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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11-2편]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42:33)
0:10
< 당신 삶의 간단한 역사 -
세상 속으로 나타났다가 다시 나타나지 않은 상태로 회귀하는 것 >
그러니까 현(나타날 현 現), 은(숨을 隱)할 때 나타났다가,
나타났다 이 말은 공즉시색, 또 돌아간다 이 말은 색즉시공,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죠?
0:33
< 확장과 수축은 우주의 보편적인 두 가지 운동이다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나감과 집으로 돌아옴으로 부를 수 있다.
이 두 가지 운동은 심장의 끊임없는 팽창과 수축, 호흡의 들숨과 날숨처럼
우주 전체에 다양한 방식으로 반영되고 있다.
그 운동은 잠과 깨어남의 순환 속에서도 반영된다.
매일 밤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의 상태로 들어갈 때
당신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나타나지 않는 모든 생명의 원천으로
되돌아가며 그런 후에 아침이 되면 기운을 보충해 다시 나타난다. >
그러니까 잠에 푹 들어버리면 본질로 돌아가 있다, 이 말이죠.
그때는 이제 소켓을 충전하는 것 같아서 발전기에 딱 이렇게 꼽아 가지고
충전해서 나온다. 아침에 다시 의식이 깨면 이렇게 돌아나온다.
그러면 만약에 요 충전하는 법을 밤에만 하지 않고 낮에도 하는 법을 안다면
항상 건전지가 만땅이겠죠. 그렇지 않나요?
대게 에너지 고갈 때문에 병도 들고 뭐 하는데 항상 접촉해 있는 법을 안다면
항상 접촉해 있는 법은 여러분, 지금 우리가 접촉해 있어요, 없어요?
이제는 말을 빨리 대답을 하셔야 해요. 여러분 항상 접촉해 있어요, 없어요?(있어요.)
그지요. 희한하지요? 이미 있지요.
우리가 접촉을 안 할 수가 없지요, 역설적으로.
그러니까 요거를 자각하면 이걸 자각하면 항상 있다 이거예요.
항상 접속해 있다, 항상 접속해 있다, 그럼 걱정할 거 없잖아요?
아, 이거 참 맞는 말인데 왜 이 반응이 뜻뜨미지근한지 모르겠네~.
"아, 정말 그렇네요." 해야죠.
항상 이러고 있어요, 접속해 있어요 여기에.
근데 여기다가 또 접속한다 이러면 옥상옥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럴 필요가 없다 이거예요.
깨달아라 이거예요.
깨달아라, 깨달아라. 그래서 이거를 두고 다시 이거를 찾으러 가는 것이 바로
어리석음의 절정인 거에요. 이거를 두고.
접속해 있는데, 여러분 지금 거기에 앉아 있어요, 딴데 가서 앉아 있어요?
거기에 앉아 있잖아요.
구원 됐네. 거기가 바로 에덴동산이고, 하늘나라고, 극락정토고 그렇잖아요.
이미 앉아 있잖아요. 근데 이거를 깨닫는 거다 이거예요.
세수하다가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 이미 되어 있으니까.
요거를 깨닫는 거다. 이걸 깨닫게 되면 그때부터 쉬워져요.
이걸 찾으러 다니던, 이것을 찾아 온 사방팔방 다니던 것이 그때부터 쉬워진다.
그래서 깨달아야 쉬워져요. 어떻게 깨닫는 건가?
이렇게 간단한 말 한마디 듣고도 깨닫는다.
이미 지금 접속해 있죠, 그렇지 않나요?
아무리 해도, 손오공이 아무리 날뛰어도, 근두운 타고 아무리 돌아다녀도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우리가 이미 본질의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다.
그러면 할 일이 없지요. 쉬워진다.
쉴수록 힘은 붙는다. 힘을 뺄수록 힘은 더 붙는다.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
생력처, 힘을 빼는 것이 득력처, 힘을 얻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니까.
5:20
이건 뭐 테니스, 수영, 골프, 운동해 본 사람들은 아시겠죠?
어깨 힘 빼는 것이 온 몸에 딱, 힘이 바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어깨 힘 뺄수록 더 유연하고 더 강한 힘이 나오죠.
언제, 언제 힘을 뺄 수 있는가?
여러분, 인간은 인간의 그리움은 언제 그쳐요?
인간의 그리움은, 그리움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다 지금 보세요.
그리움 석 자야. 두 자로 그리움은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고
그리고 글을 만나게 돼.ㅎㅎ
그러면 여러분, 만나게 되면 어떻게 되죠? 그리움이 사라지죠.
그러니까 여기에 지금 결국은 저는 그렇더라고요.
이걸 본질을 만나기 전에는 쉬지 못하겠더라구요.
그런데 알고봤더니 처음부터 만나져 있었더라.
그때부터 쉬워진다. 그를 만났다 이거예요.
그리움이 이루어져 가지고 그가 되어 가지고 함께 사는 거야.
늘 함께 사는 거야.
아침에 눈 떠서 확인하고 중간에 한 번 확인하고 잘 때 한 번 확인하고
아 이거 항상 항상 아니 이제 헤어지고 싶어도 헤어질 수가 없네.
여러분, 어떤 인간 관계가 이보다 진실된 영향력이 있을 수 있을까요?
우리 참, 인간한테 많이 실망하지요?
자식이라고 놓아가지고 그렇게 길러봤자 속 썩이고
모든 인간관계는 변덕이에요. 현상의 법칙은 변덕이에요.
근데 영원히 진실된 것은 나의 본질과의 관계,
본질과의 관계, 지금도 같이 있지 않나요?
같이 있잖아요. 지금 같이 있잖아요.
영원히 같이 있어요. 이것이 구원의 소식이에요.
자, 그래서 확실히 돌아가서 하나가 되는 것은 잠에 푹 빠질 때
현상이 쉬워지니까 의식이 쉬니까, 의식이 쉬니까 본질로 돌아가서
만땅 채운 다음에 아침에 또 눈 떠서 활발하게 운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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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걸 이제 그래서 대부분 보면 컨디션이 안 좋은 것은
잠을 못 자는 거에요.
잠을 못 자는 거~, 혹시 이 중에 잠을 못 자 가지고 좀 컨디션이
안 좋다 하는 분은 운동하세요. 운동하면 바로 곯아 떨어지게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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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개인의 삶 - 실제로는 모든 생명의 형태
개인의 삶 실제로 모든 생명의 형태는 우주가 그 자신을 경험하는
독특한 방식인 하나의 세계이다. >
이 말은 뭐냐면, 여러분 보세요.
지금 내가 나는 내가 산다 그러죠.
실제로는 우주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사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인생이란 걸 경험하고 있어요. 오케이?
그래서 우주생명인 차원에서는 나는 아바타고 그리고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게임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걔는 안 죽으니까 마음대로 게임을 하는 거에요.
오 만 케이스를 다 만들어 놓고 오 만 가지 경험을 다 하고 있어.
맞나요? 자 그러면, 그 많은 우리 게임에서 여러분,
우리 이 게임이라면 인간의 인생이 게임이라면 실제로는 본질이
우리 게임 속에 있는 캐릭터, 그러니까 우리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를 통해서 지금 본질이 게임을 하는 거라면
이 게임에 하나의 공통 법칙은 뭐냐면, 고통입니다.
이 인간이라고 하는 캐릭터의 공통 법칙은 고통이에요.
그러면 문제는 왜 고통이라고 하는 게임을 만들어 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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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은 왜 고통이라는 게임을 만들어 놨을까.
자기를 찾으라고 할 수 있어요. 그것도 할 수 있어.
그런데 고통의 의미가 있다 이거예요.
고통의 의미는 많은 분들이 결론을 낼 때는 철들라고 고통이 있다.
근데 그 철들은 내용이 본질로 돌아오는 것.
철들은 내용이 본질로 돌아오는 것, 그리고 본질로 돌아오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
철드는 것이 또 다른 내용은, 정말로 우리들은 콧대가 높아서
인간 개인 개인은 콧대가 높아 가지고 정말 남을 사랑할 줄 모른다는 거에요.
돌아보면 그 말도 좀 맞는 말 같아요.
여러분 혹시 사랑할 줄 아세요?
아, 어렵지요. 갑자기 그냥 어렵지 않나요?
당신 사랑할 줄 아세요? 어렵지 않나요? 자기밖에 모르지 않나요?
거의 인생을 자기밖에 모르고 산다. 이 말도 실감나지 않나요?
얼마나 인생이 메마른가.
그러니까 이 지금 우리가 게임 속인데 이 게임의 법칙은 고통이라는 거예요.
