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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스크랩 표트르대제와 러시아의 절대왕정 - (專制主義國家)
임광자 추천 0 조회 144 08.06.01 08: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라. 표트르대제와 러시아의 절대왕정 - (專制主義國家)

 

(1) 새로운 수도(首都) 상트 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건설

 

표트르대제의 기마상이 보이는 네바강변표트르1세가 겁없이 치른 스웨덴과의 나르바전투는, 준비 없이 의욕만으로 전쟁에서 승리할수 없다는 값진 교훈만을 패전의 대가로 그에게 지불하고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귀국 후 다시 전열을 정비한 그는 1703년 네바강 하구에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요새(要塞)를 세우고 스웨덴과의 전쟁에 대비하였다.

 

이것이 제정러시아 200 여 년 간의 수도로서, 현재 러시아의 수 많은 문화재와 함께 최대 무역항으로서 위명을 떨치고 있는 페테르부르크(Peterburg)의 첫 출발이다. 강적 스웨덴을 무찌르기 위해서 많은 준비를 완료한 1709년, 폴타바전투에서 러시아는 승리를 거두었다.

 

스웨덴을 격파한 러시아는 이제 유럽과 통할 수 있는 현관이 필요했다. 이 새로운 현관으로 네바강 하구가 정해지고 수 많은 소택지(沼澤地)가 매립(埋立)되고 계획된 도시가 건설되었다.

 

황량한 늪과 갯벌에 말뚝을 박아 지반을 다지고, 수많은 섬과 섬 사이를 다리로 연결한 이 난공사에는, 10년 세월을 소요하면서 역사상 어느 전쟁에서도 이만큼 많은 인명이 손실된 적이 없다는 기록적인 희생(약 5만 명)을 대가로 치루고서야 전쟁 기념비와 같은 도시로 태어날 수 있었다.

 

1712년 표트르 1세는 모스크바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페테르부르크(Peterburg)라 불렀다. 한 나라의 수도로서 유럽과의 열린 창구로서 역할을 맡게 된 이 새로운 도시의 명암은 제정러시아와 더불어 같은 길을 걸었다.

 

1825년 12월, 청년 장교들이 주축이 된 데카브리스트운동(12월당 반란), 1851년 모스크바를 연결하는 러시아 최초의 철도, 1905년 1월 수 천명의 노동자 시위를 무차별 살상(殺傷)한 "피의 일요일", 1914년 페트로그라드(Petrograd)로 이름 변경, 1917년의 2월 혁명과 10월 혁명으로 제정러시아 붕괴, 소련의 성립과 1924년 레닌그라드로 이름 변경,.......

 

1941년 8월, 나찌 독일의 히틀러가 보낸 기계화부대가 이 도시를 포위하자 장장 29개월간 이 도시를 지키는데 40 만 명의 아사자(餓死者)를 무덤으로 보내기 까지, 근대 러시아의 굵직한 역사에는 이 도시가 언제나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1980년대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91년 러시아어(語)의 옛 이름인 상트(聖)페테르부르크라는 정식 이름은 되찾았으나 소련은 해체되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그냥 페테르부르크로 약칭해서 부르고 있다고 하는데 언제 다시 다른 이름이 붙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2) 표트르 1세의 절대왕정

 

수도를 페테르부르크로 옮기고 표트르 1세가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서구화를 통한 부국강병책, 이른바 개혁의 사태가 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의 절대왕정도 그 농도가 더욱 깊어졌다.

 

표트르 1세의 절대왕정은 17세기 말, 직접 서유럽을 견문하고 돌아온 그 날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수염을 깎고 러시아의 긴 외투를 짧게 줄여 입도록 명령하는 등 각가지 국민생활에 관여하면서 이미 추진되고 있었다.

 

여기에 스웨덴과 투르크를 상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행정 및 재정에도 광범한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국적인 징병제도가 실시되고, 14 등급의 관등표가 만들어졌으며, 그의 이름을 딴 조선소와 제철소도 많이 세워졌다. 총주교 제도가 폐지되고 황제가 임명하는 종교회의가 교회 행정을 담당하게 했다.

 

그의 통치기간 40 여 년 중 평화롭게 지낸 것은 불과 20개월, 나머지는 전쟁으로 세월을 보냈다. 별다른 부가가치를 창출할 만한 산업이 없었던 표트르 대제로서는 막대한 전쟁 비용은 국민들의 주머니를 터는 수밖에 없었다. 콧 수염에도 세금, 턱 수염에도 세금, 상상을 초월한 갖가지 명목의 세금이 부과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수입이 목표에 미치지 못하자 이번에는 간접세 중심의 세제(稅制)를 직접세로 바꾸었다. 그래도 목표에 3/4밖에 채울 수없게 되자 1718년에는 대대적인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모든 성인 남녀에게 인두세(人頭稅)를 부과했다.

