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 봉건전제 상태에 있던 중국의 대청제국은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부단한 침략을 받는 치욕을 당하고, 중화민족도 전대미문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중국의 혁명지사들은 전제정치를 하던 부패한 정부를 전복하고자 하였고 혁명을 선전하는 언론 매체가 등장하는 등 점진적으로 혁명 여론이 형성되었다.
1911년 8월 19일(양력 10월 10일) 우창봉기(Wuchang Uprising, 武昌起義)를 시작으로 계속해서 봉기를 선언했던 전국 각지의 혁명파는 결국 청 정부의 붕괴와 중화민국의 수립을 이끌어냈다(신해혁명).
1912년 9월 우창봉기 1주년을 맞아 임시대통령 위안스카이는 임시참의원에 '국경일 및 기념일 자문안'을 제출하면서 "우창봉기(1911. 10. 10.)일, 즉 양력 10월 10일을 국경일로, 남경정부(1912. 1. 1.)의 설립일, 즉 양력 1월 1일과 남북통일(1912. 2. 12.) 일, 즉 양력 2월 12일을 기념일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임시참의원이 위 자문안을 심의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가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날을 대혁명일로 삼고, 미국이 13개 주가 독립을 선포한 날을 국경일로 삼는 예를 매우 중요하게 고려하였고, 결국 위 자문안은 참의원 62명이 참석하여 50명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우창봉기는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수립 과정에서 중대한 작용을 하였으므로, 중화민국 수립 후 우창봉기가 발발한 양력 10월 10일을 새로 세워진 공화국의 국경일로 확정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쌍십절이 중화민국의 건국기념일로 유지되고 계승된 것은 우창봉기가 내포한 혁명의 촉발점으로서의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일정 기간 진행된 사건에 대한 세계 각국의 태도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그 출발일(촉발일)을 기념일로 지정하는 것이 일반적이고, 그 완성일(종료일)을 기념일로 정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개천절이바로건국기원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