그러면 왜 고통을 왜 고통을 겪게 할까. 왜 이 고통을 겪게 할까.
우리는 철들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철들게 한다는, 철이 든다는 내용은 무엇일까.
우리가 커지는 거죠. 성숙하고 인간이 커지는 거죠.
인간이 커지는 것의 핵심은 사실은 사랑이고 그리고 이렇게
본질을 깨달아서 본질처럼 커지는, 마하가 되는, 이제 그 대목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하면 내가 커집니까?" 할 때도
그것도 사랑이라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많은 경전에서 자비나 또 사랑이나 이런 말을
강조하는 이유는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이렇게 성숙해 지라는 것,
그러니까 성숙한 인간한테는 사랑이라는 것이 흘러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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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우주생명의 본질은 사랑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주 본질의 어떤 그 특징이 사랑, 사랑이라는 거죠.
답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본질이 이 세상에 나를 통해서 나온다.
여러분, 우주의 우주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나온다.
신나는 일 아닌가요? 이걸 깨닫게 되면.
그리고 실천의 일이 남아 있죠.
그런데 그 사랑이 사랑의 이름으로 남을 괴롭히면 안 되고
제일 좋은 사랑은 역시 그 사람이 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고통의 의미를, 그러니까 고통을 피할 게 아니고
고통을 수용을 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돼요.
그러면 아, 나를 성숙하게 해주기 위해서 고통이 있구나.
그래서 고통을 통해서 우리가 만약에 사랑을 깨달을 때
우주생명이 박수 칠까요 안 칠까요? 박수 치겠지요.
예, 하여튼 그런 자각이 우리한테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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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개인의 삶 - 실제로는 모든 생명 형태는 우주가 그 자신을
경험하는 독특한 방식인 하나의 세계이다.
당신의 형상이 소멸될 때 셀 수 없이 많은 세계 중에 하나인
세계도 종말을 맞는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내가 있으면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상이에요.
그러면 인구가 70억이 있으면 70억 인구의 세상이고,
또 개미한테는 개미 세상이고, 강아지한테는 강아지 세상이고
수없이 많은 세상이 중첩되어 있죠.
이 말, 이해되세요? 저는 그 메타버스라는 개념이 참 이해가 안 됐는데
이 말 듣고 쉽게 이해됐어요.
여러분, 지금 이 공간이 있죠? 우리가 앉아 있는 이 공간,
요거 지금 인간으로서는 인간으로서 이 공간을 느끼죠? 인식하지요? 그렇죠? 오케이.
자, 그런데 만약에 여기 그 인공 청소기, 자동 로봇 청소기 한 대를 넣어 가지고
한 번 스위치를 누르면 내가 다니면서 다 인식한다면서요, 공간을.
여기는 막혔구나. 여기서 몇 발자국 여기서 막혔다, 옆으로 가 가지고
해서 이 공간을 로봇 청소기가 인식하겠죠? 맞나요?
그러면 하나의 공간인데 인간이 인식하는 공간이 있고,
로봇 청소기라고 인식하는 공간이 있죠.
그러니까 인간이 인식하는 공간 외에 로봇 청소기한테 인식되는
이 공간은 메타버스라고 한다는 거에요.
로봇 청소기의 공간, 로봇 청소기의 세계, 그러면 컴퓨터나 이런 기계를
만들어 가지고 노동 시키면 컴퓨터마다 다르겠죠.
그런 식으로 메타버스에 하나의 공간이지만 그 인식하는 기기에 따라서는
다양하게 이것이 인식되므로 달라진다, 이 말도 이해되세요?
그러면 우리한테는 인간마다 또 다르겠지만 강아지, 고양이, 벌레,
하여튼 모든 생명체가 인식하는 공간이 다르겠지요?
한 인간이 죽으면 그 수많은 공간 중에 하나가 죽는 거다,
이거예요.
그런데 또 뒤집어 말하면 내가 똑바로 깨어서 살면,
깨어서 인식하는 공간을 산다면 진정한 우주가 인식하는 공간이 나오겠죠.
우주랑 통하면,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매체는 참 좀 특별한 매체에요.
인간이라고 하는 이 미디어는, 이 매체는 좀 특별한 것 같아요.
어떤 식으로 특별한가? 영성하고 통해 있어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신령스러워요.
호호법당(好好法堂)에 불무영험(佛無靈驗)하다.
좋고 좋은 법당에, 몸이 법당이라고 하는 거에요.
그러니까 간단한 이야기인데 어느 제자가 스승 밑에서 공부하다가,
경을 공부하다가 이 스승 밑에서 화엄경까지 다 뗐는데,
경은 다 읽었는데 깨달음이 안 와.
그래서 이제는 잠시 "안녕히 계십시오." 하고 나가서
다른 스님한테, 선사한테 가서 깨닫고 돌아왔어요.
깨닫고 돌아오니까 자기 스승은 여전히 경을 이렇게 읽고 계신 거에요.
그래서 이제 역할을 맡은 게 뭐냐면 목욕탕 따라 들어가서 시좌를 맡았는데
목욕탕 따라 들어가서 등을 밀어드리는 일을 이제 제자가 하는 거에요.
그런데 제자는 깨달았고 나가서 백장스님한테서 깨닫고 와가지고 자기 스승,
여러분 깨닫고 온 제자가 자기 스승이 아직 못 깨달았으면 이 스승을
깨닫게 해주고 싶겠어요, 아니면 내버려둘 것 같아요? 깨닫게 해주고 싶겠지요.
그래 가지고 기회를 노리다가 목욕탕에서 이제 등을 미는데 이분이
덩치가 좋았나 봐 스승이, 그래서 등을 밀어드리면서 뒤에서 하는 소리가
호호 법당에, 좋고 좋은 법당에 몸은 좋아 가지고 호호법당에 불무영험하도다.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ㅎㅎ
법당은 좋은데 법당에 앉아 있는 부처가 영험이 없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경을 가르치는 스승이니까 무슨 말인가를 알아듣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무슨 소리 하고 있지?' 하고 돌아봐요.
그랬더니 또 하는 소리가 "영험 없는 부처가 야능방광(也能放光)을 하는구나."
또 반응은 잘 한다 이거예요. 유명한 이야기에요.
호호법당에 불무영험이라. 돌아보니까 영험 없는 부처가 방광을 하는구나.
방광할 줄 아는구나. 이제 그렇게 한 거에요.
그래서 이제 그분이 뭔가 느낀 바가 있어.
그래서 그 다음에 또 이 분이 경을 읽고 있는데 문풍지 사이로,
열린 문풍지 사이로 벌이 들어와 가지고 빙 돌다가 나가려고 하면
문풍지에 부닥치면 소리가 부르르 나지요.
그렇죠. 부르르 부르르 나니까 그걸 보고, 스승은 앉아서 경을 보고 있고
벌은 종이를 뚫고 있고, 그래서 하는 소리가
저 벌이 들어온 대로 나가면 그만일 것을 애꿎게 종이만 뚫고 앉아 있구나.
이게 뭐예요?
경을 읽고 있는 스승이 마치 벌이 문풍지만 부르릉 부르릉 하는 것처럼,
경이 같은 재료잖아요. 문풍지나 종이나 같은 거잖아요.
그러니까 경을 읽는 거나 그걸 못 뚫는 거나,
이 벌이 저것을 못 뚫는 것이 같다 이거예요.
근데 그 시에서 뭐라고 했냐면 공문출(空門出), 비어 있는 문으로 나가면
그만인 거에요. 그 벌이 못 나가면 죽어요.
이 벌이 나가면 자기 또 나머지 인생을 다 살 텐데
비어 있는 문으로 나가면 될 것을. 이때 비어 있는 문이 뭐예요?
이거잖아요. 지금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이리 나가면 금방 자기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을
이것을 못 나가서 괜히 애꿎은 옛 종이만 뚫고 앉았구나.
그 말 신랄하지 않나요?
그래 가지고 거기서 이제 스승이 알아차린 거에요.
그래서 제자한테 "너 어디서 무엇을 배웠길래 이런 소리를 하느냐?"
"제가 백장 선생님한테 가서 이렇게 공부를 하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종을 치게 해 가지고 전 대중을 다 모이게 하고, 자기가 제일 앞에
딱 앉고 이 제자를 법상에 올려 가지고 그래서 설법을 들었다는 거에요.
그 설법 듣고 깨달았다는 거에요. 유명한 이야기에요.
계현(戒賢)법사라고 해요. 계현법사가 깨달은 그 인연이 자기 스승한테서~.
그래서 여러분 만약에 한국의 절에 비구니나 비구나 할 것 없어요.
자기가 아직 못 깨달았어. 근데 자기 제자가 선방에 지금 안거 들어간다 그래요.
