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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개의 고조선 침략 전 연나라의 위치>
동이족(東夷族). 사전에도 등재가 안 된 말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다. 알게 모르게 어디선가 듣긴 들은 말이다. 일찍이 중국인들은 그들의 동쪽에 있는 다른 민족을 동이족으로 지칭했는데 이는 지금의 한국과 만주 등을 가리킨다.
그들은 ‘동쪽의 오랑캐’라고 했다지만 夷자의 파자(破字·한자의 자획을 풀어 나눔)가 ‘큰 대(大)’와 ‘활 궁(弓)’임을 말해 주듯 ‘동쪽의 큰 활잡이’ 즉 ‘대궁인(大弓人)’을 뜻한다. 우리가 화살을 그래서 잘 쏘는 것도 같고 해 뜨는 동쪽이라 맨 먼저 환한 세상을 보았을 것 같은 예감도 들어서인지 내게는 싫지 않은 말이다.
유물과 문헌 속에 나타나는 우리나라 활의 역사는 약 3000년 전으로 추정되며 고구려 시조 주몽(BC 58~BC 19)은 ‘활을 잘 쏘는 이’란 뜻이다. 말을 타고 달리면서 활을 쏘는 천마도의 그림이 이를 대신 말해준다. 최근 북한과 중국에 있는 고구려유적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
그러자 중국 언론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구려가 동북지역에 있던 자신들의 소수 민족사라고 일제히 보도를 했다. 만리장성도 끌어다 연장하기 바쁘다. 우리가 동북 공정에 대응할 논리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북지역의 역사를 깊이 있게 파악하고 다룰 필요가 있다.
빗살무늬토기에서 보았듯 분명 중국 황하문명과 판이한 북방지역 문명이 따로 존재한다. 이에 걸 맞는 흥미로운 책이 나왔다. `동이족의 숨겨진 역사와 인류의 미래(김대선과 카르멘텔스 공저, 수선재 간)`라는 책에서는 동이족, 즉 우리 한민족이 인류 최초로 문명을 건설했으며, 현재 인류의 미래에 대한 책임까지 갖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이족의 문명은 과연 어떠했을까? 얼마 전 만주 지방에서 홍산(紅山)문명이 발굴됐는데, 놀라운 점은 인류의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라는 황하문명보다 무려 1,000여년이나 앞섰다는 것이다. 바로 이 홍산문명이 동이족의 문명이 분명하다고 이 책은 자신 있게 이야기 하고 있다. 이러한 진실을 얻고자 접근을 하면 중국당국이 협조를 하지 않는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듯도 하다 .
대체 홍산문화란 무엇인가? 중국 내몽골 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철이 많아서 붉게 보이는 홍산(紅山)이 있다. 그저 풍경이 좋은 산으로만 여겨지던 이 붉은 바위산에 전 세계 고고학계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지금부터 100년 전인 1906년의 일이었다. 이 산을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데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 그리고 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 유적들이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이 붉은 산 인근에서 발굴된 유적들은 예견된 상식을 일거에 깨어버렸으니 그것은 발굴한 현장이 하나의 국가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흔적이었기 때문이다.
세계의 사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그가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이것은 세계적으로 아세아의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1955년 학계는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다.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각국 언론들은 ‘오천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지금부터 약 100년 지금은 중국 땅이 된 요녕성과 내몽골 그리고 하북성 경계의 연산(燕山)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학계에서는 홍산문화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양심 있는 중국학자들은 그것이 바로 동방의 나라 즉 우리의 배달국 유물임을 확인하였고, 서양학자들도 인류시원의 문화임을 알고 고개를 숙였는데 정작 우리정부와 우리의 역사학계는 무덤덤하였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기원전 3,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띄고 있다.
