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집에서의 마리아 막달레나 (1630)
시몽 부에
시몽 부에(Simon Vouet, 1590-1649)는 이탈리아 바로크 양식의 회화를
프랑스에 들여온 화가이다.
1612~27년에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자기 양식을 형성했다.
그는 초기에는 카라바조와 카라치의 강한 영향으로
명암대조법과 투시도법을 활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환상을 불러일으키게 대담한 구도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후기에는 베로네세와 베네치아 화가들의 영향으로
밝은 색채를 사용하여 좀 더 고르게 퍼진 흰빛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는 1627년에 루이 13세의 요청에 따라 파리에 돌아와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그 뒤 거의 모든 중요한 그림을 의뢰받았고 15년 동안 파리의 미술계를 지배했다.
1630년대 초의 종교화들은 한층 발전된 양상과 더불어
절제된 바로크 양식을 보여준다.
그는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이상적이면서도 감각적인 형태를 묘사했고,
뛰어난 기법으로 밝은 색채를 사용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가 1630년경에 그린 <시몬 집에서의 마리아 막달레나>는
루카복음 7장 36-50절이 그 배경이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시몬의 집에 초청받아 저녁 식사를 하고 계셨다.
그런데 그 고을에서 이름난 창녀인 마리아 막달레나가 향유를 들고 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그 발에 향유를 발랐다.
예수님의 발 옆에는 향유를 담은 항아리가 깨져있다.
그리고 그녀는 겸손과 참회의 표시로 무릎을 꿇었고,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금빛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린다.
그래서 그녀의 손과 발에 밝은 햇살이 비추고 있다.
반면 시몬은 예수님께서 죄인이 다가오도록 놔둔 것을 놀라워한다.
그의 몸짓은 예수님의 의아한 행동에 놀라 무엇인가 따지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이 예언자라면 당신의 몸에 손을 대는 자가 누구인지 알 텐데요.’
예수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그의 얼굴을 그늘지게 했다.
우리도 시몬처럼 교회를 신성한 곳으로만 생각하지는 않는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모두 의인인 양 착각하지는 않는가?
그리고 죄인들을 멀리하지는 않는가?
예수님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시몬의 혼란스러움에 대해 답해준다.
“시몬아, 어떤 사람이 빚을 졌는데,
한 사람은 오백만 원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만원을 빚졌다고 하자,
그런데 둘 다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데
주인이 그들의 빚을 무상으로 탕감해 주었다면,
누가 더 주인을 더 사랑하겠느냐?”하고 물었고,
이 여자는 많은 죄를 용서받아서 큰 사랑을 드러내고 있음을 이야기해 주신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치 고해신부가 죄를 용서해 주듯이
오른손을 들어 여인의 죄를 용서하며 축복하신다.
“나도 당신의 죄를 용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랑의 색인 붉은색 옷을 입고,
예수님의 얼굴엔 부드러운 광채가 흐르고 있는가 보다.
예수님은 또 말씀하신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용서한다.”
그렇다.
우리가 남을 적게 용서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모두 용서받지 못한 탓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주님께 적게 용서받을까?
그것은 우리가 주님께 우리의 죄를 적게 고백했고,
죄가 없는 사람처럼 위선의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우린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분리하여
그들을 손가락질만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초대해 놓고 식탁엔 아무 음식도 차려 놓지 않았다.
우리는 주님을 불러놓고 그분의 이야긴 듣지도 않고 따지기만 했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에 화만 가득한 것이다.
오늘은 많이 용서받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생각해야겠다.
그녀는 많은 용서를 청했으니 많이 용서받았고,
많이 용서받았으니 많이 사랑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죄인에서 성인으로 변한 것이다.
우리도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죄인이 되어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