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안의 영해지역에 있는 전통문화마을의 종택(宗宅)을 찾아서-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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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해지역】 ◉전통문화 마을 *영해면 괴시리 *영해면 원구리 *창수면 인량리
◉영해지역 북부 4개면 *영해면 *창수면 *축산면 *병곡면
◉고찰 *장육사 *유금사
| ◉사적지 *항일의병대장 신돌석 장군 생가와 사적지 기념관 *항일 독립운동 1919. 3. 18 의거 애국선열 추념탑 *목은 이색선생 기념관
◉관광지 *대진해수욕장 *고래불해수욕장 *칠보산 휴양소 *임실,두들마을 약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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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덕군 영해면 위치 및 내역 > 1.영해의 위치 동해안 7번 국도를 타고 북으로 가면 포항, 청하, 강구, 영덕 다음에 영해이며,‘영해’는 포항과 울진의 중간지점이 되고, 북쪽으로 계속가면 평해, 울진, 삼척으로 간다. 영해지역이라고 하면 영덕군 9개면에서 북쪽에 위치한 4개 면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시골 5일장이며 교통의 중심지가 된다. 항일의병장 신돌석 장군의 생가와 사적지 기념관이 있으며, 1919년 3월 18일에 영해장터에서 항일 독립운동을 실행하였으며 애국선열들의 영령을 추념하는 3.18 항일독립운동 기념탑이 있다. 그리고 약 2km정도의 동해바다에는 대진해수욕장과 고래불 해수욕장이 있다.
2. 영해의 유래 *사서(史書:삼국사기)에 그 이름이 나오는 것은 우시군국이 유린(有隣)으로 바뀌는 신라 경덕왕 16년(757) 부터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23년(940)에 유린군을 예주(禮州)로 고쳤으며, 충선왕 2년(1310)에는 영해부사영(寧海府使營)을 두었다. 또한 성종 때부터 영해는 단양(丹陽)이라 불렀으며, 오늘날도 단양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 6년(1397)에 첨절제사를 두었고, 태종 13년(1413)에 다시 도호부사를 두었으며, 이후 고종 32년(1895)에 영해부는 영해군으로 되었다. 그리고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에 의하여 영해군이 영덕군에 통합되면서 영해면이 새로이 신설되었다.
유서 깊은 팔성종실(八姓宗室)마을 나라골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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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량리의 위치와 내력 1.위 치 *창수면 인량리는 영해면 소재지인 성내리에서 서쪽으로 영양읍과 창수면으로 가는 918번 도로를 따라 약 2Km 정도 가다가 첫 마을로 원구리가 나온다. 원구리 입구에서 인량리까지 약 2km되는데 오른편 방향으로 들판을 가로질러있는 도로를 따라가면 내가(川)가 나온다. 내를 건너면 바로 인량리이다. 아랫 나라골을 거쳐 윗 나라골에 도착하게 된다. 인량리에서 조금 더 가면(약1km) 창수면 소재지인 신기리가 나온다.
