성싶소 ? 진나라는 우리가
싸우는 기색만 알기만 하면 즉각 군사를 일으킬것이요 ~ 내가 염장군을 피하는 이유가 바로 이때문이올시다 !
내겐 사사로운 원수보다 나라가 더 소중하오 그대들은 내 뜻을 알아야 하오 ! 이에 모든 부하가 탄복했다.
어느날 인상여의 부하와 염파의 부하가 우연히 시정주점에 들렸는데 두사람이 서로 웃자리에 앉으려고 다투었다.
그래, 우리 대감은 나라를 위해 염장군을 피하신다 ~ 나 또한 우리 대감의 뜻을 받들어 자리를 양보할 테니 그리알거라.
하며 인상여의 부하가 다른자리로 갓서 앉자 염파의 부하는 윗자리에 앉아 거만스레 술을 마셨다.
그날 그자는 염파의 부중(府中)으로 돌아가 이 일을 자랑하니 염파(廉頗)는 더욱 통쾌히 웃으며 거드름을 피웠다.
그후 하동(河東) 사는 우경(虞卿)이란 선비가 조나라 도읍 한단(邯鄲)으로 놀러왔다가 인상여와 염파의 부하들이 하는 이
야기를 듣고 크게 느낀바 있어 조혜문왕(趙惠文王)을 찾아가 뵙고 아뢴다.
오늘날 대왕께서 가장 소중히 생각해야 할 신하는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 두 사람 아니겠사옵니까 ?
그러하오 !
신(臣)이 듣건대 옛날엔 모든 신하가 서로 공경하고 협력해서 나랏일을 잘 하였다고 하옵니다. 헌데 근자들어 대왕께서
신임 하시는 인상여(藺相如)와 염파(廉頗) 는 물과 불처럼 서로 화합하지 못하고 있다 들었나이다.
참으로 이 나라의 불행이 아닐수 없사옵니다. 인상여는 겸손 하건만 염파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 교만하니 장차
전쟁터에 나가서도 서로 돕지 않을 것인즉 이는 무엇보다도 대왕을 위해서 여간 걱정되는 일이 아닐수 없사옵니다.
조혜문왕(趙惠文王)은 등골이 오싹헀다. 이 보시요 선생이 좀 나서주시지 않겠소이까 ?
그리 하겠나이다 ! 신이 한번 두 사람 사이를 붙여볼까 하옵니다! ...... 반드시 그렇게 하여 주오 선생...!
우경(虞卿)이 염파(廉頗)를 찾아가 그의 공을 칭송하니 염파는 크게 기뻐한다.
그제야 우경이 슬며시 말하기를 『 공으로 논하자면 장군만한 분이 없고 도량으로 보면 인상여 만한 분이 없지요 』하니
염파 갑자기 화를 발끈내며 인상여는 싸움한번 못해본 자요 다만 세치혀로 약간의 공명을 얻은것일뿐 무슨놈에 도량이요
우경이 정중한 어조로 인상여는 결코 약한 선비가 아니올시다 그는 앞날을 멀리 내다볼줄 아는만큼 소견이 큽니다.
하면서 시정주점에서 양쪽의 부하들이 다투던 일과 인상여의 부하가 하던 말을 낱낱이 고한 후에 한마디 덧붙였다.
장군께서 앞으로 조나라에서 살지 않겠다면 모르되 계속해서 조나라에 살고져 하신다면 문제는 좀 달라집니다.
인상여는 어디까지나 겸손한데 홀로 장군만이 시비를 걸고 싸우러 든다면 머잖아 장군께선 모든 위신과 명예를 잃으실
것입니다. 또, 그 결과 두 영웅은 망하고 저 흉악한 진나라의 말굽아래 나라 마져 망할텐데 어찌 그걸 모르시는게요 ?
이에 염파(廉頗)는 어느덧 고개를 수그리며 자기 자신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실로 선생이 말씀하지 않으셨다면 어찌 나의 허물을 들을수 있었으리요! 진실로 인상여는 대인이로다 했다.
내 당장 인상여(藺相如)를 찾아가 사죄(謝罪) 할것이니 선생은 먼저 가 내 뜻을 전해주시기 바라오 !
부형청죄(負荊請罪)
<염파, 웃옷을 벗어, 등에 가시나무 회초리를 짋어지고 인상여를 찾아가 죄를 청하다> 염파로 인하여 이 말이 유래.
