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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로 나누어진 민족의 영산 백두산(白頭山)에 대해서!
백두산(白頭山)은 눈을 이고 있으며 화산 폭발로 흰색의 浮石(부석)이 쌓인데서 붙여진 이름이니 1962년
주은래와 김일성이 국경을 정할때 천지와 백두산 열여섯 봉우리를 갈라 55% 는 북한, 45% 는 중국으로
나누었으니, 황장엽은 1958년 김일성과 중국에 갔을 때 지도에 백두산이 중국 땅으로 표시된걸 보고
격분해 시작된 일이라는데, 이형석 한국 땅이름 학회장은 협정으로 북한이 280km²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백두산은 BC 2세기 편찬된 중국 山海經(산해경)에 不咸山(불함산)으로 기록된후 한나라 시대에 개마대산,
위진 남북조시대에 태백산과 도태산으로 이후 백산, 삼신산으로 불리다가 금나라 때는 영웅산을 거쳐
長白山(장백산)으로 불리웠으니 이는 여진어로 "골민샹기얀알린 (Golmin Šanggiyan Alin)" 곧
궤리만싸에아린(果勤敏瑢廷阿林)을 한자로 옮기니 큰흰산(태백산) 또는 긴흰산(장백산) 으로 기록됩니다!
백두산은 1135년 묘청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자고 주장하며 쓴 "호국영산" 이라는 귀절이
백두산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또는 1285년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 "환인의
아들 환웅이하늘나라에서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으니..." 나오는 "태백산
(太白山)" 을백두산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일연은 각주에서 태백산을 묘향산이라고 적었습니다.
인터넷에 삼국유사 원문이 올려져 있는데...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
(臺山五萬眞身)에“留二十日乃還<五臺山> 此山乃<白頭山>之大脉,各臺眞身常住之地.”
이라 나오니“이 산(五臺山 오대산)은 곧 백두산(白頭山)의 큰 줄기로 각
대(臺)는 (불보살의)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에서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입니다.
두 번째는 1396년 조선 개국후 정도전과 조준이 편찬한 "고려사" 에 "白頭山(백두산)"이라는 이름이
나오니“성종 10년 991년 10월 왕이 서도에 갔으며 압록강 바깥에 사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 거기서 살게 했다.”이며 그외에도“有名虎景者....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 이름이 호경(虎景)
이라는 사람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에 이르러”라고 나옵니다.
고려사에는 “玉龍記云,‘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옥룡기(玉龍記) 에 이르기를, '우리나라(의 지형지세)는
백두산(白頭山)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에서 끝나는데” 라고 언급되며 용비어천가 1권 4장
의 주석에“慶源府西有長白山, 一名白頭山, 山凡三層, 其頂有大澤南流鶯鴨緑江”“경원부(慶源府)
서쪽에 장백산이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다. 정상에 큰 못(大澤)을 길러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이 보입니다.
668년 고구려가 망한후 통일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이었다가 고려 왕건이 평양을 개척하고
서희가 663년 평안북도땅 일부를 얻었으며 윤관에 이어 조선시대에 조금씩 북진했지만 조선 초기
백두산은 여진족의 영토였으나 정도전이 북진해 1398년 안변에서 북청은 영흥도로 단천에서 경흥은
길주도로 명명한 이래 1443년 최윤덕의 4군과 1453년 김종서의 6진 개척으로 백두산이 가까워집니다.
1115년 여진족들이 金(금)나라를 세우자 자기민족의 발상지는 장백산(백두산)이며 그 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 유역이 천년이 넘는 삶의 근거지라 1172년에 금나라는 장백산(백두산)
에 제를 올렸으며....... 1193년에는 장백산을 開天宏聖帝(개천굉성제)로 이름(존호)을 지어 올립니다.
청나라 강희제는 장백산(백두산)을 만주족(여진족)의 발상지라 1677년 12월에 백두산을 "장백산지신"
이라 부르며 천지에 손수 올라 직접 제사를 올렸는데...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만주족들은 장백산 을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가 탄생한 곳 이라 하여 신성시하며 제사를 지낸다" 고
적었으며 그 전에 우무나의 장백산 탐사보고에 의하면 어허너연에 베이스캠프를 마련하고 등정했습니다.