2. 인량리 마을사 이 곳 인량리는 영해에서 서쪽으로 십리되는 곳에 삼면이 산으로 쌓여있고 남쪽에 내가(川) 가로 놓여 있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한 큰 동리로 영남의 명지(名地)로 이름이 높다. 마을의 역사는 선사시대부터 오늘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옛날 지명은 잉량화仍良火)라 하다가 뒷산 형국이 학이 나래를 펼친 것과 같다하여 비개동(飛蓋 洞), 익동(翼洞)이라 하였으며, 광해2년(1610)에 인량으로 개칭되었다. 일설 나라골(國洞)이라 불러 오는데 이는 나래골에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영해부지(寧海府誌)에 의하면 인량리는 팔성종실( 八姓宗室)이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옛부터 풍속이 순후하고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부내(府內)에서 으뜸가는 동리라 하였다. 광해 7년(1615)에 군내에서 처음으로 향약(鄕約)을 제정하였으며 숙종3년(1677)과 1927년에 규약을 시대에 맞게 중수(重修)하여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다. 또한 이 곳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기미독립운동에 이르기 까지 의병으로 구국(救國)에 참여하신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지금 많은 인재가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한 이 곳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및 기미독립운동에 이르기 까지 의병으로 구국(救國)에 참여하신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지금 많은 인재가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동리에는 크고 작은 고 가옥(古 家屋)과 많은 문화재가 산재되어 있으며 전통테마 마을과 정보화 마을로 선정되어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을로 군내에서 다른 마을보다 앞서 가고 있다. <마을 안내 현판 글 옮김>
인량리에 가장 먼저 정착한 성씨는 고려 충렬왕대에 대흥 백씨(大興白氏)이다. *대흥 백씨는 토성(土姓)인 영해 박씨(寧海朴氏)와 혼인하여 예산군 대흥에서 나라골에 정착하였으며, *단양(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고려 말 공민왕 대에 *영양 남씨(英陽南氏)가 세종조인 1420년에 울진에서 , *무안 박씨(務安朴氏)는 세종연간인 1445년에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세조2년 1456년에 *야성 박씨(野城 朴氏)는 성종연간에 *함양 박씨(咸陽 朴氏)가 1480년 연산연간에 성주에서, *재령 이씨(載寧李氏)는 1497년 성종연간에 경기도 여주에서 *야성 정씨(野城鄭氏)는 1548년 명종연간에 평해에서 이거했으며 *영천 이씨(永川李氏는)는 1567년 명종말에 예안에서, *선산 김씨(善山金氏)는 1678년 숙종조에 영해 목골 수일정에 입향하였다가 후손이 인량에 입향하였고 *신안(웅성) 주씨(新安朱氏)는 1650년 울진에서 영해 묘곡으로 이거 하였다가 입향하였다. 모든 성씨들은 먼저 이주한 성씨와의 통혼(通婚)으로 마을에 들어왔다.
*통상으로 팔(八)종가(宗家)라는 말을 하는데 실재로는 십여 종택이 있으며, 구분은 각 성씨의 입향조 중에 인량리에 터를 잡고 살았던 사실여부이다. 현재 후손이 없더라도 입향한 터가 있으면 팔 종가에 해당 된다 (1) 지정문화재 종택 〈 건축구조와 가문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함〉 ◉충효당(忠孝堂),(국가지정 중요민속자료 제168호) 재령이씨 운악(雲嶽) 종택, 입향조 울진현령 이애(李璦)공이 지은 집. 손자 의령현감 운악(雲嶽) 이함(李涵)공이 이건함. ◉오봉헌(五峯軒)(경상북도 지정문화재자료 제538호), 안동 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 입향조 오봉(五峯) 권책(權策)공의 종택. 단종복위 사건시 단종의 외족으로 유배 옴 *파조(波祖) 부정공(副正公) 권통의(權通義)의 8세손 ◉갈암(葛菴)종택( 〃 기념물 제84호) 재령 이씨 숙종 때 문신이며 성리학자, 영남학파 거두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1627-1704) 공의 종파. *父는 이시명(李時明) 母는 안동장씨 장계향 디미방의 저자 ◉우계(愚溪)종택( 〃 문화재자료 제307호). 재령이씨 우계(愚溪) 이시형(李時亨)공의 종파. 이함공의 차남임. ◉용암(龍岩)종택( 〃 민속자료 제61호) 입향조 선산 김씨 통정대부 병조참의 용암(龍岩) 김익중(金益重) (1678-1740) 공의 종택 ◉삼벽당(三碧堂)( 〃 문화재자료 제458호) 영천이씨 하연공파(賀淵公派) 영해부사 이중량(李仲樑) 종택. 부(父)는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 조선중기 문신,청백리,문학가 *인량 입향조 이사민(李士敏)은 이현보의 증손자가 됨 (2) 비문화재 종택 ◉평산 신씨(平山申氏) 재정공파(平山申氏齋靖公派) 인량종택. 파조(派祖) 현종9년 좌의정 재정공(齋靖公) 신효창(申孝昌)(1364-1440) *입향조 고려 공만왕대 이유헌(理猶軒) 신득청(申得淸)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로 유명 ◉처인당(處仁堂), 영양 남씨(英陽南氏) 송정공파(松亭公派)종택. 입향조 용담현령(龍潭縣令) 송정공(松亭公) 남수(南須)종택 송정공의 12세손 증직 사복시정 처인당(處仁堂) 남달만(南達萬) ◉무안 박씨(務安朴氏) 영해파 종택 입향조 증 사복시정(贈 司僕寺正) 박지몽(朴之蒙)공의 종택 ◉원모재(遠慕齋) 함양 박씨(咸陽朴氏)종택 입향조 부사직(副詞直) 원모재(遠慕齋) 박종산(朴從山)공의 종택 ◉소호(小湖)종택 함양 박씨(咸陽朴氏) 중시조 소호(小湖) 박신지(朴身之)공 종택. ◉신안 주씨(朱氏) 종택.