 

인구 조사 결과에 따라서 지주에 예속된 농노는 물론, 사유지 농민이나 유민까지 농노계급에 통합해서 세원(稅源)을 넓히고 이들에게 누구는 얼마 하는 식으로 세금을 징수했다.

 

인두세 징수에 대한 역사적 사례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허다하다. 동아시아에서는 당나라 때 제도화된 조(租),용(庸), 조(調)를 기저로 세법의 근간이 마련되었는데, 중국에서는 다시 양세법으로 바뀌었고, 명대의 일조편법을 거쳐 청대에 지정은(地丁銀)제도가 확립되면서 인두세인 丁稅가 재산세인 地稅에 통합됨으로써 인두세가 사라지고 인구가 급격히 늘어 났다고 한다.

 

조선의 경우 전세(田稅) 외에 호(戶)를 단위로 부과한 공납 중, 상공(常貢)은 대동법의 시행으로 지세에 통합되었으나 별공과 진상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이름이 무엇이든 국가의 재정 부담은 농민들의 몫이었기에 대동법이라 해서 농민들이 조세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인두세의 일종인 군역의 대가로 양인(良人 : 農民) 丁男이 내야하는 군포의 부담은 균역법의 실시 후에도 가혹한 수탈은 계속되어 19세기 3정의 문란이라는 이름과 함께 전국적인 민란이 발생하는원인이 되었다.

 

이런 사정은 당시의 러시아에서도 다를 바가 없었다. 인두세 징수를 맡은 것은 주로 지주들이 였다. 따라서 그 밑의 농민들은 2중 3중의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이런 제권(帝權)의 지원하에 이루어진 지주들의 부당한 농민압박과 구속으로 농노제 제국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이렇게 러시아제국은 전국민의 절반이 넘는 농노계급의 희생을 발판으로 열강에 합류했다.

 

이외에도 국민들은 군대와 수도건설을 위한 토목공사와 공장 건설에 강제동원 등 쉴 세 없이 징발되었다. 섣불리 저항하거나 거부하면 가혹한 형벌이 뒤 따랐다. 한계에 도달한 민중들이 아스트라한의 폭동(1705)과 돈강 유역의 농민 폭동(1707)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더욱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3) 황제와 황태자 - 세대 차이와 권력 다툼이 빚은 부자간의 비극

 

Moscow 12월의 추위, 얼음으로 덮인 동물원에서 백조를 비롯한 새들이 노닐고 있다.러시아를 유럽의 강국(强國)으로 만들겠다는 목표아래 시작된 표트르 1세의 개혁은 거의가 밀어 부치기 식으로 즉흥적인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황제라는 막강한 권력 외에 개인적으로도 괴력(怪力)이라할 만큼 장사다운 힘을 가진 그는 서슴없이 개혁을 단행했지만 하나밖에 없는 심약(心弱)한 아들만은 그로서도 어쩔 수가 없었든지 죽음으로 몰고 가고 말았다.

 

황태자 알렉세이(Alexis 1690~ 1718)는 부친과는 달리 낡은 러시아 정교에 심취된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황태자가 표트르 대제의 눈에 찰 리가 없었다. 태자가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제위 계승권을 박탈하겠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위협에 황테자가 태도를 바꾸기는 커녕 그의 대답은 늘 이런 것이었다. "제가 러시아의 제위에 오를 수 없는 이상 제발 저를 가만히 내버려 두십시오. 이것만이 제 소원입니다........저는 이미 여러 가지 병 때문에 몸도 정신도 쇠약해 졌습니다.".....

 

그러든 어느날 표트르 1세가 스웨덴과의 전쟁 등 바쁘게 돌아 다니는 사이 이 태자는 훌쩍 외국으로 망명해 버렸다. 표트르 1세가 이를 그냥 넘길 리 없다. 여러 가지 감언이설로 그가 돌아올 것을 종용하였고, 그 말을 그대로 믿은 황태자는 러시아로 돌아왔다.

 

귀국 즉시 체포되어 군법회의에 회부,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의 최후에 대해서는 자살(自殺)과 독살(毒殺) 이라는 소문만 분분하게 남기고 사형집행 전에 죽었다. 어쨋든 아버지가 아들을 죽인 것이다.

 

왜 부자간에 이런 비극이 일어 났을까? 그 첫 번째이유는 세대간의 현격한 성격 차이, 일찍부터 별별 고생을 다한 아버지로서는 앞으로 러시아를 이끌기 위해서는 자기와 같은 강인한 후계자를 바랐고, 아버지의 궁전에서 고생없이 자라면서 종교에 심취한 태자로서는 군대와 아버지의 철권 정치에 진저리를 냈던 것이다.

