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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104년 11월 10일_일반법회_반야심경6_박세훈교무님 설교.hwp
◆ 원기 104년 11월 10일 일반법회 / <반야심경 6>
◆ 설 법 : 박세훈 교무
◆ 타이핑 : 일반7단 이제선
◆ 다시보기 : 카페 - http://cafe.daum.net/jnyouth/974Q/2738
유투브 - https://www.youtube.com/watch?v=gRR0zQB8ras&list=PL8Zz6u3raIrzoUojtNhUaCVvoKd8ncFYD&index=2
오늘 여섯 번째. 오늘 마무리 하려구요. 그동안 못 들으셨어도 오늘 들으시면 반야심경 다 들은 걸로 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반야심경을 공부해 보는데요. 이제 마지막이니까, 제가 이거 한 장씩 나눠드셨거든요. 뒤장에 조계종에서 하는 한글반야심경이 있긴 한데, 제가 읽기에는 경산상사님이 하신게 너무도 좋아서, 경산상사님이 쓰신 것을 한번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반야심경 하실 때마다 잘 이해가 되실 겁니다. 한번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관자재보살이 속 깊은 반야공부로서 낙원세계인 저 언덕에 도달하려는 수행과 적공을 할 때, 형상있는 육신과 정신작용인 수상행식이 모두 텅 비어있는 반야자리를 비추어보고 고통과 역경으로부터 자유를 얻었나니라. 사리자야! 온갖 괴로움을 일으키는 현상인 색과 이상의 세계인 허공같은 반야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허공인 반야와 형색인 형상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형색이 있는 현상이 바로 허공과 같은 반야이며, 허공인 반야가 바로 삼라만상인 현상과 둘이 아닌 것이니라. 사리자야. 모든 법이 텅 빈 반야의 진리는 어디로부터 태어나지도 아니하고 없어지지도 아니하며, 더럽혀지지도 아니하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더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로다.
반야의 진리를 깨달아 실천하여 들어가면 육신과 수상행식의 정신작용에도 걸리고 막힘이 없는 것이요, 안이비설신의 나의 육근에도 걸림이 없고 색성향미촉법의 외경에도 걸리고 막힘이 없으면 안식의 세계에도 걸리고 막힘이 없고 나아가서는 의식의 세계에도 아무런 걸림과 막힘이 없이 자유로울 것이요. 무명도 없으며 무명이 다 맑아졌다고 하는 관념도 없으며, 나아가서는 늙어 죽음도 벗어났으며 또한 늙고 죽음을 해탈했다는 흔적도 없는 것이로다.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시기 위하여 설하신 고집멸도의 사제법에도 걸림이 없는 것이요, 깨달음에도 걸림이 없고, 실천하여 얻음에도 걸림이 없으며, 총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에 걸리고 막힘이 없나니라.
보살은 반야의 진리에 표준하여 이상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공부를 하므로 마음에 걸리거나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나니라. 반야에 표준하여 공부를 하면 그릇된 생각을 멀리 떠나게 되고, 나아가 번뇌망상과 근심걱정을 벗어나는 반야의 진리에 합하게 되나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반야의 진리에 표준하여 불지에 도달하였으므로 대원정각을 성취하였나니라.
그러므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를 성취하려는 주문은 참으로 크게 신비한 주문이며, 크게 밝은 주문이며, 더 이상 위가 없이 높은 주문이며,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주문인 것이니라. 이 주문을 많이 독송하면 갖가지 고통을 능히 제거할 수 있으며, 이 주문의 공덕은 진실하여 헛된,말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반야바야밀다를 성취하는 주문을 말하리라. 곧 주문을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한번 읽으시니까 좀 쉽죠? 한문으로 하실 때 보다 훨씬 나으시죠?
지난번에 12연기까지 하셨는데 12연기가 좀 어려워요, 불교에서. 그래서 한번 복습을 해보고 오늘 끝까지 마쳐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산종사님께서 십이연기 법문을 하시면서 두 문구로 딱 정리해주셨어요. 아까 법문에도 나왔는데. 12연기는 어떻게 공부 표준을 삼아야 된다? 12연기라고도 하고 12인연이라고도 하는데요. 중생은 십이연기에 끌려다니는데, 보살은 십이연기를 굴리고 다닌다. 그래서 반야심경에 나오는 십이연기는 중생의 십이연기예요. 끌려다니는 십이연기. 예. 내가 한 번 들어가면 12단계까지 쭉~ 가요.
첫 번째가 뭐였죠? 중생의 12연기는? 무명(無明)이잖아요, 그쵸? 무명의 한 생각 때문에 그 다음에 뭐가 나오죠? 행(行)이 나오죠? 보지 말고 이야기해 보세요. [무명-행] 여기까지해서 전생이에요. 그러니까 요약해놓은 거예요.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어리석은 한 생각이 들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 쌓여서 일생이 된 거잖아요. 여기계신 분들은 아니지만은. 중생들의 삶을 요악해보면, 어리석은 한 생각이 들어서 어리석은 행동을 해서 한 평생 사는 거예요. 무명->행, 이것이 과거생. 부처님께서 과거생을 이렇게 표현하신 거예요. 부처님이 삶을 보니까 어리석은 한 생각이 들어서 어리석은 행동으로 나오는 것.
