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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머리말 : 1993년의 상하이 이야기
1993년, 덩샤오핑의 ‘남부 시찰 연설’이 있었던 이듬해. 남부지역 특구에 상하이 푸둥이 중국 개혁/개방의 최전방으로 떠올랐다. 2월 초봄. 상하이텔레비전 8채널은 <다큐멘터리 편집실>이라는 프로그램이 나왔다. ‘당다이 중국 신다큐멘터리 운동’이 사회체제 안에서 확립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표지였다. <다큐멘터리 편집실-마오마오 고소사건>편이 화제가 되고있었다. 그리고 10년 뒤에는 <마오마오 고소사건>의 속편으로 <열 살의 마오마오>를 내보냈다. 이 이야기는 실화다. 이 글은 이 이야기와 관련된 몇 가지 텍스트를 둘러싸고 대중매체가 도시라는 입장에서 상하이 이야기를 어떻게 펼쳐내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은 1980~90년대 중국 근현대화 과정 속에 나타난 도시와 농촌의 관계다.
2. 도시의 ‘죗값’과 봉합된 ‘대단원’
1) 여성의 농촌과 도시
<마오마오 고소사건>은 후난에서 온 다궁메이와 상하이 뒷골목 룽탕의 남자 장애인 사이의 미혼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 이야기다. 마오마오가 태어나고 아버지는 자신의 장애가 아이를 키우기에는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어머니가 딸아이를 데리고 법적 소송을 걸었다. 그는 결국 딸을 자기 자식으로 인정했다. 왕안이 이 프로그램이 문학의 “수많은 거짓된 가짜”를 전복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왕안이에게 이 다큐멘터리는 ‘진실’로써 문학에 도전한 것이었다. 신시기 이후 소설과 영화, 텔레비전, 사진 등 여러 예술양식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진실’의 추구를 경험했다. 또한 이후 그 ‘진실’에 대해 회의와 배신을다시 보여주었다. 왕안이는 <마오마오 고소사건>과 영화 두 편을 비교한다. 이 영상들의 가장 중요한 공통점은 전통 중국의 시골사회가 모두 여성 형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이며, 이를 통해 여성이 향토 중국의 기표가 된다는 점이다. 왕안이는 <마오마오 고소사건>을 통해 소설의 진실성을 따지고 든다. 문제는 <마오마오 고소사건?이 큰 틀에서 왕안이가 말하고자 하는 소설의 서사와 다르며, 진실이라는 명의로 그러한 서사를 추구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모던’과 소비주의로 지칭되는 가장 근현대화한 중국의 도시에서 ‘모던’과는 거리가 먼 빈민 가족이 뜻밖에 가장 유명하게 되었다.
2) 도시의 근심과 ‘죗값’
예의 다큐멘터리의 경우 여성 연출자이자 상하이텔레비전의 탐사기자가 적극적인 서술자 겸 행동가의 신분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가상적인 면대면 서술방식을 통해 연출자는 자신과 방송국의 신분과 기능을 위해 자리매김을 시도한다. 우리는 연출자가 반복해서 질문하는 모습을 본다. 이로 보건대 근심은 언제나 뒤에 숨겨져 있다. 그것은 도시의 차별화 기제의 동기다. 그러므로 대중매체가 우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외지 아가씨가 자신의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이다. 중국의 농촌은 중국 전체의 산업화, 도시화, 근현대화를 위해 막중한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그런 역사적 사실이 서유럽의 근현대화한 도시의 자아 정체성 안으로 직접 들어가지 못한다. 그 현실성은 오히려 억압을 받아 소멸되었다. 그것이 바로 왕안이가 말하는 “타락의 위험”이다. 소설 <죗값>은 상하이 지식청년들이 윈난으로 내려가 있는동안 아이들을 낳았는데, 그 아이들이 성장해 무리를 지어 아버지를 찾으러 상하이에 온다는 내용이다. 그때 윈난에서 온 그 아이들은 상하이라는 도시가 해결할 수 없는 ‘죗값’이 된다. ‘죗값’이라는 용어는 왜 지청세대가 도시로 돌아와 뿌리를 내린 1990년대에야 등장하고 명명되었는가? 그 의미는 더욱 깊이 독해할 만하다. 청말 이후 중국의 도농관계에는 구조적 모순이 등장했다. 오늘날 독해 속에서 지청운동이 단지 죗값일 뿐이라면, 오늘날 ‘농민공 물결’이 보여주는 도농관계 역시 실은 그것돠 동일한 ‘죗값’, 즉 근현대성이라는 원죄인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근현대화한 도시가 자신과 농촌의 동일한 관계를 부인하고 이런 역사성으로부터의 격리를 통해서 서양을 향해 자아를 확립하고 상상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표명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부정적 충동에 따르는 위험과 불안을 암시하기도 한다.