 

여기에 철새처럼 따라 다니는 정치 세력들이 두 번째 이유를 제공했다. 표트르 1세의 독주에 반대한 귀족들과 교회세력이 황태자를 등에업고 그들의 세력 만회(挽回)를 위한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런 음모에 황태자가 스스로 빠져 들어가고 반대파에게 이용되었다면, 그 재앙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 비록 자식이지만 그런 그에게 절대로 러시아의 장래를 맡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기 손으로 자식을 없앤 것이다.

 

여기서 전에 이야기하다가 만 조선왕조의 인조와 소현세자와의관계를 잠깐 살펴보자

 

.....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백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그리고 임진년에 재조(再造)해준 그 은혜는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선왕(선조)께서 40년 동안 재위하시면서 지성으로 섬기어 평생에 서쪽(명나라)을 등지고 앉지도 않았다. 광해는 배은 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1619)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강홍립)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이상은 인조 반정이 있었던 그 다음날(1623. 3. 14)숭명반청(崇明反淸)의 혁명 당위성을 강조한 "인조의 즉위와 광해군의 폐위에대한 왕대비(인목대비)의 교서" 중 일부다.

 

임금(君臣)나라, 아버지(父子)의 나라와 다름 없는 명나라를 배신하고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와 내통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용서 받을수 없는 과오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명분은 불과 십 수년 후 병자호란의 치욕과 함께 그 오랑캐가 세운 청나라에 신하의 예를 바쳐야 하는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세자빈과 함께 볼모로 심양에 갔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몰랐던 유약한 선비들의 말 장난치고는 그 폐해가 너무도 컸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국내에서는 서열상 지위만 높은 뿐, 아무런 실권이 없는 것이 세자라는 자리였으나, 심양에 가게 된 소현세자는 사정이 달랐다. 양국간에 현안 문제를 비롯해서 모든 교섭 창구 역할을 담당하게 되면서 현실적인 정치문제에 싫든 좋든 개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조선이 신주(神主)처럼 받들었던 명나라가 자체의 모순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드디어는 이자성의 농민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은 1644년 베이징을 점령,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종 / 1628 ~ 44)가 자결함으로서 명나라는 멸망하였다.

 

이때 만주에 머물고 있던 청나라는 이자성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베이징에 들어 갔는데, 청의 섭정으로 사실상 황제나 다름 없었던 제 9왕 다이곤(도르곤)을 따라서 소현세자도 같이 행군하여 베이징으로 들어 갔다. 여기에서 세자는 청의 막강한 군사력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고, 그런 청과 더욱 긴밀하게 지내기를 희망하고 더욱 친선에 힘썼다.

 

베이징을 점령한 이자성은 연호를 영창(永昌), 국호를 대순(大順)이라 정하고 나라를 세웠으나 42일 만에 그 자리는 청나라에게 내 주어야했다. 이래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중원의 주인으로서 조선의 왕좌까지도 좌우하는 천자의 나라가 되었다.

 

이 천자의 나라 실세(實勢)들과 두터운 교분을 가진 세자가 돌아왔다. 이렇게 되면 누가 그를 반겨야 되고 누가 그를 미워해야 하는가? 묘한 기류가 조정을 감돌기 시작했다. 영구 귀국 후 수개월이 지난 인조 23년(1645) 4월 26일, 그는 싸늘한 시체로 변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4월 23일 세자가 신열(身熱)이 높자 어의(御醫) 박군(朴군)은 학질(말라리아)이라 하였다. 의관(醫官)들이 함부로 침을 놓고 약을 쓰다가 (3일만에) 슬하에 3남 3녀를 두고 향년 34세로 죽으니 온나라 사람들이 슬퍼하였다.........갑작스러운 세자의 죽음과 이에 따르는 의전(장례) 절차를 몰라서 강화도의 사고(史庫)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을 상고키로 주청 했으나, 상(인조)은 입관 후의 절차는 거기에 따르라 하고, 입관부터 서둘러서 3일 만에 입관(入棺)하였다.........."

 

소현세자에 관한 왕조실록의 기록은 그의 행적에 비해서 매우 소략하다. 당시에 전염병인 학질로 인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렇다면 세자만이 학질로 죽었을까? 반정공신들은 혁명의 당위성인 숭명반청의 이데올르기가 퇴색되는 것이 싫었고, 임금 인조는 청의 간섭으로 세자에게 왕위를 잃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마지하였다.