“장백산(長白山) 동쪽 포이호리 연못에 사고륜과 정고륜, 불고륜(弗庫倫) 천녀(天女) 셋이 목욕을 마쳤을때,
신작(神鵲)이 붉은 과일을 막내 옷에 떨어뜨리니 입에넣자 홀연 뱃속으로 들어간후 임신이 되어 남자아이
를 낳았는데 어머니는 아이신고로(愛新覺羅 애신각라)로 성(姓) 을 삼으라, 하늘이 너를 탄생시킨 것은
난국을 평정하도록 함이니 물흐름을 따라가라고 하며 배를 띄운뒤 태우고, 어미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
다산 정약용도 신광하에게 ‘백두산은 산해경에 불함산, 지리지에는 장백산이다’, ‘청 황제가 오악(五嶽)에
백두산을 더해 육악으로 삼고, 제사를 지내니 존귀함과 중대함이 옛날에 비할 비가 아니다’ 라 했는데
약용 뿐만이 아니다. 고려말 목은 이색은 ‘곡주공관신루기(谷州公館新樓記)’에서“우리 나라의 영토는
삼면이 큰 바다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장백산에 이른다(我國壤地。三面大海。北連長白山)” 고 썼습니다.
1458년 신숙주가 집필한 ‘국조보감’의 세조 초 기록에도 “삼각산을 중악,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을 서악으로, 지리산을 남악으로, 장백산을 북악으로 삼자고 건의했다” 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만 봐도 같은 산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백두산이 95회, 장백산이
40회 나오는데 초기에는 장백산이 대부분이고 후기로 오면 거의 대부분 백두산으로 바뀝니다.
고구려는 고구려인과 옛날 읍루라 부르던 말갈인들이 살았는데... 고구려인들은 농사를 지으니 평야
와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시에 살았으며, 밭농사 약간 외에는 수렵과 채집 에 약초를 캐며 물고기
를 잡고 돼지등 가축 기르던던 말갈인(여진) 들이 백두산 북쪽 장백폭포 아래 계곡의 강과
산에 살았다고 여겨지는데...... 훗날 백두산 인근에는 너옌부, 주셔리, 야루걍부가 있었으니
누르하치가 직접조문하고 곡한 후금 5대 공신 어이두 바투루는 백두산 여진족 뉴호록씨 입니다.
청나라는 여진족들을 중국으로 이주시킨후 장백산 등 길림성과 흑룡강성은 조상의 발상지라 하여 신성한
땅이므로 "封禁地(봉금지)" 로 묶어 중국인의 출입을 금하니 사람의 인적이라고는 없는 무인지경이
되지만 빈 땅에 조선인 산삼 채취꾼이 도강하는 사례가 생기자 청나라 태종은 1712년에 오라총관
목극등을 보내 조선과 백두산 부근의 국경지역을 조사하고 국경선을 확정해 백두산 정계비 를 세웁니다.
조선은 참판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를 파견하는데 두 사람 모두 문관이라 말을 탈 줄 모르니 그 험한
길을 갈 수 없어 수행군관을 대신 보냅니다. 대구 망우 공원에 "백두산정계비" 모조품을 세웠는데 비의
제목을 “백두산정계비”라고 오해하는 분도 있지만 첫머리에 쓰인 글자는 “大淸(대청)” 두 글자 입니다.
비문에 총관 목극등의 이름이 새겨졌고 조선은 군관 이의복과 감사 군관 조태상이 대표로 새겨졌습니다!
청나라 오라총관 목극등과 조선인은 1,044년만에 처음으로 군관과 통관 김웅헌, 김경문이
함께 올라 백두산 남쪽에서 압록강의 수원을 찾아내고 또 동쪽 수원을 찾으니 토문강이라
이 물을 두만강의 지류라 생각하고 국경을 획정하고 정계비를 세웠던 것이니....
" 大淸... 西爲鴨綠 東爲土門 故於分水嶺上 대청 서위압록 동위토문 고어분수령상"
군관 이의복으로 부터 보고를 받은 접반사 참판 박권은 장계를 올리니 숙종실록에 보면 " 통관
김웅헌이 천지 이남을 우리 땅으로 주장하니 목극등 총관이 이의를 달지 않았다" 고
조정이 기뻐했던 것이니 혹시 세종때 4군 6진을 개척한걸 인정하지 않을까 싶어 걱정
했던 것으로 벼농사가 중요한 조선 조정에서는 백두산과 천지의 가치를 알지 못한 듯 싶습니다.
