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혼생활과 파탄(結婚生活和關係破裂)
결혼후 3일째 되는 날에 장개석(蔣介石)과 진결여(陳潔如)는 중국전통에 비
추어, 한아름의 선물을 들고 진결여(陳潔如)의 모친에게 인사를 드리고난후,
시댁식구를 찾아뵈러 갔다. 오후 3시반쯤 계구(溪口)에 도착했다. 가마에서
내리면서 진결여(陳潔如)는 아주 큰 구식집이 한채 있고, 그 앞에는 약간 키
가 작으면서 온화하고 정통적인 부인이 한 명 서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장
개석(蔣介石)은 그녀에 대하여 재빠른 말투로 소개하면서 얼버무렸는데, 그
녀가 바로 첫째부인인 모복매(毛福梅)였다. 진결여(陳潔如)는 그녀를 한 번
만났던 것처럼, 정감이 가고 포근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짧은 시간에 매
우 빠르게 머리를 빗고, 세수를 하여 몸을 단정히 하였다. 그리곤 중국 전통
차림의 옷으로 빨리 갈아 입고서, 조상에게 새로운 식구가 가문에 들어왔음
을 알리는 행사인 집안사당의 제사의식에 참석하러 갔다.
1922년 마침 장(蔣)과 진(陳)이 계구(溪口)에서 밀월을 즐기던 때, 장개석
(蔣介石)은 손중산(孫中山)이 보낸, “빨리 광주(廣州)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접하게 되었다. 진결여(陳潔如)는 작별인사를 모복매(毛福梅)와 나누면서 눈
에 눈물이 고였고, 장개석(蔣介石)은 상해(上海)로 가는 배에 올랐다. 상해(上
海)에서 진결여(陳潔如)는 처음으로 장경국(蔣經國)을 만났다. 이때부터 장
경국(蔣經國)은 진결여(陳潔如)를 “상해어머니(上海媽媽)”라고 부르게 된다.
장경국(蔣經國)은 그때 열몇 살로 장위국(蔣緯國)과 함께 상해(上海)에 도착
하였는데, 먼저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각각 만죽소학(萬竹小學)과 포동중
학(浦東中學)에 입학시켰다.
▲ 젊고 꿈많고 발랄하던 시절의 진결여(陳潔如)
진결여(陳潔如)는 장위국(蔣緯國)을 특별히 총애하면서 자기가 낳은 자식과
똑같이 여겼다. 장위국(蔣緯國)은 경우에 따라서는 진씨(陳氏)의 거처에 가보
기도 하면서 그녀를 서모(庶母)라고 불렀다. 이후 몇 년 동안 장개석(蔣介石)
이 광주(廣州)에서 고향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결국 진결여(陳潔如)를 데리고
다녔다. 그녀는 동시에 장개석(蔣介石)의 비서신분이기도 하여 곁에서 장개석
(蔣介石)을 수행하면서 모시고 따라다녔다. 장개석(蔣介石)은 그때 모복매(毛
福梅)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고, 집안 내부의 상황을 공고히 하는 책략으로 대
하고, 진결여(陳潔如)에 대해서는 매우 예양된 태도로 대하고 있었다. 진결여
(陳潔如)는 지식과 학식과 예의를 겸비한 사람이므로, 모복매(毛福梅)를 매우
존경하고, 자녀들을 몹시 귀여워하여 자주 의복이나 일용품 및 장난감을 사다
주었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는 사람은 이 진씨(陳氏)어머니라고 말한다.
1923년 2월 18일 장개석(蔣介石)은 홍콩에서 보낸 손중산(孫中山)의 편지로
그를 대원수부(大元帥府)의 야전사령부참모장으로 임명한 서신을 받았다. 4월
20일 광주(廣州)에서 접한 서신에 따르면, 동년 8월 14일 장개석(蔣介石)은 단
원을 인솔하여 소련방문을 하기로 되어있었다. 장개석(蔣介石)은 본래 진결여
(陳潔如)를 데리고 그곳을 가도록 권유를 받았으나, 진(陳)이 소련으로 가기를
거절하였므로 장(蔣)은 부득이 자신의 충정을 내세워, 이것저것을 다 말하는 서
신을 쓸 수밖에 없었다. 장(蔣)은 귀국 후 봉화(奉化)에 돌아가 방문보고를 썼는
데, 다음 해 황포육군군관학교(黄埔陸軍軍官學校)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때 장
(蔣)과 진(陳)은 겨우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었다. 모씨(毛氏)와 요씨(姚氏)는 모
두 중시를 받지 못하고 버려진 상황이었는데, 오직 진결여(陳潔如)만 부인으로서
영광스러운 위치를 누리면서 혼자만 그 재미를 향유하고 있었다.