 

(4) 제정 러시아의 과제

 

러시아의 농촌 풍경러시아 근대화의 화신이었던 표트르 1세도 50 고개를 넘기면서 지치기 시작하였다.

 

그의 나이 52세가 되었던 1724년11월, 황제 일행이 페테르부르크 근처 제철소와 병기창에 가는 도중, 병사들을 가득태운 보트 한 척이 여울 톱에 걸려서 꼼짝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성미 급한 표트르 1세는 허리까지 차는 강물에 자신이 직접 뛰어 들어 보트를 끌어냈다. 그러나 11월의 차가운 날씨와 강물은 그에게 감기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을 안겨 주었다. 약이라는 약은 다 써 보았지만 효험이 없었다.

 

1725년 1월 28일 저녁, 최후의 안간힘을 다하여 펜을 잡고 "모든 것을 맡기기로 한다......."라는 말 다음에 맡기겠다는 사람이 누구라는 것을 쓰지 못하고 향년 53세로 숨을 거두었다.

 

황제인 그가 평범한 직공으로 신분을 속이고 사절단의 일원으로 서유럽에 가서는 몸소 연장을 잡고 열심히 배웠으며, 부하 수병들이 탄 보트가 물에 빠진 것을 건지다가 감기에 걸려 죽은 행적 등 수 많은 장부다운 행동과 인간적인 매력은 그의 가혹한 철권 독재정치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인들에게 표트르대제를 매우 존경하게 만들었다.

 

이런 거인(巨人)이 쓰러지자 러시아 정국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황태자가 이미 죽고 없는 마당에 누구를 황제로 세워야 하는가? 조신(朝臣)들이 이마를 맞대고 의논했지만 의견만 분분할 뿐 결론이 없었다.

 

이런 조신들의 회의장에 느닷없이 멘시코프 원수(元帥)를 비롯해서 근위대의 장군들이 들이 닥쳤다. "황후 예카테리나(Ekaterina) 폐하를 반대하는 자 있는가?....있다면 나오라, 당장 골통을 부셔버리겠다........."

 

이런 공포 분위기에서 누구도 감히 반대할 수가 없었다. 리투아니아 농가에서 태어난 표트르 대제의 황후 예카테리나는 북방전쟁 때 포로가 되어 내연(內緣)의 처(妻)로 있다가 1712년 정식 결혼으로 황후가 되었다. 슬하에 두 딸을 두었고, 문맹(文盲)인데다가 음주벽까지 있었으나 남편에게는 극진한 아내였다고 한다.

 

남편의 죽음은 이 아내를 러시아의 황제로 만들고 예카테리나 1세(Ekaterina I / 1684 ~ 1727)라 불렀다. 그러나 그녀의 황제라는 권력은 쿠데타를 주도한 근위대에게 돌아갔고, 이런 것이 전례가 되어 이때부터 37년간 여섯 번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예카테리나 1세의 두 딸을 포함한 네 명의 여황제와 세명의 황제가 교체되었다. 37년간 일곱 번씩이나 황제가 바뀠다면 그 정쟁(政爭)의소용돌이 또한 얼마나 큰 파장을 남겼겠는가?

 

이런 소요 가운데 귀족들은 군역(軍役)의 의무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행정 구역의 정비에 따라 각 지방의 행정, 사법, 경찰권 등 폭 넓은 권력을 가진 이상한 체제로 변질되어 귀족들의 천국인 동시에 농노들에게는 지옥과 같은 전제주의국가(專制主義國家)가 되었다.

 

러시아가 근대국가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이런 모순부터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모순된 체제가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라는 다른 힘에 의해서 무너질 때 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이런 것이 귀족사회가 남긴 제정러시아의 한계였고 그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 다른 곳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희생을 치루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공산정권을 수립하였다.

 

(지금까지 주마간산(走馬看山)격이남아 유럽의 절대 왕정을 살펴 보았다. 절대왕정하에서 성장했다는 시민계급도 지역에따라 천차만별이고, 그 남아 영국을 기점으로 할 때 동쪽으로 갈수록 그 시기도 내용도달라지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들 시민계급들이 근대국가를이루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독립, 프랑스 대혁명, 영국의 산업혁명 등은잠시 뒤로 미루고, 16세기에서부터 18세기에 걸쳐 일어났던 유럽에서의 절대왕정과같은 시기, 시민계급이라는 개념조차 몰랐던 동아시아 사회로 이야기를 옮겨 보자)
- 다음호에 계속.-

세계는 지금..........Sun. 16. Dec. 2001.
판문점의 북한 병사들 외 사진자료 모음

How Do I Live (영화 'Con air' 삽입곡) - Trisha Yearwo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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