그곳에서 출토된 가면과 옥(玉)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 홍산 문화는 중국 한족(漢族)의 문명과는 분명하게 다르며, 그 기원 역시 전혀 연관성을 갖지 않는 독창적인 것이다. 중국 문명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적석총 고분군이 수 십 개 산재해 있는데다 묘에서는 곰의 턱뼈가 발견되었다. 적석총은 요동반도와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리 민족의 장묘 형식이라는 점에서 중국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되는 것이며 곰의 턱뼈는 곰을 신성시하는 우리 민족의 사상이 담긴 증거로 웅녀와 관련이 있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곰의 머리를 쓰고 제사를 지내는 몽고계는 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홍산지역은 해발 600m의 고원 평지지만, 노노아호산과 발해만(바다)으로 둘러싸인 능하지역은 저지대 평지다. 따라서 농경이 가능해 이곳에 살던 청동기인들은 정주생활을 했다. 그런데 서기전 1300년 무렵부터 유목민 문화가 등장하니 이는 큰 기후변화가 일어나 비가 적게 오고 추워졌음을 의미한다. 이후 상당수는 홍산문화의 변두리인 노노아호산 남쪽의 따뜻한 능하지역으로 이동해 발달한 정주 청동기문화인 ‘능하문하’를 일으키고, 적봉지역에 남은 세력은 초지에서도 생활이 가능한 유목문화로 들어갔다.이 시기 중국인의 조상인 화하족(華夏族)이 황하 중류에서 일으킨 황하문명이 황하 하류로 세력을 넓혀왔다. 그리하여 고조선족 문화와 화하족 문화는 황하 하류 북쪽에서 만나게 됐는데, 이때 두 세력이 경계선으로 삼았던 곳이 ‘난하(?河)’라는 강이다.
학자들이 고조선족과 화하족이 큰 강인 난하를 경계로 삼았을 것으로 보는 것은 왜일까. 이유는 이곳에서 황하 중류에서 출토되는 중국식 동검과는 다른 비파형동검과 다뉴세 문경 등이 출토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유물은 만주를 거쳐 한반도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때문에 한국 학자와 일부 중국 학자들은 이를 능하지역에 있던 고조선의 영향력이 만주와 한반도로 확장된 것으로 해석한다. 앞서 언급했지만 만주와 한반도는 전세계 고인돌의 50% 정도가 몰려 있는 ‘고인돌의 왕국’이다.
만주에서 발견되는 고인돌은 크고 정교하지만 한반도 고인돌은 거칠고 작은 편이다. 그러나 하가점 하층문화와 능하문하 지역에서는 고인돌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고인돌은 능하문화인들이 동진(東進)하기 전, 만주와 한반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만든 것일 가능성이 높다. 능하문화가 꽃피기 전, 한반도와 만주에서도 군데군데 신석기문화가 존재했다. 만주에 있는 대표적인 신석기문화 유적지로는 요녕성 심양시 황화북대가 용산로 1번지에 있는 신락(新樂) 유적지가 꼽힌다.
신락이라는 마을이 있었던 이곳은 1973년, 한 전자회사가 공장을 짓기 위해 땅을 파다가 서기전 5000년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 유물이 다량 발굴돼 일약 심양을 대표하는 유적지가 됐다. 한국의 중심부인 서울에서는 암사동 유적지가 유명하다. 신락 유적지와 암사동 유적지에 살던 신석기인들은 토성을 쌓고 움집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이들이 생활한 곳에서는 청동기 유물이 발굴되지 않는다. 청동기를 만들려면 구리와 아연광이 섞인 돌이 있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노천 구리·아연 광산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의 신석기인들은 이러한 노천광을 발견하지 못했다.
만주와 한반도는 구리·아연을 품은 돌을 찾아낼 수 있는 능하문화인들이 들어오면서 청동기 시대로 들어갔다. 능하문화인들이 만든 청동기는 대부분 무기였다. 청동 농기구는 만들지 못했는데, 이는 농기구로 쓰기엔 청동이 너무 무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동 화살촉과 청동검, 청동 도끼는 물러도 사람을 충분히 죽일 수 있다. 능하문화인들은 용범(鎔范)을 이용해 청동제 무기를 대량 생산할 수 있었으니, 돌을 갈아서 돌화살촉과 석검(石劍), 돌도끼를 만드는 세력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
그쯤 비파형동검 문화와 고인돌 문화가 만나 하나가 됐을 것이다. 고인돌 밑을 발굴하다 보면 비파형동검이 출토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비파형동검은 만주와 한반도로 들어오면서 세형동검으로 모양이 바뀐다. 능하문화에서는 고인돌 없이 비파형동검이 제작됐으나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과 함께 세형동검이 제작됐다. 즉 고인돌은 홍산문화가 아니고 그 이전의 이야기다.
능하문화인들이 만주와 한반도로 세력을 넓힌 것은 정복전쟁의 일환이었다. 청동제 무기를 대량생산하게 되면 사람들은 농경만으로 재산을 늘리지 않는다. 정복전쟁을 통해 다른 종족을 약탈하는 것이 농경보다 빠른 재산 증식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약탈은 식량이나 재물에 한정하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도 납치한다. 여성을 납치하는 것은 자기 씨를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였다. 어린아이는 자기 종족으로 키우거나 여의치 않으면 노예로 부린다. 이러니 청동무기 제조술을 가진 종족은 순식간에 재산과 인총(人叢)을 늘릴 수 있다. 이때 몇몇 세력은 청동무기 제조술을 가진 세력에게 저항하지 않고 협력한다. 일종의 부족 연맹을 만드는 것이다.
