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경림 「갈대」 「목계장터」 창작과정
신경림은 언제나 새벽에 글을 쓴다는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조용하고 정신이 맑아서가 아니라 일찍 일어나는 것이 습관이 되어서라고 합니다. 글을 쓰는 일이란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고 짜증부터 나는 일이라 책상과 변소와 부엌을 들락거리고 먹을 것이 있나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하다가 마음을 잡고 글을 쓴다고 합니다. 또 한 장을 위해서는 서너 장의 파지를 내는 것이 예사라고 합니다.
추운 겨울에는 이불 속에 누워서 쓰기도 하나, 곁글이 아닌 것은 아무리 추워도 이불 속에서 누워서 쓰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나 자신의 생각을 본격적으로 나타내는 글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책상 앞에서 써야 하는 성미라고 하였습니다. 사무실에서 글을 쓰는 경우가 있지만, 신변잡기가 아니고 본격적인 글은 자신의 방, 자신의 책상 앞에 앉아야만 써지는 것 같다고 하였습니다.(이승철 편, 『시창작의 길잡이』, 1995 참조)
우리는 신경림의 시 「갈대」에 대한 창작과정을 그의 산문을 통해서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¹⁷⁾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다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 「갈대」 전문
1956년 《문학예술》에 두 번째 추천 작품으로 발표했던 모두 2연 10행의 등단 대표시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시가 발표되기 이미 5년 전에 발표된 천상병의 「갈대」와 상상력이 비슷합니다. 제목도 같고 시간적 공간적 배경, 시적 정서도 비슷합니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나란히 소리 없이 서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안타까움을 달래며
서로 애터지게 바라보았다.
환한 달빛 속에서 갈대와 나는
눈물에 젖어 있었다.
-천상병, 「갈대」 전문
이러한 현상은 선배 시인들로부터 받은 영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배 시를 읽은 경험이 다른 경험을 통하여 어느 순간에 살아났던 것이지요.
내 고향마을 뒤에는 보련산이라는 해발 8백여 미터의 산이 있었다. 나는 어려서 나무꾼을 좇아 몇 번 그 꼭대기까지 오른 일이 있었다. 산정은 몇 만평이나 됨직한 널따란 고원이었다. 그 고원은 내 키를 훨씬 넘는 갈대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강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에 갈대들은 몸을 떨며 울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갈대들의 울음에서 나는 사람이 사는 일의 설움 같은 것을 느끼곤 했었다. 이 「갈대」는 이때의 산정 고원에서 느낌을 시로 옮긴 것이다. 대학 2학년 때였다.
시인은 고향 시골의 뒷산에 올라갔다가 갈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시를 착상하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갈대는 억새의 잘못입니다. 신경림 시인도 사석에서 스스로 갈대가 아니라 억새임을 자백하였습니다. 갈대는 물가에 나거든요. 이런 오류는 감동을 주로 하는 문학적인 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겠지요. 풀의 생태를 잘 아는 사람이 읽으면 당장 알아차리니까요.
우리는 천상병의 시를 발견하고 신경림 시에 대한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표절 문제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장영우가 말했듯이 후배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배의 영향을 입을 수밖에 없으며, 중요한 것은 선배 시인으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는가가 아니라 선배의 것을 얼마나 교묘하고 감쪽같이 훔침으로써 온전한 제 것으로 만들었느냐의 문제라고 볼 때, 그렇게 문제가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여튼 창작자 신경림은 아마도 선배 시의 독서 경험과, 어려서부터 올랐던 고향마을 보련산 산정 고원을 대학 2학년 때 올랐다가 느낌을 받아 시를 써서 투고를 하고, 이것이 추천이 되어 등단을 하였다고 보면 됩니다. 여러 가지 경험이 하나의 느낌으로 살아 한 편의 명시가 된 것입니다.
창작자는 갈대를 의인화하여 갈대 스스로 자기를 흔들면서 조용히 운다고 표현하였습니다. 갈대는 울음이라는 행위과정을 통하여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자기 의식의 단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사실은 창작자의 내면이 갈대의 생태적 특성에 투영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의 훌륭한 점은 창작자 자신의 슬픈 내면을 인간의 보편적 슬픔으로 형상화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신경림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목계장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창작방법적 측면에서 민요의 율격을 계승한 명작입니다.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 흑룡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새우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년에 한 이레쯤 천치로 변해
짐 부리고 앉아 쉬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신경림, 「목계장터」 전문
단연 16행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목계장터를 중심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민중들의 삶과 애환을 우리의 고유한 가락인 민요조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시의 창작과정을 시인은 상세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초등학교 4학년 때 목계에 처음 갔었고, 두 번째는 스무 살이 훨씬 넘어서, 세 번째는 그 몇 해 뒤에 갔었는데, 어릴 때 느낀 감동에 가슴이 메일 것 같아 시를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목계장터」가 명편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습니다.