그래서 생성이 되는 것이 식(識)이예요. 식이라는 것이 뭐냐하면, 전생에 내가 지었던 모든 것들이 저장하는 것이 이 식인 거예요. 우리가 죽어갈 때 갖고 가는 것이 이 식인 거예요. 죽어갈 때 내가 그동안 지어왔던거 하나가 남아있는데 그것이 식이예요. 이 식에 태중에 들어가면 입태라고 해요. 우리가 죽고 나서 내가 지어놓은 바는 그대로 가져가잖아요. 다 못 가져가도. 재산은 못 가져가고 외모는 못 가져가도, 내가 전생에 지는 것은 가져가는 거예요. 저 사람한테 한 대 때렸으면 그건 가지고 가요. 나중에 한 대 맞아야 되니까. 예. 그것을 이제 식이라고 하잖아요. 그 식이 우리가 죽고 나면 태중에 이제 들어가는 거죠. 그렇죠?
그래서 식이 태중에 들어가면 그 다음에 뭐가 생기죠? 명색(名色). 명색이라는 것은 몸과 마음. 색이 몸이고 명이 마음이에요. 그런데 마음은 수상행식으로 하죠.
몸과 마음을 좀 더 세분화 하면 뭐가 되죠? 육입(六入)이 되잖아요. 육근(六根)-눈·코·귀·입·몸·뜻(생각)- 6가지로 분화가 되요. 우리가 전생에 지어놓은 바를 가지고 그 전생에 지어놓은 바가 식으로 형성이 되고, 그 식이라는 것이 몸과 마음으로 분화가 되요, 두 가지로. 그러다가 요새는 초음파사진 찍어보면 눈 코 귀 다 나오잖아요. 그때가 이제 육입인거예요. 여기까지 우리가 출생하기 전에 눈코귀입이 다 생성이 되잖아요? 여기까지가 태중이에요.
그 다음에 뭐가 되죠? 세상에 태어나잖아요. 세상에 태어나면 빛도 보고. 요새는 다 병원에서 태어나니까, 병원의 그 찬 공기를 느끼겠죠, 여러 가지. 그것이 이제 촉(觸)이예요. 어머니 태중에 있을 때는 못 느끼던 것이. 촉. 촉이라는 것은 느낌. 눈으로 들어오는 느낌, 코로 들어오는 느낌, 입으로 맛보는 느낌이 있잖아요-촉.
그 다음에 뭐가 생기죠? 눈으로 보고, 귀로 정보를 듣고, 입으로 말하고, 냄새 맡고 하면 뭐가 생겨요? 좋고 싫음이 생겨요. 좋고 싫음 그것이 수(受). 싫은 것은 고수(苦受), 좋은 것은 낙수(樂受), 좋지도 싫지도 않는 것은 불고부락수(不苦不樂受). 세 가지 중에 하나예요. 지금 제 목소리를 듣고 싫다는 사람도 계실 거고 졸리다는 분도 계실 거고 좋다는 분도 계실 거고. 그렇지 않아요? 제 목소리가 들리는 것은 촉이에요. 그렇쵸? 그 촉에 대해서 일어나는 반응이 수예요.
그 다음에 뭐가 나오죠? 애(愛)가 나오죠. 애라는 것은 제가 한마디 하면 제 목소리에 애를 느끼는 사람이 제 정토겠죠? 목소리 좋아해가지고. 그것이 심해지면 갈애(渴愛)라고 해요, 갈애. “어~ 목소리 좋네. 계속 듣고싶네” 가기 전에 취(取)라는 것은 “이 목소리를 나만 들어야겠다, 취해야겠다” 하는 것이 취예요. 그 다음에 유(有). 유라는 것은 그것을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거예요, 계속. 여기까지를 현생으로 본 거예요.
그 다음에 다시 또 태어나요- 생(生). 그 다음에 늙어 병들어요-노사(老死). 미래생.
그래서 이제 이것이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을 표현한거예요. 그런데 현재생을 좀 더 상세하게 표현한거죠. 여기까지 지난번에 배우셨어요. 기억나세요? 훌륭하신 분들이라 다 기억나실 꺼예요. 이 십이연기가 매번 물어보면 다 잊어버려요. 그래서 다시 말씀드린건데, 우리 교도님들은 어디가도 십이연기 설명하실 거예요. 불교에서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 중 하나가 십이연기인데.
이렇습니다. 중생은 십이연기에 끌려 다니고, 보살은-우리 교도님들은 십이연기를 굴리고 다녀요.