부족 연맹에 참여한 세력은 일단은 굴복하지만, 잠재적으로는 쿠데타 가능 세력이 된다. 전체를 리드하는 세력이 방심하거나 여러 부족을 너무 강하게 지배해 반발을 사면, 이들은 여론을 등에 업고 리딩 세력을 뒤엎는 쿠데타를 일으킨다. 이러한 일은 중국 화하족에 대한 기록에 많이 남아 있다. 청동기 시대로 진입하면서 화하족은 ‘하(夏)’라고 하는 최초의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걸왕(桀王)이 폭정을 일삼자, 하나라 조정에 협력하던 상족(商族)의 대표 탕(湯)이 여론의 지지를 업고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한다. 그리고 상족이 화하족 전체를 지배하는 상(商)나라를 열었다.
상나라의 마지막왕인 주왕(紂王)도 하나라 걸왕에 못지않은 학정을 일삼았다. 그러자 상나라에 협조해온 주족(周族)의 리더인 무(武)가 혁명을 일으켜 주왕을 죽이고 주(周)나라를 열었다. 상에서 주로 왕조 교체가 일어나던 시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기자조선을 만들었다고 하는 기자(箕子)다. 기자는 상나라 주왕의 삼촌으로, 주왕의 독재에 항거해 바른말을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주왕의 미움을 사 투옥됐는데 이때 주족의 무(무왕)가 혁명을 일으켜 집권했다. 주나라 무왕은 기자를 석방한 뒤 “함께 정치를 하자”고 했으나, 기자는 “나는 상나라의 녹을 먹은 사람이다”며 거절하고 조선 땅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가설이라지만 시간을 따라 짜맞춰지는 역사.
역사는 당연 시간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후 어떻게 됐을까. 그 후 주나라는 청동기문화를 발전시키다가 서기전 8세기 흉노의 일파로 보이는 견융족의 공격을 받아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는데, 이 ‘도주’를 계기로 주나라 왕실의 힘이 크게 약해진다. 그러자 주나라 왕실에 종속돼 있던 제후국들이 독립해 패권을 다투는 춘추 시대가 열린다. 춘추 시대는 전쟁의 시기였으므로 무기를 주로 제작하는 청동기문화는 극성기에 이른다. 그리고 서기전 5세기 초 보다 큰 제후국들이 패권을 다투는 전국 시대로 들어가는데, 전국 시대 말기 화하족은 철제 병기를 만드는 기술을 개발했다. 철제 병기는 청동 병기에 비해 훨씬 강력했으므로 전쟁의 강도는 더욱 높아진다. 이러한 혼란을 겪으면서 화하족은 진(秦)나라로 통일됐다.
그러나 능하지역의 고조선족은 화하족만큼 큰 분열을 겪지 않았으므로, 청동병기의 개발과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철기 개발이 늦었다. 전쟁술의 발전도 더뎠다. 이러한 때인 서기전 3세기(전국 시대) 중국 연(燕)나라 장수인 진개가 군대를 이끌고 고조선 땅 2000여 리를 쳐들어왔다. 그로 인해 고조선은 치명타를 입고 사실상 해체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연나라의 진개 군은 고조선에 대해, 주나라를 공격한 견융 세력과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진개의 공격으로 고조선이 능하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잃자 고조선의 지배를 받던 작은 나라들이 일어나 중국의 춘추 시대처럼 패권을 다투는 열국 시대가 열렸다.
이러한 열국 가운데 기자조선이 있었고, 부여와 고구려 동예 옥저 등이 있었다. 이 중 가장 강력한 나라는 기자조선과 부여였다. 열국 간의 갈등이 계속되던 서기전 194년쯤, 진개와 같은 연나라 사람 위만이 기자조선으로 망명한 후 신임을 받다가 쿠데타를 일으켜 위만조선을 열었다. 그러나 위만조선은 서기전 108년 철기로 무장한 한(漢) 무제(武帝) 군대의 공격을 받아 패망하고, 한 무제는 위만조선의 영역에 4개 군(郡)을 설치했다. 한 무제의 공격을 계기로 고조선 영역 안에 있는 다른 열국들도 철기문화를 갖추었다.