그러면 얼른 가서, "얼른 돌아와서 내 등을 밀어다오."
그래요, 스승이, 아시겠어요?
스승 입장에서는 '아, 내가 못 깨닫는 것을 네가 가서 깨닫고 와서 나를 깨닫게 해달라.'
그 말을 "얼른 돌아와서 내 등을 밀어다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참 아름다운 이야기죠.
21:15
그러니까 지금 다 이제 이런 말, 소화가 되지 않나요? 이거예요, 이거.
지금 우리가 여기 앉아 있는 이리로 나가면 그만인 것을.
이리로 나가면 되는데 저리로 나가 헤매느라고 지금 애꿎은 문풍지만,
문만 종이만 뚫고 있다, 자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21:49
< 깨어남과 회귀 운동 - 한 개인의 삶에서 회귀 운동이 일어날 때는
즉 늙음과 질병, 심신의 장애 상실 개인적인 비극 등을 통해 형상이 약해진다. >
형상은 외부의 목적이죠.
그 외부의 목적은 나이 들수록 약해져요.
그리고 < 소멸될 때는 영적인 깨어남의 기회가 찾아온다.>
영적인 깨어남은 내면의 목적이지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면 외부의 목적이 약해질수록 내면의 목적이
깨어날 확률이 높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실제로 여러분, 귀신 같이 안다, 이런 말 들어보셨어요?
귀신은 우리의 지금 깨어 있는 이 영혼이 몸으로부터 벗어난 것이 귀신이잖아요.
몸을 벗어나면 더 예민해져 가지고 몸을 가졌을 때보다 9배 더 잘 안 대요.
영리해진 대요. 귀신이 귀신같이 안다, 이 말은 몸을 벗어나는 순간
9배로 그 알아채는 힘이 강해진다는 거에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그 순간에 소위 말하는 49제,
설법 연가 설법이라는 게 있잖아요.
연가 설법을 귀신은 몸을 가질 때보다 훨씬 더 잘 알아듣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연가설법이 모든 설법 중에서 가장 엑기스를 모아 놓은 거에요.
그래서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23:22
자 그러면, 우리는 영가 아닌가요? 몸 가진 영가야.
그분들은 몸을 벗어난 영가, 귀신은 몸 벗은 영가고 우리는 지금 몸을 가진 영가죠.
몸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 공부를 통해서 한 번 깨어나게 되면
귀신보다도 더 똑똑해지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그런 우리가 찬스에 와 있는 거에요.
그래서 < 영적인 깨어남의 기회가 찾아온다.
의식이 형상과의 동일하에서 벗어날 기회이기 때문이다. >
그러니까 형상과 동일화한다. 집나간 상태에서 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찬스다.
근데 요 찬스를 못 살리면 어떻게 되느냐?
이제 그냥 전통에서는 다시 또 다른 몸을 또 자기인 줄 알고 또 다른 몸으로 붙어 버린다.
그게 이제 환생해 가지고 또 윤회하는 그런 모습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래서 하여튼 요 죽은 그 순간에 중요하게 여긴다.
그 순간에 훨씬 더 잘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에.
25:12
< 일어나서는 안되는 시점에 외부로 향하는 운동이 방해 받으면 >
다시 말하면, 이 극심한 우울증에 빠지든지 어떤 극심한 암에 걸려 가지고
갑자기 뭐 큰 병에 걸렸던지 이렇게 자기 현상이 갑자기 위축 당할 때,
근데 이상하게도 그때가 본질이 또 깨어날 찬스라는 거에요.
보통 사람은 현상이 위축 당할 때 그냥 완전히 넋을 놓아버리는데
드물게도 어떤 사람은 그때 깨어난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가 지금 아는 톨레가 지금 그런 사람이에요.
톨레나 바이런 케이트 같은 사람은 형상이 위축될 때 오히려 본질이
깨어나는 찬스를 맞은 사람들이다.
< 그것이 잠재적으로 일찍 영적인 깨어남을 가져올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데도 일어나는 일은 없다. >
모든 것이 다 이유가 있어서 톱니바퀴처럼 되어 있어요. 말하자면
< 더 큰 전체의 일부가 아닌 것, 그 목적의 일부가 아닌 것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
그래서 일어나는 것이 신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 거에요. 절대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은 무를 수 없어요.
< 일어나는 것은 일어날만 하니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부적인 목적에 파괴와 중단, >
다시 말하면 역할 노릇으로서의 그 어떤 뜻이 있잖아요?
존재의 목적, 내가 사람 노릇하는 존재 목적, 그것의 중단은
< 내면적인 목적의 발견으로 이어지며 그 후에 내면적인 목적에 일치하는
그 심오한 외부적인 목적에 나타남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기존의 그 자기 삶의 외부적인 삶의 목적이 좌절당하면서
내면의 존재의 목적이 뛰어나고 그러면 그 사람이 회복할 때 역설적으로
이제 깨어난 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나머지 생을 살게 된다.
이 말 이해되세요? 저는 제가 아는 하여튼 제가 존경하는 선생님이셨던
김호 선생님께서 늘 하는 이야기가 당신이 어느 날 당신 스승인
다석 유형모 선생님한테 "나 다음 주 내가 죽으니까 장례 치르러 오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거에요. 얼마나 황당했는지 몰랐다는 거에요.
"내가 하여튼 다음 주에 내가 죽으니까 와서 내 장례를 치러 주게."
그런 말 들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이제 눈앞이 깜깜하더래요.
선생님 없는 삶은, 여러분 그런 거 있잖아요. 선생님 있으면 뭐가 좋으냐면
내가 무슨 일을 해도 그때 배운 거 가지고 써먹을 수가 있어.
아마 아마도 모르긴 몰라도 이 수업 듣는 여러분은 일주일마다 오시는 이유가
한 번 들어 놓으면 이걸 가지고 일주일 동안 양식으로 삼아서 다 쓰다가
또 떨어질 때 쯤 되면 오셔서 강의 듣고 그렇죠? 그죠. 저도 그래요.
저도 옛날에 강의할 때는 선생님한테 찾아가서 강의 듣고 그거 가지고
내 식으로 풀어 가지고 강의하고 그랬어요.
그런 게 오랫동안 쌓여 가지고 지금 오늘날에 선생님은 돌아가셔도 지금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누구나 그런 과정이 있지요, 그죠?
그래 가지고 그 선생님이 돌아가신다, 이러면 덜컥 겁이 나는 거에요.
이제 나는 어쩌라고? 이렇게 되는 거에요. 일용할 양식이 사라지니까.
그래서 이 선생님이 그렇게 덜컥 했대요. 그래서 그날 그날 되어 가지고
스승의 장례를 치루기 위해서 정말 실망감만 가득한 상태로,
선생님이 거짓말 할 사람도 아니고, 그래서 올라가다가 보니까 내려오는
사람하고 딱 만났대요. 여기 부암동 고개에서.
다석 유형모 선생님이 구기동에 살았거든요.
일요일마다 여기 YMCA 종로 2가에, YMCA에서 그 강의했어요
다석 유형모가 강의할 때는 얼마나 사람이 안 왔으면 어느 날은 한 사람,
어느 날은 반 사람, 얼굴만 비치고 가면 반사람, 그러니까 한 두 사람밖에 없어 가지고.
그런 위인이 그렇게 강의를 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그렇게 안 갔어요.
그래서 김호 선생님 이야기가 할 수 없이 함석헌 선생님하고 자기 하고 두 사람이
약속을 해 가지고 둘 중 한 명은 꼭 가자, 날을 정해놓고 교대로 꼭 참석했다고.
아니 선생님이 일주일 내내 준비해서 왔는데 아무도 없다 이거에요.
그래서 우두커니 앉아 있다 가는 날도 있었다. 참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가까운 우리 시대에.
아무튼 그래서 그랬는데 스승이 내려오는 거에요, 안 죽고.
그래 가지고 "아니 선생님, 안 돌아가셨습니까."
"내가 죽는다는 것은 에고가 죽는 거지
내 몸이 죽는 걸 말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죽고 사는 사람이 됐대요, 다석은.
다석은 당겨서 죽은 사람, 다석의 필명 중에 하나가 당겨서 죽은 사람.
여러분, 당겨서 죽었다 이 말은 지금 여기 처음 태어났을 때의 외부적인 목적,
아버지 노릇, 무슨 노릇, 뭐 사회인으로서 무슨 직장에서 과장 노릇 이런 걸 하다가
당겨서 죽었다 이 말은 이제 외부적인 목적은 내려놓았다.
