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 바친 청춘
이 향 숙
세검정 언덕, 분에 넘치는 예식장은 직원들이 옷을 입혀주고 머리를 만져줄 때마다 수고비를 주어야했다. 신혼여행을 앞두고 지갑은 점점 얇아졌다. 폐백을 드리기 전 절을 도와줄 수모에게 마지막 지폐를 건네주었다. 새벽부터 단장하느라 고생한 나는 파리해진 얼굴로 간신히 폐백을 드렸다. 시댁 어르신들이 나의 주머니를 들여다보시기라도 한 것인지 절값을 두둑하게 주셨다. 친구들과 피로연장인 남한산성으로 옮기려고 로비를 가로 지를 때였다. 미혼이라 예식에 참석하지 못한 아주버니가 새치기를 한 남편과 나에게 오히려 미안해하면서 금일봉을 주셨다.
남편이 학생 신분 이라는 이유로, 아주버니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핑계로 우리는 아이를 갖지 않았다. 부모님 도움 없이 시작한 궁색한 살림이 어느 정도 펴지면 아이를 낳으려는 계획이었다. 아주버니가 결혼 하고 두어해 만에 임신 소식이 들렸다. 앞만 보고 달리던 우리부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뜰살뜰 살아온 덕에 친구들의 살림과 엇비슷해져서 우리 부부도 결혼 5년 만에 아이를 낳았다.
빚으로 시작한 남편이 운영하는 슈퍼마켓은 안주인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이웃집에 아이를 맡기고 매장을 나갔지만 아이 걱정에 일에 집중 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 이웃집은 이사를 갔다. 매장에 나가 어서 사업을 일으켜 우리 아이에게 만큼은 가난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결국 인천에 사는 언니에게 아이를 보내고 일에만 몰두 했다. 1997년 IMF로 경기 침체가 되었을 때 위기를 기회로 삼아 남편은 모 대학 정문 옆에 2호점을 냈다. 나는 그곳에서 근무하게 됐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나 아기를 안은 엄마 손님이 들어설 때면 아이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 졌다. 밤이면 피곤해서 곯아떨어질 만도한데 가슴은 뻥 뚤려 바람소리가 나고 눈 감으면 아이의 이쁜 짓 하는 모습이 아른 거렸다.
아이를 데려 왔다. 그럼에도 일을 놓을 수 없는 나는 아이를 제대로 양육 할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친정어머니가 우리 집에 오셔서 아이를 키워 주었다. 염치도 없이 4년 터울로 작은 아이를 낳게 되었다. 추석 연휴가 끝나고 직원들이 출근하는 날을 출산수술 날로 잡았다. 몸조리도 대충하고 꼭 성공하겠다는 일념으로 일터로 나갔다. 일념은 과로를 낳고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연로하신 어머니와 아이들, 그리고 나에게 미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더라면 어머니도 고생을 덜 하셨을 테고 당신만의 시간을 갖었을 것이다.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학습능력도 훨씬 좋아졌을 것이다. 나의 탓이라는 죄의식에 아이들에게 당당하지 못했다. 큰 아이가 공부보다는 음악에 관심을 갖어 국악을 전공한다. 작은 아이 성적도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하지만 매사에 긍정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에 주위에서 칭찬을 자주 듣는다. 나또한 마흔을 바라보고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웬만한 양, 한방 병원들을 찾아 다녔지만 원인도 병명도 찾아내지 못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지인의 고향 후배가 원장인 한의원에서 진료를 받았다. 기가 쇠잔해진 데다가 속으로 삭이는 성격 탓에 울화병이라고 했다. 의사는 가족들에게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했다. 병은 마음에서 온다하며 여유를 갖으라 했다. 남의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게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나 보다. 꾸준하게 1년 정도 치료 후 건강을 회복 할 수 있었다.
큰 부자는 못되었지만 젊은 날 열심히 일했던 결과로 큰 아이의 대금 공부도 뒷바라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은 아이도 그렇다. 요즘세상 아이 한명 낳아 대학까지 졸업 시키는데 평균 3억이 넘게 든다고 한다. 만약 내가 집안에서 안주하고 남편에게만 맡겼더라면 오늘 날 아이들 뒷바라지는 할 수 있을까 싶다. 남편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것이 혼자 벌어서는 집안을 이끌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쯤되면 젊은 날 물질을 쫒아간 나의 청춘이 결코 어리석은 선택만은 아니었다 싶다.
첫댓글 미안~~~ 이것도 숙제라섴ㅋㅋㅋ 고생했던 날들ㅋㅋㅋ
당연 쓰고 또 써야지요~ 좋아ㅛ~
재미나고 아름다운 추억을 쓰고 싶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