한4군 설치를 계기로 고조선 영역의 국가들은 내부 통일과 외적 철퇴라는 두 가지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는 목표를 갖게 됐다. 이 목표는 부여에 이어 고구려가 절대 강자로 떠올라 내부통일을 하고 한4군을 밀어냄으로써 비로소 완수됐다. 고구려는 내부통일을 하고 한나라군을 궤멸시키며 고조선의 옛 땅인 능하지역을 수복했다. 부여에 이어 고구려가 통일전쟁과 반(反)외세 전쟁을 하는 동안 경쟁에 패한 세력은 ‘일종의 무주공산’인 만주와 한반도로 이주했는데, 이들을 따라 철기문화도 들어갔다. 그로 인해 마한·진한·변한 등 철기를 다루는 나라가 갑자기 생겨났고, 이어 백제·가야·신라라는 고대왕국이 등장했다. 이후는 너무나도 잘 아는 친근한 우리 역사다.
고조선의 영역 ,많은 논란과 역사서에 말이 있지만 이를 종합해보면 서쪽으로 난하와 갈석산으로 이어진 요서(고대의 요동)지방으로 난하 동쪽 만주지방이 고조선의 영토이자, 고조선의 서부 영토였다. 갈석산을 고조선의 경계로 보는 많은 사학자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뿐아니라 조선상고사에 신채호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고조선의 남부 영토와 북부 영토는 어디까지 였을까? 먼저 북부 영토부터 살펴보겠다. 『제왕운기』에 의하면 부여는 고조선의 영토에 속해있었다고 기록되어 잇다. 부여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흑룡강과 어르구니하까지 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북부와 동북부 경계는 흑룡강과 어르구니하 유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남부 영토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종래에는 고조선의 남부 국경을 청천강이나 예성강으로 비정하였는데 그 중 예성강으로 보는 것이 통설오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옛 문헌에 고조선의 남쪽, 즉 한반도 남부지방에 한(韓)이 있었다고 기록되었는데 한과 고조선을 각기 다른 나라로 보고 그 국경을 청천강 혹은 예성강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강화도에 삼랑성을 쌓게 했다는 기록은 무얼 말한까? 강화도는 예성강보다 남쪽에 있는 곳이다. 예성강이 고조선의 남부 경계라면 삼랑성의 기록은 설명할 길이 없어진다.
예성강이 고조선의 남부 경계라는 학계의 견해를 뒷받침해 주듯, 고조선 시대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 동검이 예성강 북부에 집중적으로 출토되었다. 당시 청동무기는 지배층만 사용할 수 있는 독점물로, 동일한 성격의 청동기가 출토된 지역은 동일한 정치권으로 보고 하나의 강역으로 파악한 것이다. 그래서 예성강을 고조선의 남부경계로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고고학 자료는 발굴이 진행되면 계속 증가하고, 그 내용도 변하게 된다. 근래에는 전라남도 보성군과 경상남도 진주 등 남부해안으로부터 한반도 전 지역을 포함하여, 만주 전 지역과 북경 너머에서까지 비파형 동검이 출토되었다.
이것외에도 고조선의 영토를 알 수 있는 유물로 청동단추를 들 수 있다. 청동단추는 중국 심양시 정가와자 유적과 12대 영자 유적, 경북 영천 어음동과 경북 죽동리에 출토되는 유물이다. 청동단추의 의미는 신발에 달린 장식물인 동시에 전쟁터에서 적에게 위협을 주는 동시에 무기로부터 방어하는 갑옷의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비파형 동검과 청동단추의 출토지를 고조선의 영역이라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고대의 영토와 현재의 영토 개념은 달랐다. 고대는 중요지역을 그 국가의 왕이 직접 통치를 하고, 그 외의 지역은 제후(諸侯:巨帥)를 두거나, 아니면 그 국가의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그러므로, 이들 유적이 출토된 지역을 고조선의 영역이라고 보기 보다는 단군이 직접 지배하는 영역(직접 지배)과 고조선의 문화가 전파된 세력권(간접 지배)이라 봐야 한다. 참고로 제왕운기에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 한반도와 만주에 있던 부여, 고구려, 비류, 한, 신라, 남옥저, 북옥저, 예, 맥 등 여러 나라의 통치자들은 단군의 자손이었다고 전한다. 이들이 조선을 통치한 단군의 후손들이라면 이 나라들은 고조선 시대에 속해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같은 사실을 통해 고조선의 판도가(그것이 직접지배든 간접지배든)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고조선의 남부 경계는 한반도 남부 해안선인 것이다. 기록과 유물을 통해 고조선의 영토가 얼마나 광활했는지 알아보았다. 고조선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넓은 영토를 보유하였다. 그 영토를 따지면 고구려, 부여보다도 넓었다. 고구려가 다물(多勿:고토회복)을 국시로 삼은 건 어쩌면 잃어버린 광활한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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