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언공(韓彦恭)은 단주(湍州) 사람으로, 부친 한총례(韓聰禮)는 광록소경(光祿小卿)이었다.
한언공은 성품이 총민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광종 때에는 나이 15세로 광문원(光文院) 서생(書生)으로 들어갔고, 얼마 뒤에 광문원의 승사랑(承事郞)이 되었다가 내승지(內承旨)로 옮겼다.
청을 올려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내의승지사인(內議承旨舍人)으로 되었다. 성종 때에는 다시 형부(刑部)·병부(兵部) 2부[官]의 시랑(侍郞)으로 전임되었다.
송(宋)에 사은사(謝恩使)로 갔을 때에는 송에서 한언공의 태도와 행동이 예법에 맞으므로, 금자광록대부 검교병부상서 겸 어사대부(金紫光祿大夫 檢校兵部尙書 兼御史大夫)를 제수하였다. 한언공이 아뢰어 『대장경(大藏經)』을 요청하자, 황제가 『대장경』 481함 모두 2,500권을 하사하였고, 또한 『어제비장전(御製秘藏詮)』·『소요(逍遙)』·『연화심륜(蓮花心輪)』도 하사하였다.
귀국하자 왕이 어사예관시랑 판예빈성사(御史禮官侍郞 判禮賓省事)로 임명하였다. 한언공이 아뢰기를, “송의 추밀원(樞密院)은 바로 우리나라의 숙직하는 관원과 서리의 직임이니, 바라옵건대 그런 관청을 설치하십시오.”라고 하였다. 이에 처음으로 중추원(中樞院)을 설치하였고, 사(使)와 부사(副使) 각 2인을 두었으며, 한언공을 부사로 삼았다. 갑자기 〈중추원〉사 전중감 지예관사(〈中樞院〉使 殿中監 知禮官事)로 전임되었다가, 참지정사 상주국(叅知政事 上柱國)으로 승진하였다.
목종이 즉위하자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로 임명되었으며, 〈목종〉 4년(1001)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었다. 왕이 주·군(州郡)을 순행하며 살피다가 장단현(長湍縣)에 당도하자, 한언공에게 일러 이르기를, “이곳은 경의 본관(本貫)이오. 경의 공로를 생각하여, 〈장단현을〉 승격하여 단주(湍州)로 삼을 만 하오.”라고 하였다.
당시 오로지 전폐(錢幣)를 쓰고 추포(麤布)를 금하니, 백성이 자못 근심하였다. 한언공이 상소하여 그 폐단을 토론하니, 왕이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뒤에 여러 번 승진하여 특진 개국후(特進 開國侯), 식읍(食邑) 1,000호, 감수국사(監修國史)가 되었고, 그의 아버지 한총례(韓總禮)에게는 내사령(內史令)을 증직하였다.
왕이 일찍이 평주(平州)에 행차하다가 날은 저물고 추위가 심하므로, 거가(車駕)를 길가에 멈추고는 취하도록 마시고 가지 않았다. 한언공이 나아가 이르기를, “신 등은 실컷 마시고 먹지만, 군사(軍士)는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가상히 여겨 초서구(貂鼠毬)를 하사하고, 거가를 재촉하여 행궁(行宮)으로 들어갔다. 사무를 대하여 직언하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이 많았다.
〈목종〉 6년(1003)에 한언공이 병이 나니, 왕이 의약과 수레 2승(乘)을 하사하여 가서 온천에 목욕하게 하였고, 주현(州縣)에 명령하여 공급하게 하였다. 병이 위독하므로 근신(近臣)을 보내어 문병하고, 또 구마(廐馬) 3필을 하사하여 기도를 돕게 하였는데, 결국은 낫지 않았다. 이듬해에 죽으니, 나이 65세였다.
부음을 듣자 왕이 매우 애석해했고, 부의로 쌀 500석, 보리 300석, 포 1,200필, 차 200각을 내렸다. 내사령을 증직하였으며, 시호는 정신(貞信)이라 하였고, 예를 다하여 장사 지냈다. 현종(顯宗) 18년(1027)에 목종(穆宗) 묘정(廟庭)에 배향하였고, 덕종(德宗) 2년(1033)에 태부(太傅)를 더하여 증직하였다. 아들은 한조(韓祚)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