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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론
키이스(G. L. Keyes)가 말한 것처럼 모든 실천적인 역사가들은 항상 어
떤 분명한 인식론적 원리들에 입각하여 일하며 그들이 인식하고 있건 아니
건 간에 역사철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떤 한 역사가의 역사해석을 이
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필히 그의 방법론에 관한 원리들을 탐구
해 보아야 한다. 성 어거스틴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성 어거스틴은 특히 그의 명작이며 22권으로 된 {하나님의 도성}(The
City of God)을 통해 역사해석을 시도하였다. 실제로 성 어거스틴은 인간의
전역사를 시작부터 종국까지 하나님의 도성(Civitas Dei)과 지상의 도성
Civitas Terenna)이라는 두 도성의 발전을 통해 다루고 있다. 그러면 성 어
거스틴의 역사해석 원리는 무엇인가? 나는 성 어거스틴의 역사 방법론과 역
사해석을 이 논문의 주요 과제로 삼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 논문을 두 부분
으로 나누어 첫 부분에서는 성 어거스틴의 역사연구 방법론을 다루고, 두번
째 부분에서는 그의 역사해석을 다룰 것이다. 그리고 결론으로써 이 논문을
끝맺으려 한다.
1. 역사신학(Theology of History)
성 어거스틴은 개인과 인간 사회 양 측면에 걸쳐 역사에 깊은 관심을 갖
고 있다. 그는 경험의 전세계를 역사의 연구 분야-지역, 국가, 공적, 사적
정치, 과학, 철학, 문학, 과거와 미래, 시간과 영원-에 끌어들인다. 그는
인간 역사의 초상을 특히 그의 두 명작인 {고백록}(Confessions)과 하나님
의 도성(The City of God)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사회 전체의 역사를, {고백록}에서는 개인의 역
사를 다룬다. 그래서 포탈리(E. Portalie)는 기술하기를, "{고백록}은 한
영혼 속에 체험된 것으로서의 신학이요, 하나님이 개인 속에서 활동하시는
역사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인간의 역사 체계 속에 존속하는 것으로서의
신학이며, 세계 속에서의 하나님의 활동을 설명하고 있다" 고 한다. 사실
{하나님의 도성}은 성 어거스틴이 인간의 역사를 해석한 명작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에서 인간 역사의 시작부터
종국까지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성 어거스틴의 역사해석을 이
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 그러면 방법론의 관점에서 어거스틴이 역
사연구를 위해 시도하는 연구방법의 기초는 무엇인가? 모든 실천적인 역사
가들은 항상 어떤 분명하고 인식론적인 원리들에 입각하여 일하고 그들이
인식하건 아니건 간에 역사철학을 지니고 있다.
인정을 받는 역사철학자들은 역사해석 작업에서 그들이 분명하게 수용하고
있는 원리들을 나타내고 싶은 강한 유혹을 받는다. 키이스에 따르면 한 인
간의 역사철학은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철학적이라 할 수 있는 아주
일반적인 두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명시적이건 암시적이건-에 의해 결정된
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질문은 객관적인 실재를 믿는가 아니면 주관성에 예속되어 있다고 느
끼는가?이고, 두번째는 만일 객관적인 실재를 믿는다면 그 실재와 교통하는
접근수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진리론
및 실재론을 지니고 있었고 그것을 분명히 그의 역사연구 방법론에 적용시
켰다. 성 어거스틴의 이론은 명시적이다. 그는 외적인 객관적 실재를 믿는
다. 로버트 니스벱(Robet A. Nisbet)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전능하신 하
나님의 존재는 근본적인 것이었으며, 이것이 꽁트(Comte)나 막스(Marx)와
구별되는 점이다" 라고 말한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신의 계시라고 하는 어떤 선험적인(a priori)인 전제들
로부터 시작한다. 이 전제들은 역사적 증거에 대한 그의 자세와 역사과
정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 양 면을 모두 지배하고 있다. 그 전제들은
믿음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만, 모든 것들이 다 그 전제들을 뒷받침하
고 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성,속의 문학은 좋건 싫건 간에 한결 같이
원형적 전제들의 그럴듯함을 증거하도록 강요를 받는다.