그리고 당겨서 죽어서 이제 내부적인 목적의 사람으로 부활해서,
부활해서 그때부터는 부활한 인격체가 살아가는 것,
이것은 이제 충실하게 내면의 목적을, 내면의 목적으로 일치시켜 가지고
드러내는 삶을 산 사람, 별난 사람이긴 해요.
그래서 그때 뭐예요, 장례식도 치렀고요. 자기 부인하고 해혼식도 했어요.
결혼했으니까 해혼하자 해 가지고 그것도 각방 썼대요.
각방 쓰면서 해혼식을 했다는 거에요. 좀 특이한 분은 특이한 분이에요.
어쨌든 간에 이런 말들이 무슨 말인가 이해되잖아요.
그러니까 이분도 워낙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아예 선포를 하고 했다는 거에요.
선포를 하면 실천을 잘 하겠죠, 그죠? 그것도 이해되잖아요.
그러니까 좀 별난 분은 별난 분인데 그만큼 의지를, 강직한 의지를 한 번 드러낸 거지요.
그런 말을 저는 이제 기억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쉽게 이해돼요.
처음 타고난 외부적인 목적만 가지고 살다가 내면의 목적을 발견할 때는
외부적인 목적을 가진 인간은 한 번 죽는다.
그리고 내부적인 내면의 목적을 가진 인간이 부활을 해서 그때부터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산다.
그게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거다.
이 말 이해되지요? 우리들도 뭐 당장 못하더라도 참고 삼아서
이런 일이 있구나 하고 알면 좋습니다.
32:59
< 큰 고통을 경험한 아이들은 종종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젊은이로 성장한다.
형상 차원에서의 잃음은 본질 차원에서는 얻음이다. >
이 말도 참 좋네요, 그죠?
생력처가 능력처다.
형상 차원에서 힘이 빠지는 것은 본질 차원에서 힘을 얻는 것이다.
< 고대 문명과 전설에 등장하는 눈 먼 예언자와 상처 입은 치료사 같은
전통적인 인물을 보면 형상 차원에서의 크나큰 상실이나 장애가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눈 먼 예언자는 서양에서 굉장히 중요한 상징이에요.
모든 예언자는 눈이 멀었다는 거에요.
눈이 멀었다는 것이 뭐에요?
형상으로부터 벗어나서 본질을 본다.
그것을 상징하는 거에요, 눈 먼 예언자.
제가 문학에서 전공했던 보르헤스가 눈이 멀었거든요.
근데 정말로 예지력이 넘치는 말을, 오래된 소설은,
보르헤스 시는 굉장히 짜릿짜릿해요.
그래 가지고 사람들이 눈먼 예언자라고 불렀어요.
실제로 보르헤스가 컴퓨터나 이런 사이버 세계를 예언해 놨거든요, 문학에서.
그러니까 보르헤스는 체험한 거야. 돈오를 체험한 거에요. 29살에.
뭐라고 표현하냐면, 돈오의 순간을 뭐라고 했냐면
"어, 어떻게 된 것인가. 1929년, 28년이라고 합시다.
1928년이면 29살 먹었으면 1899년쯤 태어났죠, 그죠.
자기가 29살의 어느 날 산책하다가 정신 차리니까 19세기로 돌아가 있는 거에요.
이 말은 30년 전을 거슬러서 자기 태어나기 전으로 거슬러 갔다 하는 거잖아요.
무슨 소리를 하냐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네.
이런 말이 자기한테서 흘러 나온 거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살면서 문득 시간이 끊어져 버리고
시간이 없는 어떤 공간의 세계, 시간이 흐르지 않는 시간이 끊어진
공간의 세계를 체험한다는 거죠.
그때 자기 느낌을 뭐라고 했냐면 덧없는 이 세상에 대한 관찰자가 되어서
그리고 죽음을 목격하고 덧없는 관찰자가 되어서 이 세상을 보는 느낌,
그걸 가지고 문학을 했어요.
그랬더니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뜻밖에 모든 이런 상식이 깨지는
그런 소설을 써서 굉장히 유명해요.
그래서 보르헤스를 눈 먼 예언자라고 불러요. 그래서 참
그런 이런 경험한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많이 비유를 해서 말을 합니다.
36:15
< 모든 형상의 불안정한 본성을 직접 경험하면 다시는 형상을
과대평가하지 않게 되고 맹목적으로 형상을 추구하거나 형상에 집착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
요 대목이 여러분, 요 대목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우리 마음을
빼앗기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벗어날 수 있을까.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을 빼앗는 것이, 여러분 우리 마음을 빼앗는 것이
본질이 빼앗아요, 형상이 빼앗아요? 형상이 빼앗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을 빼앗는 그 형상이, 우리 마음 빼앗는 것은 간단해요.
돈, 남녀, 명예, 요 세 가지예요.
근데 요 세 가지가 현상에 속하잖아요, 다.
요것이 정말로 현상에 속하고 모든 형상은, 현상은 그대로 형상이니까
모든 모양이 있는 것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이런 덧없는 것이라는 것을
정말로 한 번 실감한다면 그러면 거기에 대한 집착이
저절로 떨어진다 이거예요.
집착이 떨어진다 이 말은 우리 마음이 더 이상 뺏기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그러니까 참 그런 거 있잖아요.
멀쩡히 걸어가다가 옆에 같이 걸어가던 친구가 벼락을 맞고 죽었어요.
저 벼락이 만약에 나한테 떨어질 수도 있었는데 그 친구는 그냥 죽어버리는 거야.
그러면 그 인생이 뭐냐는 거에요?
지금까지 뭐 울고 웃고 온갖 걸 했는데 어느 순간 그냥 벼락 맞고
그냥 걸어가다가 죽어버렸어.
걸어가다가 안 죽어도 여러분, 주변에 가까운 사람이 돌아가시는 걸 보고 나면
굉장히 허무한 그런 게 있지 않나요? 그때 좀 일찍 철들잖아요, 사실은.
그러니까 이 현상이라고 하는 것이 언젠가는 가는 것이고
모든 인간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집행유예 상태다.
그러니까 이것을 자각할 때는 아이고, 나는 사형선고, 이거 피할 수 없는데
집행유예는 언제 끝날지 모르고.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그 집착이
저절로 이제 좀 무뎌지고 떨어진다 이거죠.
요것이 극적으로 일어난 사람들도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지금 톨레나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또, 아니타 무르자니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아니타 무르자니, 홍콩에 살던 인도 여지인데 이 사람이 암에 걸려서
림프선 암에 걸렸어. 여러분, 그걸 뭐라고 그러나, 이렇게 뾰족뾰족한 과일 종류의
노란색이고 뾰족뾰족한 거 있죠.
하여튼 그런 그거 하여튼 뭐냐면 림프암에 걸리면 림프가 그렇게 변한대요.
몸 안에 그런 것이 수십 개가 생겨서 완전히 말기가 되어서 꼴까닥 임사 체험을 하는,
임사 체험에서 죽었는데 아버지가 아직 안 죽어도 된다 돌아갈 수 있으니까
너 선택해라 그랬대요.
그래서 그냥 죽든지 돌아가든지, 그래서 자기가 생각해 보니까 하고 싶은 일이
좀 있어 가지고 "돌아갈래요.' 하고 돌아왔대요.
돌아오니까 낫더래요, 이제 그때부터.
그래서 이 사람이 이제 임사 체험을 한 것을 책을 적었어요.
그리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던가 그 체험을 통해서.
그러니까 그 이전에 알던 세계는 완전히 꿈의 세계고 죽어 보니까
이게 꿈의 세계라는 것이 너무나 확연해져서,
그 메시지를 이제 아니타 무르자니가, 유튜브 쳐보면 바로 나와요.
아니타 무르자니 이 사람이 임사 체험을 하고 이제 그런 자기 경험을 썼는데
이 세상이 환인 거예요.
자기가 죽었는데 사람들은 자기 죽었다고 다들 숨이 안 뛴다고 맥박이 정지됐다고
다들 그러는데 자기는 그런 걸 보는게 그렇게 우습더라나.
그리고 병원 안에만 보이는 게 아니고 밖에서 다 보이고, 뭐 하여튼
그런 이제 체험을 하면서 메시지가 있어요.
아니타 무르자니 메시지는 뭐냐면 여러분, 죽어 보니까
너무 좋더라는 거에요. 그 사람은
"난 내가 보장한다. 난 죽어 보니까 너무 편하니까 걱정할 것 조금도 없다.
나는 오히려 뭔가 미진해서 나온 거지 너무 좋아서 그대로 죽을 수도 있었는데
그냥 할 수 없이 나왔는데 기왕 나왔으니까 메시지 전하는데 여러분,
걱정하지 마세요. 죽으면 너무 너무 편해요.