끌려다니니까 첫 시작이 뭐예요? 무명으로 시작해요. 굴리고 다니시는 분들은 뭐로 시작할까요? 굴리고 다니시는 분들은 지혜로 시작해요. 무명으로 시작하면-심지는 원래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이 없지만,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으로 살아가시는 거고. 지혜로 시작하시니까 자성의 정혜계로 살아가시는 거고. 그러니까 이제 무명으로 가면 어리석은 행을 하지만, 이 지혜로 가면 행을 복을 심고 복을 짓겠죠. 그러면 어떤 식이 형성이 되겠어요? 그래서 내생에도 불법을 공부해야겠다는 식이 생길텐데. 무명으로 산 사람은, 현생에 가난하게 살았으니 내생에는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신념이 강하게 들면 돈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겠죠. 그런데 여기 계신 분들은 오래 공부를 하셨지만 좀 부족한 것 같으니 다음생에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그 마음이면 태어날 때 식이 달라져서, 그것을 이제 서원이라고 하잖아요. 부모를 택하는데 색정으로 택하는 사람은 내가 가지고 있는 욕심으로 부모를 찾아가는 거라 잘못되면 축생계로 갈 수가 있어요, 전도 되가지고. 왜냐하면 편하게 먹고 살아야겠다~하면 돼지가 좋아 보이잖아요. 돼지가 편하게 먹고 살잖아요. 그러면 거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다음생에도 큰 공부를 해야겠다 하면 설사 가난하더라도 불법과 인연이 있는 부모한테 가겠죠. 식에서 차이가 생기는 거죠, 그 식이. 명색하고 육입은 다 똑같잖아요. 몸이 완성되고 육근이 생기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자동화 과정이니까. 촉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교당에 있으면 다 제 목소리 들어야 하잖아요. 안 들을 수 없잖아요. 촉도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없죠. 12연기라는 것이 그 동안에 악순환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중생의 한 무명이 생해서 계속 윤회를 한다, 안 좋게.
그런데 그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려면 어디를 끊어야 하는가? 지난번에 배웠잖아요. 어디를 끊어야 한다고 했죠? 이제 수에서 애로 가는 것을 끊어야 되는 거예요. 촉에서 이제 수가 나오잖아요. 수가 나오면 좋다 싫다가 나와요. 그렇죠? 그러면 좋다 싫다가 나오는데 ,좋다 싫다가 나오면 중생들은 좋은 것은 집착하고 안 좋은 것은 피하려고 하고. 좋은 것에 집착하고 그 집착한 것이 사라지면 괴로워하고 안 좋은 것은 피하려고 하는데 안 피해지면 또 괴로워하고. 그래서 중생은 결국 고수도 낙수도 다 고(苦)다. 그렇찮아요. 좋은 것이 있는데 그 좋은 것이 항상 있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그 좋은 것이 나중에는 괴로움이 되요. 돈이라는 것이 항상 있지 안잖아요. 그러니까 나중에 고통으로 변하고. 고통은 또 고통이고. 그래서 부처님께서 고통이라고 한 것은 중생들은 힘이 없으니까 즐거움도 결국은 고로 가고, 괴로움은 계속 괴로움으로 가서 결국은 고다. 그렇게 해서 이제 부처님이 말씀하신 고는 그런 의미예요. 그 고에서 벗어나는 것이 수에서 애로 갈 때 마음공부가 들어가는 거예요. 수에서 애로 들어갈 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랑하고, 싫고 좋은 것은 어떻게 내가 마음으로 받아들이느냐.
그래서 오늘 읽으신 법문에 나온 것이, 뭐라고 나왔죠? 가장 중요한 공부가 뭐다? 애취유다. 십이연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애취유다. 다른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요.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야 해요. 하지만 우리가 마음공부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애취유다. 그래서 십이연기의 공부의 핵심은 애취유다. 그래서 애취유를 하시면 십이연기를 굴리고 다니고 그래서 애취유를 잘못하시면 십이연기에 끌려다닌다.
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한 가지 일을 할 때는 반드시 삼세가 연결이 되요. 제가 지금 설교를 합니다. 설교를 하는 것도 과거 현재 미래가 연결되어 있거든요. 제가 과거에 반야심경 설교를 많이 했으면 지금 반야심경 설교를 잘 할 것이고, 연습을 많이 했으면. 지금 또 반야심경 공부를 열심히 하면 다음 생에도 잘 할 것이고,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내가 하는 한 행동이 삼세가 연결되어 있어요, 계속. 이것이 꼭 과거생 현재생 미래생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가 지금 이 순간 계속 연결되어 있는 거예요. 지금 내가 설교를 하는데 들으면 현재생이잖아요. 잘 들으면 다음 생에 들었을 때 훨씬 이해가 잘되는 거고. 그러면 또 반야심경이 또 듣고 싶을 거고. 그러니까 내가 하는 모든 행동은 삼세가 연결되어 있어요. 삼세가 같이 돌아가요. 그것이 인-과=인-과=인-과 끝없이. 그것을 잘하는 것이 애취유 공부를 많이 하는 거죠.
내가 많은 소집품 중에서도 제일 가까이 두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보시고. 오늘 집에 가서. 그 소지품을 많이 두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 소지품을 관리하는데 시간이 많이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법정스님은 누가 난 화분을 선물로 줬는데 난 화분 때문에 어디 외출도 못하고 어디 못가서 나중에 그것을 다른 분에게 줬다고 하더라구요. 이 애취유 공부를 잘하신 거죠. 내가 여기에 딱 걸려버린 거예요. 요새 애완동물 키우면 또 그럴 경우 있잖아요. 애완동물 때문에 어디 못가는 분들이 계시더라구요. 저는 애완동물 키우는 것을 찬성하거나 반대하는 것은 아닌데. 거기에 묶여버리는 아무것도 못하게 되고. 내가 소지품을 위해 사는 것인지, 소지품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인지. 내가 어떤 데에 시간을 투자하는지, 내가 어떤 물건과 항상 가까이 있는지를 보면 내 애취유가 어떻게 형성이 되고 있는지. 그러니까 교전을 가까이 하시는 분들은 교전에 애취유가 되겠죠. 그래서 불보살의 애취유가 있고 중생의 애취유가 있어요. 우리 교도님들은 어떻게 애취유를 만들어 가고 계신지?