영해 입향조 주열(朱烈)공 ◉대흥 백씨(大興白氏) 성암공파(省菴公派) 인량종택 (60년전) (3)일반 지정문화재 ※17-18세기 조선시대 가옥 변천사를 살필 수 있는 지정문화재 가옥 ◉ 만괴헌(晩槐軒)(경상북도 지정문화재자료 제209호) ; 평산 신씨 만괴헌(晩槐軒) 신재수(申在洙1798-1855)공의 살림집이며, 재정공(齋靖公) 신효창 (申孝昌)공의 16세손으로 만괴헌은 영해향교의 태화루의 개수와 이태의 흉년에 많은 시혜를 한 공로로 나라에서 특사 받은 신재수의 호이다 ◉ 지족당(知足堂): ( 〃 문화재자료 제274호) 안동권씨 영조때 장수현감 지족당 권만두(權萬斗1674-1753)공이 지은 살림집 ◉ 강파헌정침(江波軒正寢) ( 〃 문화재자료 제358호) : 숙종때 청백리로 명성이 높았던 안동권씨 강파 권상임(權尙任1622-1700)공의 살림집
(4) 지정 유형문화재 ◉ 주씨 종택(朱氏宗宅)소장 고문서,( 〃 유형문화재 제347호 ) 신안 주씨 종택 소장 고문서 3종(種) 7점(點)이다 (5) 정려비旌閭碑) ◉ 정담정려비(鄭湛旌閭碑) 문화재자료 제380호 *본관 야성(野城) 정담(1548-1593) 장군은 조선 명종(明宗)3년(1548)에 평해군 사동출생 영남 동도병마사(嶺南東道兵馬使)의 비장(裨將)으로 1583년 오랑캐를 소탕하였고, 임진왜란 때 전라 도 김제군수로 재직중 웅치(熊峙)에서 격정을 치르다가 45세로 전사하였으며, 숙종16년(1690) 에 나라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6) 애국지사 사적비(愛國志士 史蹟碑)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관리번호 33-6 사적비와 현충시설물들은 함양박씨 박의연(朴義然)(1880-1943}박의열(朴義烈)(1869-1930) 지사, 박의훈(朴義薰)(1889-1983)지사 삼형제분이 만주로 망명가서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 친 세분선열들의 항쟁 정신을 기리고자 2000년에 건립하였다. *1990년 삼형제선열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7) 지정되지 않은 문화재들 ◈고가(古家); *처인당(處仁堂). (6.25때 소실되어 재건축하였다) ◈정자(亭子): *우계정(愚溪亭), *서산정(西山亭), *청계정(淸溪亭), *집선정(集仙亭) *수택정(水澤亭), *임연정(臨淵亭), *농산정(農山亭) ※자운정(紫雲亭):재령이씨 자운정의 안주인은 음식‘디미방’의 저자인 안동 장씨 장계향 부인 이며 갈암선생은 넷째 아들이 된다 ◈사묘(祀廟): *후곡재(後谷齋), *추모재(追慕齋) ◈충효비(忠孝碑) : *인량리정려각(仁良里旌閭閣) ◉ 조선시대 사대부 가옥구조형성의 근본요소. 조선 중기이후 상류층 가옥은 남녀유별(男女有別)의 유교의 내외법(內外法)사상이 가옥구조에 반영됨으로써 口字形의 폐쇄형태이고 여성과 남성의 영역이 엄격히 분리된다. 양반층 상류가옥은 사랑채의 큰사랑은 마을 전체 주민들의 감시는 물론, 가옥내의 가족구성원들의 통제를 가능케 하는 전략적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이러한 가부장에 의한 여성 통제의 기술을 효과적이었던 공간배치가 18세기 후반부터 안채와 사랑채가 하나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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