세상에 모든 고통은 몸에서 나오는데 이 몸이 사라지면 얼마나 좋은지 아세요?"
하면서 적어 놨어요. 그런 거 보면 저도 이제 그런 거 보면 우리 모친 보내면서
"엄마, 걱정할 것 하나도 없어. 얼마나 좋은지, 그 세계가." 대화했다니까요.
41:34
이게 하여튼 그래요. 걱정할 것 없어요. 게임이에요, 게임.
게임에서 여러분 캐릭터 죽는다고 게임하는 사람이 죽어요?
아무리 게임을 뭐 반복해도 죽으면 다시 하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게임 같은 것이라서 캐릭터만 죽는 거지.
자체가 환희인데 환희에 나오는 캐릭터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정말로 이걸 게임하는 사람이 없는 이에 있어서 그 품 안은
그렇게 따뜻하다는 거에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는 거에요.
하여튼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자, 하여튼 이야기를 하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잘 가네.
여러분 우리들은 수업할 때 왜 이렇게 시간이 잘 가요?
이제 좀 시작했다 하는데 감사합니다. 네, 안녕히 가세요.
첫댓글
아빠아버지, 아버지만을 사랑하게 되어 기꺼이 힘을 빼고 사는
경지를 허락해 주셔서 참으로, 참으로 감사합니다!
<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
생력처, 힘을 빼는 것이 득력처, 힘을 얻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니까. >
[ ■ 내맡김 영성 ■
< 斷想 > 16. "하다"의 반대말은?
moowee 10.06.17 08:36
우리가 보통 "~~을(를) 하다"라고 말할 때,
그 "하다"의 반댓말은 무엇인가?
"하다"를 韓英사전에서 찾아보니,
첫 번째로 나온 것이 행하다 (do, act, try, make practice) 였다.
"do" 의 반대말은 "do not"?
"do not" 보다 "give up" 보다 "abandon"이 더 가깝다.
(내맡김의 영성 6. "내맡긴다"는 말의 의미(2)를 참고)
그리고, "~~하다"의 한자말은 "위(爲)"이다.
"爲"는 "할 위, 행위 위, 만들 위"라고 옥편에 나와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爲"에 사람 "人" 자가 붙으면 "거짓 僞"가 된다는 사실이다.
"天理"란 하늘의 이치,
하늘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攝理, 곧 "하느님의 뜻"이다.
사람이 하면 거짓(僞)이 되고,
사람이 하지 않으면 爲, 진짜 爲, 그냥(자연스럽게) 하는 것, 自然(스스로 그러함)이 된다.
"自然"이란, "원래 스스로의 모습"을 말한다.
이 세상에 자기 스스로, 자진(自進)하여, 저절로, 제 힘으로 된 것은 무엇이겠는가?
뻔할 뻔! 그것은 오직 하나!
모든 것의 原因者!
"하느님"이시다.
진실로 하기 위해서(爲)는 내가 하지 않고(無爲) 해야(行) 하는 것, 그것뿐이다.
"無爲行"이어야 하는 것이다.
무위행할 때 비로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진실, 진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을 사는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하라, 하지말고 하라!
하지마라, 네가 하지말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하시게 하라!
살라, 삶없이 살라!
살지마라, 네가 살지말라!
네 안에 계신 그분께서 사시게 하라!
하느님께서 하시게 하는 최고의 방법이 바로
나를 이 세상에 있게끔 하신 나의 주인님,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해 드리고
1%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맡겨야, 아니 "내맡겨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맡김"인 것이다! ]
< moowee 10.10.07. 08:24
사실, 내맡김의 삶은 "無爲"를 배우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계획을 세우지 말고,
나의 경험을 끌어 대지 말며,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하시게 하는 삶입니다.
한마디로 "하느님 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도록
나를 내어 드리는 삶입니다.
그것은 "無爲"로서만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無爲"할 때, 하느님께서 "行"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無爲行"입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무위행합니다.
늘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만이 "순명"할 줄 압니다.
순명은 천금보다 더 귀합니다. >
[ moowee 15.12.20 16:21
자연의 법칙 안에는 < 하느님의 진리 >가 숨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인 하느님의 진리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생활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를!
내맡김의 삶(영성)은 별다른 삶이 아니라
< 자연적인 삶 >일 뿐입니다.
내맡김의 영성(삶)에 있어서의 모 ~ ~ ~ 든 궁금증은
자연의 법칙(질서)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自然의 법칙은 無爲입니다, 無爲 !
내가 그림자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主님이 그림자를 없애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主님의 빛만 환히 밝히면 만사형통입니다. ]
[ 위무위.보조 21.11.06 16:48
모든 운동에서 < 힘을 빼는 것 >이 가장 중요하다 했습니다.
특히, 과거에 제가 정말 하느님보다 더 좋아했던 골프가 그러했습니다.
골프 할 때 힘 빼는 게 3년이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묵상기도든 관상기도든 모든 기도가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나의 힘(내 뜻)을 빼고
하느님을 채우는 것이 기도입니다.
나를 비우면 영육이 깃털처럼 가벼워져
점점 하느님 가까이로 날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를 비우고 내 안에 하느님을 채우는 최고의 기도가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는 거내영의 화살기도입니다. >
< ★하느님섭리에내맡김(韓)
제5장 -01 완전하고 참된 신앙만 있으면, 영혼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신비 19.07.14 07:50
자신을 내맡기는 것보다 더 안전한 길도 없고
더 이상 확실하거나 손쉬우며 즐거운 길도 없으며,
잘못과 실수가 더 적은 일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 영혼이 이런 방법으로 나아가려는 노력에 감동을 받으시고
친히 임하시어 영혼이 그 복된 일치의 길로 들어서는데
스스로 떠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영혼이 그러한 요구(내 힘으로 하는 신앙생활)가
시간과 노력의 낭비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면,
온갖 혼란에도 흐트러지지 않고 어떤 잡음과 소동에도
끄떡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모든 내적・외적 소란과 잡음을 무시한 채,
영혼은 평화로이 머물고 사랑의 표시로써 많은 선익을 길어내는
깊은 평화 속에 초연해질 것입니다. >
아멘, 아멘!
< 모든 위대한 영성은 왠지 모르지만 놓아버리기와 연관된다.
이 결정적인 지점에서 나를 믿어 달라. >('벌거벗은 지금' 1부 마르타에서 마리아로)
사랑하는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왠지 모르지만 놓아버리기"를
말씀하셨지만 부족한 저희 < 내맡긴 영혼 >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아버지께서 아버지하느님만을 진정 죽도록 뜨겁게 사랑하게 해 주시니
저절로 기꺼이 감사하게 "놓아버리기"가 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 내가 생각을 하지 말고, 내가 계획을 세우지 말고, 나의 경험을 끌어 대지 말며,
그럼으로써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하시게 하 >(위무위)라는 말씀,
그 길이 < 가장 탁월하고, 가장 빠르고, 가장 안전하고, 가장 완전하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쉽고, 가장 단순하고, 가장 재미있고 즐거운 방법 >(위무위)
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사랑하는 아빠아버지!
베풀어 주시는 이 놀라우신 은총에 무한찬미감사 올립니다.
맹세 수준의 < 굳은 결심 > 으로 이끌어 주시어
아버지께서 나날이 정화시켜 주시고 이끌어 주시니
부족한 저희들이 아버지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에 도달할 수 있음을 기뻐합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 모두가 죽도록 뜨겁게 아버지만을 사랑하게 하소서.
부족한 저희 모두와 우주만물을 사랑하는 아버지께 내맡겨 드립니다.
< 거내영 >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사랑하는 하느님아버지, 저를 아버지께 기꺼이 던질 용기를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
생력처, 힘을 빼는 것이 득력처, 힘을 얻는 곳이다.
저 벌이 들어온 대로 나가면 그만일 것을 애꿎게 종이만 뚫고 앉아 있구나.
공문출(空門出), 비어 있는 문으로 나가면
그만인 거예요. 그 벌이 못 나가면 죽어요.>
<이 벌이 나가면 자기 또 나머지 인생을 다 살 텐데
비어 있는 문으로 나가면 될 것을. 이때 비어 있는 문이 뭐예요?>
<여러분, 우리가 우리 마음을 빼앗는 것이, 여러분 우리 마음을 빼앗는 것이
본질이 빼앗아요, 형상이 빼앗아요? 형상이 빼앗지요.
그런데 우리 마음을 빼앗는 그 형상이, 우리 마음 빼앗는 것은 간단해요.