그래서 한 장 넘겨보면, 이 애취유 공부를 잘하려면, 사랑하되 사랑에 붙잡히지 말고. 사랑하되 사랑에 붙잡히지 말라는 것은, 한 사람이 사랑을 하면 그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본능이에요. 예전에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이런 광고도 있었잖아요. 사랑이 어떻게 변하냐고 하는데 사랑이 안 변하는것이 정신병자예요. 사랑은 변할 수밖에 없어요.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데 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겠어요? 사랑, 마음이 변하는 거죠. 그것을 인정 못하면 그게 애취유에 걸린 거예요. 사랑하는 것이 지금 여기에 있지만 계속 변한다. 그러니까 자식을 볼 때도 자식이 지금은 내 말을 잘 들으니까 좋은데, 자식이 한 마디씩 말대꾸하고 내가 하란대로 안 하면 애취유 공부가 잘못된 거죠. 집착한거예요, 어렸을 때 모습, 내 말 잘 들었을 때의 모습. 자식은 자식의 인생, 나는 내 인생 가는 것이 애취유를 넘어가는 거죠. 가면 갈 때가 됐나보다, 오면 올 때가 됐나보다~ 이러면 좋겠지만. 저도 말은 잘하지만, 저도 저를 보니까 돈이 안 생겨서 그런가 봐요. 재색명리에 대한 것은 욕심이 많이 안 생기는데 자식에 대해서는 쉽지 않더라구요. 저도 이제 자녀들하고 함께 못해주는 시간이 제일 걸리거든요. 저를 보면 항상 하는 말이 언제오냐~ 이런 이야기인데. 그래도 안암교당은 카페가 있어서 아이들이 설교영상을 보면서 하하하. 간접공부? 예. 공부는 하기 싫은데 아빠 한번 보려고 카페에 와서 설교 보다가 좀 젖어드는 것 같습니다. 애취유 공부, 집착하지 않는 거죠. 편안하게 보내주고 편안하게 받고. 취하는 데도 사로잡히지 말고.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에 꼭 붙잡지 말고 집착하지 말고. 이것을 정견이라고 합니다. 정견. 그것이 이제 무상의 이치잖아요. 모든 것은 변한다. 그리고 인과의 이치- 주면 받는다. 그러니까 나한테 가면 갈 때가 되었나보다, 오면 올 때가 되었나보다 못하고, 왜 이 고통이 나에게 오지? 그것은 인과를 안 믿는 거잖아요. 내가 지었으니까 온 거지. 그렇잖아요. 나한테 오는 것에 대해서 불만이 있다는 것은 인과를 신앙하지 않는 거죠. 내가 지었으니까 오지, 안 지었는데 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정견을 하면 무상의 이치- 모든 것은 변한다. 내 모습도 변하고, 오는 것에 대해서는 올만 하니까 왔다, 내가 지었으니까 왔지~ 그러니까 오는 것도 편안하게 받고 가는 것도 편안하게 보내고 하는데. 이것이 정견이라는 거죠. 애취유 공부. 아시겠죠? 그렇게 하시면 십이연기를 굴리고 다니는 사람이고, 그렇게 못하고 맨날 뭔가 마음이 불편해, 나한테 뭔가 오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해, 왜 내 인생은 이런가, 하면 이제 십이연기에 끌려 다니는 거죠. 항상 원망으로 살아가는 것이 십이연기에 끌려 다니는 거고. 감사로 살아가는 것은 십이연기를 굴려가는 거예요. 내 자신을 봤을 때 감사생활을 더 많이 하면 십이연기를 굴리고 다니신 거고, 원망생활을 많이 하면 십이연기에 끌려 다니는 거죠. 원망생활은 수용을 못하는 거예요, 나한테 오는 것을.
그 다음 오늘 배울 것이. <무고집멸도>
무고집멸도는 뭐냐면, 부처님께서 설하신 고집멸도 설법이에요. 이것은 설명을 안 드려도 아실 것 같으니까. 세상은 모두 고통인데 그 고통은 집착에서 오고, 그 집착을 멸하는 것이 열반이고, 그 열반은 팔정도-8가지 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이 법문이 부처님의 사제법문인데. 이 부처님의 법도 없는 것이다~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공부를 하다 보면 법에 얽매이는데, 이 반야심경은 계속 공하고 무가 반복되거든요. 이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설하신 고집멸도 사제법에도 걸림이 없다, 거기에도 집착하지 말아라. 법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되는데, 하물며 법 아닌 것에 집착하면 얼마나 괴롭겠어요?
예수님도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느냐?> 예수님 당대에, 예수님도 항상 혁신을 하신 분이시거든요. 유대인들이 이제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율법주의예요. 법에 상당히 집착했어요. 그러니까 안식일을 어떻게 해서든 지켜야하고 안 지키는 꼴을 못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께서 한마디 한 거예요. 안식일을 못 지키면 비난하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럴수도 있다고 하시는 건데, 그래서 하신 말이. <야!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냐~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냐? 안식일에 집착하지 마라.> 똑같은 의미죠?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고, 그것을 부처님은 무고집멸도.