조선에서는 목극등의 부탁으로 압록강과 두만강 사이 목책을 세우면서 백두산 천지 남쪽 10리(4km
해발 2,150미터 (백두산은 해발 2,750미터) 지점에 세워진 백두산 정계비 의 동쪽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니고 송화강의 지류임을 발견하고는 문책이 두려워 백두산 정계비 보다 10리(4km )
남쪽에서 두만강으로 흐르는 지류 석을수 를 발견해 돌담과 목책을 세워서 국경을 표시하였습니다.
숙종때 이조참의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황지 토문강에 대해 물어본바 화어(華音, 중국말)로 두만강을
말합니다.(비변사등록 64책 숙종 38년(1712) 2월 30일)" 라 하였으니 백두산 남쪽 압록강과 두만강이
국경선이라! 접반사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목극등을 접대하려고 조선에서 정한“差官接待事宜別單
(차관접대사의별단)”에 보면 토문(土門)과 두만(豆滿) 은 같은 단어 이므로 주의해야 할 것이라 적었습니다.
택리지 함경도편에는 함경도가 두만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고 아방강역고 같은 경우도 토문강
은 두만강이다 라고 했으며 조선왕조실록도 토문강= 두만강 이라 했고 이익의
성호사설 이나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이며 역관 김경문으로부터 전해들은 홍세태의
유하집 백두산기에도 토문강은 두만강이라고 했으며 오늘날 서길수 교수도 같은 얘기를 합니다.
또 백두산 정계비 설치 당시 조선은 청나라가 두만강을 토문강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알고는“토문강은
두만강” 이라고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는 백두산(천지)의 가치를 몰랐으며 청나라가 조선
초기 국경선대로 하자고 할까봐 걱정하다가 세종때 북진해 얻은 4군 6진이 인정되어 두만강으로
국경을 정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했으니 함경북도 지방 관아에서도 두만강을 국경으로 관리합니다.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비(碑)를 세우자....(숙종실록 38년(1712) 5월 23일)
*** 오른쪽 아래가 산성하 귀족묘이고 중간 위쪽 산 언덕위에 환도산성이 보인다 ***
두만강(豆滿江) 은 백두산(白頭山, 2744m)의 동남쪽 대연지봉(大臙脂峰, 2,360m)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석을수(石乙水)를 원류로 하는데 명칭의 유래를 한청문감 漢淸文鑑 만주지명고
(滿洲地名考)에서 언급하고 있으며 또 고려강(高麗江)·도문강(圖們江)·토문강(土們江)·통문강
(統們江)·도문강(徒門江)으로 표기된 바도 있는데 “두만”은 만주벌의 머리에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주지명고에 의하면 두만강은 새가 많이 모여드는 골짜기라는 뜻인 여진어 투먼 싸이친(圖們色禽
도문색금)에서 색금을 뗀 “도문(圖們)”이라는 여진어(女眞語) 자구(字句)에서 비롯되었다고
했으며 한청문감의 동문유해(同文類解)에는 원나라 지방 관제에 만호(萬戶)라는 관직명이
있었는데, 여진어로 만호를 두맨이라 발음하며 이를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두만강이라고도 합니다.
'투먼강(한자: 图们江, 영어: Tumen river)' 이라는 명칭은 중국 측에서의 이름인데 러시아어에서는
'안개 낀 강'이라는 뜻의 투만나야(Туманная) 강이라고 하는데, 1972년까지는 만주어 이름을
따서 튜멘울라(Тюмень-Ула)라고 하였으나 70년대 중국-소련 국경분쟁후 연해주 일대의 중국어
및 만주어 지명을 모두 러시아어 지명으로 개칭하면서 두만강도 투만나야 강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접반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가 국경선을 획정하기 위해 청나라측 오라총관 목극등
과 교섭한 일을 조정에 보고한 장계 에는 한결같이 백두산(白頭山) 이 아닌 장백산(長白山)
또는 간혹 백산(白山)으로 적었는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조선 초기에서 중기
까지는 장백산이라는 표기가 많다가 조선 후기에는 거의 백두산이란 표기로 바뀝니다.