이리하여 성 어거스틴은 계시에 비추어 전역사의 모든 상황 속에 나타
난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의 섭리를 본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섭리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절충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미, 형태, 순서,
수, 중량, 척도의 창조주이시다. 그러므로 어떤 과학적 허세(Pretensions)
를 지닌 역사가는 누구도 단지 믿음으로만 견지될 수 있는 것이기는 하나
그 굳건한 신앙(belief)이 그의 역사해석을 지배하고 있다는데 동의하지 않
을 것이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역사는 본직적으로 종교사다. 그래서 혹자
는 성 어거스틴은 역사철학이 아니라 역사신학을 기술했다고 주장하기도 한
다. 버스펠드(M. Versfeld)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전에는 아무도 인간 본성과 운명의 증언을 위해 그
처럼 깊이 역사를 연구한 사람이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런 관계로
그의 역사연구는 분명히 역사신학이지 역사철학은 아니다. 철학은 어느
면에서 계시없이 가능한 그 어떤 것이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역사에 대한 신학적 통찰이 {하나님의 도성}에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의 도성}은 그가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음을 분명
히 보여주고 있다. 어거스틴은 로마의 멸망에 직면하여 이러한 독특한 전
제 하에서 시작부터 종착지까지 세상 모든 나라들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두 도성의 발전을 통해 설명하려 하였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어거스틴은 우리에게 영원의 관점에서(sub specie aeternitatis) 역사
의 일별(glimpse)을 제공하려 시도하고 있다. 우리는 역사를 인간의 영
원한 종말이라는 관점에서 고찰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종말에 대
해 우리에게 말했기에 이 종말에 대해 알고 있다. 철학이 세계를 포괄
적 전체로 보려고 노력하는 한 그 노력은 철학적이다. 그러나 어거스틴
이 사용한 일치의 궁극적 원리는 신학적이다.his crede ut intelligas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성}은 역사신학으로 보아야 한다는 점이 아주 중요
하다. 말을 바꾸어, 성 어거스틴의 역사연구방법은 방법론의 특성상 독특한
것으로 철학적이기 보다는 신학적이다. 때문에 어거스틴의 역사신학은 그의
역사해석과 두 도성의 개념 이해를 위한 기조임에 틀림없다.
2. 변증론적 역사가(Apologetical Historian)
성 어거스틴은 변증론적인 역사가이다. 그의 방법론은 그것을 지배하는
엄격한 신학체계 때문에 반역사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어거스틴
은 그의 기독교 신조를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로 취급했고 그 신조 안에
서 찾아 볼 수 없는 경험이나 역사과정의 경우는 그 신조의 규칙에 순응하
게 하였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 변증론자의 역할은 애매모호하다. 얼핏 보면 그는 관심을 갖고 있는
관념들을 시험하고 있는 듯 하기에 순수 과학자와 닮은 꼴로 보인다.
그러나 더 가까이서 보면 그의 지략(Intellectual Maneuvers)이 앞의
결론을 가져오고 있음을 알게된다. 교리는 늘 흠없는 것으로 판명된다.
그 변증론자는 밧줄에 매여 있는 작은 개와 같다. 그는 상하로 날뛰며
짖어댄다. 그러나 그가 너무 멀리 돌진하면 밧줄이 그를 멈춰세운다.
그 변증론자에게 있어 그의 선험적 가설들이 밧줄을 대신하고 있다. 그
는 조사를 위해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신념들의 건전성과 그럴듯
함을 예증하기 위해 탐구한다.