천연스님이라는 분이 계세요. 이 천연스님이 어느 절에 갔는데, 날이 너무 추워요. 어느 겨울에. 추워가지고 그 절에 있는 스님이 막 추위에 떨고 있어. 그러니까 이 천연스님이- 다행히 그 불당의 불상이 나무였나 봐요. 그 불상을 뜯어다가 도끼로 패가지고 불을 땠어요. 그러니까 그 절 주지스님이 막 뭐라고 한 거예요. 제가 보기엔 좋으면서도 그랬겠죠, 따뜻하니까~, 그쵸? 저 같으면 저는 중생이라 좋아했을 거 같아요. 불을 때면서 <어떻게 불상을 때냐>고 하니까 <산부처님을 위해서 불상을 땠고, 산부처님이 더 중요한거 아니냐? 산부처님 살리려고 불 땠다>. 맞잖아요~ 불상은 살아있는 부처님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천연스님과 그 절 주지스님은 산부처잖아요. 산부처님 살리려고 불 땠는데 뭐가 문제가 있냐~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이제 대답을 못하잖아요. 그러면서 나무 불상을 다 때고 나니까 이제 태운 재를 막 뒤지는 거예요. 그래서 그 주지스님이 <뭘 찾느냐> 하니까, <사리 찾는다>고. 아 그러니까 이 주지스님이 <아니 나무부처님한테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아 그러면 왜 아까 나무부처님 땔 때 그렇게 뭐라고 했냐>고. 예. 하면서 이렇게. 하하하.
이것이 불법에 얽매이지 말라는 거죠. 그런데 대종사님은 한 단계 더 나갔어요. 우리가 집착하는 것도 유인데 이 집착하는 것 가운데 법도 있어요. 법도 유예요. 좋은 것 같지만 그것도 집착하면 안 좋거든요. 왜? 집착하면 병이 되요. 그래서 이 유를 무로 가야 되요. 무고집멸도. 그렇죠? 다시 말하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냐?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느냐?> 예수님께서 그랬죠? 그것이 유에 집착하지 말고 무로 가라는 이야기에요. 그런데 대종사님은 여기서 한발 더 갔어요. 여기[무]에서 다시 유로 나와요. 유->무로 가는 여기까지는 과거 도인이에요. 아니 이렇게 해가지고 추울 때마다 불상 다 때면 절에 남아있는 불상이 어디 있겠어요? 이렇게 살면 안 되잖아요. 이것도 무에 집착한거다. 유에 집착해서 무가 중요하다고 했더니 또 무에 집착을 하네~ 그래서 모든 게 없다, 필요 없다, 불상도 필요 없다, 이렇게 되 버렸어요, 세상이. 그러니까 대종사님은 다시 없는 자리만 밝히는 게 다가 아니다, 그 없는 자리에서 다시 유로 나오는 것이 진정한 유다. 유에서->무로가고, 무에서-> 다시 유로 가는 거. 이것이 대종사님 법의 위대함인 거죠. 그래서 대종사님은 사업성적 만들었잖아요. 사업성적 만들고 법사님 따로 있고 법호인 따로 있잖아요. 그거 만들면 사람들이 또 너무 있는 자리에 집착할 것 같지만, 없는 자리에 빠지면 세상의 발전이 안 나와요. 다 없다 없다 해버리면, 무자리에. 그러니까 유에서, 유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성자들이 무를 강조했더니, 또 무에 집착해서 무애행만 해. 다 모든게 없다, 수행도 필요 없다, 인과도 필요 없다, 이러니까 또 그 무에서 다시 -> 유로 나온 거예요. 그래서 무에서 나온 유가 진정한 유인 거예요. 그냥 유는 집착의 유고. 또 그냥 무는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무예요. 그냥 다 필요 없다, 수행도 필 없다, 다 없는 거다. 우리 어린이들이 어린이법회와서 유타원님에게, 우리가 불성자리에서는 같으니까 말 놓읍시다 이렇게 해버리면 어떻게 해요? 예전에 불가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어요. 그러면 깨쳤다고 그랬어요. 그러면 세상이 또 법도도 없고 예절도 없잖아요. 하지만 그 없는 자리에서 다시 또 차별을 나투는 거예요. 그게 유죠. 여기까지 가야하는 거예요, 원불교는. 과거의 불교는 무자리에 많이 집착을 했죠. 거기에서 다시 유가 나오니까 힘든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제 무 가기도 힘든데 무에서 또 다시 유를 만들어야 하니까. 우리는 거기까지 가야겠죠. 유->무->유. 이게 이제 최고의 단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고집멸도라고 해가지고 다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죠. 거기서 다시 고집멸도를 만들어야 해요. 무고집멸도에서 다시 유고집멸도로 가면 그것이 참다운 법인데 고집멸도에만 집착하고 있거나, 고집멸도가 없다는 데에만 집착하면 그것도 문제인거죠.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지(智)라는 것은 깨달음이잖아요. 깨달음에도 걸림이 없고. 무득(無得)-얻음에도 걸림이 없고. 그러니까 일원상의 진리, 법신불이라는 것은 왜 힘들게 생각 되냐면, 얻을수 없는 것을 얻어야 되요. 역설이죠. 이게 화두인 거예요. 얻을 수 없는 것을 얻어야 되니까 힘든 거죠. 깨달음에도 걸림이 없고 얻음에도 걸림이 없으며,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총체적으로 말하면 모든 것에 걸리고 막힘이 없나니라. 이뜻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걸리고 막힘이 없는 것을 세 가지 자유라고 경산상사님께서 말씀하셨거든요. 명암자유, 능졸자유, 거래자유.
