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3일 월요일 탐사
11시 30분
지하철 2호선 합정역 7번 출구밖에서 만난다.
아래 영상을 모두 시청하고 참석해야 됨.
애국 선교사묘역 기독교성지 탐사
https://youtu.be/EFZcNPnUmeo
호머 헐버트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https://m.youtube.com/watch?v=ut3XrzMlcWk
호머 헐버트 ㅡ 대한국인은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알버트 테일러 ㅡ3ㆍ1운동을 세계에 알린 대한민국의 은인
https://youtu.be/8HHmFbY_-JM
https://youtu.be/hPsXMxr2LY8
[조우석칼럼] ‘양화진’ 聖地 일꾼 김경래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외국인 선교사 145명 잠든 서울의 대표적 기독교 성지 개발ㅡ 故 한경직 원로목사와 손발 맞춰 기독교 금자탑을 가꿔ㅡ
(조우석 평론가·전 KBS 이사)
▲ 이야기는 당연히 100% 실화다.
한 원로의 개인사이자 한국기독교의 기록이다.
이야기는 196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서울 북창동에 있던 흥천교회가 새 예배당을 지으며 큰 빚을 졌다.
주일예배가 끝나면 사채꾼 아줌마들이 와르르 몰려들어 헌금을 챙겨가는 걸 신자들이 내내 가슴 아파했다.
경향신문 정치부장이던 신자 한 명이 자기 집을 팔아 교회 빚을 갚기로 결심했다.
교회 빚은 270만원. 자장면 한 그릇이 30원이던 시절에 집 한 채 값이었다.
정말로 자기 집 판 돈을 모두 헌금한 뒤 그와 가족은 교회 지하에서 내처 살았다.
1982년 그는 신문사 편집국장을 끝으로 신군부에 의해 해직됐고 사업을 준비할 무렵이었다.
뜻밖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가 그를 찾아왔다.
한국 교회의 어른인 그는 초면임에도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젠 세상일을 놓으실 때가 된 거 아닙니까?”
옆의 아내도 거들었다. “여보,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세요.”
그렇게 해서 그가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사무국장에 취임했다.
올해로 꽉 찬 40년째다.
누구 얘기일까?
기독교 평신도 중 기억해야 할 이름인 경향신문사 편집국장 출신 김경래 장로가 주인공이다. 현재 재단 부이사장, 만94세 현역이다.
그가 실무를 지휘했던 프로젝트 중 대박은 연인원 400만명이 운집했던 1984년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기독교100주년선교대회다. 미국 빌리 그레이엄 목사 등도 참석했던 그 대회야말로 한국기독교사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그걸 계기로 한국 교회는 위상과 자기정체성을 확인했고, 제2의 선교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당시를 ‘교회사의 황금시대’로 명명했던 신학자 정성구 박사의 말도 기억해 두자. 확실히 1980년대는 개인과 나라가 성장하고 교회도 빅뱅하던 기적의 시기였다.
이후 한경직·강원용·정진경·강병훈 목사 등 교계 지도자를 모셔가며 사업을 진행해 온 김경래 사무국장이야말로 교계의 숨은 일꾼이 맞다.
그 과정을 속(續)사도행전이라 말하는 이도 있다.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온 언더우드·아펜젤러를 기리며 1986년 인천 연안부두에 세운 기독교100주년기념탑을 비롯한 1989년 경기도 용인의 순교자기념관 건립, 1989년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창립 등이 그의 발자취다. 하지만 으뜸은 서울 양화진이 아닐까?
그곳엔 복음의 횃불을 들고 조선 땅을 찾은 외국인 선교사 145명이 잠들어 있다.
한국 개신교의 성지다.
난지도가 만들어지기 전 황량한 쓰레기 매립지였던 그곳을 한경직 목사를 모시고 그가 1983년 답사했다. 잡풀더미에 털퍼덕 주저앉은 한 목사가 눈물을 닦았다.
“외국 선교사들의 땀과 눈물 그리고 죽음을 그동안 우리 민족은 너무 잊고 살아 왔습니다.”
양화진 프로젝트는 그렇게 발동이 걸렸다.
재계도 참여했다. 1986년 재계 초청 설명회에서 현대 정주영·대우 김우중 회장이 각각 2억원의 헌금을 약속하면서 목표액 7억원을 삽시간에 채운 기록도 있다.
왜 경제계 인사들이 기독교 일에 지갑을 열었을까?
김 장로의 진솔한 설명 덕이 아니었을까? “양화진은 그 어느 곳보다 우리나라 근대사 1번지입니다.”
나는 꼭 1년 전 김 장로에게 첫 인사를 드렸다. 그때 내게 들려준 말을 재계 총수들에게도 했으리라.
사실 구한 말 가망 없던 이 나라가 이만큼 온 것 자체가 세계사적인 기적인데, 그 8할이 교육·의료·선교를 망라한 외국선교사의 헌신 덕이다. 여기서 궁금한 게 하나 있다.
한 목사는 어떻게 40년 전 김 장로를 찾아갔을까? 뭘 믿고 큰일을 맡겼을까?
비밀은 뜻밖에도 10여년 전 영락교회에서 풀렸다.
김 장로가 교회 강연을 간 자리에서 몰려든 권사들이 “우리가 바로 흥천교회 빚쟁이였다”는 깜짝 고백을 했다.
그들은 교회 빚을 몽땅 갚은 한 신자의 스토리까지 자기네 교회 한경직 목사에게도 전했다. 김 장로 스카우트는 그 뒤의 일이다.
자, 마무리다. 양화진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양에 차지 않는다.
면적 자체가 너무 좁고 쾌적하지 않은 데다가 스토리텔링도 부족하다.
선교사 한 분 한 분의 가슴 뭉클한 스토리를 성지 곳곳에 심고, 그걸 유튜브로 TV 드라마로 퍼트려야 옳다. 더구나 양화진의 이웃도 기막히다.
얼굴을 마주 댄 절두산 성지는 천주교의 보물이 아니던가? 개신교·천주교의 성지가 다투지 않고 나란히 붙어 있는 건 전 세계적으로 유례가 아주 드물다. 아니 없다.
서울이, 대한민국이 품고 있는 두 보물을 어떻게 제대로 키울까?
김 장로의 바통을 이을 건 우리 세대다.
식사는
백채김치찌개 합정역점
서울 마포구 성지길 24
https://naver.me/5zo2wKM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