돈, 남녀, 명예, 요 세 가지예요.>
사랑하는 아버지,
수많은 당신의 자녀들 중에서 저 하나쯤 없어도 아버지에게 뭐가 그리 아쉬움이 있으실까요?
아버지, 부족한 제가 제 안에 갇히고 이 세상에 발이 묶여 아버지를 잃고
아버지의 냄새를 맡지 못하는 먼 곳으로 떨어져 나갈 뻔하였습니다.
세상의 자로 아버지를 재고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가시던 걸음을 돌리시고 뒤돌아오시어
용기를 주셨지요.
그 문 앞에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망설이며 울고 있던 저에게 손을 내밀며 건너오라고
"아이고~ 이 바보.. 건너와" 하시던 아버지의 마음, 그 사랑 때문에 지금 제 가슴에 눈물이 고입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ㅠㅠㅠㅠ
아버지, 지금 제 마음은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당신께서는 제 부족함을 보게 하시고 아버지께 대한 믿음과 사랑에 확고함을 얹어 주셨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지으셨으니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십니다.
제가 몰랐던 것들도 환히 밝히시고 더욱더 아버지를 뜨겁게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셨으니
엎드려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머리로 차마 잴 수 없으며 오직 완전한 사랑 안에 당신을 계시하시니
아버지, 제가 더욱더 뜨겁게 아버지를 사랑하게 하소서.
저를 구하시는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통하여 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미리 당겨서 죽어 내부적인 목적의 사람으로 부활하게 해 주신
아빠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30:38
다석 유형모 선생님께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에고가 죽는 거지
내 몸이 죽는 걸 말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
그래서 그때부터 죽고 산 사람이 됐대요,
다석의 필명 중에 하나가 <당겨서 죽은 사람>.
'당겨서 죽었다.'
이 말은 지금 여기 처음 태어났을 때의 외부적인 목적,
아버지 노릇, 무슨 노릇,
뭐 사회인으로서 무슨 직장에서 과장 노릇 이런 걸 하다가
이제 외부적인 목적은 내려놓았다.
그리고
<내부적인 목적의 사람으로 부활>해서,
그때부터는 부활한 인격체가 살아가는 것,
이것은 충실하게 내면의 목적으로 일치시켜 가지고
드러내는 삶을 산 사람, 별난 사람이긴 해요. ]
[ 그리고 내부적인 내면의 목적을 가진 인간이 부활을 해서
그때부터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산다. ]
[ 큰 고통을 경험한 아이들은
종종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젊은이로 성장한다.
형상 차원에서의 잃음은 본질 차원에서는 얻음이다. ]
[ 고대 문명과 전설에 등장하는
눈먼 예언자와 상처 입은 치료사 같은 전통적인 인물을 보면
형상 차원에서의 크나큰 상실이나 장애가
영적 차원으로의 문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
[ 모든 형상의 불안정한 본성을 직접 경험하면
다시는 형상을 과대평가하지 않게 되고
맹목적으로 형상을 추구하거나 형상에 집착해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게 된다. ]
@무화.보조.고문단
아멘~!
"당겨서 죽은 사람"
이번 강의에서는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영적인 장례식에 대한 말씀에서
의식을 갖춘 미사를 통해
제대 위에 모가지를 봉헌하며 하얀 국화까지 곁들여
에고의 죽음을 온 천하에 공표하는
우리의 봉헌식을 떠올려 주십니다.
거내영은 사랑하는 하느님께
세상에서의 모든 역할, 외부적인 목적은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내면의 목적)만 따르겠다는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의 봉헌을 하여
내면의 목적을 가진 인간으로 부활한
부족한 나를 통하여
하느님만이 드러나시도록 사는 삶입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시니 하느님의 지혜를 받아
육의 몸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의 중간에 말씀하신 귀신과도 비교할 수도 없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살아가지요.
바로바로
집나간 상태에서 살다가 집으로 돌아갈 찬스이며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생명의 원천을 소유하였기에
밤낮 가리지 않고 건전지를 만땅으로 채우고
너무나 쉽게 내면적인 목적에 일치하는 삶,
깨어난 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나머지 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강의 마지막 부분에서
< 형상 차원에서의 잃음은 본질 차원에서는 얻음이다. >
이 톨레의 말씀을
형상 차원에서의 육체적 불구를 예를 들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했는데
부족한 저는
< 내맡김은 빼앗김이 아니라 영원한 얻음 >이라는
고자의 영성 내맡김으로 알아듣습니다.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
아버지께서 잡으시도록
손에 움켜쥔 것을 펴고 그 손을 아버지께 내어드려
아버지의 모든 것을 소유하는
거내영을 통하여 아버지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소서.
당겨서 죽은 사람들,
하내영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사랑하는 무심님, 감사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무화.보조.고문단
[ ▣ 보조교사방
맡김의 축복
moowee 17.09.02 23:37
< 3분영성 (2012년 6월) - 맡김의 축복 >
차동엽 신부님의 "잊혀진 질문" 중에서.......
세상에 틀린 기도는 없답니다.
다 나름대로 맞는 기도입니다.
다만
수준이 낮은 기도와 수준이 높은 기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어떤 경우 우리는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기도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 우리는 '영혼의 성장' 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하느님께는 이 두 기도가 모두 정당하고 가치롭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기도의 힘은 의탁에 있습니다.
미국의 영성가 헨리나우웬이
어느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 구경을 갔습니다.
공연에서 그네 타기 곡예사 다섯명이 멋진 곡예를 보여주였습니다.
'나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습니다.
'잡는' 이의 강한 손에 붙들리기 전에는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습니다.
나우웬은 곡예사들의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또한 이 아름다운 공연을 보고 '맡김'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손을 잡으려면
일단 내가 잡고 있는 그넷줄을 펴야
비로소 새로운 차원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
내가 붙들고 있는 '그네'의 줄을 놓아야
'잡는 이' 주 하느님이 내 손을 잡고 아름다운 비행을 할 수 있다.
그래야 꿈의 세계를 날 수 있다."
그는 완전한 맡김에 대해서 얘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최고의 승부는 맡기느냐 못 맡기느냐의 고개입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
[ moowee 10.07.22. 13:44
그분이 내 손을 잡아 주시게 하기 위해서
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을 놓아버리는 것이 바로
"내맡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믿는 신앙인은 우리가 기지고 있던 모든 것을
아무데나 버리고 비워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은
내 목숨까지도 모두 다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 다시 내맡겨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버리다, 비우다,내려놓다"등의 말보다
"맡기다"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고 봅니다.
불교교리에는 "창조와 신"의 개념이 없기에
그들은 아무데나 내려놓고 버리고 비운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주인께 내려놓고 버리고 비워야 합니다.
그 내려놓음, 버림, 비움이 곧 "내맡김"입니다.
그리고,
목숨을 내놓기가 정말로 결코 쉬운일이 아니지만,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완죤히 100% 다 내맡기면
목숨도 쉽게 내놓을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 내맡겨
"내가" 주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내맡기면
내 목숨이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 되어 버렸기에
내가 내 의지로, 내 뜻으로 내 목숨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의지로,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이 내 목숨을 내놓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순교 성인들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순교는 인간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금, 그 어려운 "내놓음의 삶" 즉
"내맡긴 삶"을 살아가기로 약속한 30 여명의 "내맡긴 영혼들"이
이 카페에 계십니다. ]
[ moowee 13.01.31
내맡김의 영성은 <포기의 영성>입니다.
내 뜻(자기 의지)을 완죤~~~히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느님의 뜻(의지)>으로 살아가는 영성입니다.
그래서 내맡김의 영성을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
< 거룩한 포기의 영성 >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늘 나라를 때문에 스스로 고자(포기)가 된 이들도 있다.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받아들여라(마태19,12).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하늘 나라 때문에
스스로 고자(포기)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영성입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하내영)들은 <고자>들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은 <고자의 영성>입니다.^-^
고자(鼓子)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생식기가 불완전한 남자" 라고 적혀 있습니다.
(왜 고자의 鼓를 "북 고" 자를 썼나 모르겠네요)
내 뜻(자기 의지)가 없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어둠의 아들들)이 보기에는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인간이 자기 뜻(의지) 없이 살아 갈 수 있을까 하고
생각들합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인간은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잘났고 완전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은
<엄마 품에 안겨 있는 젖먹이, 똥싸개, 오줌싸개, 앵앵이> 일뿐입니다.
또, 따라서
영어 가사를 "entrust" 를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abandon> 이나 아니면 차라리
<give up> 을 사용해야만 합니다.]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
힘을 빼는 것이 힘을 얻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 자리니까. >
힘을 빼는 것이 힘을 얻는 것이라는 역설과
그 자리에 공존하는
내 뜻이라는 형상과 하느님 뜻이라는 본질이 제 자리를 잡게 하는
거내영의 가르침은 묘수 중에 최고의 묘수입니다.