3) 봉합된 ‘대단원’
마오마오는 상하이라는 도시의 죗값이다. 마오마오의 혈연적 특성은 이 도시가 마오마오와 그 어머니를 다루는 태도를 결정하게 된다. 이미 결혼을 했지만 호적 문제는 여전히 민감했다. 어머니라는 신분은 당시 그녀가 도시에 수용된 전제였다. 천멍전이 감히 자오원룽에게서 떨어져 나갈 때, 그녀는 바로 어머니라는 신분을 박탈하는 상황에 직면할 것이고, 마오마오는 그녀에 대한 징벌이 될 것이다. 이 도시는 단지 마오마오를 직면할 때에만 자신의 죄책감을 인정할 것이다. 또한 왕원리가 왜 자오원룽을 ‘인격적’인 아버지로 창조했는지 알 수 있다. 청멍전이 떠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고 마오마오를 얻음으로써 그 이면에 놓인 합법적 논증을 자오원룽에게 제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이 도시는 비로소 도의적으로 죗값을 속죄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마오마오 고소사건은>은 자오원룽의 참회로 끝을 맺는다. 해피엔딩은 이미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예고한다. 그리고 그 전제는 대중매체라는 힘의 개입이다. ‘도시의 타락’은 도시 자신에 의해 속죄되고 해피엔딩은 모든 사람에 대해 속죄한다. 모든 갈등과 충돌이 서로를 위로하는 방식으로 해결되고 풀리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대중매체에 의해 봉합된 ‘대단원’의 결말이 갖는 의미다. 사실 이야기는 본래 감춰진 더 큰 서사속에 놓여있었다. 도시의 입장에서 상상되고 처리된 도농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는 이 도시에 잠재해 있는 도덕적 근심을 완화해 주었으며 이 도시가 만족할 많나 도덕성의 통로를 제공해 주었다. 그것은 농촌을 마주하고 서서 대가를 치러야 하는 도시의 죗값이기도 했다. <열 살의 마오마오>는 오늘날 이 가족의 삶을 보여준다. 비록 경제적인 어려움과 현실적인 고민이 많이 남아 있긴 하지만, 훌륭한 가정에 귀여운 마오마오가 있다. 마오마오에게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도 있다. 이를 통해 방송은 애초부터 그들의 삶과 운명에 개입한 것이 도덕적으로 옳았음을 증명하려 한다. 매체의 자아논증이면서, 아울러 시청자들에게 가설적인 만족을 기대하는 것이다.
3. 농촌에서 도시로 : 정체성과 위기
그러나 <마오마오 고소사건>의 ‘대단원’ 결말이 봉합되는 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드러났으며, 오히려 모종의 냉혹한 진실과 현실만을 보여주었다. 마오마오는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매체는 그로 인해 많은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뒤 그들 가정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해피엔딩’은 방송이 소독제와 머큐로크롬, 여타의 화학약제를 섞어 봉합해 낸 상처였다. 그것은 상처가 봉합된 것인 듯 위조했다. 그러나 상처 밑에는 진짜 고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실 <마오마오 고소사건>에서 소송이 처음부터 천멍전에게 결혼을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외려 일종의 세례였다. 자오의 도덕적인 자아회피는 도시의 ‘타락의 위험’에 대한 왕안이의 우려와 매우 비슷하다. 동시에 농촌은 음란한 유혹의 상징이 된다. 그녀는 농촌의 도덕적 가치의 수호자로서 비로소 자기 주체성을 수호하기 시작했다. 이 당시 그녀의 정체성은 ‘시골 사람’이었다. 그녀가 소송을 건 이유는 양육비를 받아내기 위해서였다. 법원의 조정으로 천멍전은 달마다 양육비 50위안을 받는다는 판결을 이끌어냈다. 50위안은 사실 의례적인 성격이었다. 그녀가 온 힘을 다해 얻어내려 했던 것은 양육비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세례 증명이었다. 10년 뒤 《명작 다시보기》에서 사회자가 도대체 어떤 힘으로 소송을 이어갔느냐 물었을 때 천멍전의 대답에 귀 기울일 만하다. 분명 천멍전은 ‘진리’라는 단어를 말했다. 그녀는 스스로 진리의 반환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기 정체성은 진리의 필요에 대한 방식으로 등장한다. 