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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정읍중17회 원문보기 글쓴이: 샘골김형문
제3장 치우천황의 등극(登極)-치우천황③ | |
헌원의 반란사건 잠시 치우천황의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다시 원래의 이야기인 헌원의 반란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이야기한 대로 치우가(蚩尤家)의 노파(老婆) 강씨(姜氏)의 전갈을 받은 천도의 어전회의가 각 중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첨예한 대립 양상을 보이며 결론을 짓지 못하자, 천황은 수십명의 첩자를 은밀히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알아오게 하였다. 비록 어전회의가 일부 중신들의 반론제기로 결론을 유보한 채 중단되었으나 치우천황의 심중에는 이미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다만 지금으로서는 제국(帝國) 전통의 화백회의 제도를 원칙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여 중신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 중요했다. 아울러 앞으로 닥칠 만약의 사태를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첩자를 보내서 헌원군의 병력 상황과 군진의 형태 등 세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한 것이다. 폭풍전야(暴風前夜) | ||||||||||||
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탁록(?鹿)의 북쪽에 대효(大曉)가, 동쪽에는 창힐(倉詰)이 그리고 서쪽에는 황제(黃帝) 헌원(軒轅)이 있었다. 이들은 그 세력이 서로 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황제 헌원은 먼저 대효와 동맹을 맺고 창힐을 치려고 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창힐과 동맹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들 두 무리들이 모두 치우천황의 제후국(諸侯國)들이어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밀기』의 기록은 배달한국의 지배하에 있던 제후국 간의 세력 균형을 한마디로 요약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첩자들의 정보를 면밀히 분석한 치우천황은 이미 전쟁을 피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배달 국의 천도(天都) 신시 아사달을 떠나 동경[現 遼陽, 펴라]1)으로 내려와 사태의 추이를 관망하다가 추가 정보를 받고 곧 색도(索度=白河)로부터 출동하여 회대지간(淮垈之間)에서 무기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1973년에 중국 호남성에서 발굴한 마왕퇴(馬王堆) 3호분의 B. C 2144년 기록의 『황제사경(黃帝四經)』 진본(眞本)을 통해 치우천황과 황제의 충돌이 역사적 사실임을 다시 한번 증명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진본 『황제사경』의 「십대경(十代經)」에 치우(蚩尤)를 ‘지우(之尤)’라고 쓰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물론 ‘치우’가 우리말의 ‘황상(皇上)’을 뜻하는 것이므로 한문자의 표기에 별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글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에 있어서 ‘치우(蚩尤)’가 ‘어리석고 벌레 같다’는 뜻인데 반하여 ‘지우(之尤)’는 그저 ‘특별하다’는 뜻이어서 적어도 본래의 발음에 충실하려는 의도로 볼 수 있고, 의도적으로 나쁜 감정을 표시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에서 다시 한번 ‘치우’의 뜻을 되새기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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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기록들은 모두 중국측의 문헌들로 『한단고기[桓檀古記]』를 비롯한 한국측의 문헌들에서 증명하는 내용을 제외하고도 이렇게 증거는 충분한 것이다. 천황이 정황을 살피던 중 제국의 서남지역 제후 사이의 작은 충돌로 시작한 혼란상태는 시간이 흐르면서 천황의 직영지인 청구마저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배달한국은 국가 기구를 전쟁체제로 바꾸고 무기 생산에 필요한 장인(匠人)들을 모두 갈로산으로 집결시켰다. 천황의 긴급 칙령에 따라 아홉개의 대장간을 만들어 장인들을 분치하고 주철(鑄鐵)을 캐서 새롭게 개량된 병장기(兵仗器)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기동에 편리한 보급품을 마련하는 등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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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개량된 병장기로 무장한 천황의 모습을 본 중국인들은 하나같이 치우천황의 모습을 ‘동두철액(銅頭鐵額)’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에 만들어진 병장기(兵仗器)를 보면 다음과 같다.
갈로산의 신무기 생산이 완료되는 시점에 맞추어 서남방의 여러 전선에 긴급 투입된 첩자들로부터 적정(병력수, 무장상태, 방위상태, 보급상태, 사기와 심리적 동향)에 관한 세밀한 정보가 속속 도착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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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천황은 각 지역의 사령관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나 완벽한 듯했던 천황군의 전쟁계획은 처음부터 중대한 시련에 직면하게 되었다. 천황군의 출정을 반대했던 운사부(雲師部)가 기병을 거느리고 헌원군에 합류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적극적인 협조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예견된 일이기는 했지만, 운사부가 천황의 칙령에 정면으로 맞서는 대담한 배반행위를 감행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잠시 충격을 받은 천황은, 그러나 일찍이 서남방으로 깊숙이 진출시켜 놓았던 묘족(苗族)을 차출하여 운사부의 공백을 메우기로 하고 묘군(苗軍)의 출동을 명령하였다. 천황군은 우사(雨師)와 풍백(風伯)을 좌우 대장군으로 전군을 편성하여 출정하였는데, 이때의 모습을 중국측 기록에는 ‘누에벌레와 새의 머리’로 묘사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치우천황의 군사를 동물로 표현하는 식으로 그들의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는 것이다. 또 이런 식의 황당한 표현은 당시의 전사(戰士)들이 투구를 만들 때 용맹성을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무서운 맹수나 도깨비 형상 같은 장식을 부착했는데, 이것을 치우군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인식한 중국인들이 치우천황의 천군을 모조리 맹수나 도깨비의 모습으로 기록한 데서 비롯 된 것이기도 하다. 대장군(大將軍) 풍백(風伯)도 역시 투구 위에 참새가 날개를 펴고 있는 장식을 달고 있었는데, 새는 제국 행정부의 상징물이었다. 천군(天軍)의 총사령관인 치우천황 역시 황금빛 투구 위에 황소뿔 장식을 달았다. 이를 보고 중국인들은 천황의 머리는 ‘소머리(牛頭)’라 하여 수령(首領)을 ‘우두머리’로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천황군의 많은 병사들이 천황을 흉내내어 투구에 소뿔을 달았고, 이것을 실전의 단병전(短兵戰)에서 두촉(頭觸 : 머리 박치기)의 전투기술로 응용하여 중국 병사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술이기(述異記)』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치우의 귀옆 수염(구레나룻)은 칼과 창처럼 날카롭고 머리에는 뿔이 있어 헌원의 군사와 싸울 때 뿔로 사람을 받으니, 헌원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秦漢間說 蚩尤耳髮如劍戟頭有角與軒轅鬪以角?人人不能向).”는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치우는 천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치우의 병사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민족 특유의 박치기 기술이 얼마나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지 짐작케 한다. 『술이기(述異記)』는 치우의 모습을 설명하면서 “치우는 구리머리에 쇠이마, 4개의 눈과 6개의 손 그리고 어깨에는 외날 칼, 몸통은 갑옷, 양손에는 모와 극을 지니고 있으며 쇠와 돌을 먹는다.”라고 하였다. 인류가 치명적인 살상무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B. C 3500년부터이다. 구리 제품은 벌써 B. C 7~6000년경에 나타났는 데 비해 본격적인 살상무기의 제조는 구리에 비소, 주석, 아연을 합금하는 청동 야금술이 개발되면서부터이고 이 기술의 선두주자가 바로 치우천황으로 보인다. 중국의 각종 사서들이 이구동성으로 치우천황의 철제무기 생산을 경이적인 사건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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