염파(廉頗)는 웃옷을 벗고 등에 형장(刑杖 : 매질하는 곤장)을 짊어지고 인상여(藺相如)의 부중(府中)으로 찾아갔다.
『 이몸은 워낙 뜻이 좁아 대감의 너그러운 도량을 미처 몰랐나이다 이제 죽어도 그 죄를 씻지 못할줄 아오 』 하면서
인상여를 향해 진심으로 사죄하며 꿇어 엎드렸다.
이에 인상여(藺相如) 버선발로 뒤어나와 염파(廉頗)를 부축하여 일으키며 말하길 우리 두사람은 다 같이 나라의 종묘사
직을 떠 받드는 신하올시다, 장군께서 이 뜻을 알아주시니 오히려 고맙기 한량없거늘 어찌 이렇듯 사죄를 하시오 ?
그러자 염파가 인상여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 몸은 원래 성미가 급하고 미련하오, 대감께서 이렇듯 용서를
하시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 이에 인상여도 염파를 붙들고 울었다.
이윽고 염파(廉頗)가 말하길 나는 이제부터 대감과 생사를 함께하는 벗이 되겠소 비록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이 마음은
변치 않겠사옵니다 하면서 인상여(藺相如)에게 절했다.
인상여(藺相如)는 곧 답배(答拜)하고 염파를 안으로 안내하여 성대히 술상을 차려 대접하니 이로써 문경지교(刎頸之交)
란 말이 세상에 나오게 된 동기였다. 염옹이 시로써 이 일을 찬탄(讚嘆)하니 이러했다.
引車趨避量誠洪 (인거추피양성홍) 수레몰아 골목으로 피한 인상여의 도량은 참으로 컸고
肉钽將軍志亦雄 (육단장군지역웅) 웃옷을 벗어 죄를 청한 염파의 뜻 또한 웅장했도다
今日紛紛競門戶 (금일분분경문호) 오늘날은 어더떠한가 모두 자기 세력을 위해서 날뛰니
誰將國計置胸中 (수장국계치흉중) 어느 누가 나라를 위해 생각는자 있으리요 !
이에 조혜문왕(趙惠文王)은 인상여와 염파를 화해시킨 우경에게 황금 100일을 하사하는 한편 상경벼슬을 주었다.
이후의 조나라 역사는 모두 생략한다 다만, 인상여는 한동안 나라의 크나큰 일을 여하히 수행하다 병들어 진(秦)나라의
침략전쟁을 바라만 보다 죽게되고 염파는 진나라 백기,왕전 같은 명장들이 내침해 와도 끄덕없이 잘 막아냈는데 진나라
의 이간책에 조나라가 속아 염파를 퇴진시켰고 이후에도 다시 염파의 능력이 인정되어 다시 기용되었으나 간신의 농간에
왕이 속아(조혜문왕 이후) 염파를 쓰지 아니하여 결국 나중에는 조나라도 망해 진나라에 먹혔다.
훗날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진소양왕의 증손)이 화씨벽옥(和氏璧玉)을 수중에 넣게 되어 이사로 하여금 전국옥새
(傳國玉璽:나라를 전하는 도장)를 새기게 했는데 4치가량의 크기에 손잡이는 다섯마리의 용을 새겨 만들어 여덟글자를
전자(篆字)로 새기니 그 내용인즉 이러하다.
受命于天 하늘로 부터 명을 받음에
旣壽永昌 영원히 창성 하리로다
하지만 이 세상의 물건이 어느 한사람의 소유만으로 끝나는적 있었던가 강성했던 나라도 그러한데 하물며 천하만민이
탐을내는 보물에 있어서이겠는가 ?
진(秦)나라가 2대만에 망하고 항우와 유방이 또 한번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결하더니 결국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이겨
이 옥돌로 만든 전국옥새를 한(漢)나라가 4백년 역사를 이어가는동안 한실(漢室)의 옥새로서 그 역할을 다 하게되는
데 중간에 왕망(王莽)의 난때 수난을 당해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고 한말 오나라의 손견(孫堅)에게 갔다가 다시 원술(袁
術)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전국옥새가 원술에게까지 들어가데 된 동기는 이러하다.