통일신라 국경선이 황해도~ 원산이고 고려 건국때 국경선이 평양~ 영흥이고 서희가 평안북도 일부
를 찾으니 조선초에 평북 삼분지 2와 함경남도 상당부분에 이르렀는데 세종때 최윤덕과 김종서가
대군을 이끌고 북진해 고구려 이전부터 천여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여진족 을 쫓아내고 4군6진을
세웠는데 여진족 후예들이 세운 청나라가 압록강~ 두만강을 인정했으니 조정은 대만족 이었습니다!
옛날 나라에서 영산에는 사람을 보내 제사를 지냈는데 백두산은 요나라, 금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남의나라 땅이니 제사를 지내지 못하다가 영조때 제사를 지내면서 백두산정계비
(국경선)가 백두산 남쪽 십리(4km)인지라 백두산에는 오를수가 없으니 남쪽 녹반치
(綠礬峙)봉에 올라 백두산을 바라보며 제사를 지냅니다(영조실록 43년(1767) 윤7월 신축)
*** 1861년 김정호가 작성한 대동여지도에 백두산이 보인다 ***
조선시대 관리들이 만포에서 건너다 보이는 고구려 국내성 유적과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들을
자기네 조상인줄 모르고 금나라 유적 으로 생각하고 지은 시들이 많은 데.....
우리네 성씨중 고구려 지역을 본관으로 하는 것은 진주강씨와 신라가 차지한
황해도 14개에 의주와 평양 등 단 2개에 불과하니 모두들 신라인의 후손 이라 여긴 탓일까요?
1800년에 정조 사후 조선인들은 수탈과 1869년의 대흉년으로 인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도망쳐 농사를 지으니 청나라는 1881년에 200년간 지속했던 封禁(봉금)을
풀면서 길림장군 명안과 흠차대신 오대징을 보내 개간을 시작하니 고종은 어윤중을
보내 백두산 정계비를 조사하니 마침 비문에 "東爲土門 (동위토문)" 이라는 글자를 확인합니다.
*** 1885년 고종은 최초로 토문강을 그리고 청나라는 석을수를 국경선으로 주장함 ***
두만강에서 토문강 사이에 "조선인이 월경해 사는 간도가 조선 땅" 이라 주장하니 청나라는
토문강과 두만강이 같은 이름이라며 대립하던중 이중하는 간도가 조선땅이라 주장합니다.
1885년 12월 6일 장계에서 토문강이 송화강이라면 송화강 동쪽에 위치한 길림과 영고탑
이 조선땅이라는 것이라 곤란하고 강희 임진정계등록을 보고는 토문강과 두만강
은 같은 강이며 목극등의 수계판단 착오임을 알고는 비밀 상소를 올린후 주장을 거둡니다.
*** 1885년이후 조선 고종의 주장을 반영한 1904년 박애관에서 나온 조선전도 ***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을 차지한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행사하게 되자 1907년에는 만주로 진격할 교두보 마련을 위해 "간도가 조선땅"
이라고 했다가... 1909년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맺는데 백두산 남쪽 두만강 지류인
석을수 를 국경으로 정하니 간도는 물론이고 백두산과 천지도 모두 중국령이 되었습니다.
*** 조선의 외교권을 가진 일본이 1907년에 간도를 조선령이라고 주장한 지도 ***
*** 1909년 간도협약시 중국 주장대로 두만강 지류인 석을수를 국경으로 정한 지도 ***
말갈족이 아닌 고구려인들이 백두산에 살았다는 기록이나 유물을 발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현재까지는 고조선 시대에 백두산 인근에서 사람이 거주한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며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만이 백두산 천지 달문에서 흐르고 나머지 압록강은 백두산
서남쪽 그리고 토문강과 두만강은 백두산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니 천지와는 무관합니다.
첫댓글 민족의 영산이 백두산이 두나라로 나누어져잇는지 많이 아쉽네요.
우리민족의 성산이지만
또 여진족의 성산이기도 합니다!
여진족(만주족)의 발상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