어거스틴의 역사연구의도는 역사의 발전양식과 륜곽을 발견하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도처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하려는데 있다. 그는 기
독교 신앙을 분기시키고 강화시키는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다. 포탈리는 다
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어거스틴은 자신을 그 과업에 종사하게 했다. 그는 자신이 로마제국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해석하는 문제에 직면해 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
의 작업범위를 더 확대하여 그의 변호를 역사철학으로 변형시킨 천재적
인 섬광으로 일견에 세상나라들의 운명까지 둘러쌌다. 그는 인간을 태
초에로 되돌아가게 하며 종국적 목표로 인도해가는 유일한 종교인 기독
교가 세상 나라들의 운명의 중심이라고 보았다.
사실 그는 신앙을 옹호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성}을 저술했다. 이 기념
비적인 작품을 완성한 1년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이 경과한 후에 그는 그 작
품을 저술한 목적을 다시 진술하였다. 즉 아버지의 집에 대한 불타는 열망
에 못이겨 고트족(the Goths)과 알라릭(Alaric)의 침입에 의해 410년에 로
마가 멸망한 것을 기독교 때문이라고 하는 이교도들의 모독과 실책에 반대
하여 {하나님의 도성}을 쓰기로 결심하였다는 것이다. 410년에 고트족에
의해 로마가 포위된 것이 {하나님의 도성}을 구성하게 된 이유였다.
그리고 영원할 것으로 보였던 로마시가 멸망당한 것에 의해 상처를 받은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 양측의 마음을 재교육하려는 시도로 {하나님의 도
성}을 저술했다고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로마의 멸망은 일시적인 것들
과 우리 삶에서의 일시적인 정책들의 역할 에 대한 마음가짐을 부득이 다시
생각해 보게 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변증적 이유에서 그 작업이 시도
되었다는 점이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로마가 멸망하게 된 원인은 로마의 부도덕성과 무신앙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세상 모든 사회들의 특성을 나타내 보이며, 오직 하나
의 도성만이 영원함을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로마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미덕을 발휘하는 한에서만 남보다 뛰어났었다는 것을 증
명하기 위하여 이 일을 착수하였다.
성 어거스틴은 두 도성을 주로 계시, 즉 성서에 기초를 두고 설명한다.
그는 정경으로 인정된 성서(Canonical Scripture)는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이며, 인간이 역사의 진행과정에 대한 설계(Design)및 세부사항(Details)과
연관이 있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주요자원이라는 신념에 공식적으로 헌신
하고 있다. 성서의 정경들은 인간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그 안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만일 역사의 의미가 역사의 섭리적 계획 속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것이
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라면 하나님께서 그의 신적인 생명과 의지에 관해 우리에게 부여한 계
시를 통해 우리를 그의 계획에로 끌어들이지 않는 한 그 역사의 의미는
영원히 우리에게 닫혀져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거스틴이 성서에 기
초를 두고 두 도성을 설명하며, 그 저술작업에 있어 인간적인 기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을 그처럼 자주 요청하고 있는 이유이다.
리상사회 또는 리상국가와 두 도성의 개념은 {하나님의 도성}이 구성되기
전부터 존재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플라토(Plato), 티코누스
(Tyconus), 그리고 성서가 광대한 재원을 제공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어떤 다른 가능한 자료-이교도적인 것이건 기독교적인 것이건 간에- 보다는
성서로부터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마르쿠스(A. Markus)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어거스틴은 "두 세계"에 대한 플라톤과 성서의 어조 사이에는 실질적인
격차가 있음을 그의 생애의 아주 후반기에 깨달았다. 그때 그는 젊은
시절에 그리스도의 나라(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요
18:36)와 플라토 형태의 지성적인 세계(Intelligible World)를 동일시
했던 것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첫째되는 주요 계단은 성서에의 몰두, 성직수임, 그리고
특히 390년대 중반의 바울서신 탐독의 결과였다. 이것이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구원 받은 자와 하나님에게 버림을 받은 자에 대해
단호한 시각(Vision)을 갖게한 근원(Source)이었다.