출가위 되신 분들은, 이제 여래위 되신 분들은 명암자유(明暗自由)-어두울 자리에 어둡고 밝을 자리에 밝을 수 있는 것. 우리 법사님들 나이가 드시면 아는 게 많아지잖아요. 저도 조금씩 자리가 올라가면서 아는 게 많아져요. 그러면 지적하고 싶은 게 많아요. 집안에 며느리가 들어오면 살림에 대해서 모르는 것 같아서 자꾸 지적을 해준다거나 이렇게 되면. 그러니까 알아도 모른채 할 수 있는 것이 힘인건데, 아에 모르는 것은 정말 힘이 없는 거고, 아는 것은 조금 힘이 있는 거고, 알아도 모른채 하는 것은 아까 유->무->유까지 여기까지 가는 것이 명암자유, 능졸자유(能拙自由). 대종사님이 일제 탄압을 받을 때 일제 순사들이 대종사님을 한국의 간디라고 생각하니까 일제한테 가서 촌영감처럼 했데요. 그랬더니 일제에서 마음을 놓은 거죠. 아~ 원불교 지도자 별 거 아니네? 이게 이제 몰라서 정말 그러셨겠어요? 모른채 하신 거죠. 명암자유. 이것이 능졸자유. 재주가 있는 사람은 그 재주에 묶여서 그 재주있는 것만 자꾸 하려고 해요. 그것도 놓는 것-능졸자유. 그리고 마지막으로 거래자유(去來自由)-생사자유 하는 것이 이제 이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는 자리인거죠.
여기까지가 증득품이였어요.
그래서 진리품은 모든 것이 없다고 해서, 공자리를 강조한거에요. 그것이 청정법신불 자리, 반야의 실상 자리고. 이제 증득품이라는 것은 진리를 증득하면 이러한 경지가 나타난다. 진리를 증득한 것은 원만보신불 백억화신불이예요. 원만보신불은 그 법력으로 나투는 거죠. 백억화신불이라는 것은 중생 사람사람에 근기에 맞게 법이 나가는 것이 백억화신불인데, 그게 이제 증득품의 내용이고.
그 다음에 배울게 수행품이예요. 반야를 증득해가는 과정.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해석해보면.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이예요, 앞에 보살. 보살은 그 반야의 진리에 표준하여. 보살은 나도 깨닫고 남도 깨닫게 할 수 있는 사람을 보살이라고 해요, 보리살타가. 자각각타(自覺覺他)라고 해서. 그러니까 보살은 반야의 진리에 표준하여 이상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공부를 하므로. 그러니까 보살공부를 하는데 어디에 공부를 하냐? 반야바라밀타에 의지해서 공부를 해요. 반야바라밀파가 뭐라고 했죠? 반야는 근본 진리. 그리고 바라는 저 언덕이예요, 인도말 저 언덕. 왜 인도에서 저 언덕이라는 개념이 나오냐면 인도에 겐지스강이 있으니까 강 너머에 뭔가 좋은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거예요. 그래서 저 언덕. 저 언덕 피안의 세계, 우리가 원하는 열반의 세계. 바라는 열반의 세계, 반야는 지혜. 밀타는 건너간다=마음공부. 그러니까 <반야바라밀타라는 것은 근본진리를 통해서 저 열반의 세계에 건너간다> 라는 뜻이예요. 그러니까 보살은 여러 가지가 의지할 수 있지마는 보살이 돈에 의지하겠어요? 명예에 의지하겠어요? 보살이 의지하는 것은 반야바라밀타에 의지하는 고로, 이 뜻이 됩니다.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타에 의지하는 고로. 반야바라밀타에 의지하니까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다. 반야바라밀타=일원상의 진리, 법신불에 의지하니까, [심무가애(心無괴碍)]서 과가 한자 찾아보면 괴라고 나와요. 심무괴애. 그런데 이것은 옛날에 괴로 읽었고 지금은 가라로 읽어요, 과나. 보통 가라고 읽어요, 심무가애. 가하고 애에 걸리고 막힘이 없다는. 심무가애(心無괴碍)-마음에 걸림이 없고/ 무가애고(無가碍故)-걸림이 없으므로/ 무유공포(無有恐怖)-두려움이 없어서/ 그런데 우리가 보면 여기 계신 분들은 보면 걸림이 없을텐데 간혹 한번씩 걸림이 있잖아요? 그 걸리는 게 어떤 거세요?
제가 다 적어놨는데, 대게 이 세가지중에 걸려요. 육신- 내가 오늘 감기 들어가지고, 몸이 안 좋아서, 보통 이야기 시작할 때 이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육신이 아픈 것이 핑계가 많이 되죠. 우리 수행을 할 때 많이 걸려있어요. 내가 아픈데 저걸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인연에 걸리잖아요. 오늘 법회 못 오신 분들 중에서 누군가와의 약속, 여러 가지 관계 때문에 못 오는 경우가 많이 있죠. 저도 제 자녀에게 많이 걸리잖아요. 예. 인연에 걸리고. 그리고 마음버릇에 걸려요. 마음버릇이라는 습관. 과거 내 전생부터 해온 습관이 있잖아요? 그 습관이 선입견을 만들어요. 그 선입견에 걸려서 이것이 지금까지 내가 지어온 식이 되는 거예요. 식. 숙세의 업이 되는 거죠.