장개석(蔣介石)과 진결여(陳潔如)는 매우 다정하게 지내고 있었고, 장개석(蔣介
石)은 국부(國父)인 손중산(孫中山)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언제라도 쉽게 집으
로 찾아가서도 접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송미령(宋美齡)을 알게 되자, 그
욕심이 끝이 없어 “롱(隴)을 평정하면 촉(蜀)까지 점령하고 싶다” 는 말처럼 마
음이 한곳에 집중되지 못하고 들떠서, 색다른 것을 보고 마음이 변하여, 당시 사
람들은 장개석(蔣介石)을 호색가(好色家)라 칭하며, 일찍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중국의 도덕적 기준을 잣대로 적용하여 판단하여도 장개석(蔣
介石)의 행위는 도학선생(道學先生)을 경시하는 것이 확실함에 그치지 않고, 일
반민간인에게도 멸시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蔣)은 또 송(宋)에게 마음이 팔
리고, 송(宋)의 자색(姿色)에 홀려 그렇게 간단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장(蔣)
과 송(宋)은 장개석(蔣介石)이 정치적인 동기로 주요한 모임에 자주 나오는 것
을 계기로 인척관계를 맺고자 하였다.
▲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교장시절의 장개석(蔣介石)과 진결여(陳潔如)
장개석(蔣介石)은 자기의 대사(大事)를 그르치지 않고, 방해받지 않기 위하여 우선
진결여(陳潔如)를 가다듬어야 했다. 1926년 여름에 송미령(宋美齡)의 형부인 공상
희(孔祥熙/ 쿵샹시 : 1880~1967)집에서 진결여(陳潔如)와 송씨자매(宋氏姐妹-宋
靄齡과宋美齡)가 만나도록 그들을 초청하는 형식의 “비둘기향연”을 주선하도록 장
개석(蔣介石)은 사람을 시켜서 일을 추진하였다. 그 당시 송애령(宋靄齡/ 쑹아이링:
1889~1973)바람이 불고 있었기 때문에 송미령(宋美齡)으로 진결여(陳潔如)의 지
위를 대체하는 것을 시도하기 위해서였다. 1926년 장개석(蔣介石)은 남창(南昌)에
서 재차 곤경에 빠져있을 때였는데, 송애령(宋靄齡)은 공상희(孔祥熙)와 송씨가문
(宋家)의 이익을 위하여 장개석(蔣介石)에게 또다시 송미령(宋美齡)을 아내로 맞이
하는 계책을 꾸며, 서방의 지원을 획득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장(蔣)은 이번 혼인은
정치적인 혼인이라는 것을 진결여(陳潔如)에게 알리자, 그녀는 거의 기절할 것 같았
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개석(蔣介石)의 감언이설에 진결여(陳潔如)은 5년간이나 바다를 건너 머나먼 미국
에 가서 공부하게 되었고, 되돌아와서 다시 말하기를 "만약 그 당시 그렇게 하지 읺았
다면 장(蔣)은 '모두가 죽고 만다'고 말하였다" 고 했다. 장(蔣)이 자기의 주장을 강력
하게 내세우자, 진(陳)은 부득이 뒤로 물러나 길을 터주면서 자기의사를 표시했다. 진
결여(陳潔如)와 장개석(蔣介石)은 이렇게 갈라서게 되었는데 1927년 8월 진결여(陳
潔如)가 바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이었다. 8월1일 아침 장개석(蔣介
石)은 진결여(陳潔如)의 어머니에게 혼자서 가서 진결여(陳潔如)가 미국으로 떠난다는
것을 알렸다.
