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도중 큰스님께서 우리에게 선유현의 특산물을 용안이라고 하셨다. 이곳은 전국적으로 용안이라는 과일이 유명한데 여름에 따서 지금은 말려서 판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지역 특산물 과일보다는 중국에서 쓰는 불구들을 사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들의 바람을 큰스님에게 말씀 드렸더니 선유현에는 그런 것을 파는 곳이 없기 때문에 내일 포전에 가보자고 말씀하셨다.
차가 북으로 달려 두어 시간 걸려 운거산에 다다랐다. 이 산에 바로 관정 큰스님이 극락유람하실 무렵 수행을 하셨던 맥사암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산은 입구에서부터 계단에 이르기까지 모든 산을 큰스님께서 모두 불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산의 사찰은 오르내리는 길이 오른쪽과 왼쪽 두 길이 있는데 모두 관정 큰스님이 돌계단을 만들었다. 입구에 ‘운거로 석관정 건’이라는 공로비가 서 있다.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80살 연세이신 큰스님은 산문 앞에서 맞이한 한 아주머니가 부축을 해서 올라가셨다. 운거산은 해발고도가 1,000m가 넘고 정상의 큰 바위 아래 높은 축대를 쌓아 건립한 맥사암사는 대찰은 아니지만 청정한 기운이 서린 고찰이었다.
“이 절을 중수하는데 한국 신도들이 많이 시주하였다.”
큰스님의 말씀에 자세히 둘러보니 한국의 자해 스님과 함께 중수했다는 상량문이 있고 입구에도 기둥에 ‘정토선 도랑(량의 잘못)’이라는 한글이 쓰여 있어 한국 신도들의 정성을 나나내려고 한 뜻이 엿보였다. 아울러 절 마당에도 경사가 급한 곳에 마당을 만들기 위해 쌓은 축대공사에 한국의 제자들이 가장 많은 성금을 냈다는 것을 명기하고 있다.
저녁 공양을 하고 맥사암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오송암 스님은 넓은 방장실에서, 등원 스님은 1층 방에서, 그리고 등인 스님, 정우 스님과 함께 나는 2층 큰스님 옆방에서 잤다. 잠자리나 공양이나 지금까지 지낸 세 사찰에 비해 상태가 가장 안 좋았다.
첫날 환영식에는 그렇게 많은 음식을 마련했지만 다음날부터는 먹는 음식은 첫날과 너무 달랐다. 큰스님은 우리를 중국 스님과 똑같이 대하셨다. 마지막에는 어느 시장골목 허름한 노점상에 데리고 가서 몇 가지 시켜놓고 먹으라고 했으나 우리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다. 큰스님은 맛있게 드시고 ‘먹고 싶으면 먹고,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는 식이었다. 잠자리는 더 힘들었다. 모두 큰스님이 직접 불사를 하신 사찰에서 잤는데 봉비사는 조금 나았지만 맥사암사나 영취암사에서 잘 때는 평소 이런 환경에서 잔 경험이 없는 우리 비구니 스님들은 낮에 차에서 자기로 하고 아예 잠자는 것을 포기할 정도였다. 가는 절마다 큰스님은 보시를 하라고 말씀하셨고, 우리는 큰스님 체면 봐서 보시를 하였으나 이미 가지고 간 비용을 큰스님에게 다 드렸기 때문에 불평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큰스님은 늘 거침없이 말씀하셨다. 큰스님의 논리는 간단했다.
“너희들은 잘 살지 않느냐?”
새벽에 일어나 법회에 참석하는데 이 때 만행중인 중국본토출신 비구스님 한 분도 같이 동참하였다. 그런데 웬일인지 큰스님의 예불곡조가 잘 맞지 않아 힘드셔 하셨는데 아마 간밤에 잠을 잘 못 이루신 것 같다고 누군가 애기하였다. 우리는 간단히 아침 공양을 하는데 큰스님께서 설명하시기를 이 절에는 이전에 두 명의 화상이 있었는데 노화상은 두 달 전쯤에 입적하고 한 사람만 남아있어 지금 좀 어수선한 분위기라고 하셨다.
우리는 처음 맥사암을 올라갔던 길과 다른 길로 큰스님을 따라 사찰을 빠져 내려왔다. 조금 내려오자 선과암사라는 조그마한 암자가 나왔다. 이 암자는 바로 위에 있는 맥사암사 옆 동굴에서 참선할 때 관세음보살이 큰스님을 데리고 극락에 갔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절에는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2층에 올라가면 은혜에 보답하는 ‘보은당’이 있다. 이곳에는 나이 많은 비구니 한 분이 작은 암자를 지키며 열심히 염불수행을 하고 있다. 관정 큰스님이 세운 유일한 비구니 절이기도 하다. 이 암자는 대만 제자들이 불사를 한 것이라고 한다.
선과암사에서 조금 더 내려오니 전망이 좋은 곳에 잘 조성한 탑이 하나 있었다.
큰스님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으셨다.
탑을 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동운정종 48대 전등 석관정 대화상 연탑
정토선 뭇 제자들 공경히 모심
싱가포르 뭇 제자들 합장공경 봉헌함.
1992 임신년 음력 8월 세움
싱가포르 제자들을 중심으로 세운 이 연탑은 관정 스님 68세 되시는 1992년에 세웠기 때문에 이미 10년 전에 조성된 것이었다. 물론 한국에도 가묘라고 해서 생전에 미리서 좋은 자리를 찾아 자신의 무덤을 만들어놓은 풍습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제자들 이름으로 이렇게 미리서 탑을 세운 것은 의외였다.
“진짜 관정 큰스님은 이미 10년 전에 입적하신 것 아닐까?”
등원 스님의 코멘트다. 자신의 무덤이 아닌 다른 관정 스님 무덤을 일부러 데리고 와서 보여주시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너무 뜻밖이라는 표현으로 들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큰스님이 2007년(83살) 원적하셨기 때문에 무려 15년 전에 자신이 가실 자리를 마련하셨던 것이다. 이 탑을 세운 뒤로도 몇 군데 불사를 하지만 1997년부터는 한국에서 정토선을 펴는데 집중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펴지 않은 정토선을 한국에서 심은 것은 마지막 삶을 더 연장하신 큰 뜻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연탑을 둘러보고 나서 큰스님이 극락가시기 전 참선을 했다는 동굴을 보고 싶다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큰스님이 준비가 필요하다며 먼저 적수암사를 다녀오라고 하셨다.
“적수암사에 갔다 돌아온 뒤 큰 전지를 가지고 들어가서 보기로 하자.”
맥사암사에 오는 차 안에서 이미 관정 스님은 오늘 적수암사에 가겠다는 것을 알려주셨다.
“맥사암사에 이르면 적수암사에 간다. 1리(500m)쯤 가는데 가는 길은 그들을 불러 시키거나 내가 데리고 간다. 물건들은 맥사암사에 두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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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무량공덕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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