이 세 가지에 걸림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어져요. 그런데 이 세가지에 걸림이 있으면 두려움이 생겨요. 우리가 사람들 협박할 때 가장 많이 협박하는 게, 돈으로 협박하고. 너 말 안 들으면 자녀 어떻게 한다고 하면서 협박하잖아요.
제가 이제 심무가애 무가애고를 어디서 제일 많이 쓸까 보니까 보이쉬피싱에서 많이 쓰는 거 같아요
통장의 돈을 모두 빼서 집 안 냉동실에 넣으세요, 이런 말이 보이스피싱에서 많이 하는데. 전화를 하면 여기에 10명중에서 5명은 전화를 끊어요. 5명은 전화를 들고 있데요. 그래서 나머지 5명은 대화가 되는데. 그 다음에 자기가 형사라고 하고 나서, “나는 형사인데 통장의 돈을 빼서 모두 냉동실에 넣어라~” 하면 5명은 끊고 5명은 들고 있데요. 그 다음에 하는 것이, “당신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이용되고 있으니까, 범죄에 연루되기 전에 돈부터 찾아서 안전한 곳에 두시고, 자세한 건 만나서 애기하자”고 하면 5명 중에 4명은 끊는데 그 중 1명은 또 한데요. 그리고 집 비밀번호까지 알려주면 형사가 그 약속한 장소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집으로 가서 돈을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왜 냉장고에 넣어놓으라고 하면 냉장고가 제일 찾기가 쉬워서 하는건데, 일년에 여기에 3만명이 걸려들어 간데요, 형사통계를 봤더니. 그리고 1년에 4천억원이 이 돈으로 나간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보기에는 심무가애 무가애고예요. 돈이 있으니까 공포가 생기잖아요. 니 돈 지금 없어질지 모른다고 하다고 하니까 이것이 바른것인지 뭔지도 모르고 돈을 찾아버리는 거잖아요. 그쵸? 내 마음에 걸림이 있으면 걸려들어가는것 같아요. 돈에 대해서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으면 1원 한푼도 없어지면 안 되니까 그 두려운 마음에 시키는 대로 하는 거고. 그리고 두 번째 많이 하는 수법이 “너의 자녀가 지금 납치되어 있는데..” 이런 식으로. 그러면 이제 자녀에게 전화 걸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돈을 보내는거. 결국은 우리가 심무가애 무가애고- 마음에 걸림이 있는데 그 걸림이 있는 주요 대상이 돈과 인연이라는 거죠. 예. 이 인연에 대부분 묶여있어요. 그것을 범죄자들도 알고 걸림이 있으니까 이용을 한다.
내가 없는 거 같지만 이 전화 한방에 마음이 흔들리잖아요. 그래서 심무가애-마음에 걸림이 없어야지 무가애고가 돼서 두려움도 없어진다는 거예요. 이 걸림으로 비롯해서 두려움이 생기죠.
그 다음에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반야에 표준하여 공부를 하면, 원리전도(遠離顚倒)- 전도라는 것은 앞과 뒤가 바뀌고 근본과 말이 뒤집히는 거예요. 몽상은 꿈속에서 헤매는 거죠. 그러니까 이 반야바라밀타 공부를 하면 전도몽상이 안되고, 원리-멀리 벗어나고 떨어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경열반의 자리에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삼세제불-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의-의지했다. 이 반야바라밀타에 의지했다. 다른 것에 의지하면 안 되는 거죠. 돈에 의지하는 것도 인연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반야바라밀타에 의지했기 때문에. 고(故)가 그거예요-했기 때문에. 삼세부처님이 반야바라밀타에 의지했기 때문에. 고가 그 ‘때문에’예요. 때문에 득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었다. 아뇩다라삼막사보리는 산스크리트어를 음만 따온 거예요. 정확히 뭐냐면 <아눗타라 사미아크 삼보디>예요. <아눗타라 사미아크 삼보디>인데, <아눗타라>는 뭐냐면 무상(無上)을 말해요. 그것보다 높은 것이 없는 것. 그러니까 무상이라는 것은 최고잖아요. 그 다음에 <사미아크> 삼막이라는 것은 진실이라는 것을 말해요. 그리고 <삼보리>라는 것은 보리죠, 보리-깨달음. 그래서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것보다 더 최고의 깨달음을 그냥 <아뇩다라삼막삼보리>, 많이 나오잖아요. 쉽게 이야기하면 최고의 깨달음. 이것보다 높은 깨달음은 없는 것. 이것을 무상정등각이라고 합니다. 완벽한 깨달음. 그래서 삼세부처님들은 반야바라밀타에 의지했기 때문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까지가 수행품이에요.
그 다음에 오늘 마지막 나오는 주문품이에요. 넘겨보시면.
그래서 [고지반야바라밀다].
그래서 알아라. 그래서-고(故). 그러므로 지(知)-알라. 반야바라밀타는 시대신주(是大神呪)-이 주문은 크게 신령스러운 주문이고/ 시대명주(是大明呪)-크게 밝은 주문이고/ 시무상주(是無上呪)-무상이라는 것은 위가 없는 거잖아요. 이것보다 높은 주문은 없는 것이고/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무등등이라는 것은 상대가 없다, 견줄 대상이 없다, 무등등한 주문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최고의 주문이라는 말이에요. 예.
