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원균장군은 비열하고 전쟁에 패하기만 한 장수인가?
1.무인집안 출신의 용장(勇將)
평택시 도일동은 원주 원씨의 5백 년 세거지다. 원균은 경상도병마절도사 원준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대로 원씨 집안은 뛰어난 무인들을 배출하였다.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원준량을 비롯하여 형제와 조카들도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크게 활약하였다.
원균은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성격이 호탕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한 끼에 밥 한 말, 술 한 말, 꿩이나 닭 서너 마리를 먹어치우는 대식가였다. 25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한 뒤에는 이일 등과 함께 함경도 일대에서 여진족을 토벌하여 명성을 얻었다. 조산만호(造山萬戶)로 있을 때에는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로 부령부사로 특진하였다. 두만강 부근 종성에서 함경병사 이일을 따라 시전부락을 격파할 때에도 적은 병사들로 적진에 뛰어 들어 적장의 목을 베었기 때문에 여진족들은 원균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였다. 원균의 무인다운 풍모는 선조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나중에 선조가 원균을 신임하고 두둔한 것도 평소에 가졌던 깊은 믿음 때문이었다.
원균이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부임한 것은 임진왜란 두 달 전인 1592년 2월이었다. 하지만 두 달은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던 군대를 재편하고 기강을 바로 잡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1592년 4월 왜군이 7백 여 척의 함선과, 16만 명의 군대, 9천 여 명의 수군으로 침략하자 훈련부족에 전투경험이 없었던 경상좌수영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다. 왜군의 기세에 놀라기는 원균의 경상우수영도 마찬가지였다. 혹자는 당시 경상우수영에는 수군 1만여 명에 판옥선 70여 척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순신과 이억기의 전라좌․우수영의 전함이 각각 25척 내외였으므로 기껏해야 40척을 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사들이 도망치는 가운데 함선 40여 척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원균은 동생 원전을 시켜 신속하게 전라좌수영에 구원을 요청하는 한편, 왜군의 수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제도의 함선과 무기, 군량미를 불에 태우거나 수장시킨 뒤 나머지 함선으로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순신의 전라좌수영, 이억기의 전라우수영 부대와 연합한 뒤에는 옥포, 당포, 한산도 등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실록에는 원균이 전투에 임했을 때 선봉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적진에 뛰어들어 적을 당파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원균은 1597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된 뒤 통제사에 올랐다. 당시 조정의 여론은 전공으로나 전투능력으로 평가할 때 이순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은 원균밖에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2.패장의 멍에와 후대의 부정적 평가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자 조정과 도원수 권율은 부산포의 왜군 본진을 공격하도록 명령하였다. 부산포 공격은 이순신을 파직하고 원균을 통제사로 임명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산포 공격은 수많은 난제들이 가로막고 있었다. 1597년 당시 왜군의 전투력은 왜란 초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강되었고 조선수군에 대한 대응전술도 잘 준비되어 있었다. 조선 수군도 함선을 새로 건조하고 군졸들을 훈련시켜 전력이 증강되었지만, 전염병 등으로 입은 손실이 컸고 무엇보다 이순신 휘하에 있었던 장수들이 원균의 지휘를 받지 않으려 하면서 결속력이 약회되어 있었다. 더구나 경상도 해안이 왜군에게 점령된 상황에서 수군단독으로 공격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어 뛰어드는 격이었다. 원균은 육군과 수군의 합동작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원균의 주장은 도원수 권율에 의해 묵살되었다. 냉정함을 상실한 상태에서 결행한 한 두 차례의 작은 전투에서 패배한 뒤에는 출전을 머뭇거린다는 이유로 권율에게 곤장까지 맞았다. 원균은 치욕에 몸을 떨었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면서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설 줄 몰랐던 용장에게 곤장은 참을 수 없는 치욕이었다. 끊어 오르는 울분을 참지 못해 원균은 틀어 박혀 술만 마셨다. 결과적으로 칠천량 해전의 패배는 참혹한 것이었지만, 패배는 예상했던 일이 현실화된 것뿐이었다.
원균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리한다. 왜란 당시 우호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은 선조와 서인들이었다. 선조는 처음에는 원균의 용맹함과 무인적 풍모에 대한 호감을 가졌다가, 나중에는 이순신 처리문제를 비롯하여 자신의 실수에 대한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 두둔하였다. 윤근수, 윤두수, 김응서와 같은 서인들은 남인을 견제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과, 거짓 장계를 올린 뒤 나중에는 왕과 조정을 능멸하는 이순신에 대한 반감으로 원균 옹호대열에 합류하였다. 반면 원균을 부정적으로 평가한 사람들은 유성룡, 이원익으로 대표되는 남인계열과 이순신 자신이었다. 사실 이순신의 불만은 상반된 성격차이에서 온 것이기도 하겠지만, 나이로 보나, 무과급제 순서로 보나, 그동안의 공로로 볼 때 자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원균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일 수도 있다. 남인들은 과거 부령부사시절의 치리(治理)문제를 비롯하여 경상우수사 시절 이순신과의 갈등, 충청병사 시절의 치리(治理)에 대하여 부정적인 면만 부각시켰다. 이순신과의 갈등에 대해서도 원인보다는 불같이 화를 내는 현상에만 초점을 맞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더구나 이순신은 ‘난중일기’를 남겨 자신의 입장에서 원균을 바라볼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였고 유성룡의 ‘징비록’이 이를 뒷받침하였지만, 개인기록을 남기지 않은 원균은 무엇으로도 자신을 변호할 수 없게 되었다.
부정적 평가는 양난 이후 더욱 심해졌다. 인조 때 이순신의 입장이 반영된 선조수정실록이 편찬되고, 효종 때 북벌운동과정에서 이순신이 크게 부각되면서 원균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대세를 이뤘다. 부정적 평가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은 국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출판된 소설류다. 신채호의 '이순신전(1908)'을 필두로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전(1932)'이 나오면서 둘 사이는 영웅과 간웅으로 갈렸고, 제3공화국 정부의 정책적 지원으로 출판된 이은상의 '성웅 이순신(1969)'과 일련의 영화들은 원균을 ‘민족의 공적(公敵)’으로 만들었다. 소설에서 원균은 충효(忠孝)의 상징이며 완전한 인격체인 성웅 이순신을 모함하고 비열한 짓을 일삼는 간신모리배로 묘사되었다. 원균이 주장(主將)이었던 경상우수영과 전라 좌, 우수영의 연합작전은 모두 이순신이 주도한 전투였으며, 원균의 구원요청을 받은 뒤에도 15일 동안이나 출전을 미루다가 정운의 위협에 못 이겨 마지못해 출전하였던 이순신의 과오는 감춰졌다.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치리(治理)에는 부족하였지만, 성격이 호탕하고 싸움에는 용맹하며, 청렴하고 부하들을 아껴서 신뢰를 얻었고, 상당산성을 수축할 때는 공사장에 토굴을 파고 기거하며 공사를 독려하였다는 실록의 기록은 위대한 성웅을 위해 묻혀버렸다.
역사적으로 원균이 이순신보다 훌륭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분명 이순신은 불세출의 영웅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영웅이 성웅일 수는 없고, 한 사람을 성웅화하기 위해 다른 훌륭한 장수가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으로 이순신은 이순신일 뿐이고, 원균은 원균일 뿐이기 때문이다.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