시인은 「목계장터」의 창작동기와 경위를 소상히 기록하고 있어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목계장터」란 제목으로 나는 시를 꼭 세 번 썼다. 74년 봄 경향신문에 「목계장터」를 쓴 것이 처음이다. 열심히 쓰느라고 썼는데. 발표된 시는 적이 나를 실망시켰다. 주제의 안이성(安易性), 방법의 상투성은 내 눈에조차 확연했다. 마침 《자유공론》지에서 청탁이 있길래, 발표되었던 시를 대폭으로 고쳐서 주겠다고 미리 양해를 구하고 「목계장터」를 두 번째로 써서 실었다. (…중략…) 75년 늦은 봄, (…중략…) 충주에 가까운 강촌(江村)엘 갔다가 거기서 1박하고 (…중략…) 우리는 원주에서 충주행 버스를 타고 목계까지 왔다. (…중략…) 목계 길바닥에 주저앉아두어 시간을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나는 슬슬 나루터를 향해 나루터가 보이는 언덕까지 나가보았다. 근대적인 웅장한 다리가 놓여, 나루터는 이미 그 흔적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언덕에 선 채 옛 나루터까지 가볼까 어쩔까 망설이고 있는데 투망을 어깨에 맨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젊은이 둘이 노랫가락을 흥얼대며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실패한 내 두 편의 「목계장터」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실패작이 되고 만 까닭을 이내 깨달았다. 우리의 고유한 가락 그것이 빠져있어서는 목계장터는 결코 한 편의 시로 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무렵 나는 민요에 적지 아니 열중해 있었다. 민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첫째는 내 시가 또 한 번 껍질을 벗기 위해서는 민요에서 그 가락을 배워와야 하고 또 참다운 민중시라면 민중의 생활과 감정, 한과 괴로움을 가장 직정적이고도 폭넓게 표현한 민요를 외면할 수 없다는 매우 의도적이요 실용적인 동기에서였으나, 민요가 보여주는 민중의 참 삶의 모습, 민중의 원한과 분노,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는 원래의 동기와는 관계없이 차츰 나를 깊숙이 민요 속으로 잡아끌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나는 본격적으로 충주 지방의 민요를 찾아 읽었다. 목계에 관계되는 몇 가지 문헌도 뒤적였다. (…중략…) 내가 목계에 처음 간 것은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중략…) 두 번째 목계에 간 것은 스물이 훨씬 넘어서였다. (…중략…) 그 몇 해 뒤에 다시 목계엘 가게 되었다. ・・・중략・・・) 때마침 담배 수납철이었다. (…중략…) 술집마다 흥청대었고, 이 한철을 보고 모여든 색시들의 노랫소리로 거리는 그대로 활기를 띠고 있었다. 나는 가슴이 메일 것 같았다. 그것은 어릴 때 소풍 와서 느낀 감동 바로 그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목계장터」를 쓰게 된 것인데, 그것이 두 번씩이나 썩 불만스러운 작품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네 번째로 거의 우연히 목계엘 들러, 또 한 번 「목계장터」를 쓸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략…) 《엘레강스》에서 화보와 함께 실을 수 있는 시를 청탁한 것이 이때였다. (…중략…) 나는 세 번째로 「목계장터」(「」가 원문에는 없음: 필자)를 쓰게 되었다. (…중략…) 그림과 함께 발표된 시는 나를 꽤나 만족시켰다. 2년 만에 작품다운 작품을 완성했다는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¹⁸⁾
위 인용문을 서술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목계장터」를 제목으로 두 번의 시를 써서 발표했지만, 주제의 안이성과 방법의 상투성으로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② 목계에 찾아갔다가 우연히 「목계장터」를 생각하고 시가 실패한 원인이 우리의 고유한 가락이 빠져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③ 당시 민요에 열중해 있었다. 그 이유는 시의 방향 전환을 위한 민요에서 가락 배워오기, 참다운 민중시라면 민중의 생활감정인 한과 괴로움을 직정적이고 폭넓게 표현한 민요를 외면할 수 없다는 실용적인 동기가 있었다. 그리고 민요가 보여주는 민중의 참삶의 모습이나 민중의 원한과 분노 및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과 풍자가 매력적이었다.
④ 목계 여행에서 돌아와 충주지방의 민요를 찾아 읽었다.
⑤ 네 번째로 우연히 목계에 들러 또 한 번의 「목계장터」를 쓸 생각을 했다.
⑥ 《엘레강스》에서 시를 청탁해서 세 번째로 「목계장터」를 쓰게 되었는데 2년 만에 만족한 작품을 완성했다는 느낌이었다.
시인이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까지 시적 제재가 되는 목계에 직접 여행을 하고 우리의 고유한 가락인 민요의 율격을 계승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하였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한 시인의 창작과정 경험을 통하여 하나의 명편이 나오기까지 다양한 경험과 노력,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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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공광규, 『신경림 시의 창작방법 연구』, 푸른사상, 2005, 268~269쪽 참조.
18) 신경림, 앞의 책, 307~311쪽.
공광규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 수업』
2025. 1. 2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