그래서 그 주문이 뭐냐? 그리고 이 주문은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일체 고통을 없애고/ 진실불허(眞實不虛)-그러니까 이 주문이라는 진실해서 허황된 게 아니다, 믿고 따라라. 허황된 게 아니다,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다./ 그래서-고설(故設). 반야바라밀타주. 그래서 이 반야바라밀타주가 설해졌다/ 이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에 즉설주왈(卽設呪曰). 그래서 한마디로 이 주문을 가르쳐 말하면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 라고 됩니다.
여기에 대해서 불교계에서 많이 서로 간에 오고가요, 그 앞에 거 하고. 앞에 거를 보면 <고설반야바라밀타주>를 <그래서 반야바라밀타주가 설해졌다>고 하는데 요새는 어떻게 하냐면 <그 반야바라밀타 상태에서 주문을 이야기했다>라고 해석을 많이 하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가 산스크리트어를 음역을 한건데, 뭐냐면 <가테 가테 바라 가테 바라 상 가테 보디 스바하>하 되거든요. 밀교에서는 이게 되게 중요한 거예요. 이것을 밀교에서는 진언이라고 하고 다라니라고도 해요. 무슨 천묘무슨다라니 많이 있잖아요? 주문을 말하는 건데. 주문이 길면 다라미, 주문이 짧으면 진언,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이것은 진언이죠, 짧으니까. <가테 가테 바라 가테 바라 상 가테 보디 스바하> 가테라는 것은 간다는 거예요, 가자! 가자 가자/ 바라 카테- 바라밀다심경할 때 바라예요. 저 언덕에/ 가테-가자/ 상이라는 것은 완전한걸 뜻해요. 온전하게 가자-상 가테./ 스바하. 스바하는 산스크리트에서 모든 문장이 끝났을 때 쓰는 말이예요, 보통. 그래서 내용을 이제 마치겠다, 종결하겠다고 해서 기독교로 따지면 아멘 같은 거예요. 기도 끝나면 아멘 하잖아요~ 그것처럼. 산스크리트어에스는 <스바하> 그러면 이제 이 경이 끝났다. 해석은 보통 어떻게 하냐면, 우리가 일심으로 비옵나이다 하는 것처럼, <원만하게 성취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 잘 되게 해주십쇼~ 이런 말이에요. 그러니까 <가테 가테 바라 가테 상 가테 보디 스바하> 라는 것은 가자 가자 피안으로 가자. 피안의 상-온전하게 가자. 보디-깨달음이잖아요. 깨달음이여! 스바하-원만하게 성취되리라. 이제 아시겠죠?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제사바하>를 할 때 이제 이렇게 생각하시면 되요. <가자 가자 열반으로 가자. 열반으로 온전하게 가자. 깨달음이여! 원만하게 성취되리라.> 스스로에게 이제 안심시킨 거죠. 이 주문을 외우면 온전하게 성취될 것이다. 이렇게 외우시면 되겠죠.
그래서 마지막으로 반야심경할 때 앞으로 이렇게 독송하시면 되요.
믿음을 가지고 독송해야 되요. 부처님께서 이 반야심경만 외우면 열반으로 갈 수 있다고 했으니까 이 반야심경을 외우면 열반으로 갈 수 있다는 믿음.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이 반야심경에 자기의 모든 서원을 심어놓은 거예요. 반야심경을 외우는 사람은 열반으로 갈 것이다, 깨달음으로 갈 것이다. 부처님의 원력이 스며든 거예요. 일원상서원문은 대종사님의 원력이 스며든 거고, 반야심경은 부처님의 원력이 스며든 건데. 그러니까. 믿음을 가지고 독송하시고.
두 번째 알고 독송해야 되요. 이제 아셨잖아요? 아제아제 바라아제 할 때 가자가자 피안으로 가자. 서로 독려하는 거예요. 알고 독송하고
세 번째는 실천하면서 독송해야죠. 그러니까 알고 독송하는 것을 교리반야라고 해요. 실천하면서 독송하는 것은 조견반야라고 합니다. 경계 경계마다 반야를 비춰보는 거예요. 아! 원래 없다고 했지, 모든 것은 변한다고 했지. 나라는 것도 없는 거지. 마음을 비춰보는 것, 조견반야라고 합니다. 세 번째가 실천하면서 하고.
네 번째는 가르치면서 독송해야 됩니다. 열 번 듣는 것보다 한번 가르치는 것이 강하니까 주변있는 분들에게 이야기하면 대종사님께서 그것이 성업니다. 대종사님께서 내 법을 전하는 것이 성업이다. 그렇잖아요? 성자의 법문을 전하는 것이 성업이니까.
그래서 6주 동안 반야심경을 배워왔잖아요? 반야바라밀타심경의 뜻을 잘 아셔서, 믿음을 가지고 독송하고, 알고 독송하시고, 실천하시면서- 그러니까 반야를 비춰보시면서 독송하시고, 주변에 가르치시면서 전하면서, 반야심경은 이런 것이다 전하면서 독송하시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라-그 열반의 세계에 가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6주 동안 반야심경을 해왔는데 기억이 안 나실 수도 있어요. 잊어버릴만 하면 또 몇 년 뒤에 다시 또 반야심경을 해서. 이 4가지를 행하면서 반야심경을 하시길, 다음주부터라도. 간곡히 부탁드리면서 반야심경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은혜롭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