거내영의 가르침을 통해
늘 함께 하시는 당신을 뵈옵니다.
이제는 헤어질래야 헤어질수 없는 당신을 뵈옵니다.
영원히 같이 계신 당신, 구원의 당신을 영접합니다.
형상에 목매고 살았던 저를 이젠 과감히 버립니다.
저와 진정으로 헤어집니다.
존재의 주체를 비유를 통해 바꾸어 놓으니 또 다른 세상이 펼쳐지네요.
우주 생명인 창조주 하느님 아버지가 주인이 되고
생멸하는 형상인 제 뜻이 아바타가 되니
게임이 끝나도 게임판에서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등장인물이 됩니다.
아바타가 주인이었을 때는 한 게임이 끝나면 모든 것이 끝이었지요.
제 안의 같은 자리에 함께 하시는 아버지를 주인으로 모시고
생멸하는 제 뜻이 아바타가 되는 것이
영원을 살 수 있는 길임을 비유를 통해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 실제로는 우주생명이 나를 통해서 사는 것이다.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인생이란 걸 경험하고 있어요.
우주생명인 차원에서는 나는 아바타고 그리고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게임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죽어도 걔는 안 죽으니까 마음대로 게임을 하는 거에요.>
아멘!!!
아멘!!!
제 뜻이 아바타가 되니
언제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존재로의 탈바꿈이 되네요.
물론 게임기라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요.
< 우리를 통해서 지금 본질이 게임을 하는 거라면
이 게임에 하나의 공통 법칙은 뭐냐면, 고통입니다.
이 인간이라고 하는 캐릭터의 공통 법칙은 고통이에요.
그러면 문제는 왜 고통이라고 하는 게임을 만들어 놨을까요?
철들라고,
철들어 본질로 돌아오라고,
본질로 돌아오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 사랑, >
캐릭터에서 공통 법칙으로,
공통 법칙에서 고통으로,
고통에서 철듦으로, 철듦에서 본질로,
본질에서 사랑으로 연결되는 논리적 고리에 이유 없이 가슴이 울컥합니다.
삶의 오만가지 법칙이 사랑으로 귀결되는
모든 것의 해답은 사랑임을,
'기승전 사랑'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인간의 본질에 먹먹해집니다.
모든 인간이 찾아다니는 근본 뿌리는 사랑이고,
그 사랑 부족으로 외로움에 몸부림치고, 그 외로움으로 상처받고,
좌절하고, 미워하고, 증오하며, 죽고 죽이는
모든 병폐의 뿌리가 사랑의 갈급함 때문이지요.
인간은 사랑 받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졌기에,
그 사랑이 채워지지 않으면 모두가 병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생멸하는 에고의 사랑은
인간 모두를 깊이가 다른 상사병 환자로 만들었습니다.
본질인 아버지 사랑만이
상사병을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명약입니다.
< "어떻게 하면 내가 커집니까?" 할 때도
그것도 사랑이라는 거에요.
성숙한 인간한테는 사랑이라는 것이 흘러 넘친다. >
아멘!!!
아멘!!!
맞습니다.
정말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만큼 신나는 일은 없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음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무한의 능력이며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최고의 촉진제입니다.
그러나 에고가 행하는 사랑은 늘 변했고,
사랑의 기쁨은 이별의 아픔과 여지없이 연결되는 한 세트였기에
추구하는 사랑의 최고봉은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이었지요.
그러나 변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의 이유를 이제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피조물 자체가 생멸하는 존재인지라
생멸하는 피조물들이 행하는 사랑 역시도 생멸할 수 밖에 없고,
그러기에 피조물인 에고가 하는 사랑은
변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진리를 이제는 깨닫게 됩니다.
< 우주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나온다.
신나는 일 아닌가요? 이걸 깨닫게 되면,
그리고 실천의 일이 남아 있죠. >
본질의 사랑,
창조주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사랑만이
변하지 않는,
우주에 생명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걸 깨달았으니 인간의 사랑이 아닌,
아버지의 사랑만을 미치도록 갈구하게 됩니다.
아버지께로부터 흘러나오는 본질의 사랑을 맛보니
변화무쌍하게 변모하는 에고의 흔들리는 사랑이
다 그까짓 것이 되어 버립니다.
사랑의 원류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주변을 사랑하며
사랑, 사랑만 하며 신나고 즐겁게 살아가렵니다.
변치 않는 아버지의 사랑 안에
온전히 온 마음 다 바쳐 죽도록 죽기까지 머무르렵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각 개인의 삶 - 실제로는 모든 생명의 형태
개인의 삶 실제로 모든 생명의 형태는 우주가 그 자신을 경험하는
독특한 방식인 하나의 세계이다. >
< 고통의 의미를, 그러니까 고통을 피할 게 아니고
고통을 수용을 해서 그 의미를 찾아야 돼요. >
< 깨어남과 회귀 운동 - 한 개인의 삶에서 회귀 운동이 일어날 때는
즉 늙음과 질병, 심신의 장애 상실 개인적인 비극 등을 통해 형상이 약해진다. >
< 처음 타고난 외부적인 목적만 가지고 살다가 내면의 목적을 발견할 때는
외부적인 목적을 가진 인간은 한 번 죽는다.
그리고 내부적인 내면의 목적을 가진 인간이 부활을 해서 그때부터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산다.
그게 내면적인 목적과 외부적인 목적이 일치하는 삶을 사는 거다. >
아멘, 아멘~!!!
철저히 아바타로서의 삶만 살아온 제가
거내영 봉헌식을 앞두고 봉헌문을 매일 읽으면서
죽음까지 불사할 정도의 용기는 나지 않았었습니다.
내 마음속에 그려놓은 형상이나 현상에 목매고 살아온 제가
그것을 일시에 끊어버리라는 글조차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글을 통해서, 지금 당장 잘 안될지라도
그러한 상황이 닥쳤다면 그렇게 하겠다는 결심을 하며
흐르는 눈물을 닦아냈었습니다.
나의 전부라 할 수 있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생각만 떠올려도 쉽지 않았지요.
내맡긴 영혼이 되기 전에 아바타의 죽음은 정말 죽고싶을 정도의 괴로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심지어 가족들에게까지 말을 못하였지만
그런 적도 있었습니다.
< 이 몸이 죽고 죽어 일 백 번 고쳐 죽어
백골(白骨)이 진토(塵土)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정몽주의 '단심가'
내맡긴 영혼이 되어서 내 뜻의 에고가 한번, 두번, 세번... 죽을 때마다
아픔없이 죽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거내영에 입문한 지 만 7년이 넘어서는 지금까지
저의 죽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죽어야만 살 수 있고,
끝없는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달아갑니다.
두껍게 내려앉은 가면을 벗기고 또 벗어야만
가장 깊은 내면의 나, 본연의 나, 아버지가 만드신 나로서 사는 것임을 느낍니다.
@무사.보조.기조실
아버지, 저는 죽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죽어야만 기꺼이 기즐행하며 살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 우주생명인 차원에서는 나는 아바타고 그리고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게임하고 있어.
게임에서 여러분 캐릭터 죽는다고 게임하는 사람이 죽어요? >
제가 죽을 기회를 주시고 죽을 용기를 주시며
죽음을 넘어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아버지만 따라갈 때
아버지와 저는 나뉠 수 없는 한몸이 되겠지요!
죽음과 고통 앞에서 주저앉게 하지 않으시고
은총의 사다리를 놓아주시어 영원한 천국으로 넘어오게 하시는 아빠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죽기까지 아버지와 함께 하며
아버지만을 뜨겁게 뜨겁게 사랑하오리이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이제는 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사시는 삶으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생력처(省力處)가 득력처(得力處)다.
생력처, 힘을 빼는 것이 득력처, 힘을 얻는 곳이다. >
< 처음 타고난 외부적인 목적만 가지고 살다가 내면의 목적을 발견할 때는
외부적인 목적을 가진 인간은 한 번 죽는다.
그리고 내부적인 내면의 목적을 가진 인간이 부활을 해서 그때부터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산다. >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어리석은 저는 있는 힘을 다하여 외부적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왔습니다.
어느 시점까지는 그 전략이 먹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모든 일은 아버지의 뜻만이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제 뜻과 제 욕심이 정해져 있으니
제 마음은 불만과 불안,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나름 종교생활을 한다고 착각을 했으니
더더욱 제 입에는 왜 라는 단어가 저를 정당화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아버지의 일이시기에
저는 힘을 빼고 저의 모든 것을 아버지께 맡겨드리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정작 맡겼다고 하면서 말과 머리로만 맡겨드리며
대단한 착각 속에 살았습니다.