역적 왕망(王莽)이 한평제(漢平帝) 를 독살하고 정권을 찬탈했을 때 왕심(王尋)과 소헌(蘇獻)을 시켜 효원(孝元) 태후께
보내서 전국옥새를 받아오게 했다. 효원 태후는 옥새를 내주다가 그것을 들어 그 역적들을 내리쳤고 그때 옥새의 귀퉁이
가 깨어진 것을 광무제(光武帝)가 의양 땅에서 옥새를 되찾았다. 이후 전하는바로는 漢나라 말기 십상시들이 난을 일으
켰을 때 옥새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만 해도 아직 조조와 유비는 미약한 입장이었다.)
그것은 그 옥새를 지키라 명받은 궁녀가 더이상 지킬수없게 되자 품에안고 우물에 몸을던져 일시 종적을 감춘것이었다.
훗날 십상시의 난이 평정되자 역적 동탁이 낙양(洛陽)에 무단히 대군을 이끌고 들어와 천자를 폐위시키고 진류왕을 천자
에 앉히고서 국권을 농단하며 도성을 불지르고 장안(長安)으로 강제 천도(遷都) 할때 조조(曺操)가 천하각지에 격문을
돌려 역적 동탁(董卓)을 치는 군사를 일으키게 된다.
그때 강동(江東)의 손견(孫堅)도 대군을 이끌고 낙양으로 진군해 왔다가 밤에 폐허가 된 낙양의 궁궐터에서 서광이 비
친다는 보고를 받고 즉시 달려가 확인하니 그곳은 불타 허물어진 우물이었다. 서광은 거기서 뻗치고 있었다.
군사로 하여금 내려가 확인하니 한 궁녀의 시신이 꺼내졌는데 그 목에 함이 하나 걸려 있는것이었다.
즉시 열쇠를 열고 보니 그것은 바로 화씨벽옥으로 만든 전국옥새였다. 손견은 수하들에게 비밀을 지키라 엄명을 내리고
제후들의 맹주(盟主)로 추대된 기주태수(冀州太守) 원소(袁紹)에게 돌아갈것을 청하러 갔다.
그러나 이미 그 옥새를 손견이 접수한 사실을 원소에게 고해바친자가 있었다. 원소가 그 옥새를 내어 놓으라고 손견을
나무라며 윽박질렀지만 천하의 효웅(梟雄)이요 야망가인 손견은 딱 잡아떼며 그런 사실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약 그 보물을 얻고도 감추고 있다면 다른날 반드시 제명에 죽지 못하고 칼과 살아래 목숨을 잃을것이요> 했다.
손견은 그만큼 그옥새가 탐났고 그걸 얻은건 오로지 하늘이 자신에게 천하의 주인임을 암시 하는걸로 착각했던것이다.
결국 손견은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는 길에 형주(荊州) 유표와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게 되니 이 어찌 하늘의 응징
이 아니고 무었이겠으며 또한, 말이 씨가된다 했슴은 이를 두고 한 이야기 아니랴 !
또한 그 손견(孫堅)이 죽고 그의 아들 손책이 강동의 후계자로 되었을때도 여전히 손책은 원술의 진중에서 그의 감시하
에 있었는데 원술에게 전국옥새를 바치고 드디어 원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그의 본거지 강동으로 돌아가게 된다.
삼국지의 내용은 원술이 그 옥새를 얻어 기고만장한 나머지 황제라 칭하고 얼마후 망하고만다.
화씨벽옥이 이처럼 전국옥새가 되어 영웅호걸과 왕조마다 다투는 물건이 되어 숫한 일화를 남겼는데 그 이후의 종적은
나로선 알 길이없다 다만 분명한것은 그 옥돌, 그 옥새는 주인될 자격이 없는자에게 갔을때는 어김없이 재앙을 내렸다.
회고해 보자, 변화(卞和) 는 두 발이 잘렸고 ~ 초(楚)나라와 조(趙)나라는 망했고 ~ 진(秦)나라도 망했으며 그 나중에
한(漢)나라만이 그 옥돌 국새(國璽)와 더불어 창성하지 않았던가 ?
그러다가 왕망(王莽)이 잠시 가졌었지만 그 역시 망했고 조금전 이야기 처럼 손견(孫堅)과 손책(孫策) 부자가 모두 비명에 죽었으며 원술(袁術) 또한 칭제(稱帝) 하며 거들먹거리다가 나라도 망하고 객사했으니 이 어찌 무서운 결과 아리랴 !
이 세상 모든 물건과 권리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함은 참으로 시사하는바가 크기만 하다.
화씨벽옥(和氏璧玉)이 장장 5백여년동안 중국대륙을 강타한 한줄기 풍운(風雲)이었다. - 終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