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묵상 말씀은 욥기서 34장 1-30절.욥의 세 친구들에게 강하게 호소하는 엘리후의 포효를 듣는다.'내 말을 들으라, 내게 귀를 기울이라 '(2절)엘리후는 그랬다.자기의 말을 들으라고 했다.자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했다.자기의 생각과 말이 곧 진리요 법이라고 생각한 까닭이다.엘리후의 말이 부분적으로는 맞다.하나님은 단정코 불의를 행치 아니하시며, 사람의 일을 따라 보응하시는 분이심은 맞다.신분의 귀천을 따라 공의가 굽혀지지 않는 분이시다.정말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시기에 오래 생각하실 것이 없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안다.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만은 아니심을..욥기서를 통해서 우리는 인과응보의 원리마저 훨 뛰어넘는 하나님을 배우고 있다.하지만, 욥의 세 친구들처럼 엘리후 그 마저도 역시나 인과응보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죄를 지으면 보응을 받지만 모든 아픔이 죄에 대한 보응만은 아니다.죄를 지었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죄 까닭에 사업이 어려워지고,죄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천편 일률적인 이런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이제 우린 안다.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얼마나 몸서리치는 율법적인 요소가 되는지를 잘 안다.하지만,욥의 세 친구들, 엘리바스, 소발, 빌닷 뿐아니라 마지막 남은 엘리후마저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우리 역시 마찬가지다.우리마저도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인과응보의 틀에 묶여 꼼짝못할 때가 있다.그래서 함부로 판단하고 예사로 정죄할 수가 있다.남에게 뿐아니다.문제는 자기자신에게 더 심하다는 데 있다.조금만 잘못되면,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꼭 인과응보식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어쩌면 머리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하지만, 하나님은 그 원리에 마저 제한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인과응보만은 아닌, 그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또 알아야 한다.욥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죄와는 상관없는 아픔, 그래서 결코 죄의 보응이 아닌 고통도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운다.욥기서에서 배워야할 중요한 지혜의 하나다.그걸 모르면,우리 마저도 어쩔 수 없이 욥의 친구들 처럼 된다.내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겁없이 정죄해버리는..그러면서 내 말을 들으라는,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무식하고도 용감한, 무서운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겸허함을 배우는 월욜아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안다.하나님은 인과응보의 하나님만은 아니심을..욥기서를 통해서 우리는 인과응보의 원리마저 훨 뛰어넘는 하나님을 배우고 있다.하지만, 욥의 세 친구들처럼 엘리후 그 마저도 역시나 인과응보의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죄를 지으면 보응을 받지만 모든 아픔이 죄에 대한 보응만은 아니다.죄를 지었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죄 까닭에 사업이 어려워지고,죄 때문에 고통을 당한다는.. 천편 일률적인 이런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이제 우린 안다.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얼마나 몸서리치는 율법적인 요소가 되는지를 잘 안다.하지만,욥의 세 친구들, 엘리바스, 소발, 빌닷 뿐아니라
마지막 남은 엘리후마저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우리 역시 마찬가지다.우리마저도 조금만 방심하면 이렇게 인과응보의 틀에 묶여 꼼짝못할 때가 있다.그래서 함부로 판단하고 예사로 정죄할 수가 있다.남에게 뿐아니다.문제는 자기자신에게 더 심하다는 데 있다.조금만 잘못되면, 조금만 어려움을 당하면 꼭 인과응보식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다.어쩌면 머리는 자동적으로 그렇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인과응보의 원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방법중의 하나임에는 분명하다.하지만, 하나님은 그 원리에 마저 제한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인과응보만은 아닌, 그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또 알아야 한다.욥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죄와는 상관없는 아픔, 그래서 결코 죄의 보응이 아닌 고통도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배운다.욥기서에서 배워야할 중요한 지혜의 하나다.그걸 모르면,우리 마저도 어쩔 수 없이 욥의 친구들 처럼 된다.내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겁없이 정죄해버리는..그러면서 내 말을 들으라는, 내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무식하고도 용감한,
무서운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겸허함을 배우는 월욜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