승인과 존엄을 위해 진행된 이 투쟁속에서 그녀는 대중매체의 힘을 확실히 빌려왔다.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종종 감독의 통제를 넘어서는 다중적 의미를 드러낸다. 현실 자체의 복잡성과 모호성은 연출자의 주관적인 의식에 의해 순화되기를 거부하고 그 어떠한 희망 또한 주관적으로 해석되는 데 저항한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어떻게 문학과 예술의 방식으로 새롭게 정의할 것인가. 또한 그 정의 위에서 진실과 허구를 또렷하게 양단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도 허구가 될 수 있고, 허구도 진실이 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예술적 ‘진실’은 현실에 대한 이해와 대화다. 《명작 다시보기》에서 왕샤오위는 천멍전에게 질문 하나를 던진다. 마오마오가 말을 듣지 않을 때 그를 때리느냐고. 천멍전에게는 자신이 아이를 때리는 것은 아이를 다루는 정상적인 태도다. 자오원룽이 아이를 때리지 않는 것은 그의 괴로움에서 비롯한 참회의 방식이다. 이러한 설명은 왕원리가 묘사한 엄한 어머니와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가족 모델을 매우 힘 있게 전복시킨다. 천멍전은 담담하고 성실한 방식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옹호하는 데 성공한다. 따라서 여기서 ‘진실’과 ‘진리’는 동등한 의의를 갖는다. 진실은 약자의 진리이자 무기다. 대중매체가 그녀를 선택한 동기와 그녀가 대중매체를 이용하는 동기, 이 두 가지는 확연히 다르다. 표현된 객체로서 ‘타자’는, 객체의 패러다임 속에서 주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완강히 드러낸다. 이 또한 오늘날 중국의 신다큐멘터리 운동이 갖는 중요한 의미다. 천멍전이 결혼을 받아들인 것은 그녀의 자아 정체성이 변화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그녀가 상하이인임을 수용한 것이고 또한 새로운 자아 정체성의 내원으로서 어머니의 역할을 받아들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천멍전에게 모종의 은닉과 변화를 요구했다. 천멍전이 스스로 ‘거세’의 방식을 택해 그녀에게 대한 도시의 규범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를 통해 그녀는 인정과 결백을 얻게 되었고 도시는 자신의 통행증으로서 그녀의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명작 다시보기》에 주민위원회 간부가 참석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주민위원회’는 공증기구가 되었고, 천멍전은 외지 아가씨와 외지 아줌마들의 대표로서 ‘책임’이라 명명되는 위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 도시가 그녀에게 요구하는 ‘책임’을 이행했음도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천멍전에 대한 호칭은 여전히 2인칭과 3인칭 사이를 떠돌고 단수와 복수 사이를 오간다. 그것은 ‘진정’한 상하이인이 보기에 천멍전의 신분은 여전히 애매하고 불확정적이라는 뜻이다. 천멍전의 경우, 이제 가정에 의지해 새로운 정체성의 가능성과 그 실천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고 표현했다. 집안 경제는 그녀가 완전히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니 그녀는 당연히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 그녀는 가정에 대해 자주권을 선언함으로써 내부의 동의를 분명히 드러내려 했다. 이는 그녀가 새로운 주체의식을 얻어내는 가장 직접적인 자원이다. 가정은 그녀가 이 도시(상하이)와 대화하는 방식이다. 가정의 수호는 그녀와 이도시 사이의 평등한 관계를 수호하는 일이다. 가정을 통해서 천멍전은 바로 이 도시에서 자신의 위치를 갖게 된다. 그녀는 10년 뒤의 천멍전이야 말로 상하이인이 될 수 있는 완전한 자격을 갖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그녀가 완전한 상하이 말을 구사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정체성 이론에서 가장 민감한 것이 바로 언어다. 