저의 진심을 꿰뚫어 보시는 아버지 앞에서는
그 어떤 것도 숨기거나 속일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아버지를 부르며
제 안에 계신 아버지께서 사시도록 저를 내맡겨드릴 뿐입니다.
이제 제 삶은 내면의 목적만을 향하기에
그 어떤 외적인 목적도 중요치 않습니다.
아버지 함께 하시지 않는 제 삶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이 때문입니다.
저는 완전히 죽고
오직 아버지만이 제 안에 사시옵소서!
부족하고 죄스런 제 안에
저와 함께 하시는 아버지만을 바라보며
아버지만을 끊임없이 부르겠습니다.
아버지만이 저의 삶의 이유이며 생기이며 전부이시기에
제 영혼은 오직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할 뿐입니다.
황무지같이 차고 메마른 제 영혼을 차지하여 주셔서 감사드리며
제가 아버지와 더욱 더 깊고 깊은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바라시는 아버지,
아버지를 갈망하는 모든 이들을 아버지께 내맡겨드리며
< 거내영 >의 모든 것을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영성의 탑, 주부적 영성의 핵심인 거룩한 내맡김을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살게 해 주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무심님,
녹취의 수고로 양식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 인간이 커지는 것의 핵심은 사실은 사랑이고 그리고 이렇게
본질을 깨달아서 본질처럼 커지는, 마하가 되는, 이제 그 대목이니까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 하면 내가 커집니까?" 할 때도
그것도 사랑이라는 거에요.
더 큰 전체의 일부가 아닌 것, 그 목적의 일부가 아닌 것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부적인 내면의 목적을 가진 인간이 부활을 해서 그때부터는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를 통해서 본질이 드러나게 하는 삶을 산다. >
아멘아멘아멘!
인간이 커지는 것의 핵심은 사랑이라는 말씀이
거내영을 살아가는, 죽도록 아버지만을 뜨겁게 사랑하는
내맡긴 영혼들에게 충분히 와닿는 말씀이기에 참으로 반갑습니다.
태어나서 끊임없이 벌과 보상으로
거짓에고에 조종당하며 인공적으로 살아왔습니다.
거내영을 통하여 시작도 끝도 없으신 아버지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아버지의 진정한 사랑을 저만은 잊지 않으리라,
저만이 홀로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꺼지지 않는 작은 촛불이 되어
인공적이던 어린 사랑의 작은 불꽃이
어떠한 벌과 보상의 상처에도 물들지 않으며
하되 함이 없이 내면의 목적인 큰 사랑의 빛과 하나 되었습니다.
있는 그대로인 무위자연의 작은 사랑을 부활하게 하시는
크나큰 아버지의 은총이 내맡김 하나로 흘러넘칩니다.
생생하던 육의 능력들이 나날이 감소하고 감각이 무뎌지는
죽음의 길을 모든 피조물이 걸어가고 있지만,
창조된 목적에로 거꾸로 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는
내맡긴 영혼들과 함께 하는 축복으로
영의 세포가 더욱 생생하고 총명하게 되어감을 느낍니다.
그저 감사함으로 충만하게 하시는
사랑하는 나의 아빠아버지, 나의 모든 것이신 분!
거내영과 모든 사제를 통하여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
미숙한 저의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우주생명의 본질은 사랑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주 본질의 어떤 그 특징이 사랑, 사랑이라는 거죠.
답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본질이 이 세상에 나를 통해서 나온다.
여러분, 우주의 우주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나온다.
신나는 일 아닌가요? 이걸 깨닫게 되면.
그리고 실천의 일이 남아 있죠. >
아멘! 아멘!
아버지, 그렇습니다.
정말 신나는 일의 연속입니다.
날마다 사건은 일어나고 특별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요즘처럼 리얼하고 치열한 사건과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아니, 제가 이제야 그렇게 인식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치열한 사건 속에서 리얼하게 부서져도
제가 죽지 않는 게임 속 캐릭터임을 알아버렸기에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으신 아버지께서 저를 뜨거운 용광로 속에서
단련시키고 계심을 더욱더 느끼기에 아멘하며
충실히 이끌려 드릴 뿐입니다.
힘을 빼고 이끌려 드리니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고
치열했던 하루가 마무리되면 오히려 새 아이템을 획득한 듯
뿌듯하며 함께 해주신 아버지께 찬미찬양을 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생력처(省力處)는 득력처(得力處)가 아닐런지요!
지인들이 제게 스트레스를 안 받는 것 같다고 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아버지를 사랑하니 그럴 일이 더욱 없어집니다.
어리숙하고 얼치기인 제가
날마다 만나는 사건과 사람들 속에서 단련 받으며
본질이신 아버지의 거룩한 사랑으로 승화시켜
주실 것을 믿기에 곰담묵으로 따릅니다.
한 달 전 어린 고양이가 사무실로 들어와 자리를 잡고는
문을 열어줘도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곤 합니다.
아예, 나갈 생각이 없는 듯 합니다.
처음 먹을 것을 찾아 사무실로 들어왔을 때에는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호기심은 있는지라
곁을 주지 않으면서 먹을 것만 취했습니다.
그러던 고양이가 이제는 사람 손을 탔는지
저를 너무 따르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합니다.
자기 옆에 와서 가만히 있으라고 종일 불러댑니다.
한 달 동안 차츰 사람들과 적응하고
길들여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제가 아버지께
그렇게 길들여지고 있음을 고양이를 통해 보게 되었습니다.
@빈손.보조
어제는 직원이 제게 말합니다.
“동물들이 저를 좋아하는 것 같다.”라구요.ㅎ
그래서 제가 답했습니다.
“사실 수컷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라구요.ㅋ
좋으신 아버지,
동물들은 제게 잘 해주는 사람을 따르기 마련이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사랑을 주시니 저도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득이기에 사랑하는 얼치기 사랑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더라도 대우주적인 고결한 사랑을 하렵니다.
아버지께서 제게 주시는 그 신적인 사랑으로 사랑하렵니다.
부족한 저의 사랑이 아버지를 부끄럽지 않게
모든 것 다 내맡겨 오늘도 충실히 이끌려 드립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는 모든 영혼들이
< 거내영 >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얻어 충만하게 하소서.
아버지의 완사완영을 위하여!
하느님아버지, 참으로 감사합니다!
[ < 각 개인의 삶 - 실제로는 모든 생명의 형태
개인의 삶 실제로 모든 생명의 형태는 우주가 그 자신을 경험하는
독특한 방식인 하나의 세계이다. >
이 말은 뭐냐면, 여러분 보세요.
지금 내가 나는 내가 산다 그러죠.
실제로는 우주 생명이 나를 통해서 사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러면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인생이란 걸 경험하고 있어요. 오케이?
그래서 우주생명인 차원에서는 나는 아바타고 그리고
우주생명은 나를 통해서 게임하고 있어.
그러면 우주생명의 본질은 사랑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러니까 우주 본질의 어떤 그 특징이 사랑, 사랑이라는 거죠.
답이라는 거죠.
그래서 그 본질이 이 세상에 나를 통해서 나온다.
여러분, 우주의 우주 생명의 본질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나를 통해서 나온다.
신나는 일 아닌가요? 이걸 깨닫게 되면.
그리고 실천의 일이 남아 있죠.]
아멘 아멘!!
사랑하는 아버지,
아침 미사에서 난데없이 이 글이 떠올려지면서 거대한 우주에 한 점이 되어 있는
저의 모습이 보이면서 그 한 점 안에 아버지의 뜻을 심어 주시어서
그 점 안에 있는 저를 통하여 이 세상을 이끌고 계시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작은 점 하나에 아버지의 뜻을 넣어 주시면서 나랑 함께 하자라고 하시는 듯하여
제 가슴은 참으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 차오름을 느꼈습니다.
그 기쁨과 함께 아버지 안에 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은총임을 또 느끼며
제가 아버지의 도구임이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존재임을 또 깨달았습니다.
제 안에 제가 죽어 아버지께서 이끄시는 대로 따르면
이 거대한 우주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는 것임이라 느끼기에
이 기쁨에 찬 묵상으로 얼마나 소중한 미사를 드렸는지 감사의 눈물이 났습니다.
우주 생명의 본질인 사랑이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들을 통하여
이 세상에 퍼지고 있는 지금 부족한 저도 아버지의 딸로서 함께 할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거내영>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저희 하덧사, 하내영들의
모든 것을 통하여 아버지 홀로 무한찬미영광 받으소서.
아버지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영광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