장개석(蔣介石)은 진결여(陳潔如)와 장정강(張靜江)의 딸이 같이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타도록 하였다. 진(陳)은 아무 대답도 않았고, 장(蔣)은 딱 5년만 있다가 오라고 고통
스럽게 간청하였다. 장개석(蔣介石)은 이렇게 말하였다 : “결여(潔如)야, 너가 머나먼
미국에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이것이 송애령(宋靄齡)이 제시한 조건 중 하나다. 결
여(潔如)야,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지나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 그러나 상해
(上海)에 계속 머무르는 것은 거래전체가 깨지게 되는 거야. 너는 아직도 나의 고심을
이해하지 못하니?”
진결여(陳潔如)의 모친이 알선할 때 장개석(蔣介石)은 5년을 기한으로 하여 결여(潔
如)와의 혼인관계를 회복시키겠다고 맹세하였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하늘이 벼락을
내려 해외로 쫓아내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장개석(蔣介石)은
정치적 목적을 위하여 결의를 굳히고, 진결여(陳潔如)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었다.
그리고 송미령(宋美齡)과 잘 지내다가 부부가 되었다. 장(蔣)과 진(陳)의 혼인기간은
6년에 불과한데다가 대부분의 세월을 남방의 광주(廣州)에서 보냈다. 그들의 관계는
상해(上海)에서 시작하고, 역시 상해(上海)에서 끝냈다.
▲ 장개석(蔣介石)과 진결여(陳潔如)의 즐거운 시절
1929년 8월 19일 진결여(陳潔如)는 장정강(張靖江)의 다섯째 딸인 헬렌(Helen /
본명 張菁英 : 1910~2005)과 함께 증기기관선인 잭슨 대통령호(Present Jackson)
를 타고 미국으로 갔다. 배가 일본 고베(神戶)에 도착했을 때, 일간지들이 장개석(蔣
介石)의 부인이 이 중기선을 타고 미국으로 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당시 태평양상에
기선이 항해하면 상해(上海)의 라디오방송들은 각 신문잡지들이 게재한 ≪장중정(蔣
中正)소개≫를 보도하였다. 각 동지들은 중정(蔣中正)의 가정사에 관하여 많은 서신
질의가 있었다. 아직도 알려드리지 않은 사항과 계몽에 회답하지 않은 사항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특별히 알려드린다. 민국10년(1922년) 원부인인 모씨(毛氏)와 중정(中
正)은 정식으로 이혼하였다. 기타 양씨(兩氏)는 원칙적으로 혼약이 없으며, 현재 중정
(中正)과는 이혼상태이다. 현재 중정의 가정에는 두 아들이 있고, 아내와 딸은 없다.
전해들은 말은 사실과 같지 않을 수도 있어 주관적인 생각대로 쉽게 부풀리고 자신의
감정을 섞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인물에 대한 질문에는 특별히 신중히 대답
해야 한다. 진결여(陳潔如)가 이와 같은 소식을 전해 듣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
지는 것 같고, 죽고 싶을 정도로 슬펐다. 몇 번이나 바다에 뛰어들고 싶고, 모든 호송
자를 밀쳐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진결여(陳潔如)가 미국에 도착하자, 한때는 뉴스
거리를 찾아낼 의도로 기자들이 뒤를 따르는 일도 자주 있었다. 진결여(陳潔如)일행
은 이에 대해 어떤 드릴 말씀도 없다고 얼버무렸다. 진결여(陳潔如)와 장개석(蔣介石)
이 이혼하고 나서 두월생(1888~1951 : 杜月笙/ 두위에성)을 통하여 그녀에게 한번
거금을 보내왔다. 이로 인하여 그녀는 출국한 뒤 물질생활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진결여(陳潔如)는 일반여성들이 걷는 길을 걸으면서, 보통의 한 남자를 만나 평범하
게 살아가는 생활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인생길을 걷는
적당한 남자를 찾아보고도 싶었다. 외국에서 지나가는 가정주부의 생활이 마음편안
한 것을 알지만, 진결여(陳潔如)는 이 길도 걸을 수가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평생 다
시는 어떤 남자와도 접촉하지 않았으며, 다시 시집가는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다. 오
직 모든 정력을 쏟아서 더욱 깊이 연구하여 미국에 체류한지 5년여 만에 힘들여 노력
하여 영문, 양봉과 원예를 공부하여, 컬럼비아대학 교육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
다.
▲ 진결여(陳潔如)의 미국유학시절- 미국인학우와 함께
<진결여(陳潔如)4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