두 거대한 사상의 흐름이 로마에서 서로 만났다. 즉 그리스-로마
(Greco-Roman) 문화와 철학 전통 그리고 팔레스틴으로부터의 유대-기독교
(Judaeo-Christian) 계시이다. 성 어거스틴은 이 두 전통의 총아이며 이 두
사상조류를 깊이 들이 마시며 성장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어거스틴
은 플라톤주의자이다. 플라톤 및 신 플라톤주의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어거
스틴의 정신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어거스틴은 플라토에게 많은 빚을 지고있다. 그러나 성 어거스틴의 철학
에서 단지 헬라적인 요소만을 인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유사성에도 불
구하고 플라톤의 {국가} 및 {법률}과 성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간에
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버스펠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국가}는 인
간의 철학적 사고의 구축물이다. 그것은 인간의 합리성이 암시하는 바가 제
거된다면 인간의 삶은 어떻게 될 것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하나의 이상적인 구축물이며 단지 언어 속에만 존
재하는 어떤 기획물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그의 성서적인 배경을 힘입
어 역사에 대해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거스틴에게는 {하나님의 도성}이 이상적인 것도 아니고 단지 신화적인 언
어로만 묘사할 수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것은 철학과 상상적 지식이
아니라 계시된 진리에 대한 확신을 필요로 하는 실제적이고 현존하는 사회
(Community)이다. 다시 말해서 어거스틴이 성서의 정경을 계시된 진리로
믿는한 그에게는 이상향적인 요소는 없다는 것이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이 세상의 사상과 성서가 상반되는 경우는 성서가 언제나 옳다고 그는
믿는다. 이러한 생각은 그를 지구는 겨우 수천년전에 존재한 것이라는
전제에 붙들어 맨다. 그는 모든 진리는 기독교적이라고 믿는다. 이교
철학자들이 동의하지 않을 경우는 단연코 그들이 잘못된 것이다. 이교
철학자들이 동의할 때는 그는 유대-기독교 전통이 지혜의 궁극적 원천
이라고 생각한다. 중립적인 독자들은 그의 주장이 불성실함을 발견할
것이며, 그의 모든 신념들이 그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외고집적(wrong-
headed)이라고 추론할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에서 우리는 어거스틴의 다양한 역할을 발견한다. 즉 신
학자, 철학자, 도덕주의자. 정치사상가, 역사 해석자, 문학 및 드라마 비평
가로서의 역할 등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결코 그가 우선적으로 기독교 감
독이지 철학자가 아님을 잊지 않았다. 그는 철학이나 사상학파 에게서 보다
교회와 성서에서 훨씬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그러기에 그는 이성적인 사색
보다는 성서의 계시에서 진리를 찾는다. 그는 그의 생애 중 많은 부분을 변
증론자로써 교회를 변호하는데 할애했다. 이 목적달성을 위해 그는 세속철
학을 활용하였다. 키이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그는 지금 전문적인 철학자이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 감독이며 결코 그
사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그는 고대의 중요한 세속철학을 지적인 원천
으로 활용한다. 성서의 정경에 관하여는 그는 이레니우스(Irenaeus)와
성 아다나시우스(St. Athanasius)에 동의하여 성서는 첫번째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자료라고 한다. 그러나 그가 세속적인 증언을 할 때 그
의 변증적인 목적을 지키기 위해 성서를 기꺼이 왜곡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철저한 변증론자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가르쳐 온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조금도 틀림없는 것으로써 숙고되어야 한다. 역사적 증거,
세속의 과학, 지적 훈련, 철학적 사색, 그리고 성서의 정경 자체는 그의 선
험적 가설들의 그럴듯함(Plausibility)을 예증하는데만 활용되어야지 결코
그것을 시험하는데 활용되어서는 안된다. 성 어거스틴의 역사 연구 방법의
근본적인 기초는 기독교 신앙이며, 역사연구를 포함해 그가 연구하는 주요
한 목적은 기독교 신앙을 변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