천멍전이 자오원룽과 ‘얘기’가 된다고 했을 때의 그 말은, 상하이 말이 이미 이 가정의 일상 언어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거기서 이 시대 속에 내재한, 도시/상하이에 대한 강력한 정체성을 본다. 천멍전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 도시의 신분을 얻었다. 하지만 그녀가 강력한 힘에 의해 소환되고 창조되었음에도 그 힘의 비호를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이는 새로운 자아 정체성이 처음부터 위기와 분열로 가득 차 있었음을 뜻한다. 천멍전은 몰락한 시골에서 마침내 도시로 진입했지만 그녀가 합류한 도시계급은 역사적 몰락에 직면해 있다. 사실 10년 뒤 천멍전이 다시 대중매체로 들어가려 한 까닭은 그녀 자신이 위기에 처해 있어서였다. 다시 한 번 대중매체를 통해 새로운 주체 신분의 정합과 실현을 완성하는 것이야말로 천멍전이 바라는 바였다. <마오마오 고소사건>에서 천멍전은 용감무쌍했다. 그러나 ‘시골 사람’으로서의 자아를 희생함으로써 '도시 사람‘으로 신분을 전환해야 했을 때, 그녀는 이미 불평등한 전제에 직면해 있었다. 나는 작가에게 천멍전이 인터뷰에 응한 까닭은 일자리를 찾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었기 때문 아니냐고 물었다. 그런 도기가 없지는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 일자리를 갖고 있는가? 돌아온 대답은 새 일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천멍전이 대중매체의 힘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그 위해를 더 잘 깨닫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사실 날마다 우리 주변을 흘러서 떠다닌다. 단지 그 이야기들은 앞으로의 날들 속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기술될 것이다. 근현대 이래 중국 농촌사회는 결코 근현대화 과정을 겪지 못했다. 농촌의 쇠락과 도시의 번영은 사회가 단절의 방식으로 수립한 관계다. 그것은 결코 외부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부의 이야기다. 이러한 역사적 단절은 치료 할 수 없는 상처처럼 보인다. 천멍전에게나 이 사회에, 그리고 이 사회에 속해있는 우리 모두에게.
4. 맺음말 : 은닉된 주체들
노동자계급이 주체성을 잃어버린 시대, 근현대화의 맥락 속에서 농촌사회가 자신들의 주체적 지위를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억압된 주체는 격리 된 채 이름과 성(姓/性)을 숨기는 방식으로 존재할 뿐이다. 억압된 주체는 여전히 자신의 방식으로 구별되고 귀환할 수 있는가? 신분의 허무는 그 배후의 정치적, 경제적 힘의 부재를 뜻한다. 신분을 잃어버린 사람은 언어도 잃어버린다. 체험은 ‘물’적 형식으로 존재한다. ‘물’적 형식만이 그들이 대중매체의 시야로 들어오는 이유가 된다. 즉 하층 노동자들이 ‘신체’ 즉 피와 살, 욕망과 눈물이 될 때, 일종의 생물적 존재가 될 때 그들은 비로소 대중매체의 시야에 들어올 가능성을 얻게 된다. 우리가 단지 진실이 유리된 채 물적 존재만을 볼 때, 억압된 주체는 영원히 익명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고통은 존재의 증명이 된다. 그 전제는 그들의 육체와 정신의 거대한 정신적 외상이 인간이라는 존엄한 위치에 놓일 수 있는가다. 다시 말해, 인간으로서 고통 체험이 드러나고 동일시될 수 있는가다. 그렇지 않으면 소리 없는 그러한 고통의 호소는 의지할 데 없는 외톨이들로서 우리 도시 안을 가위 눌린 듯 떠돌아다닐 것이다. 근현대중국의 신다큐멘터리 운동의 의의는 바로 여기에 뿌리내린다. 그것은 영상의 내부와 외부의 구별을 없애며 ‘우리’와 ‘그들’의 경계에 도전한다. 중국 근현대사에서 피억압자가 신분을 얻고 해방을 추구한 과정들은 일찍이 이미 저마다 ‘혁명’이라고 명명되었다. 혁명이 모종의 죗값이라면, 그런 죗값은 사실 중국의 근현대화 과정 속에 내재해 있는 것이며, 우리 각자는 모두 그 죄의 아들이자 죄의 손자들이다. 도시들은 저마다 모두 그렇게 이른바 근현대화라는 원죄를 짊어지고서 그렇게 무거운 숙명속에서만 속죄의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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